28화 백호광객 (4)
우설금이 싸늘한 한기를 뿜어냈다. 그녀는 대꾸하지 않고 먼 산으로 고개를 돌렸다.
소화자가 앉은 자세 그대로 슬금슬금 거리를 좁혔다. 물론 우설금과 소화자 사이에는 흑귀가 앉아있어 바로 옆까지 붙을 수는 없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소화자는 능글거리는 미소를 지은 채 우설금에게 말을 걸었다.
“흘흘, 이보게, 소저. 어디 가는 길인가?”
흑귀가 곤란한 표정으로 소화자에게 눈치를 줬다. 정작 소화자는 그 경고를 전혀 읽지 못했다.
“혹시 같은 길이라면 동행하고 싶네만…….”
“노인장, 혼자 가시지요.”
흑귀가 대신 대답했다.
소화자가 기분 나쁜 표정으로 흑귀를 나무랐다.
“자네에게 말한 게 아니네.”
흑귀가 나무에 기댄 채 눈을 감자 소화자가 슬그머니 다시 우설금에게 수작을 걸었다.
“소저, 내가 소저를 보니 딸 같아서 말이야. 요즘 세상이 여자들이 다니기에 보통 험한가. 한 사람이라도 더 있으면 좋을 걸세. 아, 물론 지금 두 호위도 썩 훌륭하네만…… 원래 사람이 많을수록 좋은 법 아닌가?”주석하는 미간을 찌푸렸다. 딸이라니. 나이 차를 보면 손녀뻘이구먼. 그런데 소화자가 원래 여자를 밝히는 인물이었나? 소화자에 관한 별다른 정보를 갖고 있지 않으니 알 도리가 없었다.
우설금의 분위기로 봐서 저런 수작이 먹힐 리가 없다고 생각한 주석하는 소화자의 명복을 빌었다. 그가 처리해야 하는데 우설금에게 먹이를 던져준 기분이라 찜찜하긴 하지만.
“흘흘, 내가 소싯적에 화산파에서 수학했어. 지금도 소화자라 하면…… 울던 애도 울음을…… 그칠 정도는 아니지만 하여튼 알만한 사람은 다 아는 유명 인사라네. 소저도 힘든 일 있으면 나에게 부탁하게. 내가 소저의 부탁이라면 두말하지 않고…… 크윽!”열심히 입을 놀리던 소화자의 입으로 흑귀의 주먹이 날아들었다.
얼떨결에 한 방 맞고 나동그라졌던 소화자가 벌떡 일어나 우설금을 향해 삿대질했다.
“이것들이 오냐오냐하니까! 노인을 공경할 줄 몰라?”
소화자가 버럭 소리쳤으나 우설금과 흑귀는 상대할 가치도 없다는 듯 눈을 감고 나무에 기댄 채 쉬고 있었다.
“내가 이 나이에 수작을 부리겠나? 다 딸내미 같아서 도와주고 싶어서 그래. 솔직히 줘도 먹지도 못한다고. 손만 잡아도 그게 보신인데! 예쁜 처자가 그 정도 융통성이 없어서야!”대체 무슨 뜻인지 혼란스러운 말을 내뱉은 소화자가 우설금과 흑귀, 백귀를 노려봤다. 하지만 세 사람은 소화자를 공기 취급했다.
이쯤에서 이상함을 감지하고 소화자는 물러나야 했다. 문제는 우설금의 미모였다. 강호를 떠돌아다닌 소화자마저 난생처음 보는 아름다움에 제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흘흘, 내가 꼭 손 한번 잡아보자고 이러는 것은 아니라고. 나도 웬만큼 체면 차리는 사람이고…… 이 동네가 처자 혼자 다니기 워낙 험해서 그래. 손 좀 잡는다고 닳는 것도 아니잖나?”여전히 반응이 없자 소화자는 조심스럽게 우설금 앞으로 기어갔다. 향긋한 내음이 혼을 뺄 것 같았다.
저절로 머금어지는 미소를 간신히 삼키고 소화자는 우설금 앞으로 면상을 들이댔다. 우설금을 더 자세히 보기 위해서다.
그때 갑자기 우설금이 눈을 번쩍 떴다.
“으헉!”
놀란 소화자가 뒤로 우당탕 넘어졌다. 버럭 소리치려던 소화자는 우설금의 아름다운 눈을 보고 넋이 나갔다. 그는 조심스럽게 다시 우설금 앞에 쪼그려 앉아 소곤소곤 말했다.
“어흠, 내가 그래도…… 이름만 대면 강도나 산적이 벌벌 떤다니까. 나랑 같이 움직이면 아주 안전할 거야. 그래서 말인데…….”
소화자가 슬그머니 우설금의 손을 잡으려고 손을 뻗었다.
순간.
서걱-
검광이 번쩍이더니 허공으로 피가 튀었다.
비명을 지른 소화자가 한쪽 손을 붙잡고 뒤로 넘어져 있었다. 검을 휘두른 자는 옆에 있던 흑귀였고 우설금을 잡으려던 소화자의 손목이 깔끔하게 잘려있었다.
“이! 이게 무슨!”
갑작스러운 난리에 소화자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우설금에게 달려들었다.
서걱-
다시 검광이 번쩍였다. 이번에는 백귀였다. 동시에 소화자의 반대쪽 팔이 잘려나갔다. 잘린 부위에서 피가 폭포수처럼 쏟아졌다.
“으아악!”
소화자가 비명을 지르는 순간 다시 검이 번쩍였다. 순식간에 소화자의 가슴 서너 곳에 구멍이 났다. 소화자는 피할 틈도 없이 그대로 쓰러졌다.
처참한 모습에 우설금이 살짝 아미를 찡그리며 벌떡 일어났다.
“그만 가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흑귀와 백귀가 조용히 따라서 일어났다.
나무에서 두세 걸음 발을 떼던 우설금이 힐끔 나무 위쪽을 쳐다봤다. 그리고…….
우설금과 눈이 마주친 주석하는 기겁할 듯 놀랐다. 자칫 떨어질 뻔해서 다급하게 나뭇가지를 붙잡았다.
우설금의 싸늘한 눈길이 그에게 닿았다. 그것도 잠깐 그녀는 말없이 멈추었던 발걸음을 다시 내디뎠다.
우설금과 흑귀, 백귀가 저만치 멀어진 후에야 주석하는 참았던 숨을 가까스로 내쉬었다.
“후아, 저 여자…… 무섭네.”
“흐아아! 나도 지렸다!”
도수의 너스레에 머리를 긁적이던 주석하는 나무 밑동을 다시 살폈다. 흥건하게 피가 고인 가운데 소화자가 쓰러져 있었다.
“근데 소화자가 죽은 거냐?”
“그런 것 같은데?”
목표했던 소화자를 다른 이가 죽여 버렸으니 할 일이 없어졌다. 다소 찜찜하긴 했으나 이미 끝난 일이다. 어쩌면 직접 손에 피를 묻히지 않았으니 오히려 잘된 일인지도 몰랐다.
계속 나무에 매달려 있을 수는 없는 법. 주석하는 나뭇가지를 붙잡고 조심스럽게 아래로 내려갔다.
“어? 석하! 저기!”
도수가 먼 곳을 가리켰다.
“응?”
내려가던 자세 그대로 주석하의 시선이 손끝을 따라갔다.
“저것들은…….”
방금 이곳을 떠났던 하얀 옷을 입은 무리가 달려오고 있었다. 백호문 제자들이라 했던가.
“젠장, 저것들이 왜 돌아오지?”
투덜대던 주석하는 지금 나무 아래에 소화자의 시신이 널브러져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 상황이라면 영락없이 소화자를 죽인 범인으로 지목될 판이다. 물론 그들 역시 소화자를 죽이고자 했으니 딱히 억울할 할 것도 없지만.
주석하가 다시 올라가 숨기도 전에 녀석들이 나무 아래에 도착했다.
“소화자 어르신! 저희랑 같이…….”
소화자를 찾던 녀석들은 손목과 팔이 잘린 채 피투성이가 된 소화자를 발견하고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이,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방금까지 멀쩡했는데?”
“감히 누가 소화자 어르신을…….”
할 말을 잃은 녀석들이 우왕좌왕하다가 무심코 시선을 위로 올렸다.
“어? 저놈들 뭐야?”
그들은 주석하와 도수를 발견하고 나무 아래에서 고래고래 소리 질렀다.
“저것들이 범인이다!”
“감히 소화자 어르신을!”
“미친놈들! 나무에 숨으면 안 보일 줄 알아?”
주석하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나무에 매달려 고민했다. 이대로 있을 수도, 그렇다고 내려갈 수도 없었다.
누구인지 한참 자기들끼리 떠들던 녀석들 가운데 그날 밤 백호문에서 주석하를 봤던 자가 있었던 모양이다.
“저! 저놈은! 흑검문의 주석하 아닌가!”
순간 떠들썩하던 녀석들의 소란이 찬물을 부은 듯 조용해졌다. 소화자의 죽음과 그날 밤에 보았던 주석하의 무위. 더는 의문을 가질 이유가 사라졌다. 주석하라면 소화자를 없앨 충분한 동기마저 있는 자이니.
그들은 주석하를 내버려 두고 도망칠 것인가, 아니면 아래로 내려오지 못하게 붙잡아 둘 것인가 고민했다. 그 와중에도 그들은 비난을 멈추지 않았다.
“저 새끼가 감히 어르신을 죽였다!”
“정파의 공적! 무림의 살인마!”
“설마? 행방불명된 백호광객도 저들이?”
살인마로 지목받으니 기분이 좋지 않았다. 주석하는 도수와 눈빛을 주고받았다.
‘우린 안 죽였잖아?’
‘변명의 여지가 없어.’
‘이제 어떡하냐?’
‘남은 방법은 딱 하나지!’
도수가 한 자 한 자 또박또박 소리는 내지 않고 입 모양으로 말했다.
살! 인! 멸! 구!
어쩔 수 없다. 괜히 소화자를 죽였다고 의심받아 덕양에서 공적이 되느니 이들을 죽이는 게 더 낫다. 어차피 백호문과는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넌 관계다.
주석하는 도수와 눈빛을 교환하면서 암암리에 내공을 끌어올렸다. 경혼심법으로 내력을 끌어올리려면 아직 다소 시간이 걸렸다.
단전에서 스멀스멀 피어나던 내력이 천천히 온몸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힘이 충만하고 몸이 새처럼 가벼워졌다. 바로 이 기분이다.
공격 기회 포착은 암습에 최적화된 도수의 몫이다.
나뭇가지를 박차고 새처럼 날아 내리면서 도수가 검을 그었다. 그 뒤를 따라 주석하도 아래로 뛰어내렸다. 물론 그의 자세는 도수처럼 그렇게 멋있지 않았다. 역시 초보자는…….
서걱-
도수의 검에 두 녀석이 상처를 입고 혼란에 빠진 사이 주석하의 무시무시한 검이 녀석들을 엄습했다.
안타깝게도 주석하의 흑검육식은 그리 세밀하지 못했다. 내공이 실려 가공할 기세를 내뿜기는 했으나 여러 명의 백호문도를 동시에 공격할 만큼 화려하지 않았다. 기겁한 백호문도들은 메뚜기 뛰듯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 바람에 주석하의 검은 애꿎은 허공을 갈랐다.
콰앙!
목표물을 놓친 검이 지금까지 올라가 있던 고목을 찍었다. 아름드리 고목이 검격에 맞아 쩌저적 갈라졌다.
“으허헉!”
그 광경을 본 백호문도들이 경악성을 지르며 몸이 굳었다.
놀랍게도 거대한 나무 밑동이 마치 도끼에 찍힌 것처럼 잘려 쓰러지고 있었다. 보통의 경우라면 생채기만 났을 나무가 쪼개져 넘어가는 비현실성에 모두가 입만 벌렸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부 문도들은 자신에게 나무가 넘어오고 있음에도 피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쿠웅!
나무가 쓰러지는 충격에 지면이 들썩였다. 나뭇잎이 우수수 사방으로 휘날리고 땅에서 피어난 먼지가 뭉게구름처럼 퍼져나갔다.
입을 쩍 벌린 백호문 제자들 사이를 도수가 제비처럼 지나갔다.
서걱-
과연 유능한 살수답게 일격에 한 명씩 해치우고 있었다.
장내가 마무리되었을 때 살아남은 백호문도는 아무도 없었다. 주석하는 무너진 고목을 살피며 고개를 갸웃거렸고 도수는 검에 맺힌 피를 털어냈다.
“젠장, 나무가 종이짝도 아니고…….”
뒤로 돌아서는 주석하의 눈에 장내의 참상이 들어왔다. 사방에 시신이 널려 있었다.
“언제 끝냈냐?”
“이 녀석들이 땅에 발이 붙었는지 도망도 안 가더라고.”
대수롭지 않은 듯 도수가 검을 집어넣으며 눈을 찌푸렸다.
“왜?”
“나무를 찍어 버리는 바람에…… 우린 이제 어디에 올라가서 백호광객을 기다리냐?”
주위를 둘러보니 이처럼 크고 무성한 나무가 없었다. 설사 있더라도 길목에서 멀리 떨어져서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래도 목표물 중 한 명을 죽였으니 작전은 성공이 확실했다.
“나무 위 말고 달리 숨을 방법은 없나?”
주석하는 무심코 새로운 방법을 물었다. 당연히 없을 리가 없다. 도수가 묘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당연히 있지. 이왕 온 김에…… 마저 처리하고 가야지.”
도수가 생각해낸 방법은 지면에 은신해서 목표물을 기다리는 방법이었다.
그들은 길목 한쪽 옆에 참호를 파고 몸을 숨겼다. 땅속에 숨어 며칠간 백호광객이 나타나기를 기다렸으나 당연하게도 백호광객은 그림자도 비치지 않았다.
“하, 미치겠네…… 백호광객 그 자식 나타나기만 해봐. 이 고생을 몽땅 갚아준다!”
주석하는 은신한 내내 백호광객을 욕했다. 땅에 파묻혀 시간을 보내는 짓은 인간이 할 일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