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화 비무 대결 (2)
같은 검(劍)을 이름에 달고 있어도 흑검문과 달리 검우방은 검법에서 일가를 이룬 문파였다. 그렇기에 진소량은 자신이 있었다. 내공 면에서도 그날 주루에서 있었던 사건을 떠올리면 절대 우위에 있었다. 내공과 검법 양쪽에서 압도하고 있으니 눈앞의 주석하가 가소로웠다.
저놈이 정천신검을 죽였다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면에 숨은 꼼수가 있었을 것이다. 방금 백호문 부문주와 대결했던 도수를 보니 더욱 분명해졌다. 도수는 같은 날 백호문주를 죽였다고 알려졌는데 방금 본 무공을 보면 절대 그 수준이 아니었다.
‘저놈도 소문만 그럴듯한 놈이다!’
진소량은 검을 들고 주석하를 겨누었다. 검우방 대대로 내려오는 이 보검이 있는 한 절대 지지 않는다.
진소량의 기세는 무시무시했다.
주석하는 검을 겨누며 진기를 끌어올렸다. 그나마 다행스럽게도 진소량이 대협 흉내를 내느라 그가 공격할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다. 만일 진소량이 곧바로 공격해 들어왔다면 아직 제대로 내공을 끌어올리지 못한 주석하는 대항하기 만만치 않았을 것이다.
단전에서 잠자던 내력이 점차 강하게 온몸에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처음과 달리 주석하는 최근 들어 내공이 일주천하는 이 기분이 대단히 상쾌했다.
우우웅-
내력이 검에 집중되면서 검명이 일었다. 하지만 그 현상은 매우 미약하여 다른 이들은 볼 수 없었다.
주석하는 천천히 검을 앞으로 내밀며 한 걸음씩 다가갔다. 진소량의 강력한 살기가 온몸을 엄습하며 압박했다.
‘이자도 만만찮구나!’
주석하는 진소량이 정천신검에 못지않은 고수란 사실을 깨달았다. 더구나 이자는 예리한 보검을 소지하고 있으니 그 위력이 배가될 터였다.
주석하가 사정권 내로 들어가자 진소량의 검이 춤을 추기 시작했다. 검우방을 유명하게 만든 검초가 모습을 드러냈다.
반면 주석하의 검법은 흑검육식이었다. 흑검문 제자라면 누구나 배운다는 기초적인 검초였다.
챙-
두 검이 부딪치는 순간 커다란 통증이 양쪽으로 전해졌다.
‘어? 안 부러지네?’
지금까지 도수와 비무하면서 검에 이 정도의 내력을 주입하면 도수의 검은 여지없이 반 토막이 났다. 그런데 진소량의 보검은 끄떡도 하지 않았다. 진소량의 내공 때문인지 아니면 보검의 영향인지 알 수 없었다.
진소량 또한 멀쩡한 주석하의 검에 당황했다.
예상과 다른 결과에 주석하는 재차 힘을 실어 진소량을 공격했다.
챙-
다시 검이 막혔다. 이번에는 두 사람의 검이 서로 만나 힘을 겨루게 됐다. 이것은 주석하의 힘을 시험하려는 진소량의 의도였다. 초식이 아닌 힘으로 상대를 제압하려는 기술이다.
두 사람이 서로 검을 맞대고 용을 쓰는 국면이 전개됐다.
이런 식의 대결은 처음이라 주석하는 혼란스러웠다. 진소량의 얼굴을 보니 비릿한 미소를 머금고 만족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 표정에서 주석하는 지금 상황이 진소량의 의도대로 흘러갔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래서 어쩌라고? 지금 상황은 딱히 주석하에게도 나쁘지 않았다.
다음 순간,
퍽!
진소량의 왼손바닥이 주석하의 가슴을 가격했다. 정확히는 손바닥이 가슴에 척 붙었다. 동시에 진소량의 손바닥에서 뜨거운 기운이 엄습했다.
주석하는 그날 주루에서 보았던 진소량의 강력한 내공을 떠올렸다. 탁자에 선명한 수인을 찍은 내력은 범상치 않았었다. 그때처럼 강한 열기가 가슴을 지지듯 전달되어왔다.
“특이한 무공인데?”
“넌 이제 끝이다!”
진소량이 잔인한 미소를 지으며 내력을 더욱 끌어올렸다. 상대를 확실하게 제압하면서 고통도 가하기 위해 선택한 수법이었다.
순간 주석하도 왼손을 뻗었다.
퍽!
그의 왼손도 똑같이 진소량의 가슴팍에 붙었다. 이에는 이, 눈에는 눈이다!
다만 문제가 발생했다. 내력 운기가 서툴다 보니 검에 집중된 내력을 일부 빼내어 왼손으로 옮기기가 어려웠다. 게다가 검에 집중한 내공을 빼면 현재 서로 맞댄 검의 기 싸움에서 밀릴 우려가 있었다.
내공에서 우세하다고 자신한 진소량의 전략이 먹혀드는 순간이었다.
“애송이! 어디까지 버틸 수 있는지 확인해보마!”
우세를 점했다고 여긴 진소량은 더욱 강하게 상대를 압박했다.
치이이익-
뜨거운 기운이 주석하의 가슴을 달궜다. 옷에 가려 보이지는 않으나 주석하의 가슴에 선명한 수인이 새겨지기 시작했다.
가슴에서 통증이 전달됐다. 예상했던 대로 진소량의 내공은 대단했다. 게다가 진소량은 주석하를 살해할 의도를 품고 있었다. 마치 주루의 탁자에 인장을 새기듯 자신의 극양 내공을 이용해서 주석하의 가슴을 불태우며 몸의 내부를 지져버리려 했다.
사실상 단전을 깨고 무공을 폐하는 방식과 비슷한 효과가 있다. 물론 상한 혈맥은 복원이 가능하긴 하다. 적어도 깨진 단전보다는 훨씬 쉽다. 그러나 그것 또한 단지 이론적인 문제일 뿐 현실에서는 쉽지 않았다.
진소량은 잔인하게도 주석하를 아예 망가트릴 계획을 세웠다. 감히 정파에 반기를 든 흑도 무리는 어떤 방식을 쓰든 반드시 처단해야 한다.
처음에는 검을 이용해서 사지를 절단할 계획을 세웠다. 그런데 비무 대결에서 그런 큰 상해를 입힌다면 구설에 오를 소지가 컸다. 그래서 내상 쪽으로 작전을 변경했다.
“넌 죽었어!”
진소량이 잔인한 미소를 머금고 주석하에게 속삭였다.
양측이 검을 맞대고 거기에다 서로 상대의 가슴에 손바닥을 붙이고 있으니 얼굴 또한 서로 코앞에서 마주 보고 있었다. 실로 기괴한 광경이었다.
주석하는 진소량의 표정에서 잔인한 살인마의 미소를 읽었다. 이런 자가 정파에서 추앙받는다니. 비록 강호 전역에선 별 볼 일 없는 인물일지 모르지만 적어도 덕양에서는 진소량은 정파를 대표하는 인물이다.
“……자신 있나?”
주석하는 고통을 참으며 상대에게 물었다. 가슴을 통해 전달되는 상대방의 극양진기가 심상치 않았다.
“적어도 덕양에선 내 적수가 없다!”
진소량이 피식 웃으며 더욱 내공을 끌어올렸다. 주석하의 고통스러운 표정을 보았으니 그의 판단이 틀리지 않았다. 이제 잠시 후면 주석하의 가슴은 불에 탄 듯 엉망이 되리라.
극심한 고통이 전해지자 주석하의 단전에서 내공이 들끓기 시작했다. 그의 단전에는 모두 다섯 가지 내공이 잠자고 있었고 지금 그 하나는 검에 주입되어 상대의 검을 비교적 여유롭게 막아내고 있었다.
하지만 주석하는 내공 운용이 서툴러 가슴으로 가해지는 공격에 제대로 대항할 수 없었다.
잠자던 네 종류의 내력 가운데 가장 먼저 날뛰기 시작한 내력은 진소량과 성질이 비슷한 극양의 내력이었다.
고오오오-
무지막지한 내력이 단전에서 깨어나 일주천하기 시작했다. 주석하는 가슴의 통증 외에 단전에서 은은하게 전해오는 통증을 느꼈다. 이 뜨거운 내공은 가슴으로 침입하는 외부의 공격에 대항하는 대신 주석하의 왼쪽 손바닥에 집중됐다.
“어?”
이때 진소량은 가슴으로 전해지는 뜨거운 기운에 의문을 품었다. 주석하가 감히 비슷한 방식으로 그를 압박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그리 신경 쓰지 않았다. 벼룩도 밟으면 꿈틀거리는 법이니 죽음이 임박한 주석하가 쓸모없는 반항을 한다고 생각했다. 죽어가는 녀석이 공력을 이용해 가슴을 압박해봐야 큰 위협이 될 수 없었다.
고오오오-
그 누가 주석하의 내공을 감당할 수 있을까.
놀랍게도 진소량은 점차 가슴이 불타는 뜨거움을 느꼈다. 심상치 않다고 생각한 그는 주석하의 손을 떼려고 뒤로 한발 물러섰다.
그 순간 주석하가 바로 한 발을 전진하면서 그 후퇴를 물거품으로 만들었다.
점차 가슴에 전해지는 통증이 커졌다. 극양신공을 익힌 그이건만 주석하의 극양지기를 감당하기 점점 힘들어졌다.
진소량은 믿을 수 없었다. 어린 주석하가 그에 필적할 내공을 소유하고 있다는 것도 의문이었고 하필이면 그와 같은 극양진기를 품고 있다니! 그것도 상상 불가한 엄청난 위력의 진기가!
“으으!”
진소량이 안면을 뒤틀며 고통스러운 신음을 토해냈다. 진소량은 뭔가 잘못 돌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주석하는 이상한 놈이었다. 이처럼 의문에 싸인 놈은 건드리면 위험한 법이거늘.
주석하가 음산한 미소를 담고 진소량에게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어떠냐? 지금부터 슬슬 망가질 것이다!”
“미친놈! 뭐라고?”
진소량은 점점 견디기 어려워졌다. 가슴이 불타오르고 서서히 혈맥이 망가지기 시작했다. 진소량의 내공도 적지 않았다. 그런데 진소량이 아무리 기를 쓰고 저항해보아도 달걀로 바위 치기였다. 가슴을 파고드는 주석하의 손바닥을, 그 열기를 감당할 수 없었다.
“크으윽!”
진소량의 가슴에도 선명한 수인이 찍혔다. 고통을 견디지 못한 진소량은 이 싸움을 포기하고 싶었다.
하지만 주석하는 그럴 의사가 전혀 없었다.
강력한 극양진기가 주석하의 왼손을 달구었고 그 손과 붙은 진소량의 가슴은 불에 지진 듯 타오르며 혈맥이 너덜너덜해졌다.
투두둑-
몸 내부가 열기에 짓이겨졌다.
극심한 고통과 공포에 진소량은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사…… 살려줘…….”
“너라면 살려줬겠냐?”
주석하는 신경 쓰지 않고 공격 강도를 높였다.
치이이익-
매캐한 냄새가 진소량의 가슴에서 피어올랐다. 비명도 제대로 지르지 못한 그의 몸이 서서히 무너졌다. 내부의 혈맥이, 근육이, 살이 열기에 새카맣게 타들어 갔다.
서로 맞닿았던 검이 풀썩 떨어졌고 주석하의 가슴에 붙은 진소량의 왼손 또한 흐느적거리며 떨어졌다.
“크으윽-”
고통을 참지 못한 진소량이 하얗게 눈을 뒤집으며 쓰러졌다.
그제야 주석하도 손을 거두고 한 발 뒤로 물러났다. 적을 죽여버릴 수 없는 비무 대결이니 이 정도면 충분히 교훈이 될 것이다. 짐작건대 진소량은 수년간 요양해도 다시 무공을 쓸 수 없을 것이다.
진소량이 무너진 후 주석하는 손을 떼고 한발 물러났다.
어떻게 된 일인지 영문을 모르던 사람들은 주석하가 꿋꿋하게 서 있고 진소량이 무릎을 꿇자 경악했다. 흑검문은 잔치 분위기였고 정파 쪽 사람들은 초상집에 온 듯했다.
정파 사람들이 진소량의 위험을 깨닫고 뛰쳐나왔다.
“이놈! 대체 무슨 짓을 한 거냐?”
사람들은 진소량의 가슴팍이 엉망이 된 것을 발견했다. 살점이 떨어져 나가고 혈맥이 짓무르고 끊어진 상태에서 시커먼 인장과 붉게 변한 피부가 가관이었다. 그들은 눈을 찌푸리며 주석하를 노려보았다.
주석하는 말없이 자신의 상의를 젖혔다. 그의 가슴에도 시커먼 수인이 찍혀 있었다.
“나도 찍혔는데?”
주석하와 진소량의 가슴에 비슷한 상처가 나 있으니 두 사람이 같은 방식으로 싸운 것이 확실했다. 그렇다 보니 아무도 주석하가 무자비한 살수를 썼다고 비난할 수 없었다.
“흑검문 소공자가 덕양 최고고수를 이겼다!”
“아아! 정파의 앞날은 어찌 될 것인가!”
“이건 말도 안 돼!”
좌절에 빠진 정파 쪽 사람들이 울분을 감추지 못했다.
반면 흑검문의 환호성은 길게 이어졌다.
“소문주님 만세!”
주격과 주소은이 달려와서 부상 여부를 확인했다.
“오라버니! 괜찮아?”
“당연히 괜……, 안 괜찮지. 소은이 간호가 필요해.”
가슴의 상처는 지난 경험으로 보면 운기조식 한두 차례면 다시 정상으로 돌아갈 것이다. 염려하는 가족에게 괜찮다고 손짓한 후 주석하는 연무장을 훑어보았다.
이 순간부터 덕양에서는 흑검문에 대항할 문파가 정과 사를 불문하고 존재하지 않는다.
그는 정파 쪽 인사를 노려보며 소리쳤다.
“각 문파의 책임자는 나와라! 이제 마무리를 지어야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