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검천하-38화 (38/273)

38화 비무 대결 (3)

덕양에서 가장 세력이 큰 흑도 문파는 흑검문, 적혈방, 살검회였다. 반면 정파 쪽은 백호문, 검우방, 창무관, 이 세 곳이다.

적혈방과 살검회가 무너지면서 흑도는 흑검문으로 통일됐다. 백호문주는 죽었고 검우방주는 오늘 사실상 무력화됐다. 창무관은 무공을 가르치는 도장인 데다 화산파와의 연결고리였던 소화자가 죽는 바람에 앞으로는 제대로 영향력을 발휘하기 어려울 것이다.

특히 백호문은 제자들마저 꽤 큰 피해를 보아 다시 일어서기 어려울 지경이 됐다.

주석하의 앞으로 이 세 방파의 책임자가 나섰다. 지금까지 이들 문파를 대표하여 협상 대표를 맡았던 현현자와 함께였다. 그들의 표정은 당황, 좌절, 체념이 섞여 복잡했다.

지난 만남에서 거들먹거리던 녀석들을 생각하니 주석하는 속으로 한바탕 웃음이 터졌다. 역시 무림에서는 힘이 우선이고 힘이 정의다.

“비무 대결 약조가 뭐냐?”

무려 오 년간 봉문! 외부의 지원을 받지 못하면 그 타격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어린 제자를 가르치는 창무관은 봉문하게 되면 사실상 문을 닫으라는 것이어서 완전히 사라지게 된다. 반면 백호문이나 검우방은 그 존립에 영향이 없을지라도 이권에 개입하지 못하면 세력을 확장할 수 없으니 살아남기 쉽지 않을 것이다.

문파 최강고수가 무사하다면 그나마 미래라도 기대 하겠으나 백호광객이나 진소량이 이미 죽거나 무력화되었으니 앞으로 수년, 아니 십 년 이상 제자리를 찾지 못할 것이다.

이제 덕양은 흑검문 천하였다.

“주…… 주 공자! 선처를 베풀어주십시오!”

현현자가 바닥에 무릎을 꿇으며 하소연했다.

이쯤에서 남은 일은 주석하의 몫이 아니다. 다른 사람에게 넘겨야 한다. 주석하는 주격과 흑검자에게 눈짓했다.

흑검자가 목을 빳빳하게 세웠다.

십 년 묵은 체증이 확 내려가는 기분이다. 그는 실실 비웃음을 흘리면서 현현자를 놀렸다. 두 사람은 오래전부터 맞수였기에 흑검자는 지금 승리의 기쁨에 듬뿍 취해 있었다. 역시 적혈방을 버리고 흑검문에 투신한 선택은 탁월했다.

“흐흐, 현현자, 만일 흑검문이 졌다면 네놈이 선처해주었겠나?”

“다…… 당연히…….”

“작년에 적혈방에 있을 때 백호문에 당한 수모를 잊은 적이 없다. 그때 백호문 제자 한 놈을 상해했다고 거들먹대면서 엄청난 배상을 요구했던 일 기억하나?”

“으으으.”

“그때 네놈 때문에 내가 잘릴 뻔했다고! 동종 업계에서 그렇게 놀면 안 되지!”

지금까지 덕양의 정파와 사파는 대립 관계 속에 항상 아웅다웅 시끄러웠다. 당연히 상대를 괴롭히려 했고 정파와 사파는 물과 기름처럼 섞일 수 없는 관계였다.

흑검자의 행동에 실소를 머금던 주석하는 정파 대표에게 일갈했다.

“내일까지 현판 다 떼라! 내일도 붙어 있으면 바로 현판 깨버린다.”

앞으로 오 년간 저 문파들은 현판을 붙일 수 없다.

사색이 된 자들을 쓱 훑어본 후 주석하는 연무장을 떠났다. 그의 뒤로 주소은이 재잘거리며 급히 뒤따라왔다.

**

덕양의 주요 이권을 대부분 넘겨받았으니 흑검문 책임자로서 최소한 한번은 방문해야 한다. 덕분에 주석하는 바쁜 시간을 보내야 했다.

그러다 보니 하루에 한 번씩 들리던 백화루를 며칠 만에 방문했다.

오랜만에 백화루 앞에 서서 주석하가 미래의 목표를 되새기고 있을 때였다.

그를 알아본 백화루의 점소이가 다급하게 달려와서 인사했다.

“무슨 일이냐?”

“고, 공자님. 지금 백화루 이 층에 손님이 오셨습니다.”

“손님이 누군데?”

“그…… 흑도 소공자회라고…….”

흑도 소공자회가 아직도 살아 있었나? 그 모임은 살검회 소회주였던 도건이 죽으면서 문 닫지 않았나? 최근에 바쁘다 보니 미처 그놈들을 손볼 여유가 없었다.

소공자회 인원들이 백화루에서 진을 치는 이유는 그를 만나기 위함이다. 이제는 유명 인사가 된 주석하를 그들도 무시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지금도 여전히 과거의 힘없이 당하기만 하던 주석하에게서 한몫 챙기기 위해서일 것이다.

주석하는 성큼성큼 백화루로 들어갔다. 그가 지나갈 때마다 백화루에서 일하는 자들이 모두 머리를 숙였다. 역시 이 맛에 힘을 쓴 보람을 느낀다. 먼 훗날 그가 뜻을 이루어 이 백화루를 실질적으로 소유하게 된다면 그때는 더 큰 존경을 받게 되리라 생각하니 가슴이 뿌듯했다.

“어디에 있지?”

굳이 물을 필요가 없었다. 소공자회 사람들이 이 층에서 가장 좋은 자리를 차지하고 떠들고 있었으니까.

“벌써 사흘째입니다.”

따라온 점소이가 난감하다는 듯 머리를 긁적였다.

사흘 동안 이 녀석들이 주석하가 나타나기만을 기다리면서 이곳에서 난장을 부렸다는 뜻이었다. 돈은 냈을까? 그럴 리가…….

주석하는 탁자에 모인 녀석들을 훑었다. 모두 넷. 평소 도건을 따르면서 그를 함께 괴롭히며 얕잡아보던 녀석들이다.

이들의 신분은 덕양 흑도 문파의 소문주라지만 사실 그들의 문파는 유명무실했다. 그동안 살검회 소회주인 도건의 위세를 업은 것뿐이니까. 도건만 아니었다면 그들은 감히 더 큰 문파인 흑검문 소문주를 건드리지 못했을 것이다.

사실 저들이 그렇게 제멋대로였던 이유는 도건의 비호도 있었으나 주석하가 어리숙하게 행동했기 때문이었다. 그동안 빌빌거리면서 한 번도 저들에게 대들지 못했으니 그를 밥으로 여긴 것도 당연했다.

“왔어?”

주석하가 손을 흔들자 소공자회 네 명이 자리를 만들어줬다.

“하하, 한턱내야지. 아무나 유명 인사가 되는 게 아니잖아?”

친근한 십년지기처럼 그에게 말을 걸어왔다. 일단 주석하도 그들의 인사를 받아주었다.

“그런데 네가 검우방주를 이겼다며? 야, 속 시원하게 털어놓아 봐. 무슨 수작을 부렸는지.”

“수작 부린 적 없는데?”

“이 자식이! 너, 도건이 없다고 우리와 맞먹으려 하는데…… 알지? 괜히 목에 힘주면 혼난다?”

서로 대화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예전의 분위기로 돌아가 버렸다. 밖에서는 덕양 최강고수라 모두가 설설 기지만 아직도 소공자회에서는 과거에 얻어터지던 한심한 녀석으로 보이나 보다.

‘이것들을 어떻게 처리하지?’

주석하는 소공자회를 계속 내버려 둘 생각이 없었다. 이제 흑검문이 덕양 최강으로 올라선 데다 앞으로 흑검문은 정사지간으로 중립을 유지해야 하기에 흑도 소공자회 모임은 그에게 쓸모가 없었다.

“크크, 이 녀석! 긴장하긴! 이 형님이 안 잡아먹는다.”

“유명해졌다더니 여전히 쪼는 건 똑같네.”

“일단 큰절부터 한 방 박지? 네 녀석 키운 게 우리 아니냐?”

주석하가 가만히 있자 녀석들이 마음 놓고 평소처럼 장난을 일삼았다. 그 가운데 가장 심한 녀석은 소공자회에서 도건 다음의 권력자이자 항상 그를 괴롭히던 이홍이란 자였다.

이홍은 불과 십여 명으로 구성된 청살파의 이인자로 무공도 평범했다. 이름 없는 문파인 청살파의 이인자가 이곳 소공자회에서도 이인자가 된 이유는 도건에게 충성을 다했기 때문이다.

도건이 사라진 지금도 예전의 습관을 버리지 못하고 자신이 소공자회를 이끌어가는 것처럼 행동하고 있었다.

보다 못한 주석하의 눈빛이 싸늘하게 식었다.

“이홍! 넌 내가 뭐로 보이냐?”

“이 새끼 뭔 소리야? 너 주석하잖아?”

“그래, 주석하. 그러면 내가 누구지?”

“너, 흑검문 소문주잖아?”

여전히 이홍은 주석하의 의도를 눈치채지 못하고 실실 웃으며 심기를 건드렸다.

이렇게 눈치도 없는 자식이 어떻게 지금까지 도건 밑에서 열심히 기었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주석하는 목소리를 낮추고 또박또박 말했다.

“흑검문은…… 이제 덕양 최고의 문파다. 그렇지?”

“크크, 당연히 그렇지.”

“그 흑검문의 소문주가 바로 나다.”

“그래, 누가 아니랬…….”

무심코 말을 받던 이홍이 흠칫 놀라 입을 다물었다. 갑자기 묵직해진 주석하의 목소리와 그의 음산한 표정, 그리고 떠오른 흑검문의 위명……. 그제야 눈앞의 인물이 예전의 주석하가 아니란 사실을 깨달았다.

“그…… 그게…….”

“앞으로 착하게 살아라. 오늘부로 소공자회는 해산한다.”

주석하는 단호하게 선언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 이 자식 봐라?”

“쫌 컸다고 눈에 뵈는 게 없어?”

소공자회 녀석들이 분노를 폭발하며 벌떡 일어났다.

급기야 이홍은 뒤에서 주석하에게 주먹을 날렸다.

턱!

순간 주석하는 날아오는 이홍의 주먹을 손으로 잡았다. 지금도 별달리 내공을 운기하지 않은 상황이라 평소와 마찬가지건만 예전에는 이 주먹을 왜 그리 겁냈던 걸까.

“이, 이놈이!”

주먹을 잡힌 이홍이 바락바락 악을 쓰며 주석하를 노려보았다.

주석하는 천천히 내력을 끌어올렸다. 사실상 무림인이라 볼 수 없는 이들에게 굳이 엄청난 힘을 보여줄 필요가 있을까. 약간의 내공이면 충분했다.

주석하가 손을 꽉 쥐자 이홍이 비명을 지르며 통증을 호소했다.

“으아악! 이, 이놈이 힘세다고…….”

이홍은 주변 동료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하지만 아무도 꿈쩍할 수 없었다. 그들 또한 이제 주석하가 누구인지 본능적으로 깨닫기 시작했다. 주석하는 덕양 최강고수였다. 감히 그들이 상대할 엄두조차 낼 수 없는. 주석하가 호랑이라면 그들은 고양이…… 아니 쥐새끼였다.

“아프냐?”

전혀 힘을 쓰지 않은 듯 주석하가 편안한 표정으로 물었다.

여전히 제대로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이홍이 다시 발악했다.

“감히 나를 엿 먹여? 도건 형님이 없다고 네놈이 이 소공자회를 날로 먹으려 들어?”

“아직 정신 못 차렸네!”

지금 그의 행동이 그렇게 비치는 건가? 그는 소공자회에 조금의 미련도 갖고 있지 않건만. 실소가 절로 새어 나왔다. 이놈은 오늘 완전히 실수한 거다.

으드득-

주석하가 쥔 손에서 뼈가 으스러지는 소리가 났다.

“으아악!”

이홍이 비명을 지르며 고통에 날뛰었다.

주석하가 손을 놓자 일그러진 이홍의 손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홍은 아픔 때문에 방방 뛰었고 다른 세 사람은 두려운 시선으로 주석하를 살폈다. 과연 덕양 최강고수라던 소문은 진실이었다.

“내가 분명히 말했다. 소공자회는 해산한다!”

주석하는 또박또박 말하고는 눈빛으로 그들의 동의를 물었다.

겁에 질린 세 사람이 먼저 고개를 끄덕였다. 이홍 또한 상황을 인지하고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지금 꼬리를 내리지 않으면 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엄습했다.

그때 바깥에서 소란이 일었다.

마무리 지으려던 주석하가 멈칫하는 사이 점소이가 빠르게 올라왔다.

“소문주님! 큰일 났습니다!”

“뭔데?”

“밖에…… 비적 떼가 나타났습니다.”

주석하는 미간을 찌푸렸다. 하필 지금 웬 비적일까?

덕양에는 주요 흑도 문파가 네 곳이다. 흑검문, 적혈방, 살검회, 혈랑곡. 이 가운데 혈랑곡은 비적 무리다.

혈랑곡은 말을 타고 떼를 지어 다니면서 약탈을 일삼았다. 하지만 덕양 중심가를 습격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었다. 그동안에는 정파 문파들이 연합해서 혈랑곡의 침입을 방어했기 때문이다.

혈랑곡이 갑자기 등장한 이유는 아마도 덕양의 백도 문파가 봉문했다는 소식 때문일 것이다. 정파를 봉문해서 좋다고 생각했더니 엉뚱한 방향으로 일이 터졌다.

“몇이나 되지?”

“그게…… 이십여 명입니다.”

오늘 습격한 규모는 크지 않았다. 하지만 마을 사람들이 비적에 대항할 재간은 없다. 그만큼 이들은 잔인했다.

이제는 비적에게서 마을을 보호하는 일을 흑검문이 맡아야 하나? 뭔가 공교로운데?

한숨을 내쉰 주석하는 소공자회 사람들에게 한마디 하고는 몸을 돌렸다.

“너희들도 따라와라!”

**

백화루 앞 거리는 아비규환이었다.

무려 십여 필의 말이 떼 지어 거리를 오가며 흉흉한 기세로 위협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겁에 질려 피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흡사 전쟁이 벌어진 순간 같았다.

“으하하하! 이것들아! 혈랑이 왔다!”

사람들이 경기를 일으키며 자지러졌다. 그만큼 혈랑곡의 악명은 높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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