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화 음모와 계략 (1)
“무식한 놈!”
선우청과 진소량의 분노가 폭발하는 가운데 주석하는 현현자의 입가에 감도는 야릇한 미소를 확인했다. 저들이 의도한 대로 흘러간다는 뜻이다.
물론 주석하도 이를 노리고 있었기에 오히려 더 도발을 감행했다.
“이미 망가진 백호문은 고려 대상이 아니고…… 검우방이라…… 잠잠하던 검우방이 돈 냄새를 맡았나 본데…….”
쾅!
진소량이 탁자에 손바닥을 강하게 내리쳤다.
저 정도로 세게 내리쳤다면 당연히 탁자가 부서져야 하는데 신기하게도 탁자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내력으로 지탱하고 있었나?
정작 더 놀라운 현상이 다음에 일어났다.
치이이익-
탁자에 놓인 진소량의 오른손바닥 주위로 시커먼 연기가 피어올랐다. 동시에 탁자에서 타는 냄새가 진동했다.
극양의 신공이었다.
주석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놀라는 척했다.
솔직히 진소량이 지금 보이는 신기가 놀랍긴 했다. 적어도 상당한 수준의 극양신공을 익히지 않았다면 흉내조차 낼 수 없는 그런 장면이었다. 게다가 평범한 내공이라면 절대 탁자에 손바닥을 저런 식으로 찍을 수 없다. 덕양에 이만한 고수가 있었다니 놀라울 따름이다.
진소량이 분노해서 탁자에 수인을 찍는 장면은 주석하를 위협하려는 행동이다.
그들의 이런 수작질 뒤에는 뭔가 요구 조건이 있는 법이다.
흥분한 듯 보이는 진소량과 달리 현현자는 느긋하게 주석하를 관찰하며 입을 열었다.
“주 공자, 검우방주의 무공이 어떻습니까?”
“호오! 겨울철 토란 뿌리 굽기에 딱이야.”
“뭣이라?”
진소량이 버럭 소리치며 길길이 날뛰었다. 조금 전 분노한 표정이 연기였다면 이번은 진짜였다.
“흑검문과 사생결단을 내겠다!”
진소량이 주석하를 향해 주먹을 날리려는 순간 현현자가 재빨리 만류했다.
“주 공자, 이번 발언은 아무래도 흑검문이 선을 넘으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중재하지요. 양쪽에서 대표자들이 출전해서 사생결단을 내면 어떻습니까?”이들이 노리는 것이 바로 이것이었나 보다. 못 받을 건 없다.
“사생결단? 좋지, 넌 사(死)! 난 생(生)!”
안면이 일그러진 현현자가 가까스로 분을 삭였다.
“흑검문과 우리 정파 연합에서 최강자를 앞세워 겨뤄보지요. 이기는 쪽이 덕양의 모든 이권을 갖고 지는 쪽은 문파를 봉문하기로 말입니다.”
봉문? 주석하는 저들이 원하는 바를 이해했다. 현재 흑검문이 기존 흑도 문파의 이권을 그대로 물려받는 바람에 전체의 절반 이상을 거머쥐었다. 이것을 큰 희생 없이 빼앗고 싶은 것이다.
가장 잡음을 줄이는 방법은 역시 실력대결이고 문파를 대표하는 강자의 대결로 승패를 가리면 전력 손실도 입지 않는다. 또 군말 없이 흑검문을 지우는 방법은 역시 봉문이 최고였다.
“오호! 몇 명이나?”
“우리는 강자가 모래알처럼 많으니 편하신 대로 하시죠. 단 용의자인 혈혼도객은 반드시 참여해야 합니다.”
흑검문에 비해 정파 연합이 월등히 고수가 많다. 양쪽에서 한 명씩 출전한다면 혈혼도객이 반드시 나서야 하니 눈앞의 검우방주만 하더라도 혈혼도객을 충분히 이긴다.
양쪽에서 둘씩 출전하면 승패가 가려지지 않으니 하나 아니면 셋이어야 하는데 흑검문에서 알려진 고수라면 소문주인 주석하가 유일했다. 즉 정파 연합에서는 한 명으로 대결하든 세 명으로 대결하든 패배할 일이 전혀 없다.
실로 교묘한 제안이었다.
주석하는 고민에 잠기는 척하다가 순순히 수락했다.
“좋아! 양쪽에서 세 명씩 출전해서 승부를 겨뤄보자고. 진 쪽이 봉문하고? 앞으로 오 년간 덕양에서 정파가 사라지겠네.”
“그렇게 하지요. 우리 정파 연합은 절대 패배하지 않습니다.”
현현자가 웃음을 머금고 동의했다. 주석하가 미끼를 물었다는 생각에 기쁨을 참지 못하는 표정이었다.
정작 주석하는 그런 모습에 내심 흐뭇하게 웃었다. 이번 기회를 잘 이용하면 덕양의 패권을 순식간에 거머쥐게 된다. 적어도 오 년간은 정파 때문에 골머리를 앓지 않아도 된다. 오 년이 지나면 봉문했던 정파와 달리 흑검문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앞서 있을 테니 미래를 걱정할 이유는 없다.
“그럼 언제 대결하면 좋겠습니까?”
이미 다 이긴 듯 현현자를 비롯한 세 사람의 표정은 여유로웠다.
“너희들 손보는 거야 빠를수록 좋지.”
별 신경 쓰지 않는 주석하의 대답에 현현자는 진소량과 눈빛을 교환했다. 이미 자포자기한 것처럼 들렸기 때문이다.
“보름 뒤로 하지요.”
대화를 마치자마자 세 사람이 일어나서 밖으로 나갔다.
탁자 위에는 그들이 먹다 남긴 술과 요리가 잔뜩 놓여 있었다.
“저것들…… 돈은 내고 가는 거지?”
주석하는 그들이 돈 내려고 점소이를 부르는 것을 보고 나서야 다시 탁자로 시선을 돌렸다. 어쨌든 남은 음식은 그의 차지다. 마침 술이 고팠는데 잘 됐다.
술을 한잔 마시며 탁자를 보니 진소량이 남긴 수인이 선명하게 박혀 있었다. 나무 탁자의 일부가 손 형상을 따라 움푹 파였고 마치 불에 거슬린 것처럼 검게 변해 있었다.
“얘들아! 탁자값도 받아라!”
이번 대결에서 진소량은 반드시 출전할 것이니 그놈을 누가 상대해야 하나. 주석하의 고민이 깊어졌다.
**
주석하가 현현자와 합의한 내용을 보고했을 때 흑검문은 난리가 따로 없었다.
흑검문의 실력과 정파 연합의 실력을 낱낱이 알고 있는 흑검자는 걱정이 태산이었다.
“소문주님, 이거…… 문파의 존망이 걸린 대형 사고인데요?”
“사고라뇨?”
“우리가 이길 것 같습니까?”
“당연히 이기죠.”
주석하는 천연덕스럽게 대꾸했다.
“끙!”
옆에서 주격과 신옹의 신음이 들려왔다. 모두가 절대 승리할 수 없다는 표정이다.
“소문주님, 그게 말입니다. 저들이 출전할 세 사람은…… 검우방주 진소량과 백호문 부문주에 다른 한 사람이 붙을 겁니다. 그 한 사람은 우리처럼 빈객이 될 수도 있고요. 빈객이 아니라면 아마도 창무관의 관장 정도겠죠.”
“그럴듯하네요?”
“그렇죠? 그런데 우리는 누가 있습니까? 규정에 따르면 빈객인 혈혼도객은 반드시 나가야 하고요, 다른 사람은…….”
“내가 가죠. 그리고 여기, 도수까지.”
주석하는 도수의 손을 들어줬다.
“난 왜?”
“뺄까?”
“아니! 흥분돼!”
흑검자가 바로 한숨을 내쉬었다.
“상대가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주격 역시 상황을 인지한 듯 그리 표정이 밝지 않았다.
물론 주석하는 백호문 부문주와 창무관장의 무공 수위를 전혀 모른다. 또 검우방주도 수인 찍는 모습을 본 게 전부다.
“소문주님, 검우방주는 대단한 인물이에요. 이곳 덕양에 있을 그런 수준이 아닙니다.”
“덕양 밖이라고 좋을 것도 없어요.”
“그런 말이 아니라…….”
무심코 대답하던 흑검자가 화들짝 놀라 주석하의 눈치를 봤다. 내심은 절대 이기지 못한다고 생각하지만 주석하를 함부로 평가하다가 심기를 거슬리면 여기에서 쫓겨날지도 모른다. 옆의 주격의 눈치를 보니 주격 역시 조금 불쾌한 눈빛이었다.
흑검자는 재빨리 평가를 수정했다.
“당연히 소문주님께서 이기겠지만 나머지 두 사람이 문제 아닙니까? 나머지 두 사람 중에서 적어도 한 사람은 이겨야 하는데…… 그게 쉽지 않습니다.”혈혼도객의 무공은 제법 강하다. 문제는 적이 그 사실을 꿰뚫고 있다는 점이다. 그들은 당연히 혈혼도객을 이길 자를 붙일 것이다. 백호문 부문주보다는 빈객을 고르겠지.
“전 저들이 무림 고수를 초빙하리라 봅니다. 최소한 혈혼도객을 이길 사람으로 말입니다.”
흑검자의 예상은 확실히 타당했다.
그렇다면 도수와 백호문 부문주의 대결이 문제다. 비록 도수가 놀라운 실력의 자객이라지만 백호문 부문주를 정면에서 상대할 능력은 없다. 암습이 아닌 정면대결에서는 도수가 자신의 장기를 발휘할 여지가 완전히 사라진다.
그렇다고 출전할 마땅한 사람이 있지도 않다. 문주인 주격은 도수보다도 무공이 떨어지니까.
“끙!”
판세를 읽은 신옹이 신음을 터트렸고 주격 또한 안면에 먹구름이 깔렸다.
정작 주석하는 미소를 머금고 모두를 안심시켰다.
“나를 믿으세요. 믿으면 밥이 떨어집니…… 하여튼 걱정 붙들어 매시죠.”
“소문주…….”
만류하던 흑검자가 주석하의 경고 어린 눈빛에 바로 입을 다물었다.
주석하는 미소를 머금고 주격에게 동의를 구했다.
“아버지, 제가 맡아서 처리해도 되겠지요?”
“당연하지. 그렇게 하거라. 누구 아들인데.”
평소처럼 주격의 신뢰는 굳건했다.
원군의 도움으로 기세를 올린 주석하는 흑검자에게 할 일을 지시했다.
“흑검자, 당신은 지금부터 출전명단을 교환하세요. 나와 도수, 혈혼도객. 우리 측의 명단을 주고 적의 명단을 확보하는 일이 가장 중요합니다.”
주석하의 명령을 받는 순간 흑검자는 다소 혼란에 빠졌다. 아무리 고민해 봐도 뾰족한 수가 생각나지 않지만 소문주는 뭔가 대책이 있나 보다.
할 말을 마무리한 주석하는 도수를 끌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자! 수!”
**
열흘 후, 주석하는 도수와 혈혼도객을 붙잡고 청하루에서 술을 마셨다.
청하루는 백호문에서 관리하는 주루로 그 규모는 백화루의 절반가량 되었다. 예전이라면 주석하는 정파가 관리하는 업소에 출입하지 않았었다. 괜히 흑도 소공자회에서 시비의 빌미가 되었기 때문이다.
“여기도 좋네.”
그렇다 보니 이곳 청하루는 처음이었다.
도수가 주변을 조심스럽게 훑어보며 중얼거렸다.
“우리가 여기 와도 되냐? 하얀 벌판에 까만 점이 셋 박혔어!”
“눈에 띄라고 온 거지.”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손님과 달리 그들은 제대로 눈에 띄었다. 세 사람 모두 시커먼 옷을 입고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혈혼도객은 피부마저 시커머니……. 누가 봐도 흑검문 사람이라는 게 바로 표가 났다.
“정말 얻어터져서 돌아가는 거 아냐?”
“그러면 더 좋고.”
“크흠!”
혈혼도객이 나지막이 신음을 터트렸다.
오늘 이곳에 오면서 주석하는 모두에게 주문했었다. 오늘 돌아가기 전까지 시비가 붙어야 하고 특히 혈혼도객은 반드시 다쳐야 한다고.
닷새 후에는 흑검문 대표로 출전해야 하기에 아무도 그 의도를 이해하지 못했으나 주석하는 세세하게 설명하지 않았다.
상대를 자극해서 패는 것도 아니고 반대로 얻어터지라니 혈혼도객은 내내 심기가 불편했다. 두들겨 맞는 일이 즐거울 리 없다.
‘젠장! 네가 당해봐!’
혈혼도객은 슬그머니 주석하를 째려보다가 눈이 마주치자 바로 시선을 돌렸다. 어쨌든 그날 도가 부러진 이후로 그는 주석하 앞에서 완전히 꼬리를 내려야 했다. 오늘 살신성인의 희생을 거부하지 못하고 받아들인 이유이기도 했다.
“자! 한잔하죠.”
세 사람은 잔을 부딪치며 분위기를 올렸다. 술을 많이 마실수록 목적을 달성하기 쉬우니 점점 빈 술병이 탁자에 쌓였다.
자연스럽게 그들의 대화는 닷새 남은 비무 대결로 돌아갔다.
“정파에선 누가 나오지?”
“흑검자가 통보받기로는 검우방주, 백호문 부문주, 거기에 최근 창무관 빈객으로 들어온 무정신협.”
“무정신협?”
“내가 아는 자일세.”
도수의 의문을 혈혼도객이 바로 풀었다. 마침 혈혼도객은 예전에 강호를 전전하다가 무정신협(無情新俠)을 만난 적이 있었다. 물론 둘이 대결한 적은 없었다.
“흐음, 그러니까 무정신협의 무위는 당신과 차이가 없을 정도란 거지?”
“그렇습니다.”
고개를 끄덕이던 혈혼도객이 눈치를 보다가 바로 정정했다.
“아니, 요만큼 차이가 나지요.”
재차 주석하가 눈을 부라리자 혈혼도객은 손톱을 내밀었다가 팔뚝을 가리켰다.
차이가 없는 게 아니라 혈혼도객보다 확실하게 위인 자다. 서로 명단이 통보된 상황에서, 그것도 이쪽의 출전선수가 뻔하니 승패가 모호한 인물을 넣었을 리 없다. 그것도 문파의 존망이 걸린 비무에서.
적어도 무정신협은 혈혼도객보다 몇 초식은 더 뛰어난 고수다.
주석하의 타박에 혈혼도객은 맹물을 들이켜며 기침만 연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