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화 혈혼도객 (2)
업무에 바쁜 주격을 돌려보내고 혈혼도객을 따라 도착한 연무장에는 아무도 없었다.
한산한 연무장을 본 혈혼도객의 안면이 갑자기 어두워졌다. 소문주를 앞에 두고 본인의 위세를 뽐낼 기회인데 관중이 없으니 흥이 나지 않아서였다.
주석하는 아무런 생각이 없었다. 비록 혈혼도객이 덕양에서 보기 힘든 고수라지만 그가 탐낼 그런 무위를 지닌 자는 아니었다. 더구나 그는 검이 아닌 도를 사용하는 자다. 그러니 더더욱 배울 게 없었다.
“여기서 하면 되겠습니까?”
연무장 가운데에 도착하자 주석하가 혈혼도객의 의사를 물었다.
“흠흠, 그렇게 하지.”
주석하는 가져온 검을 풀었다.
“흠, 소문주는 어떤 검법을 익혔나?”
“저는 흑검육식이라는 본문의 대표 검법을 익혔습니다.”
순간 혈혼도객의 얼굴에 무시하는 표정이 드러났다. 아마도 이미 여러 차례 문파 제자들을 데리고 검법을 확인해봤던 모양이었다.
“내가 듣기로 자네는 상당한 고수라고 하더군.”
“고수 아닙니다. 얼떨결에 운이 좋았을 뿐이죠.”
혈혼도객도 흑검문에 빌붙기로 한 이상 사전에 여러 정보를 취합했었다. 그런데 소문주에 관한 정보가 어딘지 이상했다. 무공이 일반 문도와 전혀 차이가 없다는 소문도 있었고 사천삼살을 죽인 고수라는 말도 있었다.
거기에다 흑도 소공자회에서 맨날 얻어터지는 호구라고도 했고 백호문에 들어가 문주를 죽였다는 믿기 어려운 증언도 있었다. 물론 백호문에 잠입했을 때 유명한 자객이 옆에 붙었다는 추가증언이 덧붙긴 했지만.
한 사람이 이처럼 정반대의 소문을 만들어내는 일은 흔치 않다. 그리고 대부분 과장된 경우가 많았다.
‘무공의 ’무‘자도 모르는 놈들이 소문을 부풀리면 그렇게 되지.’
혈혼도객은 눈앞의 주석하를 쓱 훑어보면서 무공을 가늠했다. 과연 주석하는 별다른 내공을 소유하지 않은 것처럼 느껴졌다. 게다가 검법을 열심히 연마한 흔적도 없었다.
강호를 떠돌면서 이런 놈을 많이 봤었다. 일파의 소문주랍시고 거들먹거리지만 실제로는 무공을 제대로 익히지도 않은 녀석 말이다.
그런데도 부모는 유명한 고수를 초빙하여 어떻게든 무공을 배우라고 옆에 붙인다. 그도 예전에 한두 번 경험해봤었다. 이런 놈들은 처음 가르칠 때 따끔하게 훈계해야 그다음부터 절대 거들먹거리지 못한다. 당연히 그의 이곳 생활도 그만큼 편해질 것이다.
“흑검육식이라…… 그래, 그 검법을 어디까지 익혔느냐?”
“전부 다 익혔습니다.”
주석하는 다소곳하게 대답했다.
“자, 그럼 한번 펼쳐 보거라.”
무심코 검을 들고 휘두르려던 주석하는 멈칫하며 혈혼도객을 쳐다봤다. 검법을 시범 보이는 것은 문제가 아니지만 이 녀석에게 굳이 머리를 숙이며 사부처럼 대할 필요가 있는지 의문이 들어서였다.
물론 혈혼도객이 흑검문에 있음으로써 인근 정파 문파에 위협이 된다는 사실은 충분히 납득했다. 이는 그도 바란 일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소문주인 자신 앞에서 거들먹거리는 행동은 어쩐지 보기 싫었다. 이미 그는 이런 놈을 숱하게 경험해보지 않았던가? 물론 내공 빼면 걸음마 단계라지만.
그는 검을 쥐고 기합을 넣은 다음 흑검육식을 한차례 펼쳤다.
당연히 그의 검법은 시원찮았다. 아직 검초가 익숙하지 않았고 힘도 없었다. 검의 흐름이 유려하기는커녕 매우 부자연스러웠다.
지켜보던 혈혼도객의 입에서 한숨이 뿜어져 나왔다. 역시 짐작대로 소문주의 무공은 보잘것없었다. 눈이 먼 놈이 소문을 퍼트렸거나 흑검문에서 의도적으로 왜곡했음이 분명했다.
“흠, 좋아. 이번에는 진기를 주입하여…… 아니다, 진기가 한 줌이라 주입 자체가 어렵겠구나.”
한심하다는 듯 비아냥거리던 혈혼도객이 어깨에 메고 있던 도를 풀었다.
두껍고 묵직한 도신이 겉보기에도 대단한 고수가 사용하는 무기처럼 보였다.
“검이란 그렇게 병아리조차 죽이기 힘들 만큼 흐느적거리면서 휘두르는 게 아니다.”
“한번 보여주시려고요?”
“그래, 잘 보거라.”
주석하도 혈혼도객의 무공 수준이 궁금했던지라 한쪽에 물러서서 조용히 지켜봤다. 전생의 경험 때문에 그는 남의 무공 수준을 쉽게 알아봤다.
“하압!”
혈혼도객이 도를 이리저리 흔들며 화려한 도법을 선보였다. 한눈에도 이 도법에 별로 실속이 없음을 바로 알아봤으나 주석하는 흥미로운 표정으로 열심히 주목했다.
한차례 춤사위를 끝낸 후 호흡을 고르며 혈혼도객이 물었다.
“어떠냐? 네 녀석이 펼친 검법과는 차원이 다르지?”
“제가 보기에는…… 별 차이가 없어 보이는데요?”
예상과 다른 주석하의 반응에 혈혼도객이 안면을 찡그렸다. 과연 오만한 녀석이라는 생각에 혈혼도객은 다시 도를 거머쥐었다.
“그게 말이지, 원래 무공은 아는 만큼 보인단다. 네 녀석이 아직 아는 게 없어서 그 차이를 보지 못하는 거야. 앞으로 열심히 노력하면 나의 도법이 대단하다는 사실을 알아볼 것이다.”
“에이, 그저 그런 것 같은데…….”
주석하의 빈정거림에 혈혼도객은 새삼 분노가 치솟았다.
“그렇게 보이느냐? 맞상대를 해보면 바로 뼈저리게 느끼게 되지. 내 도법이 얼마나 힘 있고 굉장한지 말이다.”
혈혼도객이 도를 주석하에게 겨눴다.
“검을 들어라.”
애초에 주석하는 혈혼도객과 다툴 생각이 없었다. 혈혼도객의 존재가 흑검문에 도움 되기 때문이다. 다만 이 자의 사기꾼 같은 기질만은 적절하게 통제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랬던 혈혼도객이 도발해왔다. 물론 혈혼도객 본인은 당돌한 소문주에게 한 수 가르쳐 주며 기를 꺾어둔다는 생각이었을 것이다.
주석하는 주섬주섬 검을 들며 상대의 우람한 도를 쓱 훑었다.
“이건 아무래도 제가 불리해요. 묵직한 도랑 부딪히면 제 검이 바로 부러질 것 같은데요?”
지금 눈앞에 보이는 검신과 도신의 날 폭이 두 배가량 차이가 나니 무공을 모르는 사람에게는 당연히 그렇게 보였다.
“이놈아, 폭이 넓다고 무조건 좋은 것은 아니다. 검에 내력을 불어넣으면 무기의 폭이나 날카로움은 큰 변수가 아니다.”
“에이, 아닌 것 같은데…….”
“하! 이놈이 따박따박 대꾸를 하는구나! 얼른 검을 들어라. 내가 오늘 천외천이 있음을 보여주겠다.”
“어떻게요?”
“네놈 검을 딱 부러트리는 신기를 보여주마!”
“검신이 좁은 내가 불리하다니까요.”
“명필은 붓을 가리지 않고 고수는 무기를 가리지 않는 법이다.”
“거짓말! 고수가 싸구려 검을 들고 다니는 거 봤어요?”
계속 뭐라고 구시렁대는 주석하를 아니꼬운 목소리로 힐난한 혈혼도객은 버릇없는 소문주를 오늘 제대로 혼쭐내야겠다고 결심했다.
주석하가 슬그머니 검을 쥐고 맞은편에 섰다. 그런 그의 모습은 앞서와 마찬가지로 영 엉성했다. 지금 주석하가 취한 자세는 흑검육식의 기본자세였다.
무관 입문생에게서나 볼 자세에 혈혼도객이 비웃음을 터트렸다.
“제법이구나. 이제 검에 내기를 불어넣어 보아라!”
당연히 삼류무사가 내기를 검에 넣을 줄 알 리가 없다. 겉으로 보이는 주석하 수준이 딱 그 정도이기에 놀리는 말일 뿐이다.
반면 혈혼도객은 순식간에 도에 내력을 흘려 넣었다.
우우웅-
물론 혈혼도객의 수준에서도 이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는 간신히 도에 넣은 내력을 유지하면서 버럭 소리쳤다.
“와라! 부러지는 사람이 지는 거다! 네놈! 검이 부러지면 나를 스승으로 모셔라!”
“네? 만일 그쪽의 도가 부러지면 어떡하죠?”
혈혼도객은 기분이 팍 나빠졌다. 눈앞의 놈은 정말 범이 무서운 줄 모르는 하룻강아지였다.
“내 도가 부러질 일은…… 절대 없다! 그때는 내가 너를 주인으로 모시마!”
당연히 그럴 일이 일어날 가능성은 벼락을 맞아 죽을 가능성보다 적기에 혈혼도객은 생각 없이 내뱉었다.
여전히 어정쩡하게 서 있는 주석하를 향해 혈혼도객이 소리쳤다.
“와라!”
“잠시만요!”
주석하는 재빨리 손을 내저으며 내력을 끌어올렸다. 남궁천의 도움으로 내력을 끌어올릴 수 있게 되었다지만 아직 자유롭지 않았다. 여전히 시간이 조금 걸렸다.
“어리석은 놈.”
힘을 쓴다고 내력이 검에 주입되는 일은 없기에 혈혼도객은 주석하를 비웃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혈혼도객은 주석하의 검 끝에 이상한 기운이 어리는 모습을 포착했다.
“응?”
그는 눈을 비비며 눈의 초점을 모았다. 이런 초보자에게서 검기를 볼 가능성은 전혀 없기에 분명히 잘못 본 것이어야 했다.
그 순간 주석하가 벼락처럼 검을 휘두르며 공격해 들어왔다. 그 초식은 흑검문도를 가르치며 몇 번이고 보았던 첫 번째 초식이었다. 주석하의 공격은 빠르지 않고 검의 흐름 또한 평범했다.
주석하의 검에 어린 기운에만 신경 쓰고 있던 혈혼도객은 몸이 반응하는 대로 자연스럽게 공격을 막았다. 이미 그의 도에는 내공이 어려 있기에 자칫 강하게 휘두르면 주석하가 다칠 우려가 있었다. 그래서 그는 상대의 공격을 방어한 후 기회를 봐서 혼을 내겠다는 작전을 짰다. 흑검육식 정도의 검법이라면 눈을 감고 도를 휘둘러도 충분히 상대할 수 있으니까.
퍼석-
검과 도가 부딪혔다기엔 다소 기분 나쁜 소음이 울렸다.
‘부서졌군!’
오랜 강호 경험이 이 소리가 검이 토막 난 소리임을 알려줬다. 진기가 주입된 그의 도가 절단될 일은 전혀 없으니 주석하의 검이 부러졌다고 확신했다.
혈혼도객은 비릿한 미소를 흘리며 상대를 확인했다.
“어?”
주석하의 검이 멀쩡했다. 공격했던 주석하는 여유롭게 휘파람까지 불며 약간 거리를 벌리고 여유를 부리고 있었다.
혈혼도객의 눈이 천천히 자신의 도를 향했다.
비명도 지르지 못한 그의 눈이 부릅떠졌다. 도가 절반 부러져 부러진 단면이 날카롭게 빛나고 있었다.
“허억!”
꿈이 아닌지 확인하고자 혈혼도객이 자신의 눈을 비볐다. 부러진 도가 다시 붙을 일은 없었다.
“그거…… 저잣거리에서 싸구려 사신 거 아녀요?”
주석하가 도를 가리키며 물었다.
싸구려? 원래 무림인은 더 좋은 무기를 위해 돈을 아끼지 않는 법이다. 혈혼도객도 마찬가지였다. 나름대로 도 제작의 명인이라는 사람에게 주문해서 간신히 구한 명품이었다.
그런 도가 지금 뚝 부러졌다. 화가 날 상황임에도 어이가 없어 실소가 나왔다. 대체 어떻게 된 거지?
그 순간 주석하가 성큼성큼 다가왔다.
“줘 봐요. 싸구려 맞나 보게.”
혈혼도객이 마음의 결정을 내릴 틈도 없이 주석하가 부러진 도를 가져갔다.
그리고.
뚝-
절반만 남았던 도가 또 뚝 부러졌다. 단지 주석하가 손을 쓱 대기만 했는데도 말이다.
보통 사람이라면 싸구려 도를 바가지 썼다고 한탄할지 모르지만 이 도를 지금까지 썼던 혈혼도객은 안다. 이 도가 강호에 이름을 떨칠 명품은 아닐지라도 모두가 감탄하던 명도란 사실을.
“어…… 어떻게…….”
입을 쩍 벌리고 정신을 못 차리는 사이 그의 곁으로 다가온 주석하가 귓가에 속삭였다.
“도가 엉망이네? 기억해? 부러지면 날 주인으로 모신다고 했지?”
“그, 그게…….”
“꿇어!”
그제야 혈혼도객도 교육을 시작할 때 장담했던 내용을 떠올렸다. 이런 일이 절대 없으리라 생각해서 그냥 질러봤던 제안이었는데 말이 씨가 되다니.
혈혼도객은 주석하의 몸에서 무시무시한 기운이 어리고 있음을 발견했다. 그로서는 감히 견줄 수 없는 엄청난 내공이었다. 어린 나이에 이런 내공을 품고 있는 사람을 그는 지금까지 본 적이 없었다. 강자일수록 더 약한 혈혼도객의 무릎이 자연스럽게 굽혀졌다.
“앞으로 나는 황제와 무관 동기동창이야. 알지?”
주석하의 살기 어린 협박에 혈혼도객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