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화 풍운채 (2)
고개를 넘으니 높은 산이 줄줄이 서 있고 그 사이로 좁은 고갯길이 보였다.
“여기가 풍운령입니다.”
혈혼도객의 안내에 주석하는 미간을 좁혔다. 눈앞에 보이는 경치는 평범했으나 이름이 심상찮았다.
“풍운? 뭔가 큰일이 벌어질 이름인데?”
“그렇죠. 저기에 가시면 밥도 먹고 잠도 자고 돈도 생깁니다.”
혈혼도객이 호언장담했다.
다시 찬찬히 고갯길을 살폈으나 별달리 특별한 것은 보이지 않았다. 이놈이 대체 뭘 믿고 이러는 거지?
연신 고개를 갸웃거리는 주석하의 등을 도수가 밀었다.
“뭘 고민해? 밑져야 본전이니 얼른 가야지.”
이럴 때는 도수 자식도 대단히 현실적이다.
기대 반 실망 반, 발을 끌며 걷고 있자니 고개 입구에 커다란 공터가 나타났다. 놀랍게도 십여 명의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그들은 먼 길을 오가는 봇짐장수가 절반이고 나머지는 고향이나 타향을 오가는 나그네로 보였다. 그 가운데 부녀자와 어린아이도 몇 명이 포함되어 있었다.
앞서가던 혈혼도객이 슬그머니 그들 뒤에 섰다.
“사람들이 왜 여기에 모여 있데?”
“그게 말이죠……, 이 고개를 넘기 위해서입니다.”
“고개? 그냥 넘으면 되잖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광경에 주석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혈혼도객이 기회를 맞은 듯 침을 튀기며 설명했다.
“그게 그렇지 않습니다. 이 풍운령 중간쯤에는 산채가 있거든요. 풍운채라는 유명한 산적 본거지요. 중원에서 가장 큰 규모의 산채를 녹림 십팔채라 하는데 거기에 포함된 곳이니 엄청 크다고 볼 수 있죠.”녹림이라……. 들어본 기억이 있었다.
“혈랑곡보다 큰가?”
“그게 말이죠, 혈랑곡은 말 타고 노략질을 일삼는 비적이고요, 여기는 산에 웅크리고 있는 산적이죠. 종류가 다르긴 한데…… 인원은 여기가 더 많습니다.”혈혼도객의 설명이 이어졌다.
주석하는 금방 상황을 이해했다.
풍운령 고개를 건너야 하는데 중간에 산적이 있으니 위험했다. 그래서 사람들이 모여 함께 건너려고 대기 중이었다. 물론 이 인원으로 산적을 제압하기는 어렵지만 그래도 혼자보다 훨씬 낫지 않은가. 비록 산적이 무섭긴 하지만 적절한 통행료를 주면 통과시켜 주니 어찌 보면 아주 위험하다고는 할 수 없었다.
“흠, 그런데 이거랑 밥과 돈이 무슨 관계야?”
“저만 믿으시죠.”
혈혼도객은 궁금증을 풀어주지 않았다.
그들이 열심히 대화하고 있자니 주변 사람들이 슬금슬금 그들 눈치를 봤다. 이상하게도 그들 옆으로는 아무도 다가오려 하지 않았다.
기분이 이상해진 주석하는 옆에서 힐끔거리는 한 아주머니에게 물었다.
“아주머니, 왜 자꾸 쳐다보세요?”
“으악!”
비명을 지르는 아주머니 덕분에 모두의 시선이 그들에게 집중됐다.
“아니, 갑자기 비명은 왜…….”
“사…… 산적이다!”
“네? 산적?”
영문을 모르고 주위를 둘러보던 주석하는 금방 상황을 눈치채고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 그들 셋의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게다가 도수는 겉보기에도 산적과 비슷하게 중구난방으로 생겼다. 여기에 더해 혈혼도객은 피부가 검어서 나쁜 놈이 아니라면 더 이상하다.
이 사람들이 보기에 주석하 일행은 산적이나 다름없었다. 마치 산적이 첩자처럼 나그네 일행에 끼어든 것처럼 보였다.
“으, 저희 산적 아닙니다.”
주석하가 하소연했으나 사람들은 그들을 피했다.
그는 도수와 혈혼도객을 째려보며 한숨을 내뿜었다.
“하아, 다음부터는 좀 잘생긴 녀석들과 다녀야지. 이게 무슨 꼴이냐.”
**
충분한 인원이 모였는지 아니면 때가 되어서인지 한 사람이 출발을 알렸고 사람들이 떼를 지어 고개를 오르기 시작했다.
뱃가죽이 등에 붙어 견디기 힘든 주석하 일행은 간신히 걸음을 옮겼다.
역시 인생은 고행길이다. 고개 좌우로 꽃이 피어 절경을 이루고 있건만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역시 아무리 절경이라도 식후경이다.
“하아, 죽겠네.”
고개를 넘는 무리의 중간에 끼어 주석하는 간신히 발을 끌었다. 이 고개가 끝날 때까지 밥도 돈도 안 생긴다면 혈혼도객 자식을 요절내고 말겠다고 욕했다.
한참 땀을 흘리며 걷고 있자니 뒤에서 누가 툭툭 건드렸다.
“응? 귀찮게 어느 놈이…….”
욕을 퍼부으려고 뒤를 돌아보는 순간 주석하는 바로 입을 닫았다. 일곱, 여덟 살 정도 된 예쁜 여자아이가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다.
“아저씨, 뭐해?”
아이에게 화를 낼 수도 없고, 그것도 예쁜 아이이니 주석하는 싱긋 웃어줬다.
“뭐하긴, 산 넘어가지.”
“땀 많이 흘리는데?”
“땀?”
“울 아버지도 땀 많이 흘리다 돌아가셨는데…….”
헉! 겁나는 소리를 하다니! 주석하는 무의식적으로 소매로 이마를 닦았다. 과연 이마에 땀이 많긴 했다. 산을 오르니 땀이 나는 게 정상이긴 한데 이건 배가 고파 물로 배를 채웠더니 나는 식은땀이다.
“아저씨가…… 힘들어서 그래.”
“응, 엄마가 인생은 힘든 거랬어.”
아이가 나이답지 않게 벌써 인생의 도가 텄다.
“여기 자주 다니니?”
“아뇨, 하지만 산은 많이 타봤어요.”
평상시 산을 타며 놀러 다니는 아이와 보통 때 술 마시러 저잣거리나 돌아다니던 그가 체력이 같을 수 있나. 그도 이 아이 만할 때는 산을 누비며…… 아니, 장원에 콕 틀어박혀 있긴 했다.
“아저씬…… 굶어서 그래. 배가 고프거든.”
“아! 아저씨 너무 불쌍해.”
머쓱해진 주석하는 아이에게 빙그레 미소를 보냈다.
아이가 옆에서 걷던 부인의 행낭에서 주섬주섬 뭔가를 꺼냈다. 부인은 아이의 어머니로 보였다.
민망해진 주석하는 부인에게 대충 인사했다.
행낭에서 꺼낸 사과를 아이가 주석하에게 건넸다.
“아저씨, 이거 먹어.”
오늘 처음 보는 먹을거리라니! 주석하는 감격했다. 역시 이렇게 착한 아이가 있기에 세상은 아직 살만하다.
사과를 한쪽 베어 먹으니 정말 꿀맛이었다. 주석하는 도수와 혈혼도객을 향해 사과를 자랑하며 다시 한입 베어 물었다. 콩 반쪽도 나눠 먹는다는 말은 분명 개소리다. 당장 굶어 죽게 생겼는데 뭘 나눠 먹어. 그건 굶어보지 않은 자의 헛소리에 불과하다.
도수와 혈혼도객은 입이 한주먹 나와서 시선을 돌렸다.
주석하는 다시 아이에게 말을 걸었다.
“이름이 뭐니?”
“명아예요.”
“응, 명아야. 아저씨 안 무서워? 남들은 아저씨가 산적 같다고 무서워하던데?”
명아가 방긋 웃으며 도수와 혈혼도객을 가리켰다.
“아저씬 안 무서워. 잘 생겼잖아. 그런데 저 두 아저씨는 산적이 확실해.”
역시 어린아이도 예쁜 것을 안다. 주석하는 왠지 모를 뿌듯함을 느끼면서 감사를 표했다.
“명아야, 사과 정말 고마워. 아저씨 배가 무척 고팠거든.”
“괜찮아요. 난 많이 먹었어요.”
명아가 배시시 웃었다.
명아와 그 어머니의 옷차림을 보면 그리 잘 사는 사람이 아니다. 그렇기에 그는 명아의 마음 씀씀이가 무척 고마웠다.
“어디 가는 길이니?”
“친척 집에요. 친척 집이 고개 너머에 있거든요.”
“아버지는?”
명아의 안색이 살짝 어두워졌다. 아! 돌아가셨다고 했지. 괜한 것을 물었다고 생각한 주석하는 얼른 주제를 바꿨다.
“친척 집에는 왜?”
“동생이 생겼거든요. 동생 보러 가요.”
명아가 다시 환하게 웃었다.
“명아 닮았으면 예쁘겠네.”
명아 덕분에 고갯길이 지겹지 않았다. 주석하는 가파른 길을 꿋꿋하게 올라가는 명아에게서 힘을 얻어 쉬지 않고 올라갔다.
십여 명의 사람들이 떼를 지어 얼마나 갔을까.
고갯길이 점점 가팔라지고 주위가 기암괴석으로 덮여 절경을 보이기 시작할 때쯤 앞서가던 사람들이 걸음을 멈췄다.
소란스러운 움직임에 주석하는 앞쪽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산적 같은 놈이 길을 막았군.”
“산적 같은 놈이 아니라 산적입니다.”
혈혼도객이 빙그레 웃으며 대답했다.
수염이 텁수룩한 장한 십여 명이 날이 넓은 도를 들고 위협하고 있었다. 대충 들어보니 풍운채가 얼마나 위대한 산적 집단인지, 구국의 용사가 얼마나 많은지 구구절절 설명하고 있었다. 아무리 스스로 소개하지 않으면 몰라주는 시대라 하지만…….
“……그래서 통행료를 받겠다, 이런 말씀이시다! 얼른 가진 돈을 다 내놓아라!”
산적의 호통에 겁에 질린 사람들이 호주머니를 뒤졌다. 어떤 사람은 은자를 꺼내고 어떤 사람은 동전을 꺼냈다.
당연히 주석하는 주머니를 뒤질 생각도 하지 않았다. 뒤져봐야 먼지밖에 없으니. 그만 그런 게 아니라 도수나 혈혼도객도 같은 처지였다.
도를 든 흉흉한 인상의 녀석들이 옆을 지나갔다. 그들은 동전은 쳐다보지도 않았고 은자를 건넨 자들만 골라 무리에서 빼냈다.
“너희들은 합당한 통행료를 냈으니 지나가도 좋다.”
선택된 사람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남은 사람에게 미안한 눈짓을 보냈다. 어디에서든 돈이 많으니 대접을 받는다.
주석하는 내심 구시렁거리고 있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여비를 더 챙기는 건데. 아니지, 여비가 부족한 것은 도수와 혈혼도객 때문이니 저들이 책임져야 하는 게 아닌가. 그래도 흑검문 소문주라 돈 때문에 곤란했던 적이 거의 없는 그로서는 머리가 찌근거렸다.
통행료를 낸 사람들이 사라지자 가난한 사람들만 남았다. 당연히 명아네도 남아 있었다. 명아는 두려운 표정으로 엄마 옆에 딱 붙어서 달달 떨고 있었다.
“너희들은 왜 돈이 없어? 이건 우리 풍운채를 무시하는 행동이잖아?”
산적 하나가 목소리를 높였다.
“나리, 그게…… 저희도 드리고 싶었습니다요. 그런데 돈이 있어야죠. 선처해주십시오.”
나이가 들어 보이는 중년인이 연신 고개를 숙였다.
퍼억!
산적의 발길질에 중년인의 몸이 비탈 구석으로 처박혔다.
사람들이 웅성대면서 두려움에 떨었다. 산적의 흉악함을 몸소 체험하니 정말 위험하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모두 죽고 싶나? 숨긴 것 다 꺼내!”
눈치 보던 사람들이 가진 돈과 패물을 모두 꺼냈다. 여전히 주석하는 꺼낼 것이 없었다.
“이 자식이 있으면서도 숨겼구나?”
금반지가 걸린 남자가 곧바로 얻어터졌다.
“나리, 그…… 그건 제 혼인 예물이라…… 절대 안 됩니다.”
“안되긴 뭐가 안돼? 목숨보다 소중하나?”
이번에는 산적 셋이 모여 그 남자를 두들겨 팼다. 산적들의 흉악한 행동에 사람들은 아무도 나서지 못하고 벌벌 떨기만 했다.
한참 난리를 치던 산적들이 곤죽이 된 남자를 내버려 두고 남은 사람들을 한곳에 모았다.
“일단 너희들을 산채로 끌고 간다. 도망치면 죽어!”
고래고래 협박하면서 사람들을 떠밀었다.
주석하는 쓴웃음을 머금고 사람들과 함께 이동했다. 그는 혈혼도객에게 눈을 부라리며 조용히 물었다.
“이게 뭐야? 밥도 먹고 돈도 준다더니?”
정작 혈혼도객은 싱글벙글 웃으며 걱정하는 눈치가 아니었다.
“공자님, 이게 일반적인 산적 방식이거든요. 잡혀가면…… 저들도 사람인지라 굶기진 않아요. 밥을 주죠. 우리처럼 굶은 사람에겐 산채도 천국입니다.”이게 대체 뭔 소리지? 그럼 밥을 얻어먹으려고 산적에게 잡혔다는 건가? 제대로 이해 못 한 주석하에게 혈혼도객이 설명을 이었다.
“밥 얻어먹고 적당히 눈치 보다가 야밤에 산채를 텁시다. 산채에 돈이 제법 있을 것 같지 않습니까?”
“끙!”
주석하는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혈혼도객 이 자식도 정상이 아니다.
고민하는 사이에 길을 막고 있는 거대한 목책 앞에 도착했다. 악명 높은 산적 본거지, 풍운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