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검천하-45화 (45/273)

45화 풍운채 (3)

산채로 끌려가는 일행 가운데 유달리 곱상하게 생긴 청년이 있었다.

평범한 청색 장삼을 걸치고 듬성듬성 콧수염을 기른 부드러운 인상의 남자였다. 갸름한 얼굴에 맑은 눈동자와 오뚝한 코가 돋보이는 서글서글한 인상, 보기 드문 꽃미남이었다.

그의 이름은 유비연. 실상은 남자가 아닌 여자였고 지금 남장한 상태였다. 나이는 열여덟. 화산파의 제자로 강호에서는 설매검화(雪梅劍花)란 별호로 이름이 높았다. 무엇보다 그녀를 유명하게 한 것은 천하절색의 남다른 미모였다. 무림인들은 그녀를 현 무림에서 최고의 미모를 지닌 세 여인, 천상삼화(天上三花)에 포함했다.

후지기수 가운데 무공이 제법 높은 그녀는 사제와 함께 강호협객행을 떠났다가 다시 화산파로 돌아가는 중이었다. 강호를 누비는 일 년여 동안 그녀는 악독한 사파인을 주살하여 이름을 드높였다. 덕분에 그녀의 미모에 더해 협행까지 널리 알려졌다.

‘이것들이…… 꽤 규모가 크구나.’

거대한 목책을 보면서 유비연은 고민에 잠겼다.

고개 앞에 모인 상인과 나그네를 보면서 산적을 예상했던 그녀였다. 협객행을 마무리할 겸 풍운채를 때려잡겠다고 결심하고 합류했다. 다만 지금은 인질이 예상보다 많고 산채 규모가 크다는 문제가 발생했다.

물론 그녀의 무공이라면 인질만 없다면 산적이 수백 명 몰려와도 별문제가 없다. 목책 뒤의 산채 건물을 보니 그 안에 또 얼마나 산적이 많을지, 인질이 억류되어 있을지 고민스러웠다.

‘둘이 처리하기 만만찮겠는데…….’

처음 협객행을 떠날 때는 사제 둘과 함께했었다. 며칠 전 화산파에 연락을 취하느라 한 명을 먼저 보내고 지금은 고진이라는 사제 한 명만이 옆에 붙어 있었다. 아쉽게도 고진의 무공은 그녀만큼 높지 않았다. 먼저 보낸 사제 한 명이 그리워지는 순간이었다.

목책 안으로 끌려 들어가는 사람들의 표정을 보니 염라대왕 앞에 끌려가는 것처럼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어떻게 하지?”

유비연은 옆에서 걸음을 옮기는 사제, 고진에게 나지막이 물었다. 당장은 별다른 수가 없으니 참으라고 고진이 눈치를 줬다.

일단은 두고 볼 수밖에. 사실 그녀가 손을 쓰기 힘든 다른 이유가 또 있긴 했다.

고개 밑에서부터 그녀의 시선을 끈 인물, 지금 이 무리와 어울리지 않는 세 사람 때문이었다. 한 놈은 귀공자처럼 생겼는데 옷이 남루하고 먼지투성이라 뭔가 비정상이었다. 다른 한 놈은 생긴 것부터 ‘나는 산적이야’라고 표시하고 다녔다. 그나마 수염을 기르지 않아 전형적인 산적은 아니라지만 그녀의 관점에서 저런 인상을 지닌 자는 산적의 범주를 벗어날 수 없었다.

남은 한 놈은 대체 무엇을 먹었는지 온몸이 시커멨다. 옷마저 검고 먼지투성이니 절로 경계 대상이었다. 풍기는 음산한 기운을 고려하면 흉악한 산적이거나 사파 인물이 확실했다.

저 세 놈이 풍운채의 산적과 한패가 아닌지 의심스럽다. 인질 가운데 산적에 대항하는 위험인물을 솎아내려고 눈을 속이고 일반인인 것처럼 위장한 게 아닐까. 한 놈이 계속 어린 여자아이를 찝쩍거리는 것도 그렇고.

그들을 신경 쓰다 보니 유비연은 산적에게 바로 대응하기 어려웠다. 그녀가 인질을 탈출시키려는 순간 저 셋이 본색을 드러내면 대형 참사가 발생하니까.

그녀가 고민하는 사이 목책을 지나 산채 한가운데 자리한 공터에 도착했다.

산채는 의외로 평화로웠다. 곳곳에 띄엄띄엄 초가집과 목조건물이 들어서 있고, 산적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일하고 있었다.

‘적어도 오십은 될 것 같은데…….’

산적은 그녀가 예상한 수를 훌쩍 넘었다. 어떻게 인질을 구출할지 더욱 막막했다.

그들을 끌고 온 산적이 위풍당당한 목소리로 위협했다.

“너희들은 통행료를 내지 않았으니 그 값을 해야 한다. 일을 마치면 풀어줄 것이다. 일을 못 하면 노예시장에 팔아버릴 거니까 열심히 해라. 일단 창고에서 대기한다.”사람들은 커다란 창고로 안내됐다.

창고에 들어가자 문이 닫히고 맥이 풀린 사람들은 바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앞날에 대한 걱정으로 웅성대는 가운데 유비연은 의심스러운 세 명을 멀리서 살피면서 고진에게 속삭였다.

“인질이 더 있는 것 같지?”

“네, 밖에서 일하는 사람 상당수가 보통 사람이에요.”

“인질을 다 구하기 쉽지 않겠어.”

“일단 눈치를 좀 보죠. 산채 구조랑 녀석들 배치를 봐야죠. 조심해서 천천히 구출해야 할 것 같아요.”

간단하리라 생각했던 산적 퇴치가 예상외로 복잡해지자 유비연은 더욱 힘을 냈다. 어려울수록 보람된 법이다. 아마 이 일로 강호협객행의 대미를 장식하려는 모양이다.

**

주석하는 혈혼도객에게 계속 눈치를 주고 있었다.

밥을 먹을 수 있다더니 밥은 구경도 하지 못하고 창고에 갇혔다. 상황을 이렇게 만든 건 순전히 혈혼도객 자식 때문이다.

“밥 어디 갔냐?”

“조금만 기다려 보시죠. 확실하게 나옵니다.”

“이제 밭에 씨뿌리는 거 아니야?”

“그게 말이죠, 제가 원래 산적 습성을 아는데요.”

혈혼도객이 태연하게 반박했다.

왜 이리 잘 알아? 이 녀석이 원래 산적 출신이었나? 할 말이 없어진 주석하는 야리꾸리한 눈으로 녀석을 살폈다. 오늘 중으로 밥을 못 먹으면 이 녀석을 혼쭐내야지. 숟가락 들 힘도 없어 가능할지 의문이지만.

투덜대는 그의 눈에 어린아이가 들어왔다. 명아는 겁에 질려 엄마의 손을 꼭 잡고 있었다.

아이가 불쌍해진 주석하는 명아를 슬쩍 건드렸다.

“명아야, 겁나?”

명아가 고개를 저었다.

정작 그녀의 안색과 몸의 떨림은 아니라고 대변하고 있어 주석하는 가슴이 쓰라렸다.

“별다른 일은 없을 거야. 곧 풀어주겠지.”

“엄마도 그렇다고 했어요.”

“그래, 나만 믿어.”

그나마 다행이었다. 아이가 꿋꿋하게 견뎌주고 있으니. 이런 아이까지 잡아 온 산적이 미웠다. 여차하면 산적을 박살 내고 사람들을 구해볼까.

주석하는 금방 고개를 저었다. 자신이 언제부터 무림 협객이 되었다고. 전생에서 앞으로는 협객을 자처하면서 뒤로는 호박씨 까는 녀석을 워낙 많이 봤기에 정파니 협객이니 하는 말에 경기를 일으킬 정도였다.

그때의 경험으로 미루어보면 괜히 남을 도와봐야 이로울 것이 없었다. 세상은 어차피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흐르는 법이고 그는 무리하지 않고 이곳을 빠져나가면 그뿐이다.

지겨운 시간을 보내고 있자니 창고 문이 덜컥 열렸다.

“배고픈 자는 나와라! 죽을 주겠다. 먹고 나면 일해야 한다. 먹기 싫은 놈은 안 먹어도 된다. 단, 오늘은 추가 배급이 없다.”

일을 시키려고 밥을 주겠다는 소리였다. 엄지를 척 올리며 자랑하는 혈혼도객이 눈에 들어왔다.

“그래, 일은 네놈이 다해.”

한숨을 푹 쉬며 주석하도 반겼다. 역시 산적도 밥을 주긴 주는구나. 굶는 것보다 백배 낫다. 특히 오늘은 눈뜨고 한 끼도 먹지 못했으니 무조건 먹어야 한다. 밥이 아니라 죽이어서 아쉽지만 그게 어딘가.

주석하는 혈혼도객을 따라 창고를 나갔다.

대충 줄을 서서 죽을 받았다. 희멀건 물에 밥알이 몇 개 보였다. 이것들이 주려면 제대로 주지. 이런 것 먹어서 얼마나 힘을 쓸지 의문이었으나 뱃가죽이 눌어붙었으니 일단 먹고 생각하자.

“싹싹 비워라!”

산적의 경고를 뒤로하고 죽을 타서 한쪽 구석에 앉았다. 씹을 건 없고 대충 마시면 끝날 듯했다.

엄마의 손을 잡고 죽을 타오는 명아가 보였다. 먹지 않겠다고 도리질하던 그녀는 엄마의 강요로 어쩔 수 없이 죽을 먹기 시작했다.

주석하는 주먹을 쥐고 용기를 내라고 손짓을 보냈다. 죽을 먹던 명아가 그를 보고 배시시 웃었다.

**

밥을 먹고 나자 바로 일감이 떨어졌다.

주석하는 혈혼도객, 도수와 헤어져 다른 두 사람과 함께 산비탈을 올라갔다. 그들을 숲으로 끌고 간 산적이 도끼를 건네며 명령했다.

“땔감이 필요하다. 나무를 베라.”

도끼 하나를 주고 세 사람이 돌아가면서 나무를 베라고 시킨 후 정작 감시하러 온 산적 놈은 부근 바위에 걸터앉아 놀고 있었다. 녀석의 옆구리에 반짝거리는 도가 보였다.

이쪽도 도끼가 있고 인원도 셋이니 붙어볼 만한데 정작 산적은 그런 걱정이 전혀 없는 듯 풀을 질겅질겅 씹으며 여유로웠다.

눈치를 보던 세 사람 가운데 주석하가 가장 먼저 나서서 나무를 벴다. 소문주였던 주석하가 나무를 베어 봤을 리가 없었다. 당연히 효율이 팍 떨어졌고 주석하는 도끼질 몇 번 하다가 허리를 펴고 하늘을 쳐다봤다.

“제대로 안 해?”

산적의 호통에 주석하는 후다닥 도끼를 내리쳤다. 도끼가 엇나가서 난리를 치다가 간신히 한 그루를 성공했다.

다음 차례에 무심코 도끼를 넘기던 주석하의 눈이 부릅떠졌다.

‘어?’

다음 녀석이 그와 비슷한 또래인데 외모가 무척 곱상했다. 그도 잘생겼다는 소리를 여러 번 들었지만 눈앞의 꽃미남을 보니 모란 앞의 들꽃이었다. 과연 도끼를 들 수 있을지 의심되는 외모를 가진 청년에게 주석하는 인사를 건넸다.

“형씨, 인사나 합시다. 난 주석하입니다.”

정작 남장 여인 유비연은 깜짝 놀라 한 발 뒤로 물러섰다. 건네받던 도끼가 아래로 떨어졌다.

살짝 인상을 찡그리던 주석하는 도끼를 주워 다시 꽃미남에게 건넸다.

“저는…… 유…… 유연입니다.”

“아, 유 형이셨군요. 보아하니 유 형은 글만 읽었을 듯한데 어쩌다가 여기에…….”

“고개 넘다가 운이 나빴습니다.”

너무 당연한 이야기라 주석하는 이 남자가 사사로운 이야기를 회피하고 있음을 눈치챘다.

그는 입을 다물고 산적 옆으로 가서 바위에 걸터앉았다. 그의 눈이 곱상한 녀석의 도끼질에 머물렀다.

퍽!

유비연이 도끼를 내리찍자 나무 밑동이 쪼개지며 옆으로 넘어갔다.

‘어? 겉보기와 달리 대단하네!’

힘을 못 쓸 것처럼 보이더니 정작 결과는 주석하를 훨씬 넘어섰다. 대수롭지 않게 내리치는 도끼에 족족

나무가 넘어갔다. 게다가 나무를 찍는 자세는 한 폭의 그림이었다.

감탄한 주석하는 입을 쩍 벌리고 그 장면을 구경했다.

**

산채에 어둠이 내렸다.

밤이 깊어지자 유비연은 창고를 몰래 빠져나왔다.

창고 입구에 산적 두 녀석이 보초를 서고 있었으나 고수인 유비연에게는 전혀 장애가 되지 못했다. 둘의 혼혈을 짚고 빠져나오는 것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산채는 적막에 잠겼고 하늘에서 어렴풋한 달빛이 내리고 있었다.

그녀는 낮에 보아두었던 산채 구조를 떠올리며 조심스럽게 주변을 둘러보았다. 보초가 서 있는 창고는 이곳과 저쪽에 있는 창고까지 둘뿐이었다. 이 두 창고에는 모두 합쳐서 대략 서른 명가량 인질이 잡혀 있었다. 오늘 잡혀 온 사람만큼이나 이미 감금되어 있었다.

이 인질들은 운이 좋으면 풀려나고 운이 나쁘면 시장에 팔리거나 이곳 산채에서 허드렛일을 할 것이다.

“놈들 수와 숙소를 파악해야 해.”

인질을 데리고 여기를 벗어나려면 적의 수와 배치를 반드시 염탐해야 한다. 그녀가 야밤에 산채를 탐색하는 목적이었다.

여러 곳을 돌아다닌 결과 그녀는 풍운채에 대략 오십여 명의 산적이 머문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오십 대 이. 거기에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세 녀석까지. 인질 수는 삼십. 인질을 희생하지 않고 구해내기에는 중과부적이었다. 아무리 그녀가 산적과 비교할 수 없는 고수라지만.

야밤의 탐색을 마치고 다시 감금된 창고로 돌아오던 유비연은 낯선 그림자와 딱 만났다. 창고에서 불과 십여 장 떨어진 곳에서 들켰으니 운이 나빴다.

지금 곧바로 산적과 싸우기엔 여러모로 위험했다. 그녀가 망했다고 자책하는 순간.

“유 형인가요?”

낯선 그림자가 물었다. 그녀의 앞에 생각지도 못했던 인물, 주석하가 딱 가로막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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