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화 풍운채 (4)
야밤에 눈을 뜬 주석하는 창고에 갇혀있으려니 가슴이 답답했다.
주위에는 함께 잡혀 온 사람들이 군데군데 무리 지어 자고 있었다. 산적은 자신감이 과했는지 인질을 묶지도 않고 그냥 귀찮다는 듯 창고에 때려 넣었었다. 덕분에 행동이 다소 자유로웠다.
슬며시 일어난 주석하는 동료를 살폈다. 도수와 혈혼도객이 잠에 빠진 것을 확인한 그는 조용히 창고 문을 열었다.
서늘한 새벽바람이 훅 들어왔다.
창고 밖에는 보초로 보이는 두 녀석이 세상모르고 자고 있었다.
“기가 빠져서는…….”
당연히 주석하는 이들이 잠에 빠진 이유가 유비연 때문임을 알지 못했다.
혀를 차던 주석하는 측간에서 볼일을 보고 맑은 공기를 마셨다. 그의 눈에 날렵한 그림자가 보인 것은 그즈음이었다.
이상하다는 생각에 슬그머니 몸을 숨겼던 주석하는 그림자가 아군임을 확인하고 몸을 드러냈다.
정작 그 아군은 그를 아군으로 여기지 않았던 모양이다.
“아! 주……”
“주석하입니다.”
유비연이 그의 이름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자 주석하는 다시 알려주었다. 상대가 눈에 띄게 긴장하고 있는 점이 이상했으나 동지를 만났다는 반가움이 더 컸다.
갑갑해서 야밤에 돌아다닐 생각을 한 사람이 혼자만은 아니었나 보다.
“주 소협, 무슨 일인가요?”
“측간 가느라…….”
머쓱해진 주석하가 머리를 긁적였다.
“나도 측간 갔다가 잠시 돌아다녔어요.”
유비연이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고개를 끄덕이며 주석하는 주위를 휙휙 둘러봤다. 어둠에 잠긴 산채 건물이 의외로 편안하게 다가왔다.
“여긴 참 이상하네요. 보초들이 생각 없이 자고 있지 않나……. 산적 같지 않아요.”
유비연은 주석하의 말이 진심인지 아니면 그녀를 떠보는 것인지 판단하기 어려웠다. 혼혈이 짚인 것을 모른다면 이자는 무공 고수가 아니었다.
“그래도 흉악한 산적인 걸요.”
“맞아요. 밥을 안 주고 죽만 주는 걸 보면 나쁜 놈들 맞네요. 소나 말도 일을 시키기 전에는 잘 먹이는데…… 우리는 가축보다도 못한 존재입니다.”주석하가 분개하며 산적을 욕했다.
“뭐 하시는 분인가요?”
주석하 일행이 산적이 아닌가 의심을 품고 있기에 유비연은 이 기회를 틈타 정체를 알고 싶었다.
“전 흑검문에서 왔습니다.”
주석하는 솔직하게 털어놓았으나 유비연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흑검문이라는 곳을 들어본 적이 없어서다.
“동료가 있죠?”
“저 말고 두 사람 더 있어요. 한 사람은 자객…… 아, 그건 아니고 저랑 같은 흑검문이고 다른 한 사람은 혼천교인가 거기 사람입니다.”
유비연의 안면이 일그러졌다. 혼천교가 화산 부근에 있고 혼천교주가 무림을 주무르는 혼군이다 보니 혼천교도라면 쉽게 볼 인물이 아니었다.
‘이자는…… 산적과 짜고 인질 사이에 섞여 있는 게 분명해.’
정파인 그녀에게는 사파나 산적이나 한통속이었다. 둘 다 나쁜 자이고 정파의 적이니 이 셋은 인질을 구할 때 가장 경계해야 할 인물이었다. 어쩐지 옷차림부터 그렇게 생겼었다.
“아, 그렇군요.”
대수롭지 않게 모른 척 넘어가려는 유비연에게 주석하가 다시 물었다.
“유 형은 무림인인가요?”
“아뇨, 건넛마을 서생입니다.”
“서생인데 도끼질 참 잘 하시더라고요.”
“집이 가난해서 나무하러 자주 다녔거든요.”
주석하의 질문에서 뭔가 비꼬는 기분을 느낀 그녀는 황급히 인사하고 창고로 들어갔다.
“그럼 이만.”
주석하는 그녀의 뒷모습을 한참 쳐다봤다. 이름이 유연이라고 했던가? 어째 외모도 하는 말도 묘하게 어긋나는 기분이었다.
**
죽을 먹으면서 유비연은 사제 고진과 작전을 짰다. 산채의 정황을 대충 파악한 이상 이대로 시간을 보낼 수 없기 때문이다.
지키는 산적이 멀리 떨어져서 밥을 먹는 것을 확인한 그녀는 연신 주변을 경계하며 작전을 짰다.
“문제는 인질이 두 곳에 나뉘어 수용되어 있다는 거야. 우리 둘이 각자 창고 하나씩을 맡으면…… 그동안 산적 동정을 살펴줄 사람이 없어.”
“하아, 사제만 있었어도…….”
고진도 먼저 화산파로 보낸 막내 사제를 아쉬워했다. 어쨌든 이곳엔 그들 둘밖에 없으니 둘이서 어떻게든 해치워야 한다.
유비연은 쉽게 해결책을 생각해낼 수 없었다. 대략 오십 명에 달하는 산적의 손에서 인질을 안전하게 구출해야 한다. 더구나 인질 가운데 섞인 첩자, 세 사람을 따돌려야 하고.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절대로 안전하게 인질을 구출할 수 없다는 결론이 나왔다. 그렇다면 비상수단을 쓸 수밖에.
“그들이 산적이랑 한통속이란 보장은 없지 않습니까?”
“어차피 그 나물에 그 밥이야. 이 기회에 산적과 한 편인지 확인해봐야지. 놈들을 이용해서 적의 눈과 귀를 홀리고 그 틈에 인질을 구출해야겠어.”
일단 인질이 산채만 벗어나면 설사 산적이 추격해오더라도 그녀의 무공으로 해결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인질이 창고를 탈출하여 산채에서 도망치는 시간만 벌면 충분했다.
“만일 그자들이 정말 산적 편이라면 골치 아프잖습니까?”
“괜찮아. 그래 봐야 더 나빠지지 않을 테니까. 여차하면 그자들부터 먼저 죽여버려야지.”
유비연은 머릿속으로 전략을 세세히 짚어보았다. 이대로 계속 기회를 노리기보다 지금 당장 시도하는 것이 백 배 유리하다는 결론이 났다. 게다가 새벽에 주석하에게 걸렸고 그의 질문도 수상쩍었으니 시간을 끌수록 불리했다.
일정을 살펴보니 밥을 먹은 후 휴식을 취할 때가 그나마 가장 가능성이 컸다. 인질 모두를 구출하는 것은 포기했다. 대신에 최대한 많은 수를 구하는 것으로 목표를 수정했다. 몇 사람의 희생은 아쉽지만 어쩔 수 없다.
바삐 죽을 먹은 후 유비연은 한쪽에서 주석하를 기다렸다. 열을 채 새기도 전에 주석하가 웃으면서 앞을 지나갔다.
유비연은 곧바로 그를 불렀다.
“아, 유 형! 무슨 일입니까?”
주석하가 싱글벙글 웃으며 다가왔다.
유비연은 내심 경계심을 높였다. 사파인은 웃으면서 뒤에서 칼을 찌르니까.
그녀는 주석하를 데리고 나무 뒤로 숨었다.
“주 소협, 부탁 하나 하죠.”
“뭡니까?”
“나, 실제로는 무림인이거든요. 여기에는 붙잡힌 인질을 구하고 산적을 뿌리 뽑으려고 왔어요.”
뜻밖의 말에 주석하는 상대를 훑어봤다. 여리게 보이는 서생이 그런 일을 할 수 있다고 믿어지지 않았다.
주석하의 대답이 없자 유비연은 나직이 이야기를 계속했다.
“반 시진 후에 오후 작업이 시작될 거잖아요? 그 직전에 놈들의 이목을 끌어줘요. 소동을 크게 일으킬수록 좋고요. 적이 우왕좌왕하는 사이에 내가 인질을 구할 테니까요.”
“음, 위험하지 않을까요? 무공 세요?”
이리저리 훑어보는 주석하의 시선이 다소 거슬렸으나 유비연은 꾹 참고 말했다.
“내 걱정은 필요 없고, 할 수 있는지 없는지만 말해요. 못하겠다면 다른 방법을 찾을 테니.”
주석하가 산적과 관련이 있든 없든 수락하리라고 유비연은 생각했다.
산적과 한패가 아니라서 제 몫을 해준다면 다행이고 만일 산적에게 알린다면 그녀도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산적과 정면 승부할 생각이었다.
“아, 귀찮은데……. 난 협사가 아닌데……. 새벽에 말했잖아요.”
사실 주석하는 인질을 구출하겠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또 전생에서 괜히 정의를 부르짖다가 한 방에 훅 가는 경우도 많이 봤다. 게다가 흑도의 생리상 살신성인하는 행동은 어울리지 않는다.
“역시…… 흑도라 어쩔 수 없군요.”
유비연은 실망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어차피 상관없었다. 주석하와 그 일행이 인질 틈에 끼어 있어서 잠재적인 위협이 되는 것보다는 산적 쪽으로 몰아넣는 것이 유리하다.
주석하도 미간을 찡그렸다. 흑도라 어쩔 수 없다니. 덕양에서는 정파가 나쁜 짓을 더 많이 했다고! 게다가 그의 전생에서는 무림맹도 흑련과 아무런 차이가 없었는데.
유비연이 떠나려 할 때 주석하가 입을 열었다.
“그럼 공짜는 안 되고…….”
그녀가 눈으로 다시 묻자 주석하가 손을 내밀었다.
“네?”
“원하는 대로 해줄 테니 돈을 줘요.”
“돈요?”
“솔직히 말하면 내가 산적 소굴에 들어온 이유가 산채를 털려는 건데…… 당신 때문에 털기 힘들어졌으니 보상해 봐요.”
산적 소굴을 턴다는 말이 정말 황당하게 들렸다. 유비연은 어이없어 한동안 말을 못 하다가 호주머니를 뒤졌다.
어차피 그녀에게 돈은 큰 문제가 아니었다. 설사 주석하가 돈만 받고 맡은 일을 해주지 않더라도 돈 자체는 전혀 타격이 되지 않았다.
‘차라리 잘 됐어. 돈을 노리고 일만 해준다면야.’
내심 위안한 유비연은 은자 열 냥을 꺼냈다.
“이거면 돼요?”
돈을 본 주석하의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저 돈이면 혼천교까지 편히 갈 수 있었다.
그는 재빨리 은자를 낚아챘다. 이 서생은 생명의…… 아니 긴 여행길의 은인이었다.
“충분합니다. 휴식시간 끝나기 직전이랬죠? 바로 해드리겠습니다.”
돈을 받은 주석하의 태도가 확 변했다. 마치 고객을 응대하듯 연거푸 정중하게 인사를 반복했다.
유비연은 불안감을 간신히 억눌렀다. 주석하가 아군인지 적군인지에 따라 상황이 크게 변한다. 만일 아군이라면 어떤 식으로 소란을 피우겠다는 걸까.
“이미 주사위는 던졌어. 걱정하지 말고 기다리자. 모두를 구하지 못하더라도 어쩔 수 없잖아. 내 능력의 한계인데.”
유비연은 전의를 불태우며 주석하의 뒷모습을 눈으로 좇았다.
**
주석하는 도수와 혈혼도객을 불렀다.
“이제 밥은 먹었고 슬슬 떠날 시간이지?”
“떠나게?”
도수가 대수롭지 않게 응답했다. 그들의 능력이라면 산적의 눈을 피해 산채를 벗어나기 어렵지 않다.
정작 혈혼도객은 생각이 달랐다.
“밥을 먹었지만, 돈이 아직 없잖습니까? 돈을 구해야죠.”
주석하는 주머니에서 은자를 꺼내 보여주었다.
“헉! 어디에서 구하셨습니까?”
“웬 녀석한테 털었지.”
“흐흐, 그럼 가야죠.”
혈혼도객도 찬성을 표했다.
주석하는 목책으로 둘러싸인 산채 입구를 바라보다가 주변에 인질로 잡혀 온 사람들을 들러보았다. 그 순간 여전히 그를 노려보고 있는 서생과 시선이 마주쳤다.
찔끔 놀란 주석하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젠장, 그냥 도망치려 했더니…… 감시하고 있었구나!”
아무래도 나 몰라라 도망치기엔 양심의 가책이 느껴졌다. 협사인 척하는 서생에 대한 가책보다는 인질에 대한 가책이다. 이들은 구함을 받지 못하면 어쩌면 노예시장에 팔릴지도 모른다.
문득 어린아이 명아가 떠올랐다. 그녀의 천진난만한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젠장. 마음이 불편해. 돈값은 하고 가야겠어. 너희들은 인질이 도망치면 같이 도망치도록 해.”
주석하는 두 사람에게 당부하고는 걸음을 뗐다.
“어? 어디가?”
도수를 뿌리치고 주석하는 산채가 들어선 위쪽 산비탈로 이동했다. 그곳은 어제 그가 도끼질하며 나무를 팼던 장소였다. 울창한 숲이 시작되는 지점에 집채만 한 바윗덩어리가 자리 잡고 있었다.
바위 아래에는 오전에 작업하다 버려둔 도끼가 버려져 있었다. 그가 작업하던 곳이니 그가 도끼를 들어도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주석하는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내력을 끌어올렸다.
“오늘 제대로 소란을 피워보자.”
열 냥을 받았으니 적어도 그 값만큼은 할 생각이다. 도끼를 움켜쥔 손이 뜨겁게 물들면서 도끼가 마치 검명을 발하듯 웅웅거리기 시작했다.
풍운채의 전설이 시작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