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화 혈랑곡 (3)
선우청과 현현자는 일생을 살아오면서 지금처럼 당황한 적이 없었다.
선우청은 현현자에게 계속 눈치를 줬다. 혈랑곡을 끌어들인 일은 자신과 무관하니 알아서 처리하라는 뜻이었다.
현현자도 생사를 걸고, 아니 책사 자리를 걸고 해결할 수밖에 없었다.
“자자, 흥분을 가라앉히고 확인해봅시다. 혈랑곡의 누가 말했소?”
“지금 이게 흥분을 가라앉힐 때요?”
마을 사람들이 낫과 농기구를 들고 시위하듯 윽박질렀다. 이들은 평소 현현자가 상대하던, 머리를 굴리며 대화하던 사람들이 아니었다. 감정에 휘말리고 이성보다 감정이 앞서는 일반 사람들이었다.
몇 번이고 다독이며 해명했으나 현현자의 말은 전혀 먹히지 않았다. 적당히 진실을 감추고 말로 현혹하는 그런 전술이 흥분한 사람들에게 먹힐 리 만무했다.
“그게 전부 혈랑곡에서 우리 백호문을 제거하려고 하는 짓이오.”
“거짓말 마라. 혈랑곡에서 털어놓았다. 가증스럽게도 마을을 약탈한 백호문을 좋다고 떠받들었다니! 천벌을 받을 놈들!”
“저놈들도 혈랑곡이랑 같은 놈들이야!”
“문주부터 끌어내라!”
마을 사람들의 분노가 점점 커졌다.
당황한 현현자가 어떻게든 해명해보려고 노력할 때였다.
옆에 있던 선우청은 점점 인내심을 상실했다. 문주가 되었다고 축하해도 모자랄 판에 감히 그를 비난하다니. 이곳이 어디인가. 수십 년간 덕양을 수호해 온 백호문이 아닌가.
무림 문파에 보통 사람이 몰려와서 위협하다니! 감히 쥐 떼가 몰려와서 호랑이를 비난하다니! 그 위협에 굴복하면 백호문은 강호에서 얼굴을 들지 못할 것이다.
마음이 상한 선우청은 부하에게 소리쳤다.
“뭐 하는 거냐? 저들을 쫓아내라! 말도 안 되는 거짓을 퍼트리고 있는 놈들을 우리가 상대할 이유가 없다!”
선우청의 결정에 백호문 제자들이 우르르 몰려나와 마을 사람들을 끌어내기 시작했다.
마을 사람들은 백호문에서 들은 척도 하지 않자 분노가 극에 달했다. 마침 그들 손에는 비록 농기구이지만 무기도 있었다. 순순히 끌려 나갈 수는 없었다.
백호문 제자들의 위협에 떠밀리던 마을 사람들이 밀리지 않으려고 어느 순간 농기구를 휘둘렀다.
어설픈 제자 한 사람이 다쳤다.
“이것들이! 감히 사람을 쳐?”
백호문에서도 인내심이 다할 찰나였다. 가장 앞에 있던 마을 청년이 낫을 들고 선우청을 향해 뛰어들었다.
“이 간악한 자들!”
서걱-
위협을 느낀 선우청이 움찔할 틈도 없이 제자가 검으로 청년을 벴다. 피가 허공으로 크게 튀었고 청년의 몸이 무너졌다.
“백호문이 사람을 죽였다!”
“문주를 잡아라!”
청년의 죽음은 마을 사람들의 분노에 불을 질렀다. 급기야 난장판이 벌어지고 통제 불가능한 상황으로 빠져들었다.
“저들은 폭도다! 가차 없이 처리하라!”
분노한 선우청도 주저하지 않았다. 그는 손수 검을 뽑아 들고 장내에 뛰어들었다. 충성심 깊은 백호문 제자 몇몇이 바로 명령을 수행했다.
일반 사람을 겨냥한 그들의 검은 잔인했다. 순식간에 난장판이 진압되고 마을 사람들은 겁에 질려 무릎을 꿇었다. 일반인이 무림인을 상대하기는 무리였다.
일벌백계가 최선이라 생각한 선우청은 눈앞의 폭도를 향해 검을 내리쳤다. 그의 행동을 몇몇 제자들이 바로 따라 했다.
순식간에 수 명의 사람이 죽임을 당하자 장내에는 공포가 내려앉았다. 겁에 질린 사람들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했다.
수십 명의 사람을 무릎 꿇려놓고 선우청은 기세등등하게 소리쳤다.
“네놈들은 폭도다! 혈랑곡 비적들과 똑같은 놈들이다! 평화로운 덕양을 위해 네놈들은 죽어야 한다!”
선우청의 말은 거침이 없었고 마을 사람들은 분노를 참지 못하면서도 공포에 눌려 차마 경거망동한 행동을 할 수 없었다.
“멈춰라!”
천둥이 치는 듯한 호통이 장내를 뒤흔들었다. 그 소리는 선우청의 귀를 강타했고 마을 사람들에게는 왠지 모를 따뜻함을 안겨줬다. 목소리만으로도 사람들은 누구인지 짐작했다. 그들의 구원자였다.
백호문 정문에서 검은 옷을 입은 한 사람이 걸어들어왔다. 바로 주석하였다.
주석하는 손에 커다란 현판을 들고 있었다. 정문에 달려 있던 백호문을 상징하는 현판이다. 일필휘지의 글씨체가 오늘은 졸렬해 보였다.
“선우청!”
주석하를 발견한 선우청의 안면이 일그러졌다. 이런 순간에 주석하가 나타나다니! 게다가 현판을 들고?
문파의 현판이 내려진 일은 일생일대의 수치가 아니던가.
“주 소문주! 대체 무슨 짓이오? 감히 우리 백호문의 현판을 떼다니!”
비록 주석하가 고수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모두가 보는 앞에서 머리를 숙이는 수치를 당할 수는 없지 않은가. 특히 현판 문제는 명백하게 주석하의 잘못이니 따져야 했다.
“오늘부로 봉문할 테니 당분간 현판이 필요 없지 않나?”
주석하가 능글맞은 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감히, 허튼소리를…….”
“선우청! 봉문하지 않겠다는 소리요?”
주석하의 목소리가 높아지자 선우청은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 저놈이 여기까지 들어왔다면 노림수가 없을 리 없다.
선우청은 급히 현현자를 찾았다.
현현자는 한쪽 구석에 숨은 채 한숨을 내쉬며 자조하는 중이었다. 어떤 상황에서도 마을 사람을 죽이지 말았어야 했다. 강제로 저들을 제압하면 민심을 잃게 된다. 백호문이 정파라면 절대 피해야 할 일이었다.
그런데 그가 말릴 새도 없이 선우청이 일을 저질러버렸다. 평소의 급한 성질이 제대로 사고 친 꼴이었다. 지금 당장 수습할 방법은 현현자에게도 없었다.
“보…… 봉문은…….”
“과연 약속을 헌신짝처럼 버리는구나! 혈랑곡과 연합하여 마을을 약탈하더니 눈에 뵈는 게 없구나!”
주석하의 추상같은 질책에 선우청은 반박을 못 하고 입을 다물었다.
주석하는 무릎을 꿇은 마을 사람들을 향해 소리쳤다.
“여러분! 일어나시오! 백호문은 협의를 숭상하는 문파가 아니오! 저들은 자신의 이익만 챙기는 나쁜 놈들이오! 오늘 이곳에서 죽은 우리의 동료를 생각해보시오!”사람들의 시선이 쓰러져 있는 몇몇 동료를 향했다. 다시 울분이 폭발했다. 비록 백호문이 무림인이고 그들보다 훨씬 강하지만 그들에게는 믿을 구석이 있었다. 그들을 보호해줄 덕양 최강고수 주석하가 있었다.
“와아! 백호문을 몰아내자!”
“덕양에 발을 들이지 못하게 해야 한다!”
사람들의 분노가 하늘을 찔렀다.
그 순간.
콰작!
거대한 현판이 두 동강 났다. 주석하가 현판을 부수어버린 것이다.
“오오오!”
사람들의 함성은 광란의 도가니였다.
현판이 부서지는 순간 백호문도 사실상 운명이 끝났다. 부서진 현판에 선우청은 얼이 빠졌다. 다른 백호문 제자들도 마찬가지였다.
“민심에 따라 백호문은 오늘로 문을 닫는다! 끝까지 백호문에 남을 자만 남아라!”
주석하의 선언에 사람들이 함성을 질렀다.
“와아아, 백호문을 몰아내자!”
현현자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끝났군. 백호문은 재기 불능이야.”
사람들의 함성이 하늘을 찌르자 백호문 제자들도 동요하기 시작했다. 일부는 우르르 몰려나와 마을 사람들 편에 섰다.
“우리도 몰랐습니다. 문주가 혈랑곡과 합작해서 사람들을 괴롭히다니요! 이런 문파에는 몸을 담고 싶지 않습니다!”
마치 무너진 둑이 터지듯 순식간에 백호문 제자들이 마을 사람들 편으로 돌아섰다.
백호문을 사수하는 자들은 부문주인 선우청을 비롯하여 손에 꼽을 정도였다.
“문주는 무릎을 꿇어라!”
주석하가 뚜벅뚜벅 앞으로 걸어갔다. 그의 몸에서 피어나는 무형의 기운에 선우청은 완전히 넋이 나갔다. 주석하는 차원이 다른 고수였다. 감히 저런 고수에게 대들었다니. 선우청은 내심 탄식했으나 되돌릴 방법이 없었다.
“봉문을 피하려고 비적을 불러들이고 그것도 모자라 죄 없는 사람을 죽이다니! 그냥 두고 볼 수 없다!”
서릿발 같은 호통에 선우청은 사색이 됐다.
‘괜히 문주가 되겠다고…….’
선우청은 자신의 행동을 후회했다. 높은 자리는 그만한 책임을 동반한다는 진리를 몰랐다. 과거로 돌아가더라도 문주 자리만은 절대 사양하고 싶었다.
주석하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흐억!”
선우청이 황급히 무릎을 꿇었다. 일파의 문주로서 타인에게 무릎을 꿇는 행동은 사실상 문파의 수장임을 포기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와아!”
마을 사람들의 환호성이 주석하를 응원했다.
흥이 오른 그는 이참에 백호문을 완벽하게 뿌리 뽑겠다고 다짐했다. 백호문이 사라지고, 창무관은 봉문 기간에 제자를 받지 못해 사실상 명맥 유지가 어렵다고 보면 덕양의 주요 정파로는 검우방 만이 남았다.
백호문 와해를 거울삼아 검우방도 함부로 설치지 못할 테니 앞으로 덕양은 평화로워질 터였다.
주석하는 손을 쓱 내밀었다.
그의 의도를 눈치챈 백호문 제자 한 명이 곧바로 검을 건넸다.
주석하는 검을 꽉 쥐고 선우청을 노려보았다.
“흐어억!”
마치 지옥의 사신을 만난 듯 선우청은 부들부들 떨며 눈을 감았다. 이 순간 그는 힘없는 평범한 사람이었다.
‘선우청은 앞으로 다시는 일어서지 못하겠군.’
선우청이 받았을 심적 타격을 추측하며 주석하는 천천히 내력을 검 끝에 집중했다.
그도 검의 위력을 보고 싶었다. 그의 모든 내력을 집중시켜 펼친 흑검육식은 과연 어떤 모습일까. 비록 단전에 잠든 내력 가운데 하나일 뿐이지만 그것만으로도 어마어마했다.
“흑검육식을 보여주겠다!”
사람들이 많으니 한껏 뽐내면서 신위를 펼쳐야 한다. 두고두고 마을에 회자하도록. 이것이 흑검문에도 최선이다.
“하앗!”
그럴싸하게 기합을 지르고 발을 구른 주석하의 신형이 붕 떠올랐다. 동시에 손에 든 검이 허공을 갈랐다.
사람들은 주석하의 검이 선우청의 목을 벤다고 생각했다. 정작 주석하의 검이 향한 곳은 선우청이 아닌 바로 뒤편의 전각이었다.
콰아아앙!
마치 벼락이 내리꽂는 것처럼 주석하의 검이 전각을 갈랐다. 기둥 하나를 벤 것이 아니라 검에서 뻗은 검기가 전각 지붕에서 시작하여 주춧돌까지, 하늘에서 땅까지 앞에 걸리는 것 전부를 갈랐다.
“허어억!”
사람들의 입이 떡 벌어졌다. 모두가 경악해서 소리도 내지 못했다.
보라!
마치 번개가 내리꽂은 듯 거대한 전각이 절반으로 갈라져 무너지는 장면을.
지금까지 덕양에서는 그 누구도 선보인 적이 없는 엄청난 신위였다. 당연히 이곳에 모인 마을 사람들은 이런 어마어마한 장면을 처음 구경했다. 그들은 눈이 튀어나올 듯 놀랐다.
와르르르-
뒤늦게 지붕의 기왓장이 쏟아져 내리고 먼지가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파손된 전각을 쓱 훑어본 주석하는 만족스러운 웃음을 흘리며 검을 손에서 놓았다.
“이게 가능한 일이야?”
“오오! 천하무적 고수가 강림했다!”
“덕양의 신이시여!”
주석하에게 길을 터주면서 사람들이 그를 향해 절을 했다. 현 중원의 패권을 쥔 고수에게는 별것 아닌 장면이었으나 일반 사람에게는 이루 말할 수 없는 감동을 준 사건이었다.
적어도 마을 사람들에게 주석하는 신이 되었고 백호문은 사라져야 할 나쁜 문파로 전락했다.
제자마저 등을 돌린 백호문은 멸문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 당연히 주석하가 부순 현판도 앞으로 필요가 없어졌다.
군중들의 관심을 한몸에 받으면서 따사로운 햇볕을 이고 주석하는 흑검문으로 돌아갔다.
이제야 제대로 목을 세워봤다는 기분이 그를 즐겁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