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화 혈혼도객 (1)
보름이 지난 후 주석하와 도수는 흑검문으로 돌아왔다.
“허억! 이게 무슨 꼴이냐!”
흑검문주 주격이 혼비백산해서 주석하의 손을 붙잡았다. 정작 주석하는 아버지가 왜 이리 호들갑인지 전혀 알지 못했다.
“우리 아들이…… 상거지가 되었다니!”
거지? 주석하는 본인의 차림새를 확인했다. 그동안 제대로 씻지도 못하고 땅속에 은신하다 보니 옷차림이 말이 아니긴 했다. 피부도 흰지 검은지 구분이 안 될 정도였고 옷은 곳곳에 구멍이 뚫리고 흙투성이에…… 옷의 염료를 진흙으로 사용한 게 아닌지 착각할 정도이니.
“이렇게 준수한 거지를 보셨습니까?”
“준수? 피골이 상접 했잖아! 도수를 보면 모르겠느냐?”
주석하는 도수에게 눈길을 돌렸다. 과연 도수 녀석은…… 말을 말자. 원래 저렇게 생긴 녀석이니.
“대체 무슨 짓을 하다가 온 거냐?”
며칠 집을 나갔던 아들이 상거지가 되어 돌아왔으니 당연히 놀랄 수밖에. 흙과 먼지를 뒤집어써서 그렇지 실제로는 멀쩡했던 주석하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를 너무 아껴서 매사에 걱정이 많은 아버지가 문제였다.
“인근 동네를 돌아다니며 유흥을 즐기다 왔습니다.”
“밥은 제대로 먹었고?”
걱정이 가득한 질문을 웃고 넘기려는데 도수가 끼어들었다.
“저희 몰골을 보시면 모르겠습니까? 여비가 없어 굶었는데요?”
주격이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도수를 쓱 훑었다.
“넌 떠날 때보다 더 쪘는데?”
도수는 곧바로 입을 다물었다.
한바탕 소란스러운 인사가 끝난 후 주석하는 최근 동정을 물었다.
“별일 없었다. 요즘 정파 녀석들도 잠잠해서. 외부에서 초빙해온다느니 어쩌니 하더니 아직 아무런 움직임이 없더라.”
덕양의 정파에서는 백호광객과 소화자를 불러들였다. 이 가운데 소화자의 죽음을 직접 목격했기에 정파가 움직이기 쉽지 않으리라 예상했지만 아직도 잠자코 있을 줄이야. 더구나 문주가 죽은 백호문은……. 아! 백호광객을 마중하러 갔던 제자들마저 죽어버렸으니 이젠 문파 유지도 어려운 상황이 되었으려나?
“다행이네요.”
주석하는 무덤덤하게 반응했다.
정작 다음 나온 주격의 대답이 다소 황당했다.
“그래도 우리도 놀고 있지는 않았다. 적의 공격에 대비해야지. 그래서 외부 손님을 초빙했다.”
일전에 백호문에 빈객으로 들어왔던 정천신검처럼 외부의 강자를 비싼 돈을 주고 머무르게 했다는 뜻이었다. 지금까지 빈객을 초청한 적이 없었던 흑검문으로서는 일대 사건이라 할 만했다.
“외부 손님요?”
주격은 덕양에 갇혀있어 강호 사정에 밝지 못했다. 게다가 무공도 강하지 못하니 고수를 판별할 눈썰미가 있을 리 없다.
그나마 주석하는 전생에 강호를 구른 경험이 있기에 상대를 만났을 때 직감적으로 느끼는 부분이 있었다.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자니 주격이 온화한 목소리로 물었다.
“한번 만나보겠느냐?”
“당연히 그래야죠. 흑검문의 명운이 걸린 일 아닙니까?”
“그럼 일단 씻고 오너라.”
하긴 지금 차림새로는 소문주라 우겨도 아무도 믿지 않을 테니까. 주석하는 재빨리 고개를 숙인 후 도수를 끌고 처소로 향했다.
**
목욕을 끝내고 산뜻한 새 옷을 걸치고 나왔을 때 주소은이 기다리고 있었다.
“넌 왜 여기 있어?”
“오라버니 기다리고 있었지.”
한동안 얼굴을 못 봤으니 이상할 건 없지만 어째 그녀의 표정을 보니 할 말이 가득한 낌새다.
“일 있어?”
“일이라기보다…… 오라버니, 뭐 하다 왔는데?”
“놀다 왔지.”
“사고치고 온 건 아니지?”
갑자기 사고가 여기서 왜 나오지? 그렇게 철없게 보였나? 영문을 몰라 빤히 쳐다보고 있자니 주소은이 작심한 듯 입을 열었다.
“최근에 우리 흑검문에서 일이 많았잖아?”
“그렇긴 하지.”
“그 과정에서 여러 사람이 죽었고.”
솔직히 최근에 일어난 대부분 사건은 외부 세력이 흑검문을 찝쩍거려서 발생했다. 그 과정에서 주석하가 괴력을 발휘해서 잘 막았고. 그들은 모두 제 명을 재촉한 놈들이자 응분의 대가를 치렀을 뿐이다.
주소은도 이를 모르진 않을 텐데?
“오라버니가…… 한동안 없으니까 여기 또 나쁜 놈들이 쳐들어올까 봐 겁이 나서, 그리고 오라버니가 밖에서 해를 입는 건 아닌지 걱정되어서…….”그녀의 안색을 차분하게 살펴보니 그동안 걱정이 많았던 듯했다.
문득 예전 생각이 났다. 적혈방이 쳐들어오기 전, 그는 사고만치는 철부지였고 항상 아버지와 누이동생에게 걱정만 끼쳤었다. 그때도 주소은은 그의 편이 되어 감싸주었는데…….
그게 아득한 옛일이다. 무려 오 년은 훨씬 전의. 물론 단지 그에게만 해당했고 주소은에게는 불과 몇 달 전의 일일 뿐이다. 그러니 아직도 미덥지 않아 멀리 떠나면 걱정하는 그녀의 감정이 당연히 이해됐다.
“무사히 돌아왔잖아? 이렇게.”
“앞으로는…… 그렇게 떠나지 마. 최근에 소문을 들었는데…….”
“무슨 소문?”
“백호문과 창무관에서 초청한 고수가 오는 도중 죽었데. 게다가 마중 나갔던 백호문 제자들도 모두 죽었고…… 오빠가 한 일 아니지?”
응? 백호광객이 죽었다고? 지금까지 그 사실을 전혀 몰랐던 주석하는 한 대 맞은 것처럼 머리가 띵했다.
“아, 젠장! 내가 얼마나 고생했는데!”
“어? 오빠였어?”
“아, 아무것도 아냐.”
주석하는 재빨리 상황을 수습하며 속으로 치솟는 열불을 삼켰다. 며칠 동안 땅에 숨어 있느라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는데 이미 죽은 녀석 때문에 그 고생을 했다니. 죽었다고 통보라도 좀 해주면 안 되나?
그가 씩씩대고 있자니 주소은의 눈썹이 상큼 올라갔다.
“하여튼 오빠가 한 짓 아니지?”
주석하의 기억에…… 백호광객이 어떻게 죽었는지는 전혀 모르고 소화자는 무시무시한 우설금이 죽였었다. 그리고 백호문 제자들은 그가 죽일 뻔했지만 쓸데없이 나무 밑동을 검으로 치는 바람에 그사이 도수가 싹 쓸었으니 정작 그가 죽인 사람은 없다고 할 수 있었다.
그는 자신 있게 대답했다.
“당연하지. 난 살인마가 아니란다.”
“그렇지? 나도 그렇게 생각해.”
안심한 주소은이 환한 미소를 지었다.
오늘따라 이 여자가 왜 이런 일에 민감하지? 주석하가 의문을 품고 있자니 다시 주소은의 질문이 나왔다. 그것도 얼굴을 살짝 물들이면서.
“오라버니, 혹시 그때…… 그 남궁 공자님, 또 만난 적 있어?”
그제야 주석하는 주소은의 내심을 간파했다. 남궁천에게 관심이 무척 많은 모양이다.
“아니, 남궁 공자야 멀리 있는 사람이잖아? 이미 고향으로 돌아갔을 걸? 아니면 무림맹이 있는 하남으로 갔거나.”
실망한 듯 갑자기 풀이 죽은 주소은이 다시 당부했다.
“알았어. 나중에 만나게 되면…… 다시 초대해봐. 아니 꼭 해야 해!”
“알았어.”
이름 없는 흑도 문파인 흑검문과 달리 남궁세가는 유명한 곳이다. 그런 곳의 소가주가 이곳을 다시 방문할 리가 없다. 예전의 방문이 오히려 이상한 일이었다.
주소은의 마음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남궁천은 그녀가 감히 올려보기 어려운 존재이고 게다가 두 사람 사이에는 정과 사라는 절대 없앨 수 없는 선이 그어져 있다.
그렇다고 숭늉 마시고 속 차리라는 말을 할 수는 없기에 긍정적으로 답해줬다.
“그리고 오빠도 사람을 함부로 죽이거나 하지 말고. 괜히 나쁜 사람이라고 욕먹으면 안 되잖아? 남궁 공자처럼 대협 소리는 못 듣더라도 살인마로 오해받으면 절대 안 돼.”대충 눈치 챘다. 오늘 여기에 와서 주절주절 늘어놓는 이야기를 종합해보니 나중에 남궁천과 잘 어울리려면 이제 그도 몸가짐을 조심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당연히 주석하도 사람을 죽이거나 다른 이를 핍박하며 살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가 바라는 삶의 목표는 남들보다 목을 좀 세우고 본인의 의지대로 사는 것이다. 주소은의 요구와 그리 다르지 않기에 그는 흔쾌히 수락했다.
“당연하지! 나만 믿어라. 남궁천을 만나면 네 이야기 꼭 해줄게.”
환하게 미소를 지으며 수줍어하는 주소은을 보자니 괜히 남궁천에게 심술이 났다. 그 자식이 어떻게 내 누이동생을 홀렸지? 역시 잘생겨야…….
**
대청으로 간 주석하는 특이하게 생긴 인물을 발견했다.
나이는 대략 예순? 초로의 노인인데 온몸의 피부가 무척 검었다. 흡사 검은 재를 바르고 태어났나 의심할 정도였다. 지금 흑검문에서 지급한 흑의를 입으니 어째 옷과 피부가 구분되지 않을 정도였다.
체구는 마른 편이었고 겉으로 드러난 근육은 매우 탄탄했다. 코와 턱에 살짝 수염을 기른, 음흉한 분위기를 풍기는 남자였다. 어딘지 모르게 음산한 눈빛도 인상적이었다.
“어서 오거라. 이분은 당분간 빈객으로 머무를 혈혼도객 대협이시다.”
주석하의 안색이 살짝 변했다.
혈혼도객(血魂刀客). 이름은 들어봤다. 물론 이곳에서 들은 것은 아니고 전생에서 오 년간 강호를 전전하면서 들었던 이름이다.
그의 기억에 따르면 혼란했던 그 오 년 동안 혈혼도객도 무사하지 못했다. 남을 속이기 좋아하고 고수라 설치다가 어떤 협객의 손에 목이 잘렸던가. 하여튼 사기꾼 짓을 하다 인생을 마무리했던 그런 놈이었다.
실력이 빼어난 고수는 아니고 무명도 아닌 중간쯤의 인물. 물론 그렇더라도 이곳 덕양에서는 상대할 자가 없는 실력이다. 사천의 중심, 성도에서도 이름을 내밀 수준이긴 했다.
당연히 주석하는 이자를 환영할 수 없었다.
“놈들이 백호광객을 불러온다기에 우리도 대비해야겠다는 생각에 초빙했다.”
주격의 설명이 이어졌다.
주석하는 포권을 취하며 인사를 했고 혈혼도객은 뻣뻣하게 목을 세우고 인사를 받았다. 웃을 때 드러나는 하얀 이빨이 어찌 섬뜩해 보였다.
“흑검문을 도와주셔서 감사드립니다.”
“흐흐, 소문주인가? 반갑네.”
목소리도 날카롭게 갈라져서 듣기에 편하지 않았다.
“앞으로 대협께서 제자들의 무공을 봐주실 거다. 너도 열심히 배우도록 하여라.”
빈객이 밥값을 하려면 문파의 대소사를 돕는 일 외에 때로는 무공 사부가 되기도 한다. 흑검문처럼 이름 없는 소문파에서는 이런 빈객을 활용하여 무공을 얻는다.
문득 이자의 별호에 도가 들어있는 점이 수상쩍었다. 흑검문은 검을 다루는 문파이니 도를 쓰는 혈혼도객과는 어울리지 않는다.
“도를 쓰십니까?”
“흠흠, 그렇네. 하지만 검도 조금 쓸 줄 아네.”
검법과 도법은 다르거늘. 대충 눈치챘다. 제대로 빈객을 맞이하려면 검법에 능통한 자를 수배해야 하지만 주석하마저 자리를 비운 상황에서 정파의 위협이 걱정되다 보니 대충 빨리 올 수 있는 자로 모셔온 것이 분명했다. 하필 사기꾼 같은 녀석을…….
이는 문주인 주격의 뜻이니 주석하가 왈가왈부할 수 없지만, 그라면 이런 자를 절대 데려오지 않았겠지만 이미 자리 잡고 있으니 쫓아낼 수도 없고.
“혈혼도객께서 오신 후부터 신기하게도 정파 쪽 움직임이 움츠러들었다. 대협의 위명에 놈들이 알아서 기는 거지.”
주석하에게 설명하면서 주격은 혈혼도객에게 거듭 감사를 표했다.
실은 백호광객 등이 죽었다는 소식이 정파에 전해졌기 때문이었으나 아무려면 어떤가.
칭찬에 우쭐해진 혈혼도객이 의욕을 드러냈다.
“흐흐, 그렇다면 말이지, 말이 나온 김에 소문주부터 지도해볼까?”
시커먼 면상에 하얀 이빨을 보니 꿍꿍이가 엿보인다. 갑자기 오자마자 무공 지도를 받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