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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검천하-33화 (33/273)

33화 음모와 계략 (2)

겉으로 보기에 이번 대결은 흑검문의 필패로 예상됐다.

주석하와 진소량의 대결 승패는 접어두더라도 도수와 선우청의 대결은 정당한 대결이라면 도수의 필패였고 혈혼도객과 무정신협 또한 승리와 거리가 멀었다. 세 명 모두 지느냐 아니면 둘이 지느냐의 문제일 뿐이다.

정파에서도 이런 상황을 알고 과감하게 대결을 제안했을 것이다.

“끙.”

도수와 혈혼도객 두 사람의 입에서 동시에 신음에 새어 나왔다. 정작 주석하는 느긋했다. 이제부터 상황을 반전시켜야 하니까.

“자, 술! 술!”

주석하는 다시 술을 따랐다. 적당히 술에 취해야 적들이 만만하게 보는 법이다.

술을 마시는 도중에 혈혼도객이 일부러 한바탕 소란을 일으켰다. 어이없는 소란이었으나 이들이 누구인지 짐작한 주인은 공짜 술을 제공했다. 덕분에 그들은 더 많은 술을 마실 수 있었다.

중간에 주석하는 백호문 제자로 보이는 이들이 발 빠르게 움직이는 것을 곁눈질했다. 이 정도면 충분히 미끼를 던진 셈인가.

**

청하루의 위치는 덕양 중심가가 아니었다. 마을 중심에서 다소 떨어진 변두리에 있었다.

주석하 일행이 자리를 파했을 때는 이미 밤이 이슥한 시점이었다. 오랜만에 즐겁게 마시다 보니 시간 가는 줄 몰랐다. 물론 이 장소와 시간은 주석하의 의도였다.

“세상은 고요하고, 님은 없고…….”

뜻 모를 신세 한탄을 주절대며 주석하는 도수와 어깨동무를 하고 걸음을 옮겼다. 두 사람이 휘청거리는 장면은 영락없는 취객이었다.

그들의 뒤를 혈혼도객 또한 휘청거리며 따라갔다.

청하루에서 벌였던 소란이 약했던 탓인지 주석하가 기대했던 적의 반응은 없었다.

‘이러면 실망인데…….’

이곳에서 흑검문까지는 거리가 제법 된다. 중간에 인적이 없는 논두렁길도 있어 적이 기습할 딱 좋은 환경이다.

하늘은 어둡고 인가도 사라져 주변이 적막했다. 그들 또한 흑의를 걸쳤으니 흡사 도둑이 떼 지어 움직이는 장면을 연상케 했다.

“도수야, 지금이 너에게 딱 맞는 시간이다. 그지?”

“뭐가?”

“너 평소 야밤에 많이 움직였을 거 아냐?”

혈혼도객이 끼어들었다.

“도수에게 여자가 있었나요?”

주석하는 혈혼도객의 뒤통수를 갈겼다.

그제야 잠입이나 암습을 떠올린 도수가 피식 웃었다.

“크크크, 밤에만 움직이는 건 아니지. 그건 하수라고. 고수는 달라.”

“하긴 색마는 낮과 밤을 가리지 않지요.”

눈치를 보며 혈혼도객이 바로 정정했다.

뜨악하던 도수가 묘한 웃음을 떠올렸다. 암습에 도가 튼 도수가 볼 때 어둠은 단지 하나의 조건일 뿐이다. 중요한 다른 조건도 잘 맞아 떨어져야 한다. 가장 중요한 요건은 절대 실패하지 않는다는 확신이다. 적어도 지금처럼 적을 유인하는 경우라면 그런 확신을 심어주어야 한다.

논두렁이 끝날 때쯤 갑자기 도수가 주저앉더니 왝왝거리면서 토하기 시작했다. 논두렁에서 숲으로 접어드는 지점이었다.

당연히 주석하는 구시렁대면서 옆에 주저앉아 등을 툭툭 쳤다.

“그러게 적당히 마시라니까…….”

도수가 괴로운 듯 컥컥거리면서 뒤로 손을 흔들었다. 혈혼도객에게 다가와 보라는 손짓이다.

혈혼도객은 안면을 일그러트렸다. 무림인이 저렇게 과음하다니. 강호에서 저러다가는 목숨을 잃기 십상이다. 이곳 덕양과 달리 강호는 야수들이 날뛰는 전쟁터니까.

혈혼도객은 휘청거리면서 도수에게 다가갔다. 물론 그도 오늘 술을 다소 과하게 마시긴 했다. 무공이 강해서 실제로는 취하지 않았으나 오늘은 주석하의 언질로 취한 척했다.

도수와 주석하의 뒤에서 몸을 숙이는 순간 혈혼도객은 심상찮은 살기를 느꼈다. 갑자기 뒤에서 엄습하는 예리한 기운에 노출됐다.

칼이 날아오면 본능적으로 몸을 피하게 된다. 사전에 이런 상황을 인지하고 있었다고 해도 본능을 완전히 떨쳐 버릴 수는 없다.

혈혼도객은 그 본능을 이기려고 애썼다. 주석하를 믿지 않았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푹-

“크윽!”

등을 파고드는 칼날을 느끼면서 혈혼도객은 앞으로 꼬꾸라졌다.

그의 비명에 도수와 주석하가 뒤로 돌았다. 다만 그들은 앞으로 쪼그리고 있었던데다 술에 취한 상태라 민첩하지 않았다.

그사이 다시 한 번 검이 혈혼도객의 등을 꿰뚫었다.

“으윽!”

혈혼도객은 신음을 지르면서 그대로 엎어졌다.

‘하아! 왜 하필이면 나냐고!’

주석하는 소리를 지르고 도수가 검을 들었다.

“누구냐!”

어둠 속에서 다가오는 십여 명이 인물이 보였다. 누구인지 전혀 짐작이 가지 않도록 철저하게 위장했으나 주석하는 금방 알아챘다. 저들은 백호문이거나 아니면 정파 연합에서 그들을 노리고 보낸 자객이었다.

“죽어라!”

십여 명의 자객이 한꺼번에 달려들었다.

주석하와 도수의 반응은 예상외로 빨랐다. 술에 취했다고 믿어지지 않을 만큼 검을 휘둘렀고 자객은 그들에게 치명상을 입히지 못했다.

몇 차례 검을 주고받던 자객들이 어렵다고 느꼈던지 눈빛을 교환하고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논두렁에는 헉헉대는 두 사람과 쓰러진 혈혼도객만이 남았다.

“으으, 갔습니까?”

혈혼도객이 반듯하게 드러누운 채 신음을 토해냈다.

주석하가 혈혼도객을 일으켰다.

“갔어. 고생했다.”

“크흐흐흑! 아이고, 죽겠습니다.”

혈혼도객의 등은 피로 얼룩져 있었다. 기습당한 두 번의 칼침은 그의 몸을 적잖게 파고들었다. 목숨까지는 아니더라도 회복하려면 몇 달 걸릴 중상이었다.

주석하의 사전 언질이 없었다면 절대 이런 식으로 무방비하게 등을 내주지 않았을 것이다. 다만 적의 기습은 미리 짐작하고 있지 않았더라면 쉽게 피할 수 없을 만큼 빨랐다. 특히 술에 취한 상태였다면 무사하기 어려울 노련한 솜씨였다.

“하, 씨불! 앞으로 다시는 안 해요! 안 해!”

혈혼도객은 주저앉은 상태로 고통을 참았다. 꽤 심각한 상처에 대충 지혈을 마친 주석하는 등을 툭툭 두드리며 달랬다.

“대결 전날까지 내가 원상회복해 줄 테니 걱정하지 마.”

말이 되는 소리인가? 혈혼도객은 발끈하려다 금방 의문을 지웠다. 회복하지 못해도 상관없었다. 비무 대결에 출전하지 않으면 오히려 잘된 일 아닌가. 그는 이곳의 빈객이니 솔직히 문파의 생사에 별 관심이 없었다.

소문주의 명으로 칼을 대신 맞아주었으니 그것만으로도 할 일을 다 한 셈이다.

“수! 가자. 부축해라.”

“아아아! 꼭 힘든 일은 나만 시켜.”

도수가 불만을 터트리며 혈혼도객의 등을 툭 쳤다.

“가자! 도객!”

“크윽!”

혈혼도객은 고통에 몸을 떨었다.

**

백호문에 정파인들 몇이 모였다.

현현자를 비롯하여 선우청이 주도했고 검우방주인 진소량과 창무관장까지 참석했다. 당연히 그들의 관심은 이틀 앞으로 다가온 흑검문과의 비무 대결이었다.

현현자가 문서 하나를 꺼내 모두에게 공개했다.

“흑검문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혈혼도객이 다쳐 출전선수를 교체해도 되느냐는 문의입니다. 어떻게 할까요?”

모두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감돌았다. 말을 꺼내지 않지만 혈혼도객을 야밤에 기습한 사건을 누가 주도했는지 아는 까닭이다.

검우방주가 껄껄대며 웃었다.

“푸하하, 그 자식들은 정신 상태가 걸러 먹었소. 중요한 비무를 앞두고 술이나 처먹고 다니다니! 그러니 당연히 사고가 나는 것 아니오? 애초에 술을 안 마셨거나 아예 무공이 엄청 뛰어났다면 그런 사고도 없었겠지.”

“그렇습니다. 자격 미달이지요. 사실 그런 놈들이 비무에 출전해봤자 결과는 뻔했습니다.”

“으하하, 흑검문의 봉문이 눈에 훤히 보이는군요.”

저마다 한마디씩 늘어놓았다. 모두 다가올 승리를 자축하고 있었다. 어차피 흑검문에는 혈혼도객을 대체할 고수가 없다. 간신히 죽음을 면한 혈혼도객이 출전할 수도 없고 또 출전해봐야 부상이 심각해서 힘을 쓰지 못할 것이다.

“그래도 답신해야지요. 교체 불가라고 보내면 되겠습니까?”

현현자가 미소를 지으며 재차 확인했다.

“당연하지요. 이왕 이길 거라면 확실하게 밟아야죠. 선수 교체는 절대 불가. 출전 명단을 교환할 때 이미 언급한 바 있지 않습니까? 굳이 상대를 봐줄 필요는 없는 게지요.”혈혼도객이 정상이었더라도 그들의 적수가 아니라고 판단했었다. 그런데 마침 적절한 시기에 치명상을 입었다니. 다친 혈혼도객을 누가 상대하더라도 쉽게 이길 수 있을 것이다.

“남은 도수와 주석하는 별것 아닙니다. 일전에 주석하가 보인 신위가 문제라지만 검우방주께서 충분히 대적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설사 주석하에게 일 패를 하더라도 도수만 해치우면 우리가 이깁니다.”

“이보게, 현현자! 내가 질 거로 생각하나?”

진소량이 흉흉한 기세를 불태웠다.

현현자는 찔끔 몸을 움츠리며 재빨리 고개를 숙였다.

“그, 그게 아니고요. 만일, 만일이지요. 그날 청하루에서 대협의 수인에 토끼 눈이 된 주석하를 보지 않으셨습니까?”

“하하하! 그렇소.”

좌중의 인물들이 모두 대소를 터트렸다.

여러 변수를 고려해 봐도 그들이 패배할 일은 전혀 없었다. 저쪽은 악재가 겹쳤고 이쪽은 사기가 하늘을 찔렀다. 남은 결과는 흑검문의 봉문뿐이다. 어떤 경우라도 이 결과는 바뀌지 않을 것이다.

“대협, 그래도 조심하셔야 합니다. 오늘 교체 불가라고 통보하면 우리도 교체할 수 없으니까요. 그 자식들이 억하심정으로 달려들지도 모릅니다.”

“우리의…… 무정신협은 어디 있소?”

“모처에서 잘 쉬고 있습니다. 절대 안전합니다. 그날까지 절대 비밀유지! 다치면 안 되니까요. 두 분도 꼭 유념하셔야 합니다.”

현현자가 신신당부했다. 진소량과 선우청은 호탕하게 웃으며 자신감을 불태웠다. 하늘이 두 쪽 나지 않는 한 그들에게 문제가 생길 일은 없었다.

**

흑검문은 적막에 싸여 있었다.

갑작스러운 혈혼도객의 부상은 모두에게 절망을 안겼다. 멀쩡해도 불리한 판에 다치기까지 했으니 실망이 극에 달했다.

더욱 나쁜 소식도 있었다. 정파 연합에서 출전선수의 교체를 불허한다는 연락이었다. 항의해봐도 막무가내였기에 흑검문에서는 한숨을 쉴 수밖에 없었다.

세 판 중에 아예 한 판을 접어주고 승부에 임하게 되었으니 이보다 더 불리할 수는 없었다.

주격은 혈혼도객을 책망하려 했으나 전후 사정을 전해 듣고는 입을 다물었다. 그날 술을 마시자고 주장했던 사람이 아들인 주석하였으니까. 게다가 출전할 선수 세 사람이 술을 마시며 결의를 다지겠다고 하는 바람에 그가 허용했던 일이었으니. 도저히 혈혼도객을 책망할 수 없었다.

정작 혈혼도객은 주격하의 처소에서 평온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소문주님, 괜찮겠습니까?”

“뭐가?”

“교체가 안 된다니 이 상태로 나갈 수밖에 없는데 지금 등이 아파서 사실상 도를 휘두르기 힘듭니다. 전 무조건 질 수밖에 없습니다.”

어떻게든 빠지려는 혈혼도객을 주석하는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바라봤다.

“이봐, 혈혼도객. 내가 그때 말했지? 그 이전까지 정상으로 회복시켜 주겠다고.”

“에이, 그런 말씀 마십시오. 제 등의 상처는 제가 압니다. 절대로 금방 나을 부상이 아닙니다.”

혈혼도객이 그를 믿지 못하는 것도 당연했다.

“당연히 나을 부상이 아니라야 그 자식들이 믿지.”

“그러니까…… 출전 안 하면 안 될까요?”

“뭔 소리야? 지금 고쳐줄까? 가부좌 틀어!”

주석하가 자신의 앞자리를 가리켰다.

혈혼도객이 머뭇거리다가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아무래도 죽일 기세다. 역시 인생은 고행의 연속이다. 그는 여전히 믿지 못해 힐끔힐끔 뒤를 돌아봤다.

주석하는 등을 길게 후벼 판 두 상처를 살피며 물었다.

“예전에 혼군 아래에서 무공을 배웠다고?”

“그렇긴 합니다만, 실제로 직접 사사받은 건 아니고요.”

“내 기운이 혼군과 닮았다며? 즉, 자네 기운과도 닮았다고.”

“크흠, 왜 그러십니까?”

“너만 가짜 아니면 돼. 지금부터 상처를 치료해볼까?”

주석하는 장심을 혈혼도객의 등에 밀착했다.

혈혼도객은 섬뜩한 기분에 몸을 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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