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화 설매검화 (2)
무너진 목책을 두고 유비연은 어이없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계획이 완벽하게 실행됐다. 단 한 가지만 빼면.
‘이 자식은 왜 다시 돌아가서…….’
그녀가 말릴 틈도 없이 주석하가 다시 안으로 튀어 들어갔다. 이는 그녀도 미처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주석하가 뛰는 방향에 어린아이와 부인이 달려오고 있는 것을 보긴 했다.
그녀는 주석하가 고개를 오를 때 어린 소녀와 나란히 걸었던 장면을 떠올렸다. 그때 그녀는 어린 소녀를 노리는 흉악범 정도로 주석하를 간주했었다. 원래 사파인은 그런 지저분한 짓을 저지르는 인간이 아니었던가.
그랬던 주석하가 소녀를 구하기 위해 무너지는 목책 안으로 돌진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아이 친척이었나?’
말도 안 되는 추측이었다. 어쨌든 그녀는 주석하와 소녀의 관계를 짐작할 수 없었다. 그가 목숨을 걸고 소녀를 구하려 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물론 지금은 그런 고민을 할 때가 아니었다.
유비연은 산적 소굴을 빠져나온 사람들을 통제하고 수습해야 했다. 그런 상황 속에서도 자꾸 눈이 돌아간다.
주석하와 아이가 목책 더미에 아래에 깔렸다. 어마어마한 목책 더미의 양을 생각하면 저 밑에 깔린 사람은 누구라도 절대 살아남을 수 없다. 벌써 무시무시한 압력에 짓눌려 오징어포가 되어 버렸을 것이다. 살아 있을 가능성은 없다.
목책이 무너지면서 산채로 들어가는 입구를 완전히 가로막았다. 산적 일부는 목책 아래에 깔렸고 일부는 건너편에서 고래고래 소리 지르고 있었다.
그녀 쪽에는 산채에서 도망친 사람들이 무너진 목책을 안도한 표정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악몽 같았던 산채 생활에서 풀려났다는 안도감이 대부분의 안면에 떠올라 있었다.
작전에 성공했지만 주석하를 생각하니 유비연은 찜찜했다.
‘사파인 하나일 뿐이잖아…….’
저 목책 더미에 깔려 살아 있을 자는 없으니 주석하나 아이는 죽은 것이 확실했다. 비록 사파인이었으나 어쨌든 소동을 일으켜 인질 탈출에 도움을 주었으니 나름 선인이었다. 사파인 답지 않게 살신성인하다 죽다니. 그렇기에 그녀는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많은 이를 살리려면 몇 사람의 희생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주석하 또한 그런 희생자일 뿐이다. 운이 나빴고 구체적으로는 본인의 선택이었다. 도망쳤다가 다시 죽음 속으로 기어들어 갔으니까.
“이런!”
그녀의 옆에서 경악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유비연은 옆을 힐끔 돌아봤다. 주석하의 일행으로 추정된, 중구난방으로 생긴 청년과 피부가 시커먼 산적 놈이었다. 그들 역시 어이없어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이럴 때는 일단 모른 척하는 게……. 그들과 마주하기 부담스러웠던 유비연은 슬그머니 물러났다.
무너진 목책 더미는 산적들이 몇 날에 걸쳐 치울 것이다. 밖으로 나오려면.
그때 그녀의 귀에 미묘한 소음이 들려왔다.
드드드드-
“응?”
목책 더미에서 진동이 일고 있었다. 아직 완전히 무너지지 않은 탓일까.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무시하려던 유비연의 안색이 갑자기 확 바뀌었다. 목책 더미 내부에서 갑자기 엄청난 빛이 뿜어져 나왔다.
콰아아앙-
순간 목책 더미가 사방으로 튕겨 나갔다. 마치 화산이 분출하듯 엄청난 힘으로 부서진 자재가 날아갔다. 주위에 있던 사람들은 급히 몸을 숙이고 더미를 피했다.
한동안 더미가 날리고 먼지가 일어 앞을 가렸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우르르르-
허공으로 솟구쳤던 더미가 다시 땅에 떨어졌다. 뭉게뭉게 이는 먼지 속에서 사람 형상이 우뚝 나타났다.
“아!”
유비연은 놀라서 입을 다물 수 없었다. 더미에서 막 모습을 드러낸 인물, 바로 죽었다고 여긴 주석하였다.
어마어마한 양의 더미를 날려버리다니! 눈으로 보지 않았다면 절대 믿지 못했을 것이다.
현 무림을 지배하는 정파십존(正派十尊)이라면 과연 가능할까. 쉽지 않으리란 생각이 든 그녀는 머릿속이 하얗게 질렸다. 저자가 어마어마한 고수였단 말인가? 제대로 뛰지도 못하던 녀석이?
주석하는 어린 소녀를 팔로 감싸고 오연하게 웅크리고 있었다. 두 사람은 먼지투성이였으나 놀랍게도 멀쩡해 보였다.
천천히 주석하가 일어났다.
함께 일어서던 명아는 급히 자신의 뒤쪽을 살폈다. 그곳에는 그의 엄마가 쓰러져 있었다.
“엄마!”
명아가 울부짖으며 엄마를 끌어안고 흔들었다.
유비연은 넋이 나간 채 그들에게 다가갔다. 이미 피투성이가 된 아이의 엄마는 살아 있을 가능성이 없었다.
조용히 명아의 머리를 쓰다듬던 주석하가 주변으로 시선을 돌리다가 유비연과 눈이 마주쳤다.
유비연은 찔끔 몸을 움츠리며 표정이 굳었다.
“어떻게 됐습니까?”
“서…… 성공했어요.”
주석하의 질문에 유비연은 급히 대답했다. 인적 물적으로 막대한 피해를 본 산적에게 이미 인질은 관심 밖이었다. 그들은 바위에 무너진 집과 무너진 목책에 관심을 가질 뿐이었다.
“다행이군요.”
무심한 목소리로 응답한 주석하의 시선이 다시 명아에게 돌아갔다.
명아는 여전히 울고 있었다. 그 모습에 주석하도 가슴이 찢어졌다. 두 사람을 모두 살리지 못했다는 자책이 그의 마음을 침울하게 했다. 꼭 살려주겠다고 약속도 했었는데…….
무공이 조금만 더 강했더라면, 자유자재로 내력을 사용할 수 있었더라면 이런 위험에서 두 사람을 모두 살릴 수 있었을 것이다. 자신이 부족했기에 결국 아이의 엄마는 죽고 말았다. 그의 책임이었다.
게다가 이 작전을 시작한 자가 자신이었다. 아이 엄마의 죽음에 그도 책임이 있었다.
작전에 가담하지 말았어야 했나……. 많은 사람을 구한 일은 대단하지만 그 과정에서 내가 원하던 한 사람을 구할 수 없다면 그게 무슨 의미란 말인가.
착잡한 마음에 주석하는 발을 뗄 수 없었다. 흐느끼는 명아와 슬픔을 나눌 수 없다는 사실이 너무 슬펐다. 그리고 그 죽음에 자신도 일부 관여하고 있다는 사실이 미안했다.
유비연이 다가와서 착잡한 음성으로 말했다.
“미안해요. 하지만 많은 사람을 구했어요. 자부심을 느껴도 돼요.”
“꼭 그 시점에 목책을 부숴야 했습니까?”
주석하는 여전히 눈을 떼지 못한 채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유비연은 말문이 막혔다. 이 남자는 그녀를 질책하고 있다. 왜 어린 소녀를 죽이려 했냐고. 물론 그녀도 아이를 죽일 의도는 없었다. 다만 목책을 무너트릴 최적의 시점을 찾았을 뿐이다.
아이를 살리려 했다면, 아니 모든 인질을 다 구출하려 했다면 목책을 무너트리지 말았어야 한다. 그랬다면 과연 이들을 얼마나 살려낼 수 있었을까.
그녀가 아무리 고수라 해도 산적이 사람들을 인질로 잡고 위협하면 방법이 없다. 그 모든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그녀는 과감하게 움직였을 뿐이다.
“미안하게 됐어요.”
할 말이 많으나 그녀는 감정을 조절했다. 어쨌든 주석하는 큰 공헌을 했으니까. 게다가 그는 그녀가 감히 범접할 수 없는 고수였다. 겉으로 보기에 무공을 익히지 않은 것처럼 보일 뿐 실제로는 고수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거대한 암반을 깨트리고 어마어마한 목책 더미를 밀어내며 살아났다. 그런 신기를 보이려면 적어도 강호에서 열손에 꼽히는…….
너무 나갔나? 강호에 고수가 모래알처럼 많다지만 하늘에서 갑자기 최강의 고수가 뚝 떨어질 수는 없는 법이다. 이자의 정체는…… 대체 뭐지?
유비연은 눈을 가늘게 뜨고 주석하를 살폈다.
절로 몸이 부르르 떨렸다. 이자는 스스로 흑도라 했었다. 정파와는 상극이고 세상을 어지럽히는 자다. 이런 강자가 강호를 어지럽히려 든다면…….
악의 화신일지도 모른다며 조심스럽게 살피던 유비연은 정작 주석하의 행동에 마음이 차분해졌다. 주석하는 아이와 슬픔을 함께 나누고 있었다. 그는 더미를 헤치고 아이 엄마를 안은 다음 안전한 곳으로 이동했다.
잠시 후 아이의 통곡 소리와 이를 달래는 주석하의 목소리가 들렸다. 유비연은 혼란스러웠다. 사파인답지 않은데…….
**
풍운령을 넘어 고개가 끝날 때쯤에 작은 봉분이 만들어졌다.
주석하의 부탁으로 도수와 혈혼도객이 땅을 팠고 명아의 어머니가 묻혔다. 땅을 파는 내내 혈혼도객이 구시렁거렸으나 주석하는 신경 쓰지 않았다.
절을 마친 명아는 한동안 일어나지 않고 슬픔을 삼켰다.
주석하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기분을 달랬다. 아직 어린 명아는 엄마를 잃은 사실을 제대로 실감하기 어려울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 험난한 세상에 홀로 남은 외로움을 깨닫기 시작할 것이다. 그 아픔을 함께할 수 없기에 주석하는 기분이 착잡했다.
산채에 잡혔던 사람들은 이미 떠나가고 남은 사람은 그들 일행을 제외하면 유비연과 고진뿐이었다.
“이만 가자구나. 다음에 또 와서 인사드려야지.”
주석하는 명아를 일으켰다. 다행히 명아는 슬픔에서 금방 깨어났다.
“명아야, 친척 집은 어디니?”
“친척 없는데요.”
“그때 아이 낳았다고…….”
“그냥 아는 집요. 그리고 전…… 그 집이 어딘지도 몰라요.”
이렇게 난감할 때가. 주석하는 그녀의 손을 잡고 고개를 내려갔다. 그의 옆에는 유비연이, 그 뒤로는 도수, 혈혼도객이 어색한 표정으로 고진을 힐끔거리며 따라왔다.
“어디로 가시나요?”
어색한 분위기를 깨트리고자 유비연이 슬쩍 물었다. 주석하가 예상치 못한 고수임을 알아낸 이상 여러 정보를 얻어낼 필요가 있었다.
굳이 주석하는 숨기지 않았다.
“혼천교라고 하던가요? 섬서에 혼천교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혼천교는 왜요?”
“궁금해서요.”
뭔가 숨기는 것이 있어 보였으나 유비연은 더 캐물을 수 없었다.
정작 주석하는 혼천교보다 명아가 걱정이었다. 이 아이를 내버려 둘 수도 없고 그렇다고 혼천교에 데려갈 수도 없다. 얼핏 데려가겠다는 의사를 비쳤다가 경기를 일으키는 혈혼도객을 봤던 탓이다.
“혼천교에 안 가면 어떤가요? 별로 좋은 곳도 아닌 것 같은데.”
슬쩍 걸고 넘어오는 유비연을 째려보던 주석하는 좋은 생각을 떠올렸다. 이 서생이 비록 본인이 밝힌 것처럼 서생은 아닌 것 같지만, 나쁜 사람으로 보이진 않았다. 그럭저럭 반듯해 보이니 명아를 맡길 수 있지 않을까.
“어쩔 수 없습니다. 거기 가려고 얼마나 고생해서 여기까지 왔는데요. 그런데…… 당신은 대체 누굽니까? 무공도 제법 하는 것 같던데.”
“저는 화산파 문하입니다.”
산적 소탕을 무난히 끝냈기에 유비연은 본인의 소속을 확실하게 밝혔다. 다만 화산파는 정파이니 주석하 일행과는 상극이라 염려스럽긴 했다.
“화산파?”
뒤에서 따라오던 혈혼도객이 가장 먼저 경기를 일으켰다. 그는 옆에서 걷는 고진을 힐끔거리며 인상을 구겼다. 혼천교와 화산파는 거리가 멀지 않아 유달리 경쟁의식이 강했다.
“화산이라…… 그 누구였더라? 소화자인가? 그놈이 화산 문하라 했던 것 같기도 하고…….”
주석하는 흑검문을 노리고 오다가 죽은 소화자가 제일 먼저 생각났다. 전생에서 정파의 행각을 워낙 많이 접했기에 구대문파인 화산파를 들어도 그냥 무덤덤했다.
“소화자? 누구죠?”
속가제자를 유비연이 알 리 없었다.
“그런 사람 있어요.”
딱 말을 끊어버리는 통에 유비연도 추가로 물을 수 없었다.
머리를 굴리던 주석하는 명아를 화산파에 맡기면 어떨지 고민했다. 사파인 혼천교에는 어린아이를 맡기고 싶지 않았고 그렇다고 흑검문까지 그 먼 길을 계속 데리고 다닐 수도 없다. 지금 상황에서는 그나마 정파인 화산파가 무난했다.
“음, 혹시 화산파에서 제자 받아요?”
“왜 그러시죠?”
주석하는 말 없이 명아를 눈짓으로 가리켰다.
유비연도 금방 눈치챘다. 그러잖아도 명아 어머니의 죽음 때문에 적잖게 마음의 빚을 느끼던 차였다. 아무리 대의를 위했다지만 평범한 아이를 고아로 만들었으니.
“평소에는 제자를 받지 않지만…….”
화산파에서 유비연의 신분은 상당히 높았다. 아니 화산뿐만이 아니다. 설매검화라는 별호는 천상삼화의 일인이기에 무림에서 모를 사람이 없을 만큼 유명했다.
어린아이 하나를 화산파 문하로 받아들이는 일은 그녀에게 손바닥 뒤집기나 마찬가지였다. 다만 주석하의 무공이 평범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았기에 쉽게 결정할 수 없었다.
그녀는 주석하의 정체가 정말 궁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