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검천하-40화 (40/273)

40화 혈랑곡 (2)

주석하가 혈랑곡 인물을 심문하는 사이 사람들의 술렁임이 심해졌다. 모두가 경악할 사안이었다.

“제대로 말해! 오늘 혈랑곡이 이곳을 약탈한 이유를.”

혈랑곡 인물이 고통을 삼키며 다시 대답했다.

“대, 대협 살려주십시오. 배…… 백호문의 현현자가 봉문을 풀려면 혈랑곡이 마을에서 난리를 쳐야 한다고 해서…… 백호문의 의뢰를 받았습니다. 저희가 눈이 멀어서…….”지켜보던 사람들이 경악하여 웅성거렸다.

지금까지 백호문을 비롯한 정파 연합이 마을을 보호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반대로 흑도 문파는 돈을 갈취하는 나쁜 무리라는 인식이 강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어느 쪽에서 보호를 받든 비용은 비슷했다.

그런데 뿌리 깊은 관념은 정파의 손을 들었었다. 정파는 협의를 저버릴 리 없다고 생각했다,

“이게 무슨 소리지?”

“백호문이 혈랑곡을 뒤에서 조종했다는 건가?”

“백호문의 뒤에는 정파 연합이 있지 않나?”

사람들이 웅성대면서 소란이 점점 커졌다.

주석하가 녀석의 가슴을 밟은 다리에 조금 더 힘을 가하며 물었다.

“이 년 전 벌어졌던 마을 습격은 어떻게 된 거냐?”

“그때도 백호문에서 사주한 겁니다. 그때 마을을 습격하고 정파에서 수고비를 받았는데……. 크윽!”

분노한 주석하가 가슴을 짓누르자 녀석이 신음을 터트렸다.

사람들은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백호문이 그럴 리가!”

“지금까지 계속 우리를 속였다니!”

“정파 쪽이 나쁜 놈들이었어!”

사실 정파든 사파든 문파를 운영하고 유지하려면 어쩔 수 없는 부분이 있다. 드는 비용도 마찬가지다. 단지 그것을 사람들로부터 어떻게 뜯어내느냐의 차이일 뿐.

사람들은 지금까지 정파에게 속았다는 사실에 분개했다.

이 정도면 충분한가? 주석하는 사람들을 향해 손을 휘휘 저었다.

“혈랑대 놈들을 묶어서 관가로 압송합시다!”

사람들이 밧줄을 가져오고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한 놈들을 붙잡았다. 거칠게 반항하는 놈은 주석하가 가볍게 한 대 쳐주었다.

압도적인 주석하의 무위를 목격했던 혈랑곡 비적들은 감히 도망칠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혈랑곡주가 어이없이 죽었으니 사기가 꺾이고 흉흉한 민심을 보니 위축된 까닭이다.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순식간에 십여 필의 말을 진정시키고 혈랑곡 비적을 모두 포박했다.

주석하는 사람들의 감사를 받으며 뿌듯한 기분에 목을 빳빳하게 세웠다.

‘그래! 이 맛에 사는 거지.’

예전에는 빌빌거리며 간신히 목숨을 부지했다면, 그러다가 절벽 아래로 떨어졌었다면 이제는 나름대로 괜찮은 시간이 자주 있었다. 얼마 전 비무 대결에서 승리한 일이나 오늘처럼 도적을 잡고 칭찬받는 일이나.

뿌듯한 기분으로 사람들에게 화답하던 주석하의 눈에 흑도 소공자회 네 사람이 들어왔다.

주석하가 손가락을 까닥거리자 네 사람이 기겁해서 후다닥 뛰어왔다.

“허억! 소, 소문주님!”

이 녀석들이 언제부터 존칭을 썼다고. 방금 보인 신위에 놀라 이놈들 또한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확실히 소문으로 듣는 것과 직접 눈으로 보는 것의 차이는 컸다. 그제야 그들은 주석하가 지금까지 봤던 다른 무림인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강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특히 오늘 손을 다친 이홍은 주석하를 향해 비굴한 미소를 연발하며 연신 허리를 굽신댔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남아 있던 반발심이 눈 녹듯 사라진 자리에 지금은 오히려 충성심이 자리 잡았다.

“내가 말한 것 기억하지? 오늘부로 소공자회는 해산한다.”

“암요, 암요.”

눈치 빠른 다른 녀석들도 동시에 허리를 숙였다.

“앞으로 바르게 살아라.”

주석하가 녀석들의 어깨를 툭툭치고는 다시 백화루로 들어갔다.

사람들은 백화루를 둘러싸고 연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흑검문 소문주가 완전 인물이네!”

“알고 보니 흑검문이 우리를 도와주고 있었어!”

“앞으로 백화루를 많이 이용하자고!”

“백화루는 흑검문 소유가 아닌데?”

“어쨌든 조금은 흑검문에 도움 되겠지. 게다가 소문주가 자주 오시잖나? 힘든 일 있으면 부탁해.”

덕양의 분위기가 바뀌는 순간이었다.

덕양 최강고수 검우방주를 꺾은 새로운 영웅으로 흑검문 소문주인 주석하가 떠올랐다. 주석하의 가치가 뜨면서 흑검문도 덩달아 크게 뛰었다.

덕양에서 흑검문은 최고의 문파로 올라섰다. 흑검문에 대항할 문파는 정과 사를 막론하고 사라졌고 사람들의 인심 또한 흑검문을 지지했다.

사람들의 지지는 주석하를 더욱 으쓱하게 했다.

**

백호문의 부문주 선우청과 책사인 현현자는 머리를 싸매고 있었다.

꼼짝없이 오 년간 봉문하게 생겼으니 난국을 수습해야 했다. 무공을 수련하는 셈 치고 문을 닫은 기간 동안 전 제자가 무공 연마에 매진한다면 오 년 후에는 엄청난 실력을 지닌 문파로 다시 태어날 수도 있다.

그들이 진정한 무림인이었다면, 또 제자들의 무공 향상이 최우선이었다면 순순히 봉문을 받아들였을 것이다. 하지만 두 사람은 그런 인물이 아니었다.

선우청은 전임 문주가 죽고 막 권한을 이어받았기에 절대로 봉문하고 싶지 않았다. 현현자는 욕심이 많았고 사리사욕에 물든 자였다. 문파가 문을 닫으면 책사가 할 일이 사라지지 않는가. 자칫 책사 자리에서 쫓겨날 처지가 되자 현현자는 전전긍긍한 상태였다.

이런 두 사람이었기에 지금까지 무리해서 일을 벌였다.

“형님이 백호사협을 보내지만 않았어도…….”

아쉬움이 가득한 선우청이 현현자를 아니꼽게 흘겨보았다. 문파의 대소사를 현현자가 관리했으니 백호사협을 흑검문에 파견하는 실수 또한 현현자의 머리에서 나왔을 것이다.

현현자는 선우청의 원망을 알아챘다.

‘백호사협을 보내지 않았다면 문주도 죽지 않았을 테니 네가 문주 자리에 오를 일도 없었겠지.’

현현자는 내심 상대를 비난하며 조심스럽게 변명했다.

“그보다는 혈혼도객을 습격해서 출전자를 상해하려던 작전이 문제였습니다.”

선우청은 현현자의 내심을 눈치채고 한숨을 내쉬었다.

‘이 자식을 확 잘라버려?’

쫓아내고 싶은 마음이 꿀떡이었으나 선우청은 간신히 마음을 달랬다. 지금은 위기라 순간적인 감정에 잡혀 행동할 때가 아니었다.

“어쨌든…… 이제 어떻게 타개해야겠소? 이대로 문을 닫기엔 너무 억울하지 않나?”

“그렇습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덕양에 뿌린 씨앗이 얼만데. 절대 포기할 수 없지요.”

“그렇지, 오 년간 닫고 빼앗긴 이권을 되찾아오려면 다시 수년이 걸릴 거요. 무슨 수를 써서라도 봉문만은 피해야 해.”

두 사람은 의기투합해서 머리를 싸맸다.

현현자는 기회를 잡았다. 어떻게든 책사 자리를 지켜야 밥벌이를 한다. 그것도 어려울 때 빛을 발하는 계책을 생각해내면 책사로서의 가치도 올라가는 법이다.

“부문주님, 그래서 제가 생각해낸 계책이 있습니다.”

선우청이 기분 나쁜 표정으로 현현자를 노려봤다.

현현자는 금방 자신이 실수했음을 알아차리고 말을 정정했다.

“문주님! 그래서 제가 손을 써두었습니다.”

아직 부문주였음에도 선우청은 문주 호칭을 듣기 좋아했다. 어차피 곧 문주 자리에 정식으로 오를 테니 며칠 일찍 그렇게 부르지 못할 것도 없었다.

문주라는 호칭에 마음이 풀린 선우청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무엇이오?”

“원래 유능한 책사란 일이 잘못되었을 때도 빠져나갈, 두 번째 해결책을 생각해두어야 합니다. 교토삼굴이란 말이 괜히 있는 데 아니지요. 그게 진정한 책사로서…….”

“됐고, 본론만 말하시오.”

“제가 미리 혈랑곡에 언질을 남겼습니다.”

“혈랑곡?”

“부문주, 아니 문주님께선 잘 모르시겠지만 우리 백호문과 혈랑곡은 끈끈한 유대를 유지해 왔습니다.”

현현자가 과거 십여 년간 백호문주와 혈랑곡주 사이에 주고받은 비밀 협정을 털어놓았다.

선우청의 눈이 왕방울만 해졌다. 뼛속까지 정파라고 자처하던 백호문이 흑도와 이런 뒷거래를 주고받았다니!

“아마 지금쯤 혈랑곡에서 대대적으로 약탈을 시작했을 겁니다. 흑검문이야 예전처럼 비적 떼를 본체만체할 거고요. 사람들은 우리 백호문에게 구해달라고 읍소하겠죠.”

“흐음, 놀라운데…….”

“그때 우리는 봉문 중이라 나설 수 없다고 하면 됩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흑검문더러 봉문을 풀라고 요청하겠죠. 어쩔 수 없이 흑검문은 풀어줄 수밖에 없습니다.”전후 관계를 따져보니 확실히 가능성이 있었다. 선우청도 흥분해서 다시 물었다.

“마을 사람들이 움직이지 않으면 어떡하지?”

“그럴 리 없습니다. 약탈로 해결 안 되면 마을 주민 몇 사람을 죽이면 됩니다. 봉문 해제가 될 때까지 계속 죽어 나가면 언젠가는 마을 사람들이 나서게 되어 있습니다.”현현자의 목소리에는 자신감이 넘쳤다.

비록 사람의 목숨이 안타깝긴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이 모든 계획은 백호문을 살리기 위한 것이고 나아가 대의를 위한 일이다.

“곧 소식이 오겠군?”

“그렇습니다. 아마 지금쯤…….”

두 사람이 대화하고 있을 때 외부에서 소란이 들려왔다.

허겁지겁 제자 한 사람이 뛰어왔다. 바로 문 앞에서 보초를 서던 녀석이다.

“부문주님! 책사님!”

급하게 뛰느라 호흡마저 가다듬지 못한 보초에게 현현자가 나무랐다.

“어허, 부문주라니! 이젠 문주님이시다.”

“예? 아, 예! 문주님! 큰일 났습니다.”

“어허, 하늘이 무너지지 않았다면 큰일이 아니니라.”

현현자가 수염을 가다듬으며 조용히 질책했다. 자고로 백호문 책사라면 작은 일에 놀라서는 아니 될 일이다.

“그래, 무슨 일이냐?”

두 사람의 느긋함에 기분이 나빠진 보초가 허탈한 표정으로 알렸다.

“그게…… 하늘이 무너졌는데요?”

“뭐?”

“지금 마을 사람들이 몰려왔습니다.”

“마을 사람들이? 흑검문에 가지 않고 왜 이쪽으로 온 거냐? 이제는 혈랑곡을 흑검문에서 처리해야지. 우리는 상관없느니라.”

기다리던 소식이라고 생각한 현현자는 내심 크게 웃으며 느긋하게 대답했다. 과연 혈랑곡이 약속한 대로 일을 벌인 모양이었다.

“그, 그게…… 사람들이 도움을 요청하러 온 게 아니라…… 화가 나서 몰려왔습니다.”

“화가 나? 문주님, 이래서 이 세상이 엉망인 겁니다. 우둔한 백성은 잘해주면 그걸 권리라고 생각하니까요. 도움을 요청하러 왔다면 정중하게 예의를 지켜야지, 화를 내다니요. 그렇지 않습니까?”

“허허, 그렇소.”

선우청도 비웃음을 머금으며 보초를 노려봤다.

안절부절못한 보초가 두 사람에게 애걸했다.

“어서 나가보셔야 합니다.”

“어허, 거참. 불쌍한 사람을 못 본 척하는 것도 의로운 일이 아니니 나가보셔야겠습니다. 마을 사람들이 문주님의 덕을 칭송할 겁니다.”

현현자가 먼저 일어서자 선우청은 마지못해 따라 일어나 걸음을 옮겼다.

몇 걸음 옮기기도 전에 마을 사람들이 밀어닥쳤다.

“백호문주가 누구냐! 나와라!”

손에 호미와 괭이를 든 사람들의 기세가 흉흉했다.

이상한 낌새를 느낀 현현자가 대표로 보이는 자에게 물었다. 손에 낫을 들고 가장 앞에서 소리치는 청년이었다.

“무슨 일이냐? 여기가 어디라고 함부로 들어오는 거냐?”

“네놈이 문주냐?”

“어허, 감히 막말을 일삼다니. 문주님 이자를 어떻게 할까요?”

현현자는 교묘하게 선우청에게 떠넘기고 자신은 뒤로 쏙 빠졌다.

“내가 문주요. 무슨 일이오?”

선우청은 기분이 좋았다. 처음으로 대외적으로 자신을 문주라고 칭했으니까.

“백호문이 혈랑곡과 작당해서 마을을 약탈하려 한 짓이 사실이냐?”

생각지도 못한 질책이 날아들자 선우청은 당황해서 말문이 막혔다. 하지만 역시 일파의 종사답게 금방 안색을 수습하고 현현자와 눈빛을 교환하며 조용히 물었다.

“그게 무슨 말이오?”

“이미 혈랑곡에서 다 털어놓았다! 오늘 약탈도, 과거의 약탈도 혈랑곡과 백호문이 서로 짜고 작당했다던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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