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화 설매검화 (1)
유비연은 고진과 함께 잡혀 온 인질을 한쪽으로 인도했다.
그녀는 사람들에게 일이 발생하면 얼른 입구 쪽으로 뛰라고 속삭였다. 사람들은 반신반의하며 그녀가 가리키는 지점으로 모였다. 일부는 그녀의 말을 듣지 않고 제 할 일을 했다.
산적들만 눈치채지 못하면 상관없었기에 그녀도 강요하지 않았다.
‘모두를 구할 수는 없어. 말을 듣지 않으면 할 수 없는 거지.’
어차피 한둘이 뛰기 시작하면 다른 사람들도 덩달아 뛰는 법이다. 고진이 구석구석까지 돌아다니며 사람들에게 귀띔하는 것을 보면서 그녀는 곧 인질을 구할 수 있으리란 희망에 부풀었다.
오늘 구한 사람 숫자는 그녀가 지난 일 년간 강호협객행을 벌인 이후 최대가 될 것이다. 뿌듯한 마음에 그녀는 눈으로 주석하를 찾았다.
어차피 주석하는 큰 변수가 아니었다. 만일을 대비하여 주석하 일행 셋을 인질과 분리하는 것이 가장 큰 목적이었고 이들이 소동을 일으켜주면 금상첨화였다. 주석하가 산적에게 고자질하면 최악의 상황인데 그때는 힘으로 산적과 대결할 요량이었다.
“어?”
유비연은 홀로 산비탈 작업장으로 올라가는 주석하를 발견했다. 그곳은 나무 땔감을 만들던 장소로 거대한 암반이 턱 버티고 있는 곳이다.
유비연의 안색이 확 일그러졌다. 주석하 일행 셋을 모두 인질과 떼놓으려 했더니 정작 주석하 혼자만 움직이고 다른 둘은 여전히 인질 사이에서 얼쩡거리고 있었다.
남은 둘이 인질을 잡으면 골치 아프다는 생각에 유비연은 고진을 그들 옆으로 보내어 만일을 대비하게 했다.
그러는 사이 주석하가 도끼를 드는 모습이 보였다.
유비연은 헛웃음을 들이켰다. 대체 뭘 하려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소동을 크게 일으켜 보랬더니 장난치는 것도 아니고. 그나마 산적에게 고자질하지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찰나.
콰앙!
고막을 찢는 듯한 엄청난 소리가 산을 뒤흔들었다.
“으응?”
쿠르르르-
점차 그녀의 눈이 커졌다. 상상치 않았던 엄청난 일이 발생하고 있었다. 거대한 암반이 쩌적 갈라지더니 여러 개로 부서진 거대한 돌덩이가 굴러 떨어졌다. 아래쪽이 산채 건물이 세워진 곳이라 졸지에 산사태가 일어나 건물을 덮친 양상이 됐다.
“허어억!”
“산사태다!”
“피해라!”
부근에 있던 산적들이 혼비백산해서 뛰어다녔다.
마른하늘에 날벼락이었다.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입만 벌리고 있던 유비연은 화들짝 놀라 주변 사람들에게 소리쳤다.
“도망쳐!”
쿠쿠쿵-
사람들이 목책이 설치된 입구로 몰려갔다. 돌덩이가 산채의 초가를 덮치자 집과 담벼락이 무너지면서 난리가 났다.
‘이런 무식한 놈이!’
예상외의 큰 소동에 유비연은 혀를 내두르면서도 재빨리 사람들을 인도하며 계획을 실행했다. 주석하가 보인 상상 이상의 신위는 나중에 생각하려고 접어두고.
사람들이 목책을 통과해서 빠져나가면 산적들이 뒤쫓아 올 것이다. 그때 목책을 무너트려 입구를 막으면 산채 내부의 산적은 밖으로 나올 수 없다. 무너진 목책을 수습하고 나오려면 적어도 한나절은 걸릴 테니까.
완벽한 계획이었고 의도한 성과를 거두기 위해 그녀는 사전에 목책을 묶어둔 지지대에 손을 봐두었다. 최후의 순간에 그녀가 검을 휘둘러 지지대를 파손하면 순식간에 무너질 것이다.
“잡아라!”
산적들이 도망치는 사람들을 쫓으며 도를 휘둘렀다. 유비연은 손쉽게 산적 하나를 제압하고 검을 빼앗았다.
이제 준비 완료!
그녀는 차가운 눈으로 전방을 응시했다. 도망치는 사람들, 뒤쫓는 산적. 무너진 집 앞에서 방방 뛰는 산적. 그리고 저 멀리 이쪽으로 뛰어오는 주석하까지.
사전에 귀띔한 덕분에 많은 사람이 벌써 목책을 벗어났다. 목책 위에서 망을 보던 산적을 고진이 처리하고 있었다.
“으아아!”
긴박한 순간에도 함성인지 비명인지 큰소리를 지르며 달려오는 주석하 때문에 유비연은 웃음을 참지 못했다. 추격하는 수십 명의 산적을 뒤에 두고 바로 앞에서 정신없이 뛰는 모습이 목숨을 건 것인지 장난치는 것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저 모습은 무림 고수라 하기엔 어폐가 있고 그렇다고 평범한 일반인이라 하기엔 방금 거대한 암석을 부순 무위를 봤기에 절로 고개가 저어졌다.
“경공은 어디에다 두고…….”
어쨌든 죽어라 달리는 주석하가 산채 입구의 목책을 통과하는 순간 그녀는 목책 지지대를 부술 생각이었다. 그렇게 되면 주석하를 뒤쫓는 수십 명의 산적이 목책에 깔리고 더는 사람들을 쫓아오지 못하게 될 것이다.
“저놈 잡아라!”
“서둘러!”
경공을 모르는 게 확실했다. 무공에 입문은 한 건가? 유비연은 응원을 보내면서 검에 힘을 주었다.
“으아아!”
두 다리가 보이지 않을 만큼 열심히 뛰는 주석하가 마침내 목책을 통과했다.
순간 유비연이 목책의 지지대를 향해 힘껏 검을 내리쳤다.
와지직-
쿠쿵!
지지대 한쪽이 무너지자 연달아 목책이 흔들리며 폭삭 주저앉기 시작했다. 유비연도 주석하를 따라 얼른 몸을 날렸다. 작전은 완벽했다. 아직 목책을 통과하지 못한 인질까지 구할 여력은 없었다.
**
주석하는 사력을 다해 뛰었다.
입구를 막고 있는 저 목책을 통과하지 못하면 혼자 산적에게 잡혀 조리돌림 당할 게 뻔했다. 암반을 깨트리는 그를 목격한 산적이 있을 테니 절대 잡히면 안 된다. 그렇기에 죽자사자 뛰었다.
다행히 목책을 무사히 통과한 그는 바로 몸을 돌려 목책을 쳐다봤다. 목책이 흔들리며 무너지고 있었고 그 건너편에서 산적들이 정신없이 달려들었다.
“성공인가…….”
입가에 드리워지던 흐뭇한 미소가 일순간에 날아갔다.
산적과 뒤섞여 이쪽으로 뛰어오는 사람이 보였다. 바로 어린 소녀 명아와 그 어머니였다.
지금 상황에서 저 두 사람은 절대 목책을 통과할 수 없었다. 목책이 무너지는 순간 그대로 아래에 깔릴 운명이었다.
머릿속이 하얗게 변한 주석하는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었다. 본능이 먼저 움직였다.
그는 다급하게 무너지는 목책 안으로 뛰어들었다.
우지직-
천장이 무너지듯 목책을 구성했던 수많은 지지대가 조각나며 떨어져 내렸다.
“명아야!”
주석하는 몸을 날려 명아와 명아 엄마를 끌어안았다.
우직끈-
그의 등으로 커다란 기둥이 넘어지고 목책을 구성한 온갖 자재들이 쌓였다. 이 세상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와르르르-
목책이 세워졌던 입구는 산사태가 일어난 것처럼 완전히 붕괴했다. 밖으로 뛰어나오던 산적 상당수가 목책 아래에 깔렸고 미처 나오지 못한 산적은 산채 쪽에서 고래고래 소리 질렀다.
쿠쿠쿵!
무너진 목책이 산처럼 쌓였다.
아비규환이었다.
“아저씨!”
그 와중에 주석하는 품 안에서 명아의 목소리를 들었다.
주위는 어두컴컴했다.
얼마나 많은 더미가 사방에 쌓인 걸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간신히 무너진 목재 틈 사이로 희미한 빛이 스며들어왔고 등에는 엄청난 압력이 내리누르고 있었다.
주석하는 명아를 안으면서 위에서 짓누르는 압력을 버텼다.
“괜찮아?”
“괘…… 괜찮아요. 하지만…… 엄마가…….”
미처 주석하가 끌어안지 못한 쪽을 명아의 엄마가 받치고 있었다. 아이를 보호하려고 사력을 다하는 모습이었다.
“젠장!”
주석하는 상황을 파악하고 힘을 쓰려 했다. 하지만 무너진 목책은 인간이 버틸 수 있는 무게가 아니었다.
“엄마랑…… 죽을 끓이고 있었는데…….”
명아와 명아 엄마에게 주어진 임무는 식사 준비였다. 그렇다 보니 다른 인질과 떨어져 있었고 빨리 도망치기 어려웠다. 산적들이 뛰쳐나가면서 난리가 난 것을 알았고 뒤늦게 탈출 대열에 합류했다.
하지만 목책이 그들을 기다려 주지 않았다. 산적과 동시에 뛰쳐나오고 있었으니까.
“내가…… 꼭 살려줄게.”
주석하는 자신의 몸이 품속의 명아를 누르지 않도록 사력을 다해 버텼다. 어마어마한 무게가 등을 짓누르자 그는 내력을 끌어올렸다. 내력과 위에서 누르는 압력이 간신히 평형을 이루어 짓눌릴 위험을 겨우 벗어났다.
하지만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까.
사람의 힘으로, 설사 그가 무공 고수라 해도 이런 식으로 계속 버틸 수 없다. 시간이 흐를수록 위에서 내리누르는 압력이 강해질 테고 그들은 결국 그 아래에 짜부라져 뼈도 추리지 못할 것이다.
“아저씨, 난 괜찮아요.”
죽음을 감지한 걸까. 명아가 울음 섞인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니다, 내가 꼭 해줄게. 너도 엄마도 살려줄게.”
온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어마어마한, 무너진 목책의 양에 비해 그의 힘은 너무나 미약했다. 솔직히 지금 아래에서 버티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는 이야기이기도 했다.
우지직-
등에서 누르는 목책의 무게가 늘어났다. 지금 이곳이 어디쯤인지, 어디로 뚫고 나가야 하는지, 얼마나 많은 목책 더미가 쌓여 있는지 지금 상황에서는 도저히 알 수 없었다. 다만 무조건 온몸으로 떠받쳐 명아를 살리겠다는 일념뿐이었다.
쿠르르르-
목책 더미가 진동하며 등으로 강한 통증이 엄습했다. 목책을 구성하던 뾰족한 나무 장대가 위에서 그의 등을 찍어 누르고 있었다.
“으윽!”
주석하는 신음을 터트리며 몸을 움직이려 했다. 하지만 더미 사이에 낀 그의 신체는 꼼짝할 수 없었다.
“아, 아저씨.”
“참아, 구해줄게.”
주석하는 힘을 내어 내력을 끌어올렸다. 그가 운용 가능한 내력은 완벽하게 그를 지탱해주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 하나만으로는 부족했다. 다른 무공을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 그것도 힘없는 아이를 끌어안고 있는 상황에서 유일한 방법은 힘으로 목책의 무게를 이겨내고 일어서는 것뿐이다.
이를 위해서는 잠자는 다른 내력의 힘이 필요했다. 하지만 다른 네 가지 내력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젠장, 회귀해서 목책 더미에 깔려 죽는 운명이라니…….’
허탈감이 엄습했으나 주석하는 곧바로 털어냈다. 지금은 다른 생각을 할 때가 아니었다. 일단 명아만은 살리고 봐야 한다. 굶던 그에게 사과를 건넸던 호의를 갚아야 했다.
“크으윽!”
등을 찌르는 장대 끝이 더욱 깊이 침범해왔다. 이제는 단순히 위에서 등을 찌르는 정도가 아니었다. 아무래도 뾰족한 끝부분이 살을 찢고 들어온 듯했다.
“아저씨?”
그의 신음에 불안해진 명아의 목소리가 들렸다.
“괜찮다.”
품속에서 꿈틀거리던 명아가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었다. 주석하는 품에 안긴 어린아이의 얼굴을 희미하게 볼 수 있었다. 눈물이 그렁그렁 고인 검은 눈동자가 어렴풋하게 보였다. 그녀는 아픔을 삼키느라 작은 입술을 질끈 깨물고 있었다.
아무리 주석하가 위에서 떠받쳐 주고 있어도 그녀 또한 완전히 무사할 수는 없었다.
“내가 구해줄게…….”
주석하는 신음을 토해내며 온힘을 다해 내력을 끌어올렸다.
목숨의 위험을 느낀 것일까. 단전에서 잠자던 내력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주석하에게는 실로 반가운 반응이었다.
고오오오-
서서히 네 기운이 잠에서 깨어났다. 이 네 가지 기운은 이미 활성화되어 있는 하나의 기운에 더해져 온몸으로 퍼져나갔다. 기경팔맥이 잠에서 깨어나는 기분이었다.
위에서 무지막지하게 내리누르던 압력이 조금씩 줄어들었다.
‘가능성이 있어!’
주석하는 눈을 감고 운기에 집중했다. 단전을 떠난 내력이 서로 엉키고 합쳐지면서 복잡한 양상으로 전환했다. 엄청난 기운이 혈맥을 타고 돌면서 전신이 부풀기 시작했다. 이는 완벽하게 내력을 다스리지 못하는 한계 때문이었다.
‘어떻게 해야 하지?’
힘으로 일어서면 될까? 그는 무사할지 모르지만 품 안의 명아는 살기 어려울 것이다.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였다.
주석하는 우설금이 자객의 습격을 막으려고 펼쳤던 강기의 벽을 떠올렸다. 그는 그런 무공을 배운 적이 없었다. 하지만 어떻게든 해내야 했다. 양손을 통해 강기의 일부를 외부로 발산하는 무공을 써본 적이 있으니 이를 전신을 통해 응용하면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
호신강기로 온몸을 두르고 이를 폭죽처럼 외부로 일순간 밀어낸다면 우설금이 펼친 강기의 벽과 비슷한 효과를 보지 않을까.
어차피 다른 방법은 없었다.
고오오오-
주석하는 모든 내력을 사용하여 호신강기를 만들고 자신과 명아를 감쌌다. 준비가 완료되자 힘껏 호신강기를 외부로 단번에 밀었다.
콰아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