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화 음모와 계략 (3)
혈혼도객의 등에는 검에 찔린 두 자국이 선명했다. 그 상처는 절대 얕지 않았고 자칫 치명적인 후유증을 남길 뻔했다. 물론 그랬기에 적의 눈을 속일 수 있었겠지만, 이 정도로 끝난 것은 혈혼도객의 순간적인 대응이 좋았기 때문일 것이다.
“상처는 어때?”
“아픕니다. 팔을 놀리기 어렵습니다. 이래서야…….”
이런 고난을 감수했으니 혈혼도객의 충성심을 대충 엿볼 수 있었다. 완전히 신뢰하기는 어려울지라도 흑검문의 일원으로 받아들여도 나쁘지 않아 보인다.
“자, 심법을 운용해.”
주석하는 등에 붙인 장심을 통해 미약한 기운을 불어넣어 보았다.
혈혼도객은 주석하의 의도를 알지 못했으나 군말하지 않고 운기를 시작했다. 다시 찢어지는 듯한 고통이 엄습했다. 등에 입은 상처가 워낙 커서 몸을 놀리지 않고 운기만 하더라도 온몸이 떨렸다.
그 와중에 등으로부터 전해지는 미약한 기운이 그에게 웃음을 선사했다.
‘이거 뭐야? 개미만큼도 아닌 이 기운은?’
조금 짜증이 났으나 혈혼도객은 운기를 계속했다. 무엇을 하겠다는 건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한차례 일주천을 마쳤을까. 시간이 흐르면서 등에서 전해지는 내력이 점점 강해졌다.
‘허억!’
이제 그 기운은 혈혼도객 본인의 내공보다 훨씬 많았다. 혈혼도객도 내공 면에서 자부심이 꽤 있는 편이었는데 밀물처럼 밀려드는 기운은 할 말을 잃게 했다.
더구나 그를 경악하게 만든 사실은 따로 있었다. 주석하가 밀어 넣은 기운은 혈혼도객의 내력과 대단히 잘 어울렸다. 마치 태생이 같은 듯 조금의 위화감도 느껴지지 않았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혈혼도객은 일전에 주석하와 무공을 겨뤘던 때를 떠올렸다. 그날 주석하의 기운이 어딘지 모르게 자신과 유사하다는 사실을 발견했었다. 그래서 혼군의 제자가 아니냐고 물었었는데 정말 혼군의 제자였나? 혼천교 문 앞에도 가본 적이 없다고 했었는데?
혈혼도객은 마음이 복잡해졌다. 하지만 그럴 때가 아니었다. 노도처럼 밀려드는 내력이 이제는 그의 내공을 완전히 압도하여 제멋대로 돌아다니고 있었다. 이를 그대로 두면 자칫 주화입마를 맞게 된다.
주석하의 의도는 확실했다. 주석하는 강력한 내공을 이용하여 등에 입은 상처를 치유하려는 것이다. 본래의 내공과는 비교할 수 없는 엄청난 기운이 혈맥을 돌며 치유하고 있으니 등의 상처도 금방 흔적도 없이 아물게 될 것이다.
이런 방식이 가능한 이유는 본신의 내력과 주석하의 내력이 거의 완벽하게 똑같았기 때문이다. 같은 심법이 아니라면 절대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다.
“버텨라!”
‘으윽.’
아직 혈혼도객의 몸이 주석하의 내력을 감당할 상황이 되지 않아 고통이 엄습했다. 하지만 이를 악물고 버텼다. 이 과정이 끝나면 사실상 본래의 몸으로, 아니 그보다 더 튼튼한 몸으로 되돌아가게 될 것이다.
그런 와중에 혈혼도객의 의문은 점점 깊어졌다. 주석하는 어떤 형태로든 혼군과 연관성이 있어야 했다.
**
결전의 날이 밝기 하루 전, 주석하와 도수는 야습을 감행했다.
그들의 목표지는 덕양 인근의 한 장원이었다. 꽃이 만발한 그 장원은 어떤 고관대작의 별장이라는 소문이 있던 곳이었다. 당연히 두 사람은 흑의에 얼굴까지 검은 천으로 완벽하게 가렸다. 겉으로 드러난 부분은 두 눈이 전부였다.
“우씨! 여기 맞냐?”
도수가 뭔가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흑검자가 그렇다고 했어.”
“아아! 그 자식 믿을 수 있어?”
“못 믿으면 어때. 어차피 다른 수는 없잖아?”
주석하는 태연하게 대응하고는 담벼락에 기대고 안으로 들어갈 방법을 살폈다.
과거와 달리 이제는 주석하도 내력을 웬만큼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어서 수월하게 지붕으로 올라갈 수 있게 되었다. 예전에 백호문에 잠입할 때와는 그 실력이 천양지차였다.
“으아! 이 큰 장원에…… 그 대상이 누군지도 모르잖아?”
“대충 보이면 썰자!”
“이건 좀 아닌데?”
“이에는 이! 눈에는 눈! 혈혼도객이 망가진 만큼 딱 갚아줘야지.”
주석하의 허세에 도수는 찌푸린 안면을 펴지 못했다. 완벽하게 상황을 파악한 후 계획을 점검하고 또 점검해서 암습을 시도해도 성공하기 어렵다. 그런데 지금 상황은 도무지 미덥지 못하다. 확실한 것이라면 목표가 무정신협이란 것뿐.
무정신협은 창무관에서 이번 대결을 위해 초빙한 인물로 혈혼도객보다 무공이 더 강한 자로 평가되고 있었다.
“흑검자는 어떻게 알아냈데?”
“그 자식 끄나풀이 덕양에 바글바글해.”
적혈방 때 운용하던 첩자 조직이 이번에도 큰 역할을 했다. 정파 연합에서는 무정신협의 존재를 숨기려고 극도로 비밀을 유지했다. 무정신협은 출전명단에만 올라 있을 뿐 그 존재를 덕양에서 한 번도 내비친 적이 없었다.
혈혼도객의 부상으로 밑밥을 깐 주석하는 백호문 부문주나 무정신협 두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을 기습하기로 했다. 선수 교체가 불가하다고 했으니 그 둘 중 한 사람만이라도 다치게 하면 이번 대결은 이길 가능성이 커진다.
다만 백호문에 잠입하기가 쉽지 않았다. 설사 성공하더라도 흑검문 소행이라고 밝혀지면 낭패다. 반면 무정신협은 그런 문제가 없었다. 단지 그 소재를 정확하게 모를 뿐.
“미치겠네. 생김새는 알아?”
“혈혼도객에게 듣긴 했어.”
유일하게 혈혼도객이 한번 본 적이 있다고 해서 대충 외모를 듣긴 했다. 그런데 워낙 말주변도 없고 묘사도 부족해서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
유일한 특징은 무정신협이 삼십 대의 외모에 머리숱이 매우 적다는 정도. 이 밤에 이것만으로 상대를 구별할 수 있을까.
모든 일은 운에 맡기고 주석하는 작전을 계속 수행했다.
이 고급 장원이 누구 소유인지, 누가 사는지 전혀 모르니 내부부터 탐색해야 한다. 다행스럽게도 이곳은 무림인이 거주하는 곳 같지 않았다. 그렇다면 들키지 않고 많은 곳을 살필 수 있을 것이다.
도수의 조언을 받아 담을 넘어 장원 내부로 들어갔다. 커다란 전각이 모두 셋. 그 주변을 별채와 곁채가 둘러싸고 있었다.
창무관에서 모셔온 귀빈이라면 별채나 곁채에서 머물지 않을 것이기에 주석하와 도수는 중심 전각을 집중적으로 살폈다.
첫 번째 전각에는 이상하게도 아무도 없었다. 깨끗하게 청소된 것으로 보아 버려진 집은 아니었으나 인기척이 전혀 없었다.
“사람이 살고는 있어?”
주석하의 의문에 도수가 조용히 하라는 신호를 보낸 뒤 옆의 다른 전각으로 옮겨갔다.
조심스럽게 발을 내딛는 도수를 주석하가 붙잡았다.
‘왜?’
눈빛으로 반항하는 도수를 멈춰 세운 후 주석하는 조용히 내력을 끌어올렸다. 다소 시간이 걸리긴 했으나 주석하는 충분히 내력을 올린 후 주변으로 기감을 퍼트렸다.
고수들은 주변의 인기척을 쉽게 파악할 수 있다고 했던가. 숨소리와 미세한 움직임으로 존재를 파악할 수 있다고 들었던 기억이 나서 시도해봤다.
명확하지 않았으나 지금 눈앞의 전각 내부에도 살아 있는 생명체는 없다고 판단이 내려졌다.
주석하는 도수에게 내부를 수색해보라고 눈짓했다.
잠시 후 도수가 밖으로 나와 고개를 저었다. 역시 아무도 없다는 뜻이다.
기감으로 인기척을 확인하는 방식이 효과가 있다고 생각한 주석하는 마지막 전각으로 향했다.
예상과 달리 이 전각도 비어 있었다. 전각만 빈 것이 아니라 이 장원 전체에 아무도 살지 않는 듯했다.
“어떻게 된 거야?”
“그러게…….”
이곳에서 무정신협을 찾지 못하면 내일 있을 대결에서 난관에 빠진다. 절대적으로 흑검문이 불리했다. 최악의 경우에는 지금 바로 백호문에 쳐들어가서 부문주 다리라도 부러트려 놓아야 하지만 그게 가능할지…….
현재로는 흑검자의 정보가 잘못되었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이 돌아서서 장원의 담을 넘으려는 순간이었다.
알 수 없는 압력에 주석하는 몸을 멈칫했다.
‘고수다!’
뒤쪽에서 엄청난 기운이 그를 압박했다.
“흐흐, 쥐새끼들이 들어왔구나.”
갑작스러운 경고에 주석하와 도수의 몸이 굳어졌다. 그대로 튈까 말까 고민하는 사이 재차 경고가 날아들었다.
“도망치다 걸리면 다리부터 부러트리겠다!”
정신을 압박하는 날카로운 목소리에 주석하는 심호흡을 내뱉으며 천천히 뒤를 보았다.
어둠 속에 청의를 걸친 장한이 서 있었다. 그를 보는 순간 주석하는 바로 누군지 직감했다. 틀릴 수가 없었다. 그들이 목표했던 무정신협이었다. 이자는 절반쯤 벗은 대머리였다. 이마가…… 엄청 넓었다.
나이가 젊은 사람의 외모치고는 다소 희귀한 경우였기에 주석하는 치솟는 웃음을 간신히 참았다.
“우…… 우리는 도…… 도둑입니다. 그냥 금붙이라도 있을까 하여…….”
주석하는 적당히 변명하면서 상대의 무공을 가늠했다. 등장하는 기척을 제대로 느끼지 못했기에 대단한 고수라고 짐작했다. 역시 혈혼도객보다 한 수 위였다. 그렇다고 마불이나 우설금에 비할 정도는 아니었다. 정천신검 정도의 수준이랄까.
금방 안정을 되찾은 주석하는 도수와 눈빛을 교환했다.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으니 도수와 바로 작전을 주고받았다.
“도둑이라? 도둑이 무공을 익혔단 말이지?”
무정신협이 그들의 무공을 일부 파악한 듯했다. 보통 때와 달리 주석하 또한 단전에 잠자던 내력을 일부 끌어올리다 보니 무공이 일부 간파된 듯했다. 다만 그를 경계하는 기색이 없는 것으로 보아 그의 무공을 경시하고 있음이 확실했다.
“그게 말예요, 요즘은 도둑도 무공을 알아야 목을 세우는 더러운 세상이죠.”
주석하가 주저리 말을 걸었다. 당연히 상대의 경계를 낮추기 위한 술책이다.
“뭔 소리야?”
“요즘은 도둑도 경쟁 시대거든요. 옛날이랑 달라요. 먹고 살기가 얼마나 힘든데…….”
“미친놈!”
“진짜거든요.”
기가 막힌 듯 실소를 머금던 무정신협이 천천히 그들 앞으로 다가왔다.
“그래서 여기는 왜 들어왔다고? 아무도 살지 않는 집을?”
“집이 좋아 보이니까…… 금붙이라도 있을 줄 알았죠. 에이, 버린 집인 줄 알았으면 안 들어왔지……. 그렇지?”
주석하가 도수를 툭 치며 동의를 구했다. 대충 주석하가 눈짓으로 물어본 의사는 이 녀석을 어떻게 요리할까 하는 것이었다. 다리를 부러트릴까? 아니면 몸에 칼빵을 몇 번 줄까?
죽이지만 않고 비무에 나오지 못하도록 상처를 입히면 충분한데…….
“크흐흐, 이 녀석! 말은 잘하는군. 하지만 협사라고 자처하는 나로서는 네놈들을 순순히 보내줄 수 없다. 도둑놈은 제대로 교화해야 하지 않겠나?”
흔한 정파인의 변명처럼 들렸다. 어차피 강하다고 자부하는 놈이니 못할 말이 없겠지. 나쁘지 않았다. 상대가 경계하지 않을수록 더 쉽게 끝낼 수 있다.
“순순히 팔 하나씩만 내놓으면 곱게 보내주마.”
무정신협의 최후통첩이 떨어졌다.
주석하는 덜덜 떠는 체하며 도수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적당히 눈길을 끌며 유인하라는 요구였는데 역시 도수는 금방 알아들었다.
“으으으, 대협! 팔을 내놓으면 우리는 앞으로 어떻게 먹고삽니까? 살려주십시오!”
“뭔 소리야? 얼른 꿇어라!”
무정신협에게서 무시무시한 살기가 폭풍처럼 퍼져 나왔다.
도수가 눈치를 살피며 무릎을 꿇었다. 주석하도 그 옆에서 머뭇거리다가 땅에 엎드렸다.
쿵- 쿵-
위협하려는 듯 진각을 밟으며 무정신협이 다가왔다. 얼핏 느끼기엔 화가 나서 내력을 폭발시킨 것 같지만 실상은 단순한 위협용이다.
원래 호랑이는 쥐 한 마리를 잡더라도 최선을 다하는 법이다. 지금 상황이라면 삼류하수인 도둑을 잡을 때도 경계를 늦추지 말아야 한다. 적어도 지금 무정신협의 태도는 그렇지 않아 보였다.
“이놈들!”
비릿한 조롱과 함께 무정신협이 엎드린 도수의 몸을 한쪽 발로 툭 건드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