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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검천하-35화 (35/273)

35화 음모와 계략 (4)

도수는 엎드린 채 주석하에게 신호를 보냈다.

주석하가 빙그레 웃는 모습을 확인한 도수는 마치 장난꾸러기 같은 웃음을 머금고 열심히 고개를 조아리기 시작했다.

“대…… 대협, 살려주십시오. 앞으로 절대 이곳을 털지 않을게요.”

“뭣이라? 이곳만 아니라 다른 곳에서도 도둑질하면 안 된다.”

“대, 대협! 그럼 저는 어떻게 먹고삽니까? 도둑질하려고 그 힘든 무공도 익혔는데요?”

무정신협은 말문이 막혀 헛기침을 연발했다. 신성한 무공을 도둑질에 써? 어째 이놈들이 자신을 놀리는 것 같기는 한데 묘하게 말이 맞긴 했다. 도둑질하던 놈이 도둑질을 안 하면 뭘 먹고 산단 말인가.

“크흠, 내 말은…… 바르게 살란 뜻이다.”

“살려만 주신다면 명심하겠습니다.”

도수의 항복을 받아낸 무정신협의 시선이 옆에 엎드린 주석하를 향했다. 어째 이놈은 아직도 잘못했다는 말이 없다.

살짝 마음이 상한 무정신협은 이번에는 주석하를 발로 툭툭 건드렸다.

“네놈은 왜 말이 없느냐?”

주석하가 고개를 살짝 들고는 입을 열었다.

“대협, 그게 쉽지 않습니다.”

“뭐가?”

“제가 바르게 살려고 노력해서 작은 주점 한 곳을 등쳐먹고 있는데요…….”

무정신협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이놈이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지 짜증이 난 표정이었다.

“근데 그게…… 다른 놈이 자꾸 찝쩍거리거든요.”

“네놈 거를 딴 놈이 왜 찝쩍대?”

“등쳐먹는 건 나쁜 거니까…… 근데 그 자식도 저를 밀어내고 그 주점을 등쳐먹을 생각이라……. 그 자식 나쁜 놈이죠?”

“크흠, 당연히 나쁜 놈이지.”

“근데 밖으로는 좋은 놈인 척하거든요.”

무정신협의 안색이 싸늘하게 바뀌었다. 뭔가 묘한 기분이 들어서다. 얼핏 그 주점이 일전에 들은 백화루를 가리키는 것 같기도 하고. 최근 덕양 상황을 풍자하는 것 같기도 하고.

“나쁜 놈보다 겉으로 좋은 척하는 놈이 더 나쁜 거 맞죠?”

더는 참기 힘들어진 무정신협이 주석하의 무릎을 가볍게 밟고 힘을 가했다.

“이놈이! 입만 살았구나!”

순간 주석하가 무정신협의 다리를 붙잡았다.

“대협! 살려주세요!”

무정신협은 별호가 대변하듯 무정한 인간이다. 특히 대의나 협의를 앞에 걸었을 때는 누구보다도 무자비했다. 강호의 좀도둑이나 사기꾼, 특히 색마 등을 상대할 때는 목숨을 살려주지 않았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장원에 들어온 도둑을 살려줄 생각은 애초부터 없었다. 고양이가 쥐 다루듯 놀리다가 죽여버릴 생각이었다. 적어도 그가 볼 때 이런 도둑은 이 세상을 살 가치가 없는 자들이었으니까.

그런데 지금 엎드린 놈이 그의 심기를 살살 건드리고 있었다. 며칠 전, 창무관의 초청을 받고 비무 대결에 참석하기로 했다. 정파인을 양성하는 창무관의 부탁인 데다 꽤 많은 수당을 약속받았다. 일도 어려워 보이지 않았다. 지방의 이름 없는 흑도 문파 하나쯤이야.

일을 맡고 나서 이리저리 알아보니 지역 이권을 두고 정사가 서로 얽힌 국면이었다. 그에게는 당연했다. 흑도의 이권을 빼앗아야 흑도의 세력이 줄어들 것 아닌가. 이번에 맡은 일은 흑도를 없애려면 정말 필요한 일이었다.

그런데 지금 이놈이 묘하게 그의 내면을 살살 건드린다. 그렇기에 더 화가 났다.

“쥐새끼 같은 놈!”

무정신협은 녀석의 무릎을 밟은 다리에 힘을 가했다. 다리를 붙잡은 녀석의 손쯤은 장애가 되지 못한다. 그렇게 생각했다.

“어?”

다리에 힘을 가했는데 그 다리를 녀석이 붙잡고 버티고 있었다. 감히 좀도둑이 무림 고수의 행동을 방해하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놈이!”

무정신협은 내공을 끌어올렸다. 이제 이놈은 그의 발에 온몸의 뼈가 부러질 것이다.

그런데 이상하게 다리가 내려가지 않았다. 아니 무엇엔가 물린 것처럼 꼼짝하기 힘들었다.

그제야 그는 눈앞의 녀석이 단순한 좀도둑이 아니라 제법 강한 무림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그가 누군가. 그래도 이름을 밝히면 대접받는 수준의 무림인이 아닌가. 그는 눈앞의 이 두 녀석이 위험하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이…… 이…… 이놈이…….”

다리에 내력을 주입하며 전력을 다하는 무정신협의 몸이 격동을 일으켰다. 화가 난 그는 온 힘을 다하고 있었다.

그 순간 주석하의 입가에 음산한 미소가 드리워졌다.

주석하는 두 손에 내력을 집중했다. 그리고 상대의 다리를 확 꺾었다. 예상치 못한 공격이 효과적인 법이다.

뿌직-

“으아악!”

무정신협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주석하를 짓밟으려던 그 다리가 너덜거렸다. 다리뼈가 완전히 부러진 것이다.

한쪽 발로 지탱하기 힘들어진 무정신협이 뒤로 넘어갔다.

“이, 이게 어떻게 된…….”

무정신협은 지금 상황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다. 집에 들어온 좀도둑이 무공 고수인 그의 다리를 부러트리다니. 이게 꿈이 아니면 뭐란 말인가.

주석하는 재빨리 몸을 일으켰다.

녀석을 더 응징하고 싶어도 여기에서 멈춰야 한다. 그래야 내일 이 녀석이 비무 대결에 출전할 테니까. 본인은 출전하기 싫어도 출전하지 않고는 못 버티겠지.

“튀자!”

주석하가 먼저 담으로 달려갔다. 영문을 알 수 없는 도수도 덩달아 그를 따라갔다.

담을 넘으면서 간신히 주석하를 따라잡은 도수는 신경질을 팍팍 냈다.

“왜에에? 아예 못 일어나게 밟아버리지?”

“그러다가 누군지 들키면 곤란해. 게다가 더 망가져서 내일 비무에 안 나오면 그건 더 곤란하고. 지금이 딱 좋아.”

도수는 힐끔 뒤를 돌아보았다. 아직도 넘어져서 신음을 터트리는 녀석을 보니 내일 출전이 힘들 것 같긴 하지만…… 주석하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최근에 주석하와 같이 움직여보니 이 녀석이 그렇다면 그러했다. 괜히 옆에서 조언이랍시고 걸고 들어갈 필요가 없었다.

장원의 담을 넘어 멀리 도망간 후에야 주석하는 뜀박질을 멈췄다.

“다친 곳 없지?”

“당연히 없지!”

도수도 덩달아 몸을 세우고 헐떡이는 호흡을 안정시켰다.

주석하는 어둠 속에 흐릿하게 보이는 장원을 다시 확인했다. 저 장원은 창무관 소유의 장원으로 지금은 무정신협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없는 게 확실했다.

“그 자식, 내일 출전할까?”

걱정스러운 음성이다.

주석하는 피식 웃으며 호기롭게 대답했다.

“선수 교체 못 한다고 못 박아놨어.”

“어, 언제?”

“혈혼도객 다쳤을 때.”

“그렇구나.”

도수는 머리를 갸웃하며 산장을 바라봤다. 이 자식이 언제 못까지 박았지? 신출귀몰이 따로 없네. 그래, 이 녀석이 그렇다면 그런 거다. 주석하는 볼수록 새로웠다.

**

문파의 명운을 건 비무 대결은 백호문 연무장에서 이루어졌다.

정파의 본거지였기에 예상보다 훨씬 많은 정파인들이 몰렸다. 백호문 외에도 창무관을 비롯하여 이 지역의 크고 작은 문파의 문도들이 총동원됐다.

반면 흑도 인물은 많지 않았다.

그나마 이 사건의 당사자인 흑검문에서 문주를 비롯하여 십여 명이 응원차 참석했다. 다른 흑도 문파에서는 구경차 온 한둘이 전부였다. 갑자기 덕양에서 흑도의 실세로 등장한 흑검문을 응원하는 흑도 문파는 없었다.

그들은 흑검문이 무너진 적혈방이나 살검회의 이권을 모두 가져갔다고 생각하여 질시의 눈빛만 보냈다.

덕분에 백호문 연무장은 흑검문 처지로선 호랑이 입속으로 들어간 것과 같은 분위기였다. 압도적인 숫자로 응원하는 정파 쪽 사람들을 보니 그들의 기대감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들은 오늘 덕양에서 흑도 세력을 완전히 몰아낼 수 있다고 장담하는 모양이다.

“오라버니? 괜찮아?”

적의 위세에 질린 주소은이 덜덜 떨며 주석하를 위로했다. 주석하는 오늘 출전하는 당사자이자 흑검문의 소문주이니 그의 기세를 북돋우고 싶어 했다.

“숫자 많다고 이기는 건 아니지.”

주석하는 대수롭지 않게 반응하며 주먹을 쥐었다. 그의 대범함에 주소은이 안심한 듯 미소를 지었다.

정작 도수가 목소리를 높였다.

“뭐야? 이것들 겁나게 많이 몰려왔네?”

도수가 과하게 흥분하는 모습을 한두 번 본 게 아니었기에 주석하는 신경 쓰지 않았다.

대표인 주격의 안면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옆을 지키는 신옹과 흑검자도 불안한 표정이 역력했다. 나쁜 조짐은 아니다.

주석하는 연무장의 한쪽 구석에서 상대가 나오기를 기다렸다.

약속대로 정오가 되자 출전자를 비롯한 정파 쪽 대표 인물들이 줄줄이 나왔다.

흑검자와 현현자가 만나 비무 대결의 규정을 확인했다.

“그쪽 출전자들은 모두 나왔습니까?”

최대한 느긋함을 가장한 흑검자가 상대를 쭉 훑으며 물었다.

현현자가 안면을 일그러트리며 흑검자를 잡아먹을 듯 쳐다보았다.

“현현자, 왜 그러시오?”

“네놈들이 우리의 빈객, 무정신협을 저렇게 만들어 놓았느냐?”

흑검자의 시선이 무정신협을 찾았다.

무정신협은 한쪽 다리가 부러져 다리에 부목을 대고 흰 천으로 둘둘 말고 있었다. 제대로 걷지 못하는 듯 좌우로 두 사람이 부축하고 있었다. 저 상태라면 무공을 익히지 않은 평범한 사람이라도…… 거리를 주지 않으면 무정신협은 절대 공격하지 못하니까.

흑검자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가까스로 참으며 대답했다.

“뭔 소리요? 우리는 그렇게 비겁한 짓을 하지 않소. 무정신협이 어쩌다…… 혹시 혈혼도객처럼 술 마시다 저렇게 됐소?”

“네놈들이!”

“무정신협의 무공이 대수롭지 않았나 보오? 어디 가서 저렇게 얻어터졌는지 모르겠지만 걱정이 많겠소.”

“이거 모두 네놈들의 수작이잖아?”

“증거 있소?”

장원에 들어온 두 도둑에게 당했다고 하기엔 무정신협의 명예가 문제였다. 심증은 있으나 물증이 없으니 현현자는 이를 갈며 참았다.

“아, 그럼 좋소. 원래는 출전선수를 바꿀 수 없다고 했는데…… 혹시 이제는 생각 있소?”

흑검자의 말에 귀가 솔깃해진 현현자가 흑검문 쪽의 출전자를 살폈다.

“……푸흐흐흐.”

웃음을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유독 한 사람이 눈에 띄었다. 그 사람은 온몸에 하얀 천을 두르고 있었다. 그것도 군데군데 피가 얼룩덜룩했다. 오직 머리 부분만 누군지 알아보도록 간신히 드러냈다. 완전히 산송장이었다.

그리고 그자의 안색은…… 그렇게 어두울 수가 없었다. 온몸의 피가 다 빠져나갔는지 시커먼 얼굴이다. 절대 정상적인 사람의 안색이 아니었다.

그자는 혼자서 거동하기 힘들어 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것도 곧 죽기 직전처럼 골골대는 상태로.

현현자는 그자가 흑검문에 빈객으로 들어온 혈혼도객이란 사실을 짐작할 수 있었다. 등에 칼을 두 방 맞았다더니 아직 제대로 거동조차 못 하는 것처럼 보였다.

간신히 웃음을 삼키고 현현자는 혈혼도객과 무정신협의 상태를 비교했다. 한 사람은 전신에 흰 천을 감고 있고 다른 한 사람은 한쪽 다리에만 천을 감고 있었다. 한 사람은 그 천이 붉게 물들어 아직 상세가 낫지 않은 듯했고 다른 한 사람은 천이 말끔했다.

혈혼도객을 자세히 살필수록 승리를 확신했다. 누가 봐도 무정신협이 우세했다.

“원래 출전선수를 바꿀 수 없지 않소? 무정신협이 크게 다쳐 출전이 어렵다면 우리가 양보해주겠소. 원하면 바꾸어도 좋소.”

흑검자가 놀리듯 권했다.

현현자는 내심 비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흑검자가 자신에게 불리한 제안을 할 리가 없다. 그냥 척 보아도 무정신협보다 혈혼도객의 부상이 더 심하다. 아마 흑검자가 이런 제안을 하는 이유는 혈혼도객을 교체하고 싶어서겠지.

“그대로 하겠소. 규정이란 지키라고 있는 거요.”

현현자의 결단이 내려지는 순간 주석하는 불끈 주먹을 쥐었다. 걸려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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