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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검천하-49화 (49/273)

49화 설매검화 (3)

화산의 코앞에 도착한 주석하 일행은 빼어난 절경에 감탄을 연발했다.

하늘을 찌르는 듯 우뚝 선 칼날 같은 바위가 마치 조물주가 빚어놓은 작품을 연상케 했다. 저 높은 곳에서 화산파 무인들이 수도하고 있으리라.

멋진 풍경에 입을 다물지 못하는 주석하와 달리 유비연은 오랜만에 고향에 돌아온 감상에 젖어 있었다. 일 년 전에 이곳을 떠나 강호협객행을 시작하며 다짐했던 포부가 다시 떠올랐다. 그때의 다짐 중에 많은 것을 이루었고 더 강한 자가 되어 사문에 돌아왔다.

화산으로 올라가는 입구의 허름한 객잔에서 주석하는 여장을 풀었다.

만두와 소채를 시켜놓고 그들은 약속을 잡았다.

“제가 올라가서 명아의 입문이 가능할지 알아봐 줄게요. 그동안 여기에서 잠시 기다려 주세요.”

유비연의 제안에 주석하는 명아를 힐끔 살폈다.

엄마가 죽은 후로 명아는 말이 사라졌다. 처음 고개 입구에서 만났을 때 말이 많던 아이가 지금은 어쩌다 한두 마디뿐이었다. 주석하는 아련한 아픔을 느끼면서 제안을 받아들였다. 어차피 그는 바쁘지 않으니 며칠 기다리기 어렵지 않았다.

“그 정도야 뭐……. 근데…… 돈은 내고 가세요.”

천연덕스러운 주석하의 요구에 유비연의 눈썹이 확 올라갔다.

“대체…….”

“돈이 다 떨어졌거든요.”

이들을 보면 대체 무림인인지 좀도둑인지 구분할 수 없다.

“어휴, 알았어요. 그동안 인근을 둘러보며 편히 지내세요. 여기 경치가 좋거든요.”

중원 오악의 하나인 화산의 절경은 예로부터 유명했다.

“구경도 돈이 있어야…….”

손가락을 비비는 주석하를 화난 눈으로 유비연이 노려보았다.

찔끔한 주석하가 재빨리 손을 거뒀다.

“저도 몸조리를 좀 해야죠. 구경은 나중에 해도 늦지 않아요.”

풍운채에서 다쳤던 등이 여전히 따끔거렸다. 주석하는 도수와 혈혼도객의 의견을 물었다. 두 사람은 예상대로 별생각이 없었다.

급히 식사를 마친 유비연이 고진과 함께 사라졌다.

그들 일행만 남게 되자 피곤이 몰려왔다.

“혼천교는 여기에서 얼마나 가야 해?”

“백 리쯤 더 가야 합니다.”

“아직 멀었네. 유 형이 돌아오면 가도록 하죠.”

넓은 중원에 비하면 바로 이웃집인 셈이지만 좁은 덕양에서만 살았던 주석하에게는 그것도 꽤 먼 거리였다.

그제야 눈치 보던 명아가 입을 열었다.

“아저씨, 나…… 여기에서 살아야 해?”

“음, 싫어?”

“그런 건 아니지만…… 아저씨랑 헤어져야 하잖아?”

명아의 얼굴엔 불안한 기색이 역력했다. 주석하는 그녀의 불안을 이해했다. 갑자기 돌봐줄 부모가 사라진 세상에서 믿을 사람이라고는 그 하나밖에 없으니.

“아저씨가…… 좀 돌아다녀서 그래. 여기에 있으면 자주 명아를 보러 올게.”

명아가 고개를 끄덕이며 환하게 웃었다.

이곳에서 헤어지면 그가 다시 화산에 들릴 일이 있을까. 훗날 명아가 강호에 출도하더라도 넓은 세상에서 다시 만날 일이 있을까. 이미 정해진 답을 생각하자 주석하는 착잡해졌다. 지금 그는 거짓말하는 셈이었다.

‘그래도 이게 최선이니까…….’

주석하도 아이를 향해 씨익 웃어줬다.

보다 못한 혈혼도객이 끼어들었다.

“근데 화산파 그 자식들 믿을 만합니까?”

“혼천교보다는 낫지 않겠어?”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혼천교 소속인 혈혼도객의 생각을 굳이 바꾸려고 할 필요는 없었다. 꼭 정파, 사파로 구분하지 않더라도 화산파는 그나마 믿을 만한 곳이니까.

“그…… 유연과 고진 두 사람도 나쁜 사람 같지는 않던데?”

“유연 그 자식은 너무 곱상하게 생겼어. 말투도 그렇고.”

도수가 불쑥 끼어들었다.

주석하는 도수의 얼굴을 쓱 살피고는 유비연과 머릿속에서 비교했다. 차이가 좀 나긴 하네.

“생김새로 사람의 성향을 확신할 수는 없지만 나쁜 사람은 아니야.”

주석하는 도수의 불만을 잠재웠다. 여전히 그들은 유비연이 남장했다는 사실을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사실 꼼꼼하게 의심했다면 눈치챘겠지만 그동안 큰일이 많아서 그럴 여유가 없었다. 게다가 그런 부분을 굳이 신경 쓸 그도 아니었다.

“우리 걱정부터 해야지. 혼천교에 가면 혼군을 만날 수 있어?”

두 사람의 시선이 혈혼도객에게 쏠렸다.

“물론입니다. 제가 다리를 놓아드리겠습니다.”

혈혼도객이 호언장담했다.

주석하는 의심 가득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혈혼도객 정도의 수준이라면 혈혼교에서 주요 위치를 차지할 리가 없다. 아마 본인도 교주인 혼군을 알현하려면 무한정 기다려야 하지 않을까. 그런 상황에서 저 자신감은…….

답 없는 앞날 걱정을 일단 제쳐놓고 며칠간 어디를 돌아다닐지 계획하고 있을 때였다. 객잔 문이 벌컥 열리고 세 손님이 들어왔다.

무심코 입구를 쳐다본 주석하의 안색이 확 변했다.

‘허억! 저들을 여기에서 또 만나다니…….’

홍의, 백의, 흑의. 유별나게 대조되는 옷차림의 세 사람이다.

안으로 들어오던 우설금도 주석하를 발견하고는 갑자기 미간을 찌푸리더니 못 본 척 한쪽 구석에 앉았다.

주석하의 표정 때문에 그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리던 도수 또한 깜짝 놀라 입을 손으로 막았다.

“저들이 왜 여기에 있어?”

도수의 목소리가 급격하게 낮아졌다.

“나도 모르겠어. 우리를 따라 다니나?”

“그럴 리가…….”

머리를 맞대고 속닥거리자 혈혼도객이 눈을 찌푸리며 손날로 목을 긋는 시늉을 했다.

“제가 처리할까요?”

범 무서운 줄 모르는 하룻강아지 새끼! 주석하는 재빨리 말렸다. 이 자식 이런 눈썰미로 어떻게 강호에서 아직 살아남았데?

다행히 우설금 측에서 별다른 반응이 없자 주석하도 안심했다.

덕양과 화산은 엄청나게 멀리 떨어져 있다. 덕양에서 봤던 사람을 여기에서 또 보다니. 이렇게 대단한 인연은 의도하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혹시 자신이 우설금의 관심을 끌고 있는 게 아닐까. 미녀의 관심이라면 나쁠 것 없지만 문제는 우설금이 마교 인물이라는 점이다. 마교라면 자다가 경기를 일으킬 정도이고 굳이 엮이고 싶지 않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마교가 그를 주시할 이유가 없었다. 아직은 마교가 중원에 모습을 드러내고 활동할 시절이 아니었다. 더구나 이곳은 정파인 화산파의 코앞이다.

우설금이 여기에 올 이유를 짐작할 수 없자 머리가 찌근거렸다. 머리 나쁜 사람이 심하게 머리를 쓰면 머리가 아프거나 대머리가 된다더니. 젠장, 대머리가 될 운명인가.

“다 먹었어? 방에 짐이나 두러 가자.”

주석하는 재빨리 일어났다. 우설금과는 같은 공간에 있고 싶지 않았다.

**

자하검존(紫霞劍尊) 석우환.

화산파 최강고수이자 정파를 대표하는 정파십존의 일인. 현 화산파 장문인의 사형으로 평생 무공에만 정진했다고 알려진 자였다. 나이도 일흔을 훌쩍 넘어 무림에서 최고 배분에 속하는 인물이다.

자하검존의 거처인 정심각에는 젊은 청년이 찻상을 두고 마주 앉아 있었다.

흰 수염을 쓰다듬으며 자하검존은 눈앞의 청년을 따뜻한 눈길로 쳐다봤다.

“고생했네.”

이 청년은 대단한 일을 했다. 혈혈단신으로 마교에 잠입해서 매우 중요한 비밀을 알아냈다. 십만대산에서 이곳까지 목숨의 위협을 감수하고 찾아와 그 비밀을 넘겼다. 중원을 위해 목숨을 바친 셈이었다.

“전 이제 여한이 없습니다.”

“무슨 소린가. 아직 앞날이 창창한 젊은이가. 언젠가는 그 보답을 받을 걸세. 자네가 알아낸 정보를 만사지존에게 알리겠네.”

만사지존(萬事知尊) 제갈휘는 정파십존의 일인으로 모르는 것이 없다고 알려진 무림맹 유일의 군사였다.

“검존의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청년이 깍듯하게 인사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멀리 가지 않겠네. 이제 어떻게 할 생각인가?”

“잠잠해질 때까지 화산에서 머물다가 고향으로 돌아갈까 합니다.”

자하검존은 고개를 끄덕여 동의를 표시했다.

청년이 사라지자 그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안면에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스승님!”

그의 상념을 깨트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린 자하검존의 안면에 환한 웃음이 일었다.

“비연이냐? 언제 왔느냐?”

“방금 왔어요. 예정대로 협객행을 마무리하고 돌아왔습니다.”

유비연은 어느새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 있었다. 여인들이 즐겨 입는 경장을 걸친 그녀는 천상의 선녀처럼 아름다웠다. 천상삼화의 미모는 과연 남달랐다.

“건강하게 다시 보니 좋구나.”

“그런데…… 방금 내려간 청년은 누구예요?”

유비연은 정심각으로 올라오다 검존을 만나고 내려오는 청년을 스쳤었다. 자하검존이 기거하는 이곳에는 화산파 제자일지라도 함부로 드나들기 어려웠다. 검존의 수양을 방해한다는 이유 때문이다. 그런 곳에 낯선 사람이라니. 특별한 연유가 있음이 분명했다.

“그 청년은…… 일검신성 가적성이다.”

“일검신성이라…….”

강호에 청년기협은 많다. 일 년간 강호를 누비다 돌아왔으나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십만대산에서 마교의 비밀을 우연히 알아냈다는구나. 그때부터 마교의 추적을 받으며 이곳까지 왔다. 그 비밀을 알려주려고 말이다. 곤륜파와 남궁세가가 그를 도왔고 적지 않은 희생이 있었나 보더구나.”

“마교라면…….”

현재는 마교의 움직임이 잠잠하여 상대적으로 관심도가 떨어지지만, 예전이었으면 모두가 경기를 일으켰을 엄청난 사건이었다.

“마교에 무한회귀공이란 배교의 술법이 들어간 모양이야. 예상외로 그 사안이 심각해서 만사지존의 의견이 필요해. 어떻게 알았는지 혼천교에서도 가적성이 알아낸 비밀을 공유하자고 난리이고. 현재 가적성의 신변을 노리는 자들이 많구나.”

“무한회귀공요? 어떤 무공인가요?”

“글쎄다. 너무 황당해서……. 가적성의 의견에 따르면 갑자기 신성처럼 떠오른 사람을 찾아내야 한다는데…….”

자하검존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강호에 신성이 한둘인가요. 가적성 소협도 일검신성이잖아요.”

“그렇긴 하구나.”

그 순간 유비연은 주석하를 떠올렸다. 갑자기 두각을 나타내는 엄청난 고수라면 주석하를 따를 자가 없었다. 풍운채에서 드러난 주석하의 엄청난 무위는 그녀조차 상상치 못할 정도였으니까.

“그래, 강호에서 무엇을 경험했느냐?”

자하검존의 따뜻한 물음에 유비연은 그동안의 일을 재미있게 풀었다. 스승과 대화하다 보면 예전의 어린 시절로 돌아온 기분이었다. 그녀의 머릿속에서 주석하란 이름은 순식간에 지워졌다.

주석하에 대한 의심은 훗날로 미루기로 했다.

**

명아 문제를 처리한 후 주석하 일행은 화산파를 떠났다.

사흘 동안 백 리를 이동했을 때 다시 기암괴석이 가득한 거대한 산을 만났다. 화산을 구경한 직후라 감흥이 떨어졌으나 이 산 또한 대단한 절경을 자랑하고 있었다.

“여기가…… 화악봉입니다. 화산의 주변 봉우리죠.”

혈혼도객의 얼굴이 밝게 피었다. 익숙한 지방, 고향에 왔으니 오죽할까.

마침내 목적지에 도착한 주석하는 감개무량 했다. 태어나서 가장 먼 곳까지 왔다. 그는 방금 지나온 화산의 주봉 방향으로 눈길을 돌렸다.

그곳에 명아를 두고 왔다. 다행히 화산에서 명아를 문하 제자로 받아들였고 그는 한 짐을 덜었다. 앞으로 그녀를 다시 볼 날이 언제일지.

눈물이 그렁그렁한 아이를 훗날 다시 만날 거라고 약속하고 손을 흔들며 간신히 떼어냈다. 어쩔 수 없이 거짓말해야 하는 자신이 슬퍼졌으나 인생이란 그런 것이니.

그래도 인상이 좋은 서생, 유 소협이 잘 봐줄 테니 다행이라 해야 하나. 앞으로 강호를 전전하다 보면 다시 만날지도 모르고 그때 안부를 물어볼 수 있으리란 생각에 슬픔을 삼켰다.

지금은 화악봉에 둥지를 튼 혼천교에 신경 쓸 때이다.

“혼천교는 어디에 있어?”

“계곡 안으로 쭉 들어가면 되지요. 화산파만큼 크지 않지만, 혼천교도 나름 유명한 곳입니다.”

혈혼도객의 얼굴에 자부심이 어렸다. 흑도팔군의 일인인 혼군이 지배하는 문파이니 당연하다.

계곡을 타고 깊숙이 들어가자 건물 군락이 나타났다. 혼천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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