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화 혈랑곡 (4)
흑검문의 중앙 전각 대청에서는 문주인 주격과 장로인 신옹이 차를 마시고 있었다.
창으로 들어오는 화사한 햇빛이 실내를 부드럽게 밝혔고 솔솔 부는 바람이 기분을 상쾌하게 했다.
방금 우려낸 찻잎을 후후 불어내며 두 사람은 차 맛을 음미했다. 그들이 가장 좋아하는 용정차이건만 오늘따라 맛이 제대로 느껴지지 않았다. 그들의 시선은 정작 차가 아닌 탁자에 놓인 짧은 보고서에 닿아 있었다.
“백호문이 혈랑곡과 합작한 사실이 밝혀졌소.”
“문주님, 예전에 혈랑곡이 습격했을 때 우리가…… 얼마나 욕을 먹었습니까? 혈랑곡에 맞서지 않는다고…… 그때 모든 흑도 문파가 혈랑곡과 한통속이라며 욕을 먹었었죠. 그때 먹은 욕이 너무 많아서 아직도 배가 부릅니다.”두 사람은 막 외부에서 돌아온 제자로부터 덕양 중심가에서 벌어진 일을 보고 받았다. 주석하가 저잣거리에서 혈랑곡을 때려잡아 관가에 넘긴 일과 주민들이 백호문으로 몰려간 일, 마지막으로 주석하가 현판을 부순 일까지.
모두 생각지도 못한 놀라운 사건이었다.
“조금만 머리를 굴려보면 백호문과 혈랑곡 사이에 뭔가를 주고받은 정황을 쉽게 알 수 있는데…… 그동안 사람들은 정파가 그럴 리가 없다며 아예 의심을 거부했지.”
“원래 사람들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습니다. 그게 사람들의 속성이고 앞으로도 변하지 않을 겁니다.”
흑도 문파인 흑검문도 오랜 기간의 누명을 벗었다는 점에서 환영할 일이었다.
다만 두 사람의 염려는 사건을 일으킨 주범 주석하에게 모였다.
“석하가…… 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그러게 말입니다. 소문주께서 갑자기 고수가 되었으니.”
“최근엔 고수였어!”
“아, 그렇지요. 이상한 고수였지요.”
지금 주석하의 무공 수준은 강호로 나가면 별것 아닐지도 모른다. 하지만 작은 마을 덕양에서는 불세출의 고수로 불려도 손색이 없었다.
“정말 어린 시절부터 먹었던 영약이 이제야 효과를 본 것일까?”
“문주님, 정말 영약을 많이 먹였습니까?”
“우리 형편에…… 그럴 리가 없잖나? 그냥 남들 먹는 정도만 먹였을 뿐.”
주석하가 사천일살을 죽였을 때 흐지부지 넘어갔던 의문이 지금 다시 강렬하게 솟구쳤다.
“흐음, 어차피 상관없잖습니까? 굳이 원인이 필요합니까? 결과가 중요할 뿐이죠.”
“하아! 그렇지.”
신옹의 차분한 대답에 주격도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원인이 중요하지는 않다. 주석하가 갑자기 고수가 될 이유가 없다는 사실 정도는 그들 두 사람이 훨씬 잘 알고 있었다. 단지 갑작스러운 변화를 주석하가 심리적으로 받아들이지 못할까 염려해서였다.
다만 별문제 없이 잘 적응한 것처럼 보이니 걱정을 덜었다. 어차피 원인을 알더라도 다시 재현할 수 없을 테니. 그렇지 않았다면 무림에는 하룻밤 사이에 강자로 변신한 인물이 숱하게 많았을 테니까.
주석하에 대한 염려가 문파의 미래로 넘어갔다.
주격이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가?”
“약조한 오십 년이 지나지 않았습니까?”
“그렇긴 하네. 올해가 오십 년이 지난 첫해지. 이젠 모든 제약이 다 사라졌지만…….”
주격의 낯빛은 어두웠다. 그는 허공을 바라보며 부친의 얼굴을 떠올렸다.
언제부터였는지 모른다. 기억하는 어린 시절부터 그는 단 한 차례도 덕양을 벗어난 적이 없었다. 성도에서 사천 지역 흑도 문파 모임이 열렸을 때도 그는 참석하지 않았다. 아니, 참석하지 못했다.
그만이 아니었다. 흑검문 제자 모두가 사실상 덕양을 벗어나지 않았다. 아주 가끔 어쩔 수 없이 제자들이 주변 지역을 방문하기도 했으나 문파의 공식적인 방문은 아니었다.
이 모든 것은 그의 부친이자 주석하 조부의 엄명 때문이었다.
주격의 부친은 대략 오십 년 전 이곳 덕양에 들어와 흑검문을 세우고 규제를 걸었다. 향후 오십 년간 흑검문도는 절대 덕양을 벗어나서는 안 된다고. 덕양 외부의 문파와 교류해서도 안 된다고. 이는 흑검문에서 불문율로 내려왔다.
더 알 수 없는 점은 흑검문이 무림 문파를 표방하면서도 부친은 별도로 무공을 가르치거나 남긴 적이 없었다. 문파를 대표할 특별한 신공이나, 심법, 검법이 사실상 전무했다. 그렇다고 외부로부터 무공을 수혈 받을 수도 없었으니 그야말로 흑검문은 유명무실해졌다.
발전을 꾀하려 해도 제약에 묶여 방법이 없었다.
“이젠 외부로 나가야 할 때 아닙니까? 소문주님께도 그게 도움이 될 테고요.”
신옹의 권유에 주격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난 아직도 아버지의 모습을 기억하네. 부친은 흑검문이 외부와 단절하기를 원하셨어. 난 어쩌면 부친이 엄청난 고수였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네. 그런데도 이곳 덕양에 은거하다시피 하며 작은 문파를 꾸려간 이유가 있을 거야.”
“저도 선친의 모습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렇지, 부친은 항상 우리 흑검문이 무림에 빚을 지고 있다고 말씀하셨네. 그래서 속죄해야 한다고. 그게 무슨 뜻인지 모르지만…….”
한숨을 내쉬던 주격이 조용히 차를 마셨다. 그의 근심이 차의 연기와 함께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얼마 전 남궁천인가…… 남궁세가의 소가주가 왔을 때 말이지. 그날 갑자기 가슴이 쿵 내려앉더군.”
“무엇 때문인지요?”
“기억은 없어. 다만…… 오래전 부친께서 남궁세가를 몇 번 말씀하셨던 것 같단 말이지.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이름인데…… 그날 남궁세가 소가주가 왔다는 말을 듣자 뭔가 막힌 부분이 깨지는 기분이 들었어. 심연에 잠긴 기억을 조심스럽게 꺼내는 당황스러움이랄까…….”
“흑검문이 남궁세가와 인연이 있었습니까?”
“그럴 리가 없잖나? 이름 모를 흑도 문파와 정파 최고의 가문이 엮였을 리가.”
주격은 기억을 더듬었으나 별다른 성과가 없었다. 어느새 마시던 차도 바닥이 났다.
신옹이 용기를 냈다.
“그래도 소인은 소문주께서 더 넓은 세상을 경험하시길 원합니다. 오십 년이 지나 제약이 사라진 마당에 굳이 좁은 덕양에 갇혀 있을 이유가 없습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네만…… 그 아이의 뜻이 문제겠지.”
“소문주님을 믿으세요.”
“그래, 당연히 믿는다……. 누구 아들인데.”
주격은 허허로운 표정으로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는 일평생 이곳에 갇혀 있었던 인생을 돌아보았다. 자식에게만은 이런 인생을 물려주고 싶지 않다는 바람과 한편으로는 바깥세상에 대한 두려움이 뒤섞여 혼란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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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하의 일상은 평온했다.
정사를 대표하던 적혈방과 백호문이 문을 닫은 이후 흑검문이 명실상부하게 최고 문파로 올라서면서 이제는 흑검문에 시비를 걸 문파가 사라졌다. 여기에 마을 사람들의 지지가 더해지자 아무도 흑검문을 건드리지 못했다.
주석하도 지금 상황이 매우 만족스러웠다. 덕양에서는 그가 목을 뻣뻣하게 세우고 다녀도 흉보는 자가 사라졌으니 새로운 삶을 만끽하고 있었다.
이번 생의 목표는 나름 괜찮았다. 백화루를 볼 때마다 앞으로 돈을 모아 백화루를 인수할 꿈에 부풀었다.
“백화루 세 개 정도면…….”
평생 먹고 노는 꿈이 완성된다. 솔직히 무림맹주가 되어봐야 머리만 아프지 않은가.
다만 이런 소박한 삶의 목표를 쉽게 달성하기는 어려울 듯했다. 흑검문이 워낙 모아놓은 자금이 없어서다.
그동안 지역 이권 개입을 자제하면서 단지 문파가 운영될 정도만 벌어들였기에 백화루를 인수할 만큼의 어마어마한 돈이 언제 모일지 까마득했다. 최근에 덕양의 대부분 이권을 인수하고도 그만큼 주격이 보호비를 낮춰버리는 바람에 그의 꿈은 날아가 버렸다.
“흐미, 아까운 것…….”
부친의 뜻을 모르는 바 아니었으나 아깝지 않다면 거짓말이었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머릿속에서 백화루를 지었다가 헐었다가 즐거운 상상에 잡혀 있을 때였다.
“소문주님!”
주석하의 안면이 살짝 일그러졌다.
요 며칠 혈혼도객이 부쩍 자주 그의 처소를 드나들었다. 정확히는 비무 대결이 끝난 이후부터였다. 뭔가 할 말이 있어서 찾아온 혈혼도객은 그의 눈치를 보며 차만 마시다가 돌아갔다.
오늘도 어김없이 때가 되자 혈혼도객이 나타났다.
슬그머니 맞은편에 앉은 혈혼도객이 탁자와 주변을 휙휙 둘러보다가 입을 열었다.
“오늘은 차도 안 주십니까?”
눈치를 보면서 딴소리하는 것을 보니 오늘도 별다른 말을 꺼내지 않을 모양이다.
“이봐, 혈혼도객!”
혈혼도객이 움찔하면서 대답했다.
“예.”
“할 말 있으면 해.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그러지 말고.”
물론 주석하도 대충 짐작하고 있다. 이제 빈객을 들인 목적이 마무리되었으니 떠나겠다는 말이 하고 싶은 거라고. 다만 그날 주석하가 보여준 압도적인 무위에 눌려 쉽게 먼저 말을 꺼내지 못하는 것뿐이다.
한동안 한숨을 내쉬던 혈혼도객이 간신히 입을 열었다.
“으음, 소문주님.”
“왜?”
“저…… 이만 가도 되겠습니까?”
“가봐. 그럼 여기에서 자려고 했어?”
“그…… 그게 아니고요. 흑검문에서 떠나려고요.”
주석하의 시선이 혈혼도객을 쓰윽 훑었다. 저 말을 하는 게 왜 그리 어려운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이곳에 계속 묶어둘 수 없음은 잘 안다.
“갈 테면 가는 거지, 그걸 왜 나에게 허락받으려고 해?”
“그렇지요? 가도 되는 거지요?”
최근 흑검문은 갑자기 일거리가 많아져서 문하 제자를 늘려야 했다. 적혈방과 살검회 사람들을 일부 영입하긴 했으나 그것만으로는 턱없이 부족했다. 그렇다 보니 혈혼도객도 떠나겠다고 말하기 어려웠다.
예전이라면 흑검문에서 누구보다 강하다고 자부하던 혈혼도객이기에 당연히 안하무인으로 굴었을 것이다. 하지만 주석하의 엄청난 신위를 본 이후로는 그런 생각을 아예 접었다. 주석하는 감히 그가 상대할 수 없는 엄청난 고수였으니까.
“그걸 몰라서 물어? 알면서 왜 그래? 뭔가 다른 이유가 있지?”
주석하가 핵심을 짚었다. 최근 혈혼도객의 행동을 보면서 가장 궁금했던 부분이었다.
혈혼도객이 머리를 긁적였다. 피부가 검어서 그런가? 이렇게 행동하는 혈혼도객의 모습은 무시무시한 흑도의 고수가 아닌 어딘지 모르게 덜떨어진 놈처럼 보였다.
“실은…… 경혼심법말입니다.”
“그게 왜?”
“예전에도 말씀드렸다시피 혼천교에서 전수하는 심법과 비슷한 면이 무척 많거든요.”
“그런데?”
“한번 방문해보시지 않으렵니까?”
주석하라고 궁금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의 단전에 잠재된 내력 중 하나가 혼천교에서 전수한 심법으로 형성된 기운과 비슷하다면 어쩌면 이 내력의 근원을 밝힐 수 있을지도 모른다.
게다가 그의 뇌리에 아직도 선명하게 남은 뇌군이라는 말, 뇌군에 대해서도 알아보고 싶었다. 혼천교의 교주인 혼군과 뇌군은 같은 흑도팔군의 일인이니 어쩌면 관련이 있을지도 모르고.
주석하라고 고민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안돼. 힘들어.”
“왜요?”
“그걸 내가 설명해줘야 해?”
“설명 안 해주면 제가 어찌 압니까?”
괜히 말을 꺼내라고 했나? 주석하는 조금 후회하면서 어쩔 수 없이 대답했다.
“난 덕양을 벗어나면 안 돼.”
“왜요?”
“오늘 ‘왜요’가 입에 붙었구나? 하여튼 안 돼.”
주석하는 오래전 주격이 신신당부했던 규칙을 떠올렸다. 흑검문도는 덕양을 벗어나서는 안 된다고. 설사 일이 있어서 나가더라도 곧바로 돌아와야 한다고.
덕분에 그는 태어나서 사천의 중심인 성도를 딱 한 번 가봤다. 그것도 흑도 소공자회에 끌려서.
얼마 전 무정신협과 소화자를 처리하러 양주에 나간 것도 사실 이 규정을 어긴 것이었다. 비록 흑검문의 존립을 위해 어쩔 수 없었다고 홀로 변명하긴 했지만 어쨌든 어긴 것은 사실이었다.
“소문주님, 자고로 영웅이 되려면 도시로 나가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런 시골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지요. 이 기회에 나가보실 생각 없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