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화 비무 대결 (1)
흑검자는 내심 환호성을 질렀으나 겉으로는 울상을 지으며 정중하게 다시 부탁했다.
“그래도 말입니다. 예전에 의뢰 드렸듯이 혈혼도객의 부상이 심각하여…… 어떻게 안 되겠습니까?”
“이보시게, 그때 답신을 보내지 않았나? 어떤 경우에도 변경할 수 없다고.”
현현자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아쉬운 표정을 짓는 흑검자를 본 현현자는 더욱 기가 살았다.
“흑검자, 오늘 세 사람이 겨루어 그 가운데 두 사람이 이기면 승리하는 거요. 진 쪽에서는 오 년간 봉문이고. 비무는 상대를 죽여서는 안 되고, 출전 당사자가 포기하거나 누가 봐도 승부가 기울어졌다고 판단되면 끝나는 거요. 아시겠소?”이어서 세세한 규정이 만들어졌다. 대부분 승리를 확신한 현현자가 흑검문에서 딴소리하지 못하도록 확실하게 못을 박는 조항이었다. 흑검자는 순순히 받아들였다.
“그럼 우리는 첫 번째 출전자로 백호문 부문주인 선우청 대협이 나갈 거요. 그쪽은 누가 나오겠소?”
현현자는 이미 승리를 확신한 기세였다. 현현자가 볼 때 흑검문의 최강자인 주석하는 마지막에 나올 것이다. 먼저 출전할 도수나 부상 중인 혈혼도객은 누가 나오든 선우청의 필승이었다. 그렇기에 자신 있게 선우청을 앞세웠다.
현현자는 뒤로 돌아 주석하와 주격에게 눈짓으로 물었다.
주석하가 도수를 가리켰다.
모두가 물러난 연무장 중앙에 도수와 선우청만 남았다. 두 사람은 검을 사용했다.
선우청에게 도수는 형 선우학을 죽인 원수다. 그렇다 보니 선우청은 두 눈에 살의를 불태우며 검을 들었다. 반면 도수에게 선우청은 다소 껄끄러운 상대였다.
도수는 주석하가 선우청을 상대로 출전 의사를 물었을 때 고민 없이 바로 수락했다. 주석하의 작전을 대략 눈치채고 있었기에 그는 자신이 나가는 것이 가장 적합하다고 판단했다.
‘죽기야 하겠어?’
도수도 선우청의 원한을 마다할 생각이 없었다. 원한이 있다면 이런 공적인 자리에서 푸는 게 차라리 낫다. 그리고 적어도 그는 어떤 경우라도 죽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설마 비무 대결에서 패배를 선언했을 때 죽이기야 할까.
도수는 눈앞의 상대를 노려봤다. 선우청은 분노를 삼키며 험악한 인상을 짓고 있었다. 공개적으로 맞붙게 되면 선우청의 무공이 자신보다 훨씬 뛰어나다는 사실도 안다. 그렇기에 도수는 무리할 생각이 없었다.
호흡을 가다듬으며 결전에 임하는 도수의 눈에 주석하의 눈빛이 느껴졌다. 무리하지 말라고. 이번 판은 내주는 판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래도 하는 데까지는 해봐야지.’
개시 선언과 함께 선우청이 맹렬한 기세로 그를 공격해왔다. 도수도 망설이지 않고 대응했다.
두 사람의 격전은 흥미로웠다.
흑검문에서는 주석하를 제외하고 모두가 긴장 상태였다. 정작 주석하는 대수롭지 않은 듯 느긋하게 자리에 앉아 물을 마시며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채챙-
몇 차례 날카로운 소음이 울리고 난 뒤 주격이 버럭 소리쳤다.
“그만!”
도수의 자세가 흐트러진 순간 선우청이 검으로 가슴을 찔러가고 있었다. 하지만 선우청은 멈추지 않았다. 도수는 재빨리 상체를 숙였고 선우청의 검이 아슬아슬하게 그의 어깨를 스치며 지나갔다. 허공으로 붉은 피가 튀었다.
선우청의 검은 그 상태에서 재차 공격을 시도했다. 참지 못한 주격이 다시 소리쳤다.
“그만!”
한쪽이 패배를 선언하면 비무는 중단되어야 한다. 규정이 그러했으니까. 하지만 선우청은 아예 무시했다.
상대의 의도적인 공격이 이어지자 도수는 이를 악물고 후퇴했다. 다년간의 경험 덕분에 적어도 상대의 공격을 피할 능력은 충분한 도수였다.
도수에게 따라붙으며 계속 공격하려던 선우청은 어쩔 수 없이 중단해야 했다. 그는 여전히 씩씩대며 분노를 거두지 않았다.
“이놈! 다음에는 반드시 네 목을 베어 형의 원수를 갚겠다!”
“그보다 밤에 잘 때 조심하는 게 좋을 걸? 언제 목이 분리될지 모르잖아?”
도수도 지지 않고 험악한 말로 응수했다.
주석하는 돌아오는 도수의 부상을 확인했다. 몸 여기저기에 약간의 자상이 있었으나 대단한 상처는 아니었다. 도수 본인이 호언장담한 대로 제 한 몸 지킬 무공은 충분했다.
흑검문이 먼저 패배를 기록하자 정파 연합의 사기는 왕창 올라갔다.
반면 흑검문의 응원단은 안절부절못하고 연신 주석하의 눈치를 봤다. 주석하는 그들에게 괜찮다며 미소를 보냈다.
현현자가 다음 비무를 알렸다.
“우리는 무정신협을 보낼 거요. 지금 부상 중이라 출전이 어렵지만 이를 마다하지 않고 받아들인 무정신협 대협께 감사드리오. 자, 그쪽은 누가 나올 거요?”현현자의 안면에는 비웃음이 가득했다. 누가 나오든 남은 두 판 중에 한 판은 반드시 이길 자신이 있었다. 이번 판에서 주석하가 나오면 지겠지만 혈혼도객이 나오면 무조건 이길 수 있다. 부상 때문에 온몸을 천으로 감싼 채 제대로 거동조차 못 하는 혈혼도객에 비해 무정신협은 단지 다리 하나를 쓰지 못하는 것뿐이니까.
주석하가 혈혼도객에게 눈짓했다.
흑검문 사람들이 혈혼도객의 양쪽에 붙어 간신히 연무장 중앙으로 옮겼다. 두 사람의 부축을 받고 질질 끌 듯 몸을 이동하는 혈혼도객은 사실상 제대로 몸을 가누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반면 무정신협도 부축을 받으며 나오고 있었으나 적어도 그는 한쪽 다리로 제대로 몸을 지탱하면서 걸어 나왔다.
“푸하하!”
“선수들이 왜 이래?”
장내에 폭소가 터졌다.
“벌써 생사결이 끝난 모습인데?”
두 사람의 겉모습과 움직임으로 보건대 무정신협이 압도적으로 상태가 좋아 보였다.
현현자가 혀를 끌끌 찼다.
“그날 등에 두 방 크게 먹였다더니 다리도 상처를 입혔나 보네. 제대로 몸을 움직이지 못하니 공격은커녕 방어도 어렵겠어. 이건 무조건 무정신협의 승리다.”확신한 현현자는 맞은편의 흑검문 사람들의 표정을 살폈다. 모두 전전긍긍하며 불안해하고 있었다.
단 한 사람, 태연한 주석하가 거슬렸다. 현현자는 미간을 찌푸리며 곧 승패가 결정되면 제대로 욕을 퍼부어주겠다고 주먹을 꾹 쥐었다.
빈객으로 왔던 두 사람이 서로 마주 보고 섰다.
양쪽 모두 흰 천으로 상처를 둘둘 말고 있어 그 모습이 매우 우스꽝스러웠다. 우습게도 부축했던 사람들이 물러나자 두 사람은 제대로 서 있기도 힘겨워했다.
혈혼도객은 자신의 무기인 도를 지팡이로 이용해 땅을 짚고 있었고 검을 사용하지 않는 무정신협은 긴 봉으로 다리를 대신하여 몸의 균형을 잡았다.
다만 두 사람의 눈빛만은 형형하여 전의를 불태우고 있었다.
무정신협이 상대의 황당한 모습에 혀를 끌끌 찼다.
“나도 고생이 많지만 형씨도 고생이 많군. 더 고생하기 전에 패배를 선언하고 물러나는 게 어떤가?”
“당신이야말로 다리 하나 더 부러지기 전에 포기하는 게 어떻소? 난 받은 수당이 많아서 몸이 이래도 물러날 수 없소.”
“흑검문 제자도 아니면서 뭘 그리 열심히 하나? 몸이 성해야 다시 일을 맡지 않겠나?”
“피차일반이오. 나는 이 나이가 되도록 강호를 돌아다니는 동안 적 앞에서 물러난 적이 없소. 비록 몸이 이럴지라도 명예를 더럽힐 수는 없지.”
얼핏 들어보면 부상에도 불구하고 전의를 불태우는 두 사람의 대화는 그야말로 눈물겨웠다. 그러나 그들을 지켜보는 양쪽 사람들은 허탈함과 동시에 실소를 터트렸다.
몸을 가누지도 못하면서 무슨 재주로 비무를 펼친단 말인가.
입으로 씨름하던 혈혼도객과 무정신협이 드디어 비무에 들어갔다.
척!
척!
위풍당당하게 한 걸음씩 옮기면 좋겠지만 현실은…… 백 세 노인보다도 느렸다.
두 사람이 서로에게 다가서기까지 엄청 오랜 시간이 걸렸다. 비틀거리면서 도와 봉에 의지하여 다가가던 두 사람이 마침내 서로를 사정거리 안에 두고 노려보았다.
그 순간 놀랍게도 혈혼도객이 땅을 박차고 몸을 날렸다. 지금까지 몸을 제대로 펴지 못하던 자세는 어디로 가고 물 찬 제비처럼 날렵하게 움직였다.
갑작스러운 공격에 무정신협은 피하지도 반격하지도 못했다. 설사 의사가 있었어도 몸이 따라주지 않았다.
“허억!”
비명과 함께 혈혼도객의 도가 무정신협의 남은 한쪽 다리를 그었다.
치명타! 약점에 일격을 당한 무정신협은 몸을 지탱하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넘어졌다.
이미 승부가 갈렸기에 혈혼도객은 공격을 멈추었다. 어차피 이 자리에서 상대를 죽일 수도 없고 무공이 더 강한 무정신협과 괜히 원한을 쌓을 이유도 없었다.
현현자의 안색이 썩어 들어갔다.
“이것들이…… 간계를 쓰다니! 혈혼도객의 부상이 거짓이었어! 이건…… 무정신협을 습격한 놈들이 흑검문이란 증거다! 으……, 출전명단을 교체할 수 있냐고 물어왔을 때 눈치챘어야 했는데……”그동안 진행되었던 협상을 돌이켜보며 현현자는 자신이 함정에 빠졌음을 깨달았다. 이미 때늦은 후회였다.
이제 승부는 일대일. 마지막 단판 승부가 남았다.
주석하와 검우방주 진소량의 대결이다. 진소량은 덕양 최강의 무인이었다. 현현자는 진소량의 무위를 믿지만 백호문과의 전투에서 보여준 주석하의 가공할 무공 역시 잊지 않고 있었다.
‘뭔가 기분이 좋지 않아.’
이미 쏟아진 물이었다. 이제는 운명에 맡길 수밖에. 지금 와서 흑검문의 간계를 밝힐 수도 없지 않은가. 지금은 진소량의 능력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진소량은 정파의 믿음을 절대 저버리지 않을 것이다.
출전을 앞두고 주석하는 흑검문 사람들의 응원을 받았다.
“석하야, 무리하지 말거라. 절대 다치면 안 돼.”
주격이 머리를 쓰다듬으며 격려했다. 주소은은 주석하를 향해 힘차게 주먹을 들어 보였다.
“오라버니! 난 오라버니를 믿어!”
가족의 격려에 주석하는 기분이 날아갈 듯했다.
그는 자신만만한 미소로 응답하며 중앙으로 걸어 들어갔다. 뒤에서 도수의 응원 소리가 들렸다.
연무장 중앙에는 이미 검우방주 진소량이 버티고 있었다. 검우방주답게 한 손에 검을 든 모습이 꽤 늠름했다.
과연 덕양 최고의 고수다웠다. 그의 존재감만으로도 연무장을 꽉 채울 정도였으니까.
예전의 주석하라면 제대로 몸을 펴지도 못했겠지만 전생에서 산전수전 다 겪은 마당에 진소량 정도의 고수는 눈에 보이지도 않았다. 얼마 전에는 진소량과는 비교 불가인 남궁천도 만났던 그가 아닌가.
주석하는 자신의 내공에 자신이 있었다. 무정신협도 그의 강력한 내공에 저항 한번 하지 못했다. 진소량이라고 그를 능가하지 못할 것이다. 다만 진소량이 지닌 검법만은 주의해야 한다. 순수 검법으로는 상대가 안 되니까.
“애송이! 그날 주루에서 기겁하고 꼬리를 내리더니 오늘은 제법 호기롭구나!”
상대의 기세를 꺾으려고 진소량은 호기롭게 소리쳤다.
“오늘도 손바닥을 찍고 싶어 어떡하냐? 땅바닥에 찍을 수도 없고.”
주석하는 빈정대며 검을 들었다. 주석하의 검을 본 진소량이 비웃음을 날렸다.
“어디에서 주운 검이냐? 저잣거리에서도 그보다 더 좋은 검을 구하겠다.”
주석하의 검이 보잘것없자 진소량이 바로 험담했다. 검객이라면 검은 자존심의 상징이다. 검이 당한 모욕은 본인의 모욕과 같다.
진소량의 검은 예리하게 날이 벼려져 있었고 검집에는 화려한 장식과 수술이 달려 누가 보아도 명검이라 할만 했다. 검우방 대대로 방주에게 내려오는 보검이었다.
평소 사용하지 않는 보검을 들고 나온 것으로 보아 진소량이 이 대결에 얼마나 신경을 쓰는지 알 수 있었다.
“내꺼랑 똑같아 보이는데? 은자 두 냥짜리냐?”
주석하가 자신의 검을 쓱 살피며 껄껄 웃었다.
“검을 볼 줄 모르는 동태눈이구나! 오늘 그 검이 부러지지 않으면 내가 성을 간다!”
반대로 모욕을 덮어쓴 기분이 되자 진소량이 빈정거렸다.
지금까지 주석하는 수많은 검을 부러트렸었다. 검에 내기를 충만하여 휘두르면 상대편 검이 부딪히는 족족
부러졌었다. 그렇기에 진소량의 호언장담이 가소로웠다.
“돌아갈 때는 검이 두 자루로 바뀌어 있을 것이다!”
진소량은 주석하의 검법이 심오하지 않다는 사실을 금방 꿰뚫어 봤다. 이런 녀석에게는 절대 질 수 없었다. 분노한 진소량이 소리쳤다.
“와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