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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검천하-31화 (31/273)

31화 혈혼도객 (3)

주석하의 압박을 받은 혈혼도객은 고개를 들지 못했다.

도가 부러졌다는 충격 속에서 주석하가 압박하는 무시무시한 기운을 체험했기 때문이다. 절세고수가 아니라면 절대 풍길 수 없는 무형의 기운이었다.

강호를 돌아다닌 경험이 많았기에 혈혼도객은 어렵지 않게 확신했다. 비록 겉보기에 소문주는 무림에 갓 입문한 사람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어마어마한 고수라고. 본신의 능력을 숨길 수 있는 그런 수준의 고수라고.

“아…… 앞으로 정성을 다해 모시겠습니다.”

혈혼도객이 바짝 바닥에 엎드렸다.

그제야 만족한 주석하는 들끓는 내공을 서서히 잠재웠다. 예전에 비하면 내력이 필요할 때 끌어올렸다가 다시 단전에 잠재울 수 있게 된 지금은 괄목상대했다고 볼 수 있었다.

압박하던 기운이 사라지자 혈혼도객은 간신히 얼굴을 들었다. 눈앞의 미청년을 다시 살펴보니 준수한 안면을 제외하면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모습이었다. 심지어 무림인에게서 흔한 탄탄한 근육마저 부실해 보였다. 이런 사람이 엄청난 고수란 점이 도무지 믿어지지 않았으나……. 무림에서는 그것도 흑도에선 무공이 센 놈이 무조건 갑이다.

“소문주님,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자네가 앞으로 흑검문을 위해 충성하라고 봐준 거야. 만일 헛짓거리하면 저 도처럼 자네 몸을 반 토막 낼 거니까, 알지?”

해맑은 웃음을 지으며 슬쩍 압박이 들어오자 혈혼도객의 가슴은 다시 쪼그라들었다.

“그럼 아버지에겐 적당히 말해.”

주석하는 어깨를 툭툭 치면서 스쳐 지나갔다.

찔끔 몸을 움츠리던 혈혼도객이 주석하의 뒷모습을 유심히 살피다 간신히 입을 뗐다.

“소문주님?”

주석하가 가던 걸음을 멈추고 몸을 돌렸다.

“혹시…… 혼군에게 무공을 사사 받으셨습니까?”

주석하의 미간이 살짝 일그러졌다. 이건 또 무슨 말이지?

“혼군?”

“흑도팔군의 일인이신 혼군 말입니다.”

현 무림에서 최강고수로 일컬어지는 인물을 묶어 사람들은 칭송했다. 정파에서 가장 강한 인물을 정파십존이라 했고 사파에서 최강인 인물을 흑도팔군이라 불렀다.

물론 마교에도 마교칠왕이 존재했으나 아직 중원 무림에서는 이들의 존재를 몰랐다. 전생에서 마교와 얽혔던 주석하는 어렴풋하게 알고 있었지만.

당연히 주석하는 혼군(魂君)에 대해 별달리 아는 바가 없었다. 들은 것이라고는 평범한 무림인들 수준이었다. 사파의 대종사라거나 혼천교(魂天敎)를 이끄는 교주라거나, 때로는 손을 뒤집으면 산이 무너질 무공을 지녔다거나. 어쨌든 별다른 정보는 없었다.

“혼군이라? 왜?”

“그게 말이죠, 소문주님의 무공에서 혼군의 기운을 느꼈습니다.”

주석하의 눈이 예리하게 혈혼도객을 훑었다.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은데…….

“무슨 말이지?”

“방금 소문주님이 끌어올린 기운이 혼군의 기운과 유사합니다.”

“자네가 어찌 알아?”

“제가 혼천교에 입문했거든요. 그곳에서 무공을 익혀서 조금 압니다.”

혈혼도객이 머리를 조아리며 열심히 설명했다.

혼군이 혼천교의 교주이니 혈혼도객이 혼천교의 무공을 익힌 게 정말이라면 그의 말도 진실일 가능성이 농후했다.

문득 주석하는 ‘혼(魂)’자에 주목했다. 혼군, 혈혼도객, 경혼심법……. 이들은 무슨 연관이 있는 걸까. 자신의 단전에 잠재한 다섯 기운 가운데 한 기운이 혼군에게서 유래한 걸까.

주석하는 점점 잊혀 가는 기억을 떠올렸다.

마교에서 절벽 아래로 떨어졌을 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기억이 없었다. 다만 끔찍한 고통과 함께 뇌군이라는 말을 들었던 느낌뿐.

지금 생각해보니 뇌군이란 흑도팔군을 지칭하는 말 같기도 했다. 흑도팔군에 뇌군이라는 인물이 있으니. 만일 뇌군이 그의 체내에 숨은 이상한 내력과 정말 연관되어 있다면 혼군도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

주석하는 흐릿한 실마리를 잡았으나 금세 고개를 저었다. 급하지 않으니 천천히 알아보면 될 일이다.

“난 혼군을 만난 적이 없어. 혼천교랑도 전혀 관계없고.”

주석하는 피식 웃으며 연무장을 떠났다.

홀로 남은 혈혼도객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안면을 찌푸렸다.

“맞는 거 같은데…….”

**

주석하는 백화루를 하루에 한 번씩 들렀다.

흑검문이 맡은 이권 때문이었으나 사실 다른 문제도 있었다.

백화루 정문에서 바라보는 전각과 별채 건물은 웅장했다. 이 백화루가 하루에 얼마씩 벌어주는지 알게 된 이후로 그의 백화루 사랑은 더욱 깊어졌다.

이번 생을 다시 살면서 그의 목표는 남에게 휘둘리지 않고 목을 세우고 사는 삶이었다. 처음에는 이 백화루의 뒤를 봐줄 정도라면 괜찮지 않나 하는 생각을 했었다. 그런데 이 백화루가 벌어들이는 수익을 알게 된 후 그의 목표가 바뀌었다.

이런 주루를 소유하면 평생 아무 걱정 없이 놀고먹을 수 있었다. 흑검문을 이끌며 정파와 싸우고 여러 이권 다툼에 개입하는 것보다 백화루 한 채가 훨씬 값져 보였다. 아무런 걱정 없는 삶을 그 누가 마다할 것인가.

“이런 백화루를 서너 채만 갖고 있다면…….”

슬슬 그의 욕심이 커졌다. 덕양뿐만 아니라 성도에도 이런 크기의 주루를 하나 꿰차고 인근의 다른 큰 마을에도 하나 더 마련한다면 설사 한 곳이 망하더라도 전혀 문제없을 것이다.

“그래, 자고로 인생의 목표라면 이 정도는 돼야지. 조물주 위에 백화루주지!”

무림인에게 삶의 목표를 묻는다면 대답은 한결같다. 무림 고수라거나 한 문파의 문주라거나. 때로는 무림맹주라고 대답하는 이도 무수히 많다. 하지만 주석하처럼 커다란 주루의 실소유자라는 목표를 세우지는 않는다.

남들이 뭐라 하든 본인이 좋으면 그뿐 아닌가. 주석하는 인생의 목표를 다시 설정하고 흐뭇한 기분에 잠겼다.

그의 눈에 백화루로 들어가는 세 사람이 발견됐다. 한 사람은 백호문의 부문주라는 선우청이란 사람이고 다른 한 사람은 백호문의 책사인 현현자였다. 다른 한 사람은 그도 처음 보는 자였다.

원래 백화루는 적혈방이 관리했기에 정파 인물이 들르는 경우가 흔치 않았다. 최근에 흑검문과 지역 정파 사이에 다툼이 일면서 그런 경향이 더욱 심해졌다.

그런데 갑자기 정파인이 오다니? 뭔가 심상치 않은 기분을 감지한 주석하는 조용히 백화루 안으로 들어갔다.

역시 입구에서 총관이 그에게 말을 걸어왔다.

“백호문 부문주께서 부르십니다.”

과연 그에게 볼일이 있어서 온 것이다. 오라면 가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이곳은 흑검문이 책임진 구역이니 괜히 소란을 떨어봐야 좋을 일이 없다. 곤륜십이검수가 죽은 후로 최근까지 잠잠했던 백호문이었기에 갑자기 그를 찾는 이유가 궁금했다.

한가한 이 층으로 올라가니 선우청을 비롯한 세 사람이 탁자에 앉아 대낮부터 술을 마시고 있었다.

“불렀습니까?”

주석하는 다소 퉁명스럽게 물었다.

“아, 흑검문 소공자! 앉으시지요.”

현현자가 미소를 띤 얼굴로 맞은편 좌석을 가리켰다. 물론 저 미소는 영업용 미소라 호의로 착각하면 곤란하다는 정도는 주석하도 안다.

“무슨 일입니까?”

적과 자리를 오래 할 마음은 없는지라 주석하는 앉자마자 물었다.

“혹시…… 흑검문에서 최근에 빈객을 받아들였습니까?”

“그런데요?”

혈혼도객을 떠올리며 주석하는 이들의 안색을 살폈다. 문파에서 빈객을 들이는 일은 드물지 않으니 굳이 이들이 시비를 걸 사안이 아니다. 백호문에서도 일전에 정천신검을 빈객으로 들이지 않았던가.

“혈혼도객이란 자이지요?”

현현자가 정확하게 별호를 언급했다. 주석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소문에 의하면 그자가…… 백호광객과 소화자를 비롯하여 백호문 제자 일부를 죽였다는 설이 있습니다만.”

혈혼도객이? 생각지도 못한 언급에 주석하는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이들은 모르지만 그는 방금 이들이 언급한 사람들 일부가 죽는 현장을 직접 목격했다. 당연히 혈혼도객과 관련이 없었다.

“혈혼도객이 그만큼 고수였습니까?”

전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주석하가 되물었다.

정곡을 찔린 현현자가 한바탕 기침을 일삼더니 짧게 반박했다.

“흠흠, 그건 모르는 일입니다. 꼭 고수라야 가능한 일은 아니지요. 예를 들면 독을 쓴다거나…….”

“혈혼도객이 독을 씁니까?”

“흑도인은 속을 알 수 없지요. 누가 압니까?”

애초에 정과 사라는 벽을 단단히 세우고 있으니 이들과의 대화는 의미가 없었다. 더는 실랑이를 벌이고 싶지 않았던 주석하는 말문을 닫았다.

현현자가 내심을 눈치 채고 다시 도발해왔다.

“그러니 혈혼도객의 신병을 우리에게 넘겨주시지요.”

정중히 권하고 있으나 절대 들어줄 수 없는 무리한 요구였다. 대꾸도 하지 않자 현현자가 재차 요구했다.

“죄가 없다면 거절할 이유가 없을 겁니다. 우리는 단지 의심스러운 부분을 조사할 뿐이니까요. 혈혼도객에게 잘못이 없다면 금방 풀려나겠지요. 우리도 고집스럽게 놈을 잡고 있을 이유가 없습니다.”얼핏 들으면 흑검문이나 혈혼도객을 충분히 배려한 것처럼 들리기도 한다. 하지만 그 속에 숨은 의도를 완전히 숨길 수는 없었다. 어차피 증거가 없으니 죄는 덮어씌우면 될 일이다. 이들은 그러고도 남을 인물이니.

전생에서 강호를 구르는 동안 주석하는 정파와 사파의 대립을 수없이 겪었고 일선에서 직접 싸우기도 했다. 나중에는 정사 연합에 속해 마교의 칼받이가 되기도 했고. 그 와중에 겪은 정파의 속성을 그는 지겹도록 경험했다.

그렇다 보니 눈앞에 있는 현현자와 그 일당의 속셈을 훤히 꿰뚫을 수 있었다.

이 정도 참았으면 충분히 예의를 갖춘 건가? 애당초 그럴 필요도 없는 자들이었으나 충분히 참았다고 생각한 주석하는 반격에 나섰다.

“그런데 당신은 누구요?”

주석하의 시선이 처음 보는 자를 향했다.

현현자를 중심으로 왼쪽에는 선우청이, 오른쪽 인물은 그도 모르는 자였다.

오른쪽 인물이 고개를 뻣뻣하게 세우며 그제야 자신을 밝혔다.

“난 검우방주 진소량이요.”

검우방은 덕양의 정파 가운데 상당한 세력을 가진 곳이었다. 백호문과 흑검문이 패권을 놓고 시비를 벌이는 동안 조용하다 했더니 드디어 전면에 나선 모양이다. 진소량은 사십 대의 장한으로 대단한 고수라고 소문나 있었다.

“아, 검우방주?”

주석하의 반응이 삐딱했다. 이 자리에 나왔다는 것은 그의 적이란 뜻이니 굳이 이 판국에 예의를 차려 어디에 쓸 것인가.

“나는 흑검문에서 순순히 혈혼도객을 넘겨주길 바라고 있소.”

대충 이들의 계략을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흑검문이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제안을 던져놓고 거부할 시 전면전을 벌이려는 건가.

예전 같으면 문주에게 전하겠다고 대답하고 파했을 자리이고 이들도 오늘은 그런 정도로 끝낼 생각으로 나왔겠지만…….

이제는 약간의 시간만 주어지면 내력을 끌어올릴 수 있게 된 주석하에게 무서운 사람은 없었다. 괜히 이들이 불만을 품고 백호사협처럼 습격을 일삼으면 더 골치 아파진다.

“호오, 검우방까지? 백호문에 창무관에 검우방? 덕양의 정파가 전부 모였네?”

“이놈이!”

검우방주가 주먹으로 탁자를 쿵 치자 탁자 위의 술병이 쓰러졌다. 탁자가 부서지지 않은 것만으로도 천만다행이었다.

“쯧쯧, 아직 젊은데 힘이 딸려?”

주석하의 빈정거림에 싸늘한 한기가 내려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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