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검천하-50화 (50/273)

50화 혼천교 (1)

주위를 돌아다니는 인물은 하나같이 흑의를 입었다.

그것만으로도 주석하는 마음이 편안했다. 물론 지금 그들의 행색은 흑의가 아닌 먼지투성이였지만 어쨌든 원래는 흑의였다.

“공기부터 다르지 않습니까?”

가슴을 펴고 심호흡하는 혈혼도객이 고향에 돌아온 기분을 만끽했다.

정작 주석하와 도수는 뭐가 다른지 알 수 없었으나 괜히 녀석의 흥을 깨트리기 미안해서 맞장구를 쳐주었다.

혼천교 입구에는 보초 두 명이 지친 표정으로 경계를 서고 있었다.

혈혼도객이 기다리라고 눈짓하고는 성큼성큼 다가갔다.

보초가 화들짝 놀라 긴 창을 교차하며 문을 막았다.

당연하게도 혈혼도객이 눈을 부라리며 언성을 높였다.

“내가 누군 줄 몰라?”

보초들의 눈이 가늘어졌다. 두 사람은 열심히 아래위를 훑어보며 서로 눈짓했다. 답답해진 혈혼도객이 다시 버럭 소리쳤다.

“얼른 비켜!”

“헛! 알겠습니다.”

두 보초가 양옆으로 물러나자 혈혼도객이 정중히 주석하를 안내했다.

“들어가시죠.”

연신 힐끔거리는 보초의 눈을 무시하고 주석하와 도수는 정문을 통과했다.

정문에서 쭉 뻗은 넓은 길이 보였고 저 너머로 웅장한 전각 몇 채가 산봉우리를 이고 늠름하게 서 있었다. 그 둘레로 나지막한 초가와 움집, 창고가 여기저기 보였다. 대충 풍운채보다 조금 더 규모가 큰 수준이었다.

“보십시오. 제 이름값이면 정문 통과가 가능하다니까요.”

“흐음, 근데 저 보초들이 자네를 아는 거 맞아?”

주석하가 보기에 방금 보초들의 표정이 이상했다.

“크크, 여기 인원이 얼마나 많은데요, 제가 강호에 나간 지도 꽤 되고요. 당연히 알 리가 없죠.”

예상과 다른 대답이 돌아왔다. 그들의 의아한 표정에 혈혼도객이 피식 웃었다.

“원래 세상이 그런 겁니다. 자신감 있게 ‘여기가 내 집이야!’ 하고 팍 들어가면 보초가 막지 못하는 법이죠. 아마 저 녀석들 지금 누군지 열심히 머리 굴리고 있을 겁니다.”주석하는 실소를 머금었다. 그럴 줄 알았다.

혈혼도객을 따라간 곳은 한쪽 구석에 지어진 객방이었다. 혼천교를 방문한 손님에게 제공하는 장소처럼 보였다.

“여기에서 쉬고 계십시오. 제가 전갈을 넣어보겠습니다.”

혈혼도객이 양해를 구하고는 후다닥 사라졌다.

방안에 둘만 남으니 할 일이 사라졌다. 다리를 펴고 뒹구는 사이 도수가 감상을 말했다.

“난 혼천교라 해서 어마어마할 줄 알았는데 그렇지도 않네!”

“여긴 다른 곳에 비하면 그래도 소수정예일걸?”

문하 제자 수를 늘리는 문파도 있고 필요한 인원, 쓸 만한 인원만 키우는 문파도 있다. 혼천교는 다른 유명 사파에 비하면 규모가 작은 편이었다. 물론 그 규모가 문파의 실력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석하야, 너 따라서 오긴 왔는데…… 그 유명한 혼군이 너를 만나줄까?”

“어렵겠지.”

솔직히 주석하는 기대하지 않았다. 무려 흑도의 최강자인 혼군이다. 그런 자가 무명인 그를 만날 시간이 있을까. 문전박대당하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이었다.

여기까지는 혈혼도객의 위세로 왔으나 이제부터는 혈혼도객이란 이름도 통하지 않겠지. 그가 아는 혈혼도객은 혼천교 내에서 유명하거나 지위 있는 인물이 아니니까.

“그런데 왜 왔어?”

“그냥…… 심심해서. 세상 구경도 하고 훗날 흑검문을 크게 키우려면 더 큰 문파 구경도 좀 해야지.”

물론 절반은 거짓이다. 흑검문을 키울 생각은 없으니까. 단지 단전에 숨은 기운이 혼군과 관련이 있어 찾아왔을 뿐이다. 혼군을 만나지 못한다면 그 수수께끼를 풀기 어렵겠지.

“혼천교에 입교하려는 건 아니지?”

“당연히 생각 없지.”

“그렇지! 그래야지!”

도수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이 녀석, 최근 걱정하던 문제가 그것이었나.

“난 이런 곳에 얽매이는 것은 사절이야. 사람이란 자유롭게 살아야지.”

“나도! 살검회 원수만 갚으면 자유롭게 강호를 유람할 거야!”

도수가 주먹을 꽉 쥐며 의지를 불태웠다. 그는 살검회를 멸문하고 아버지를 죽인 원수로 곤륜파 외에 다른 집단이 있다고 믿었다. 아직은 정체를 모르지만 언젠가는 밝혀내겠다고 결심했다.

주석하는 도수를 볼 때마다 미안했다. 그가 아는 범위 내에서 살검회주와 도건을 죽인 자는 마교의 우설금이다. 곤륜파는 살검회 자객을 많이 죽였고. 마교의 무서움을 알기에 도수의 안전을 위해서라도 절대 진실을 말해줄 수 없었다.

“잠이나 자자. 피곤하잖아. 자고 나면 할 일이 생기겠지.”

주석하도 도수의 옆에 드러누웠다. 걱정거리가 넘치는 세상이다. 걱정만 하면 인생을 살아갈 수 없다.

**

어둠 속에 화산은 웅장한 모습을 감추었다.

고요한 적막 속에 세상은 잠이 들었다. 달도 없는 어두운 밤에 별빛만이 조용히 내려앉았다.

화산파를 방문한 손님이 머무는 객방이 쭉 늘어서 있는 담장 사이로 한 인영이 모습을 드러냈다. 붉은 홍의가 어둠 속에서 유달리 섬뜩했다.

얼음 같은 미모가 돋보이는 홍의 여인은 우설금이었다. 평소와 달리 그녀는 백귀와 흑귀를 대동하지 않고 홀로 화산파에 잠입했다.

그녀는 객방을 끝에서부터 하나씩 확인하며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마치 귀신처럼 미동도 없이 그녀의 신형이 미끄러졌다.

세 번째 방을 들여다보던 우설금의 입가에 미소가 드리워지더니 신형이 흐릿하게 변했다.

순식간에 그녀는 귀신처럼 안으로 들어갔다.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는 잠든 이를 노려보았다.

침상에는 한 청년이 잠들어 있었다. 무려 십만대산에서부터 추적해온 일검신성 가적성이었다. 만감이 교차한 듯 그녀는 조용히 청년을 내려다보기만 했다.

잠시 시간이 흐른 후 마침내 우설금이 입을 열었다.

“일어나라!”

그녀의 음성은 고저 없이 무미건조했다.

“허억!”

가적성이 놀란 얼굴로 벌떡 상체를 일으켰다. 눈을 비비던 그는 침상 앞에 선 한 여인을 발견했다. 남다른 눈부신 미모에 혼이 나간 표정을 짓던 가적성이 점차 상황을 파악했다.

“소, 소저는 누, 누구요?”

“마교의 비밀을 누구에게 누설했느냐?”

“허억!”

가적성은 눈앞의 여인이 그동안 그를 쫓아오던 마교 인물이란 사실을 깨달았다. 쫓기면서도 상대를 보지 못했던 그는 이제야 추적자의 정체를 확인하게 됐다.

“아, 아직 아무도 만나지 못했소. 내일 장문인을 만날 예정이었소.”

가적성은 황급히 변명했다. 화산파에 도착하자마자 장문인을 만나려 했으나 시간이 엇갈렸다. 훗날을 기약하고 객방으로 돌아오다가 운 좋게도 정파십존의 일인인 자하검존을 만났다. 덕분에 그 자리에서 마교의 비밀을 털어놓았다.

야밤에 추적자를 만날 줄 몰랐던 그는 무척 놀랐으나 내심 다행이라 여겼다. 지금 이 자리에서 그가 죽더라도 마교의 비밀은 이미 검존에게 전해진 뒤니까.

“그동안 다른 사람에게도 알리지 않았소. 그들이 죽을까봐 차마 알릴 수 없었소.”

우설금은 표정 없이 가적성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의 대답이 진실인지 거짓인지 고민하는 듯했다.

가적성은 정신을 가다듬으며 살아날 방법을 모색했다. 이곳은 화산파 내부다. 그가 소리를 지르면 누군가는 뛰어올 것이고 눈앞의 인물이 화산파 전체를 상대할 수 있으리라고는 절대 생각지 않았다.

조심스럽게 내력을 끌어올리며 기회를 엿보는 가적성을 우설금이 싸늘하게 비웃었다.

“넌 살아서 이 방을 나갈 수 없다.”

“뭐?”

“여기까지 도망치느라 수고했다.”

가적성은 우설금의 말을 믿기 어려웠다. 그는 내력을 끌어올리며 크게 소리 질렀다.

“무슨 말이야!”

뭔가 이상했다. 그가 지른 소리는 밖으로 빠져나가지 못하고 주변에서 웅웅거렸다.

“지금 이 방 내부는 강기의 장막으로 둘러싸여 있다. 어떤 소음도 빠져나가지 못해.”

그제야 가적성은 자신의 몸을 옥죄는 기운을 감지했다. 마치 큰 장벽이 다가오듯 그 기운은 점점 강하게 그를 압박해왔다.

‘무시무시한 고수다!’

강기로 소음을 차단하는 벽을 세우다니! 그녀는 그가 상상할 수 없는 고수가 확실했다. 당금 강호에서 정파십존이나 흑도팔군을 제외하고 누가 이런 무위를 전개할 수 있을까. 과연 마교다!

가적성의 안면이 새파랗게 질렸다.

“마교의 비밀을 안 자는 누구든 죽어야 한다.”

싸늘한 경고와 함께 우설금이 천천히 허공에서 손가락을 움직였다.

“커흑!”

가적성은 목이 뒤틀리는 충격을 감지했다. 점차 강력한 고통이 전신을 엄습해왔다. 그는 두 손으로 목을 쥔 상대의 기운을 흩트리려 했으나 전혀 소득이 없었다.

고통 속에서 가적성은 몸부림쳤다. 이불이 발에 맞아 걷히고 침상이 몸부림에 삐걱댔다.

우설금은 조금의 표정 변화도 없이 가적성을 노려보았다.

숨이 막혀 발악하던 몸짓이 점차 잠잠해졌다. 가적성의 시야에서 우설금의 모습이 점차 희미해졌다.

십만대산에서 도망치기 시작한 이후 예상보다 꽤 멀리 오랜 시간을 버텼다. 그동안 많은 사람의 도움을 받았기에 그는 만족했다. 비록 지금 죽더라도 그가 알아낸 마교의 비밀이 중원 무림의 안정에 도움이 된다면 그것만으로도 가치가 있었다.

눈이 뒤집힌 후 가적성의 몸이 축 늘어졌다. 그의 고개가 꺾였다. 제대로 반항조차 하지 못하고 죽은 것이다.

강기를 거둔 우설금은 무심한 표정으로 죽은 가적성을 바라보았다. 이것으로 이번 임무는 모두 끝난 걸까.

우설금은 천천히 방을 벗어났다.

객방에 다시 적막이 내려앉았다. 가적성의 시신은 다음 날 장문인의 전갈을 알리러 온 막내 제자에 의해 발견됐다.

**

쾅-

와직-

챙-

밖에서 소란이 발생했다.

잠이 들었던 주석하는 욕을 퍼부으며 침상에서 일어났다. 반대쪽 구석에서 잠이 들었던 도수도 시끄러움에 더는 잠을 자지 못하고 눈을 비비고 있었다.

“뭐야? 잠 좀 자자고!”

도수가 목소리를 높였으나 안타깝게도 이곳에는 불평을 들어줄 사람이 없었다. 이곳에서 외부와 소통이 되는 유일한 인물, 혈혼도객은 며칠째 코빼기도 보이지 않고 있었다.

“하, 씨불…… 괜히 와서…….”

투덜대던 도수가 주석하의 안면을 보고는 바로 입을 다물었다. 주석하도 와장창 얼굴을 일그러트리고 있었으니까.

“수! 뭔가 일이 난 것 같은데?”

“나가봐! 근데 이 자식은 대체 어디 갔어?”

없는 혈혼도객을 찾아봐야 나올 리 없다. 혈혼도객은 그날 이후 주석하와 혼군을 만나게 하려고 열심이었다. 하지만 혈혼도객의 위치에서 노력한다고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주석하가 명성이 있는 인물도 아니고 혼군이 한가하지도 않다.

예상이 현실이 되자 주석하도 답답해졌다. 자칫 멀리까지 온 노력이 물거품이 될 상황이다. 그렇다고 혼천교에 입교할 수도 없고…… 설사 입교하더라도 혼군을 만날 수 있다는 보장이 전혀 없었다.

뭔가 방법을 고민해야 할 시점이다.

“에이, 잠자긴 틀렸어.”

주석하는 주섬주섬 옷을 걸치고 객방을 나섰다. 외부 풍경을 접한 주석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밖은 전쟁터였다.

검이 허공을 가르고 붉은 피가 튀었다. 비명이 들릴 때마다 시신이 하나씩 늘었다.

대략 이십여 명가량 되어 보이는 무림인들이 날뛰고 있었다. 그들에 맞서서 흑의를 입고 싸우는 자들은 분명 혼천교도였다. 감히 혼천교에 쳐들어온 저들은 누구인가. 혼천교는 정파로 치면 구대문파와 비슷한 위치에 있는 거대 문파이거늘.

“어? 대체 무슨 일이야?”

따라 나온 도수 또한 생각지도 못한 광경에 화들짝 놀랐다.

콰당!

잘린 팔 하나가 주석하의 옆으로 뚝 떨어졌다. 젠장! 이번 생은 편히 살아보려 했더니 예상치 못한 전쟁터 한중간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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