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화 혈랑곡 (1)
주석하는 거리의 풍경에 쓴웃음을 삼켰다. 전생 오 년 동안 이보다 훨씬 끔찍한 참상을 많이 접했기에 지금 거리의 풍경은 그리 놀랍지 않았다.
하지만 이곳이 그가 사는 마을이란 사실이 가슴을 아프게 했다. 지금 혈랑곡 비적에게 위협받아 겁에 질린 사람들은 대부분 그와 안면이 있었다. 비적에게 다쳐 신음하는 사람도 그와 인사를 나눴던 사람들이었다.
거리에 나오는 순간 주석하는 사람들의 바람을 느꼈다. 모두 그가 활약해서 비적을 쫓아내 주기를 기대하고 있었다. 만일 그 기대를 충족하지 못한다면 흑검문은 욕을 먹을 게 뻔했다. 정파를 봉문하게 만들어 이 사태를 초래했다고 말이다.
“정파가 문을 닫자마자 이런 일이 벌어지다니…….”
뭔가 공교롭다는 기분이 들었으나 일단 지금 닥친 문제부터 해결해야 했다.
안면을 찌푸리며 주석하는 천천히 거리 중간으로 걸어 나갔다. 흑검문을 덕양 최고의 문파로 만든 후 이제부터는 놀고먹을 일만 남았다고 좋아하고 있었는데 그의 예상과 다르게 흘러갔다. 이래서야 과연 편안한 생활이 오기나 하는 걸까.
주석하는 뒤쪽의 백화루를 힐끔 쳐다봤다. 백화루를 소유하고 현금을 긁어모으는 미래 계획에 이런 골치 아픈 사건은 생각지 않았는데…….
“하아!”
거리 한중간에서 한숨을 길게 쉬고 주석하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위험하다고 외치던 마을 사람들이 그를 알아보고 응원을 보냈다.
“소문주님, 혈랑곡을 없애주세요!”
“흑검문이 혈랑곡을 때려 잡아주세요!”
그들의 간곡한 바람이 눈처럼 흩날리며 쏟아졌다.
덕양의 패권을 차지한 흑검문이 마주친 최초의 숙명이다.
“어쩔 수 없구나.”
황제도 백성의 굶주림을 해결하지 못하면 비난의 대상이 되는데 하물며 흑검문이야 더 말할 필요가 있을까.
아무리 같은 흑도라지만 저런 녀석들이 마을에서 약탈을 일삼는 행위를 두고 볼 수는 없었다.
주석하는 백화루 입구에서 쳐다보고 있는 소공자회의 네 녀석을 향해 소리쳤다.
“보고 배워라!”
고함을 지른 후 주석하는 길 중앙에 서서 내력을 끌어올렸다. 저쪽에서 비적들이 말을 타고 몰려왔다. 저놈들은 이렇게 거리를 누비며 사람들을 협박하다가 목표한 점포나 집으로 들어가 약탈을 일삼았다.
십여 필의 말이 쏜살같이 달려오는 가운데 앞에서 달리던 한 녀석이 고래고래 소리쳤다.
“애송이! 비켜라!”
한껏 위압감을 과시하며 장난치듯 말채찍을 사람에게 휘두르는 장면을 본 주석하의 눈썹이 꿈틀했다.
‘저놈부터 잡아야겠어.’
주석하는 단전에 숨은 내력을 깨우며 한쪽 손으로 내력을 불어넣었다. 말이 달려오는 시간 동안 주석하의 손이 천천히 달아올랐다.
말을 몰며 사람들을 위협하던 비적이 주석하를 발견했다. 대로를 가로막은 주석하의 행동을 가소롭게 여긴 그는 버럭 소리를 지르며 더욱 박차를 가했다.
“이놈! 황천에 가고 싶으냐?”
말로 짓밟을 듯 달려들던 녀석이 주석하를 스쳐 지나며 채찍을 휘둘렀다.
턱!
순간 주석하의 손이 눈에 보이지 않을 만큼 빨리 움직이며 채찍을 붙잡았다.
“어?”
말을 탄 녀석은 놀랄 틈도 없이 본능적으로 채찍을 끌어당겼다. 예상치 못한 전개에 녀석은 다른 방법을 생각할 여지가 없었다. 달리는 말로 짓뭉개지 않은 것만도 많이 봐준 것이었다.
주석하는 손에 잡은 채찍을 힘껏 끌어당겼다.
“커흑!”
채찍을 놓지 못한 녀석이 말에서 붕 떠올라 땅바닥에 처박혔다. 말에서 떨어진 녀석은 충격이 컸던 듯 곧바로 일어나지 못했다.
동료 한 명이 쓰러지자 거리를 질주하던 나머지 말들이 주석하에게 몰려왔다. 녀석들은 주석하의 주위를 빙빙 돌려서 위협했다.
비적 가운데 대장으로 보이는 뚱뚱한 녀석이 말을 몰면서 소리쳤다.
“네놈은 누구냐?”
“나? 흑검문 소문주!”
“오호! 주격 그놈의 아들이구나.”
뚱뚱한 녀석은 주격을 만난 적이 있는 모양이었다. 주석하를 위협하면서 녀석이 다시 소리쳤다.
“주격도 내 앞에서는 꼼짝 못 하거늘 감히 그 아들이 나를 노려봐?”
주석하는 거들먹거리는 녀석에게 비웃음을 보냈다. 그자는 남들보다 제법 몸집이 크고 탐욕스럽게 생겼다. 대략 그의 아버지와 같은 나이, 아마도 혈랑곡에서 지위가 확고한 자일 것이다.
“혈랑곡주냐?”
“흐흐, 그렇다! 알았으면 무릎을 꿇어라!”
상대가 혈랑곡주라니 오히려 처리하기 편해졌다. 대장을 제압하면 나머지 녀석들은 오합지졸일 뿐이니.
주석하는 혈랑곡주를 노려보았다.
“경고한다! 덕양에서 떠나라!”
“미친 자식! 세상이 어떻게 된 거야? 흑검문 조무래기마저 설치다니!”
혈랑곡주가 가소롭다는 웃음을 터트리며 그를 놀리듯 빙빙 돌았다.
주석하는 주위를 도는 여러 필의 말을 노려보다가 가장 가까이 접근하여 건방을 떠는 녀석을 향해 가볍게 일장을 내리쳤다.
퍼억!
말 한 마리가 맥을 못 추고 쓰러지면서 말에 탄 녀석이 바닥에 나뒹굴었다. 갑작스러운 변화에 혈랑곡주의 분노가 폭발했다.
“저놈을 찢어 죽여라!”
히이이잉-
혈랑곡주가 앞장서고 십여 필의 말이 우르르 몰려갔다.
무슨 짓을 하는 걸까? 그들은 거리를 질주하며 주석하와 거리를 벌리더니 다시 방향을 틀었다.
투다닥- 투다닥-
말들이 열을 형성하며 주석하를 향해 전속력으로 질주해왔다. 말들은 주석하를 곧바로 짓밟을 듯 거침이 없었다. 그 기세는 맹렬한 파도와 같아 거리를 집어삼킬 듯했다.
이 광경에 사람들이 사색이 됐다.
“얼른 피해!”
“밟히면 죽어!”
주석하를 따라 백화루 앞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소공자회 네 녀석도 이 광경에 신음을 터트렸다.
“으으, 이러다 저 자식 죽는 거 아냐?”
“저놈 죽으면 공짜 술이 날아가는데!”
“저 자식! 객기 부리다가 뒈지지.”
정작 주석하는 다가오는 말 떼를 노려보며 차분하게 내력을 운기했다. 달려오는 말과 상대할 일이 생기리라고는 꿈에도 몰랐다. 이번 생도 만만찮게 험하구나!
맨 앞에서 질주하는 인물은 혈랑곡주였다. 그 기세는 하늘을 찔렀다.
“죽어!”
혈랑곡주의 말이 주석하를 덮쳤다.
“우아아아!”
수십 필의 말을 홀로 가로막고 오연하게 버틴 한 남자의 위세는 더욱 대단했다. 사람들은 그 장엄한 광경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 순간 주석하는 두 팔을 앞으로 뻗으며 힘껏 일장을 가격했다. 지금까지 그는 장법을 제대로 배운 적이 없었다. 하지만 본능적으로 내력을 이용해서 말을 공격할 수 있으리라 여겼다.
그는 내력을 두 손에 집중시켜 외부로 분출했다. 그의 손바닥 앞으로 강력한 호신강기막이 뿌려졌다.
콰아앙-
주석하는 두 다리로 지탱하면서 자신을 덮치는 말 떼를 향해 장력을 힘껏 뿜어냈다.
히이이잉-
아비규환!
장력에 휩쓸린 선두의 말이 달려오던 기세를 꺾으면서 주춤하자 뒤에서 달려오던 말이 충돌했다. 순식간에 장내는 아수라장이 됐다. 십여 필의 말이 서로 엉키고 말에 탔던 자들은 낙마하여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우와아아!”
인간이 아니었다. 신이었다!
사람들은 생각지도 못한 엄청난 광경에 탄성마저 잃었다. 십여 필의 말이 한 사람을 짓밟으려고 달려들었다가 도리어 말이 튕겨 나가며 난장판이 되는 놀라운 광경은 너무나 비현실적이었다.
정작 주석하는 눈도 깜박하지 않고 여전히 두 손을 앞으로 뻗은 채 마치 시간이 정지한 듯 그 자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소공자회 녀석들도 입을 쩍 벌린 채 말문을 잃었다. 항상 그들에게 얻어터지던 녀석이 엄청난 무공 신위를 선보이다니! 소문을 믿지 않았던 그들은 지금 주석하를 다시 보게 됐다. 방금까지 그를 놀리고 있었으니 지금도 목이 붙어 있다는 사실을 하늘에 감사드려야 할 판이었다.
“크으으윽!”
주석하의 가공할 장력을 마주했던 충격은 컸다. 어떤 말은 간신히 일어섰으나 어떤 말은 서로 뒤엉키고 다리가 부러져 주저앉았다. 낙마한 자들도 말과 처지가 비슷했다. 절반은 땅에 쓰러져 흐느적거리고 있었고 절반은 얼이 빠져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쿵!
주석하는 발을 구르며 가장 앞에 쓰러져 정신을 못 차리는 혈랑곡주에게 다가갔다.
분노한 혈랑곡주가 괴성을 지르며 그에게 달려들었다.
녀석의 거대한 도가 주석하를 향하는 순간.
철썩!
주석하의 손이 강력한 따귀를 날렸다.
혈랑곡주의 안면이 홱 돌아가고 부러진 이빨이 사방으로 튀면서 얼굴이 피투성이가 됐다.
“우아아!”
구경하던 사람들이 흥분해서 주먹을 꽉 쥐었다.
죄없는 자를 괴롭히는 이런 녀석은 용서할 필요가 없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간신히 깨달은 혈랑곡주의 안색이 하얗게 질리는 순간 주석하의 발이 그대로 녀석의 가슴을 짓밟았다.
“크윽!”
가슴이 밟힌 혈랑곡주는 꼼짝하지 못하고 버둥거렸다. 숨을 쉬기도 힘든 공포가 엄습했다.
으드득-
갈비뼈가 부러지는 소리에 혈랑곡주는 기절하기 일보 직전이었다.
“혈랑곡주! 내가 누구라고?”
“애…… 애송이……, 크윽!”
재차 가해지는 발힘에 혈랑곡주는 신음을 마구잡이로 토해냈다. 버둥거리던 혈랑곡주의 몸에서 점차 힘이 빠져나갔다.
“내가 누구라고?”
“흐…… 흑검문 소문주…….”
“내가 네놈의 주인이다!”
“크으윽!”
혈랑곡주는 고통 속에 발버둥 쳤다. 그제야 그는 주석하가 덕양에 일찍이 없던 고수란 사실을 몸소 깨달았다. 게다가 이자는 아버지 주격과 달리 잔인하기까지 했다.
“여기에 온 이유는?”
“시, 식량과 생필품을 구하러…….”
“하필이면 왜 오늘이지? 최근에 혈랑대는 마을에 직접 들어오지 않았을 텐데?”
주석하의 질문에 혈랑곡주가 대답을 회피했다. 주석하는 뭔가 숨겨진 우여곡절이 있음을 눈치챘다.
뿌드득-
주석하가 발을 비비자 다시 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났다. 혈랑곡주는 고통에 비명을 질렀다. 옆에 쓰러진 다른 비적들도 사색이 되어 벌벌 떨었다.
“모…… 모른다!”
“모르긴 뭘 몰라. 모르면 살려둘 가치가 없지.”
콰직-
주석하가 발을 굴러 혈랑곡주의 목을 밟았다. 버둥거리던 혈랑곡주의 움직임이 서서히 잠잠해졌다. 사천 일대에서 이름을 날리던 비적 혈랑곡의 곡주가 어이없게 죽었다.
구경꾼들이 호흡을 멈췄다. 믿기지 않는 일이 일어났다. 혈랑곡주가 누구인가. 일대를 두려움에 떨게 하던 비적의 우두머리 아니던가.
혈랑곡 부하들은 곡주의 죽음에 분개하기는커녕 두려움에 몸을 떨었다.
저벅-
겁에 질린 비적들이 바닥을 기며 물러났다.
주석하는 걸음을 옮겨 그 뒤에 쓰러져 있던 다른 녀석의 가슴을 짓밟았다.
“네놈은 알겠지? 누가 사주했지?”
“그, 그게…….”
“모르는군!”
“으아악!”
녀석이 주저하는 순간 주석하는 바로 짓밟았다. 녀석이 비명을 지르며 숨을 거뒀다.
이 정도 위협했으면 순순히 자백하려나? 그가 주위를 둘러보는 순간 여기저기서 실토가 튀어나왔다.
“대…… 대협! 그, 그게…… 백호문의 현현자가…….”
어? 이게 무슨 소리지? 주석하가 노려보자 사색이 된 녀석이 입을 열었다.
혈랑곡에 모인 비적 떼는 인근 마을을 약탈했다. 그들은 가끔 덕양에도 침입하곤 했었는데 그때마다 백호문과 검우방 등의 반격으로 쫓겨 가곤 했다. 그러다 보니 혈랑곡은 덕양의 정파와 앙숙이 되었고 쉽게 덕양을 침입하지 못했다.
최근에 정파가 봉문하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흑도 문파만 있는 덕양은 그들에게 좋은 먹잇감이었다. 그때 백호문의 책사인 현현자가 은밀하게 제의했다. 덕양을 약탈하라고.
혈랑곡주는 현현자의 제의를 받아들여 덕양을 급습했다.
“현현자 이놈이…….”
주석하는 현현자의 수법을 눈치챌 수 있었다. 정파가 봉문하자마자 마을이 비적의 손에 약탈당하면 사람들은 흑검문을 비난할 수밖에 없다. 그들은 마을을 돌봐주던 정파를 그리워하게 되고 봉문을 풀어야 한다는 여론을 형성할 것이다.
이래서 책사인가. 문파가 살려고 마을에 비적을 끌어들이다니!
주석하는 그들의 계략에 혀를 내둘렀다. 이놈들을 내버려 두어서는 안 된다. 오래지 않아 화근을 불러올 놈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