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화 풍운채 (1)
“없다.”
딱 자르는 주석하의 대답에 혈혼도객이 한숨을 내쉬었다.
“외부로 나가면 엄청난 미녀도 많을 건데요?”
조금 혹하는 소리이긴 했으나 그런 유혹에 쉽게 넘어갈 주석하는 아니었다. 그에겐 백화루라는 꿈이 있다.
주석하의 시선이 점차 예리해졌다. 혈혼도객 이놈이 왜 이러는 거지?
“말 돌리지 말고 똑바로 이야기해. 나를 혼천교인지 뭔지로 끌고 가려는 이유가 뭐야?”
“그…… 그게 다른 뜻은 없습니다. 오로지 소문주님께 도움 될 것 같아서…….”
주석하는 마시던 찻잔을 톡톡 두드리며 야릇한 미소로 쳐다봤다.
“나를 핫바지로 아는군?”
“아, 아닙니다. 그…… 그게…….”
놀란 듯 경기를 일으키던 혈혼도객이 마지못해 진실을 털어놓았다.
“요즘 혼천교에서 흑도 고수를 모집하고 있습니다. 어느 정도 수준이 되는 사람들은 다 받아들이고 있거든요. 만일 제가 소문주님을 모시고 가면…… 저에게도 승진 기회가 되지요. 소문주님은 엄청난 고수시니까요.”
“흐음, 당신 개인의 영달을 위해 나를 이용하겠다?”
“그, 그게 아니고요. 소문주님의 성장에 도움이 될 것이 확실합니다. 기운이 유사하잖아요? 솔직히 이곳 흑검문에 소문주님의 공력을 제대로 활용할 무공이 어디 있습니까? 흑검육식요? 그건 제대로 된 검법이 아니잖습니까?”
“그 흑검육식이 백호문 전각을 두 조각 내버린 사실은 아나?”
혈혼도객이 입을 닫았다. 비록 흑검육식은 보잘것없지만 주석하가 펼치면 사정이 달랐다.
주석하의 생각도 깊어졌다.
덕양을 벗어나야 할까? 전생에서 흑검문이 멸망한 후 외부로 떠돌았다. 그래서 딱히 바깥세상이 궁금하진 않다. 못 나갈 것도 없지만 덕양을 벗어나지 말라는 흑검문의 규율이 마음에 걸렸다. 나가고 싶지 않지만 못 나가게 하니 괜히 나가야겠다는 청개구리 심보가 문제다.
전생에서는 흑검문이 멸문하여 언제까지 이 규율이 적용되는지, 왜 이 규율이 필요한지 그도 아는 바 없었다. 부친도 딱히 설명해준 적도 없고. 이제는 알아야 할 때가 되었나.
“무공이라…….”
제대로 된 무공을 익히고 싶은 욕망도 있었고 단전의 기운과 혼군의 연관성을 파헤치고 싶은 바람도 있었다. 다만 덕양을 벗어나면 백화루의 주인이 되어 놀고먹겠다는 그의 작은 소망이 사라지게 된다.
삶의 목표와 호기심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던 주석하는 자신의 회귀 비밀을 영원히 묻어두기 어렵다는 생각을 했다. 자신이 어떻게 회귀하게 되었는지 왜 했는지 궁금했다.
“알았어. 문주님께 물어보긴 하지.”
주석하의 응답에 혈혼도객의 안색이 환하게 밝아졌다.
**
주석하의 고민은 예상외로 쉽게 풀렸다.
주격이 흑검문의 규율을 설명해주었기 때문이다. 덕양을 떠나서는 안 된다는 규제가 올해부터 풀려서 외부로 나갈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무려 오십 년이라…… 왜 하필이면 올해지?”
실로 공교롭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어쨌든 갇혔다는 기분이 사라지니 마음이 한결 가벼웠다.
행낭을 꾸린 주석하는 흑검문 정문을 향했다.
정문에는 함께 갈 도수와 혈혼도객이 대기하고 있었다. 혈혼도객은 그를 혼천교까지 데리고 갈 사람이었고 도수는…… 어쩌다 보니 함께 가게 됐다. 물론 그가 가자고 한 게 아니라 도수가 함께 가겠다고 우겼다.
덕양 밖은 맹수가 우글우글해서 반드시 자신이 옆에서 지켜줘야 한다나 어쨌다나.
그들은 무기는 소지하지 않았다. 무림인으로 의심받으면 쓸데없는 분란에 휘말릴 우려가 있어서다. 이는 주격의 뜻이기도 했다.
“무리하지 말고 편하게 다녀오거라.”
주격이 그를 격려했다.
“몇 군데만 둘러보고 금방 돌아오겠습니다.”
주석하도 강호를 전전하며 고생할 생각은 없었다. 집 떠나면 고생이란 말도 있지 않은가. 단전에 숨은 내력의 비밀만 풀면 바로 돌아와서 백화루를 경영할 꿈을 키울 생각이었다.
주격이 어깨를 툭툭 치며 아쉬움을 표했다.
“그래, 좋은 생각이다. 일전에 네 할아버지께서 강호를 떠돌지 말라고 하셨다. 오십 년이 지났어도 명심해야 한다. 자고로 어르신 말씀은 틀리지 않은 게야.”동의하기 어려웠으나 딱히 반박할 필요도 없었다. 곧 돌아올 생각이었으니까.
“그리고…… 만일 남궁세가 사람을 만나면 되도록 피하거라.”
예상 밖의 주문이 들어왔다. 일전에 남궁천과 만나면서 남궁세가에 남달리 좋은 인상을 받았던 터라 이해하기 힘들었다.
“우리가 남궁세가와 해묵은 은원이 있습니까?”
“나도 모른다. 단지 그래야 할 것 같아서다.”
말해주기 싫어서인지 아니면 정말 모르는지 의문이었으나 주석하도 굳이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넓고 넓은 중원에서 남궁세가와 만날 일이 있을까.
“알겠습니다. 마침 제가 가는 곳이 남궁세가가 있는 안휘성과는 떨어져 있으니 만날 일도 방문할 일도 없습니다. 걱정 않으셔도 됩니다.”
주석하의 흔쾌한 대답에 주격이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그럼 잘 다녀오거라.”
주격의 시선이 그의 옆에 선 혈혼도객과 도수를 향했다.
“혈혼도객, 아들을 잘 부탁하네. 도수도 몸 성히 다녀오너라.”
혼자가 아니라 강호 사정에 밝은 혈혼도객이 함께 움직이니 주격은 적잖게 마음이 놓였다.
인사 후 걸음을 옮기는데 주소은이 달려왔다.
“오라버니!”
왜 안 보이나 했더니 뒤늦게 버선발로 뛰어나왔다.
“소은아, 잘 지내. 이 오라버니가 후딱 다녀오마.”
다행히 주소은은 매달리지 않고 순순히 그를 보내주었다. 평소 그를 무척 따르던 그녀를 생각하면 이례적이었다.
주소은의 머리를 한차례 쓰다듬어 준 후 몸을 돌리려는 찰나 주소은이 속삭였다.
“오라버니!”
“응?”
“이번에 나갔다가 혹시…… 창천일룡 대협을 만나면…….”
창천일룡은 남궁천이다.
“그 사람은 왜?”
주소은이 갑자기 얼굴을 붉게 물들이고 몸을 배배 꼬았다. 주석하는 내심 웃음을 터트리며 모른 척 다시 물었다.
“왜 그러느냐?”
주소은이 그를 쏘아보더니 나지막이 속삭였다.
“꼭 흑검문에 다시 들려달라고 전해줘요.”
“알았다.”
그냥 한번 보고 넘어간 운명이었으나 의외로 주소은의 마음에 큰 인상을 새겼던 모양이다. 이 여자가 벌써 시집갈 때가 되었나……. 물론 어린 나이는 아니라지만.
남궁세가와 흑검문이 정사로 나누어져 있음을 생각하면 그녀의 사랑이 이루어질 가능성이 전혀 없기에 주석하는 안타까운 마음을 삼켜야 했다.
주소은에게 살며시 미소를 보낸 후 주석하는 모두에게 인사했다.
“다녀오겠습니다.”
긴 인사가 마무리되고 주석하는 혈혼도객, 도수와 나란히 출발했다. 십팔만 리에 달하는 중원을 고려하면 그가 갈 곳은 코앞이나 마찬가지지만 그래도 몇 달이 걸리는 여정이다. 한동안 집을 떠난다고 생각하니 괜히 코가 시큰거렸다.
“은자는 잘 챙겼어?”
난데없이 도수가 물어왔다.
“당연하지. 목숨줄인데.”
“그거 조심해라. 바깥 동네에는 소매치기 천지다.”
“소매치기쯤이야! 너나 잘해.”
녀석과 아웅다웅하던 주석하는 동생의 부탁을 되새겼다. 주격은 남궁세가와 만나지 말라고 했고 주소은은 남궁천을 만나라고 했다. 세상일이란 알 수 없는 법이라 그의 뜻대로 되란 법은 없으니.
돌아올 때쯤 과연 그는 누구의 말을 들어주게 될까.
걸음을 옮기던 주석하는 뒤를 돌아보았다.
어느새 작아진 흑검문이 보였다. 그 정문 아래에 여전히 그를 바라보고 있는 주격과 주소은이 있었다. 가족의 배웅을 받으며 떠나는 이 길이 생소했다.
전생에는 흑검문이 멸문하고 어쩔 수 없이 덕양을 떠났었다. 그때와는 비교할 수 없는 따뜻한 배웅이다.
다시 돌아왔을 때 그는 어떻게 변해 있을까. 이제 그의 인생은 전생과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접어들었다.
인생이라는 수레바퀴에 치여 몸을 가누지 못했던 전생과 달리 이번에는 스스로가 수레바퀴를 돌리며 전진해 볼 것이다.
주석하는 주먹을 꽉 쥐며 다짐했다.
**
오악의 하나인 섬서성 화산으로 가는 길목에서 주석하는 도수, 혈혼도객과 함께 땀을 흘리고 있었다.
그들의 모습은 상거지가 따로 없었다. 입은 옷이 흑의가 아니고 백의였다면 도저히 눈 뜨고 보지 못할 몰골이었을 것이다.
“아직 멀었어?”
이미 수십 번도 더 반복된 주석하의 다그침에 혈혼도객은 냉정하게 고개를 저었다.
“멀었습니다. 한참 더 가야 해요.”
그들의 목적지인 혼천교는 섬서성에 있었다. 섬서에서 가장 유명한 문파는 정파로는 화산파이고 사파로는 혼천교다. 공교롭게도 이 두 문파는 백 리밖에 떨어지지 않아 넓은 중원에 비하면 이웃이나 마찬가지였다.
어쨌든 본의 아니게 주석하 일행은 화산을 지나가야 한다. 물론 아직은 화산 근처에도 가지 못했다.
“이건 좀 너무한 거 아냐? 이렇게 먼 줄 알았다면 아예 올 생각도 안 했어.”
주석하는 투덜거리면서 도수의 동의를 원했다.
주석하도 도수도 사천을 벗어나 본 적이 없기에 먼 길은 난생처음이었다. 최근 한 달간 그가 여행한 거리는 태어나서 평생 다녔던 길보다 더 멀 것이다. 물론 주석하의 전생 오 년을 생각하면 다른 결과가 나오긴 하지만.
“날 데려온 게 누군데?”
“나였나?”
주석하는 먼 산을 쳐다보며 딴전을 피웠다.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다 보니 허기도 지고 몸도 피곤하고 지옥이 따로 없었다.
“오늘 밤에는 편한 객잔에서 자자, 응?”
“공자님, 돈이 없는데요?”
혈혼도객이 난감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사실 그들이 고생한 이유는 바로 이것이었다. 떠날 때 여비를 너무 적게 가져왔다. 게다가 떠난 지 며칠 되지 않아 주석하는 소매치기에게 돈을 털렸다. 객잔에서 자고 일어났더니 거지가 되어 있었다.
소매치기쯤이라고 큰소리를 뻥뻥 친 사람이 누구더라? 게다가 주석하를 제외하고 도수는 주석하에게 일임했다고 생각해서 돈을 챙길 생각을 하지 않았고 혈혼도객은 가진 돈 자체가 아예 없었다.
즉 주석하의 돈이 사라지면서 고생길이 훤히 열렸다. 노숙이 다반사였고 밥을 굶을 때도 많았다.
“하아, 돈이 없어? 아이고 내 팔자야. 무림인들은 강호를 쏘다니면서도 돈 걱정 안 하던데…….”
가끔 강호협객행을 다니는 신진기예들 무용담을 들어보면 돈 때문에 고생했다는 말은 없었는데……. 현실은 돈이 발목을 잡았다.
“그건 전부 미화해서 그런 겁니다. 명문정파 자제도 돈 없으면 주점에서 일하면서 다니니까요.”
“아냐, 남들 몰래 도적질할지도…….”
“너랑 착각하지 마.”
혈혼도객과 도수의 대답이 진실인지 거짓인지 알 수 없으나 적어도 지금 주석하에겐 한 푼의 돈이 간절했다.
“하아, 오늘 또 굶어? 이래서야 목적지에 가기는커녕 굶어 죽게 생겼어.”
“내 몸 홀쭉한 거 봐.”
연신 투덜대는 주석하와 이에 보조를 맞추는 도수에게 시달려 가루가 된 혈혼도객은 오늘은 끼니를 어떻게 때울지 고민했다.
“털까요?”
“뭘 털어?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우리가 비록 명문정파는 아닐지라도 완전 나쁜 놈은 아니잖아? 죄 없는 양민을 털기는 좀 그런데…….”
“체면이 밥 먹여 주나?”
도수 이 자식도 한계에 왔나? 아직은 나름 지조를 지키고 있으나 이런 고생이 계속되면 어떻게 될지 누구도 장담하기 어려웠다. 배고픈데 장사는 없는 법이다.
“공자님, 그게 아니고요. 생각해보니 끼니도 때우고 돈도 구할 좋은 방책이 있습니다.”
혈혼도객이 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번쩍 정신이 든 주석하와 도수가 채근했다.
“뭔데?”
“지금 이 고개를 넘으면 다음에 더 큰 고개가 나오거든요.”
“으아아! 여기보다 더 높아? 난 못가!”
도수가 기겁하며 울부짖었다.
주석하도 심정적으로 이해했다. 아침부터 먹은 게 없어 다리를 옮기기도 힘든 판국에. 아무래도 괜히 혼천교를 가보겠다고 해서……. 그때로 돌아갈 수 있다면 방문 제안했던 혈혼도객 이 자식을 그냥…….
“그게 아니고요, 큰 고개 앞에 가면 끼니를 때우고 돈도 구할 방법이 있습니다. 그때까지만 참으세요.”
싱글벙글 웃는 표정이 절대 거짓말 같지 않았다.
“좋아, 아니면 혼날 줄 알아.”
주석하는 마지막 힘을 짜내며 걸음을 옮겼다.
끙! 역시 세상 살기는 너무 힘들다. 특히 청춘에게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