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화 혼천교 (2)
당황한 주석하와 달리 도수는 어이없는 미소를 지으면서 옆에 떨어진 팔을 툭 쳐냈다.
“으아아! 난리가 따로 없잖아!”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도수가 재빨리 한쪽에 떨어진 검을 주워들었다.
어쨌든 주석하도 대비를 해야 할 듯해서 검을 찾아 두리번거렸다.
두 사람은 덕양을 떠나면서 검을 두고 왔다. 낭인이나 무림인으로 강호를 주유하는 게 아니라면 무기를 소지 하지 않는 편이 이동이 편했다. 무림인보다는 상인이 생명의 위협도 적고.
개똥도 약에 쓰려면 없다더니 떨어진 검이라고는 보이지 않았다.
어쨌든 두리번거리고 있자니 그의 눈앞으로 누군가가 검을 쓱 내밀었다.
“이거 찾으시는 건가요?”
황당해서 눈을 들어보니 익숙한 서생이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어? 유 소협! 여, 여긴 어떻게?”
“아직 몰라요? 지금 화산파와 혼천교가 싸우는 중이라니까요.”
유비연이 심각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제야 주석하는 주변에서 벌어지는 싸움을 다시 살폈다. 과연 쳐들어온 사람들의 복장이 화산파였다. 화산파와 혼천교가 왜 싸우는지 이해할 수 없었으나.
“검 찾던 거 아니었어요? 혼천교 도와서 화산파를 치시려고요?”
유비연의 싸늘한 말투에 주석하는 금방 이유를 알아챘다. 주석하는 아직 혼천교 사람이 아니었다. 지금 이 싸움에 가담해서 혼천교를 돕는다면 화산파와 등을 돌려야 한다. 애초에 흑검문이 흑도이고 혼천교에 볼 일이 있으니 혼천교를 돕는다고 이상할 것 없지만 그녀를 만나니 망설여졌다.
“음, 그게…… 그런데 갑자기 화산파에선 왜 쳐들어 왔습니까?”
“그게 설명하려면 좀 복잡한데……. 얼마 전 화산파를 방문했던 일검신성이 자객의 습격으로 목숨을 잃었어요.”
“가적성?”
주석하는 무심코 일검신성의 이름을 입에 올렸다. 지금은 잊은 이름이었으나 얼마 전까지 가적성과 엮여서 고생한 일이 떠올랐다. 그 가적성이 결국 화산파로 피신했나 보다.
마침 그도 화산파에 들렀으니 어쩌면 정말 공교로운 인연이라 할만했다.
“아세요?”
“마교의 비밀을 캐는 바람에 도망 다니고 있다고 들었는데…… 여기에서 죽었어요?”
“헉! 제대로 아시는데요?”
유비연이 놀라서 쳐다봤다. 당연히 그녀는 사천에서 있었던 주석하와 가적성의 인연을 알지 못했다. 그래서 극비 내용을 주석하가 알고 있으니 당황했다. 문득 고강한 주석하의 무공을 떠올리자 의심스러운 기분마저 들기도 하고…….
“자객이라…….”
저절로 주석하의 눈이 도수에게 돌아갔다.
도수가 펄쩍 뛰며 손을 내저었다.
“왜 날 봐? 난 아니라고!”
하긴 도수는 그를 떠난 적이 없으니. 그렇다면 의심스러운 인물은 오직 한 사람뿐이었다. 우설금이라면 들키지 않게 화산파에 숨어 들어갔다가 빠져나올 수 있을 것이다. 마침 그녀도 화산에 있었는데…….
주석하의 미간이 점점 찌푸려지자 유비연이 물었다.
“우리는 혼천교에서 가적성을 암살했다고 믿고 있어요. 혹시 짐작 가는 인물있어요?”
당신 아니냐고 추궁하는 듯하여 주석하는 재빨리 고개를 저었다. 괜히 긁어 부스럼을 만들 이유는 없다.
“그렇다면 이 싸움에 개입하지 마세요. 당신은 화산파도 혼천교도 아니니까. 잘잘못은 혼천교와 화산파가 가려야 하는 거고요.”
순간 혼천교도 한 명이 유비연을 향해 검을 휘둘러왔다. 유비연은 대화를 나누면서도 여유롭게 공격을 막고 혼천교도의 목을 찔렀다. 그 솜씨가 놀라웠다.
“크윽!”
깔끔한 솜씨를 본 주석하는 유비연이 자신이 생각하는 것처럼 화산파의 말단 인물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정사의 분란에 휩쓸릴 생각이 없다면 싸움을 거들지 않는 것이 최상이 선택이다. 다만 그 경우 혼군을 영영 만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조바심이 났다.
지금 이 싸움에서 약간의 도움을 준다면 혼군과 만날 기회가 생길지도 모르지 않는가. 선택의 기로에서 주석하는 난감해졌다.
문득 전생이 떠올랐다. 당시 그는 흑검문이 망한 후 흑도의 일원으로 떠돌다가 점차 정파, 사파의 분란에 휘말리게 됐다. 정사대전의 시발점이 언제부터였을까. 이 무렵 혼천교와 화산파의 싸움이 일어났었던가?
벼락처럼 머리를 스치는 기억이 있었다.
그때도 혼천교와 화산파의 갈등이 있었고 이것이 원인의 전부는 아니지만, 자하검존과 혼군의 대립으로 번졌으며 훗날 정파십존과 흑도팔군의 격돌로 발전했다.
그 후 정파십존과 흑도팔군은 양쪽이 모두 타격을 입어 마교에 제대로 대항하지 못하는 빌미가 됐다. 이는 정마대전에서 마교의 우세를 확정 짓는 결정적인 이유가 되기도 했다.
‘그때도 가적성이?’
분명하진 않았다. 단순히 가적성의 죽음을 둘러싼 오해로 양파에 싸움이 일어났는지 아니면 혼천교의 팽창을 두려워한 화산파의 반격이었는지. 어쨌든 지금 상황은 그때처럼 돌아가고 있었다.
주석하는 세상을 구하는 협사가 될 생각은 없으나 양파의 싸움을 중지시키고 싶었다. 지금 이 싸움이 중단되면 훗날 일어날 중원의 암울한 상황이 바뀔지도 모르니까.
‘에이, 내가 뭐라고…….’
괜한 오지랖이란 생각에 주석하는 재빨리 협의를 실천하는 상상을 머릿속에서 털어냈다.
그사이 싸움이 어느 정도 마무리되고 있었다. 쳐들어온 화산파 제자의 무공은 대단히 뛰어났다. 혼천교의 떨거지들이 상대할 수준이 아니었다.
사실상 일방적인 도륙이 끝나자 화산파의 한 인물이 고래고래 소리 질렀다.
“혼군은 나와라! 화산파에 잠입해서 일검신성을 죽인 사건을 해명하라!”
당연히 이 정도의 타격으로 움츠러들 혼천교가 아니었다.
여기저기에서 혼천교도가 튀어나왔고 얼마 되지 않아 그 수가 무려 일백에 달했다. 흑도답게 그들의 기세 또한 대단히 흉흉했다.
“화산파 조무래기들이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온 거냐?”
혼천교에서도 한 장한이 나섰다. 교주인 혼군 휘하의 장로이거나 총관 정도 되는 인물로 보였다.
“혼천교는 가적성을 죽인 이유를 해명하라!”
“가적성? 우리가 그를 왜 죽여?”
“일전에 가적성의 신변을 요구하지 않았더냐?”
“뭔 소리야? 화산파에서 우리에게 죄를 덮어씌우는구나!”
양측의 주장이 팽팽하게 대립하며 설전이 벌어졌다. 당연히 다람쥐 쳇바퀴 돌 듯 서로의 주장만 되풀이했다. 주석하가 보기에 화산파도 혼천교도 답답하기 짝이 없었다.
어쩌면 저들의 목적은 사건 해명이 아닐지도 모른다. 수년간 이 일대에서 서로 앙숙처럼 다툼을 벌이다가 이번 일로 앙금이 터져버린 것일지도. 그래서 사건의 진위보다 상대의 기세를 제압하려는 의도가 더 강했다.
설전에 흥미를 잃은 주석하는 옆에서 미간을 찌푸리는 유비연에게 시선을 돌렸다.
“당신은 왜 싸움에 가담하지 않습니까?”
“나도 싸움에 공헌하고 있어요.”
“그래요?”
“당신이 혼천교에 가담하지 못하게 하면 나름 임무를 수행하는 거라고요.”
유비연은 자신의 임무를 숨기지 않았다. 주석하의 본 모습을 알고 있기에 그의 움직임만 묶어도 충분히 화산파에 도움이 된다.
주석하는 쓴웃음을 삼키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피아가 확실한 유비연에 비해 주석하는 그렇지 못했다. 지금 그에게는 화산파도 혼천교도 모두 적군도 아군도 아니었다.
설전을 벌이던 양 진영 앞으로 두 사람이 등장했다.
순간 유비연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누군데요?”
“저희 장문인과 검존이세요.”
현 화산파 장문인인 북청진인(北淸眞人)과 그 사형인 자하검존이었다. 이 두 사람이 함께 화산파를 벗어나거나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내는 일은 흔치 않았다.
“오늘 사건을 매우 중요하게 여긴다는 방증이군요.”
주석하도 예상치 못한 두 사람의 등장에 시선을 모았다.
가적성의 죽음을 혼천교의 짓이라고 오해했다면 가벼운 충돌로 적당히 마무리할 것이다. 그런데 화산파 최고고수이자 최고 배분인 두 사람이 개입했다는 것은 단순한 사과 정도로 마무리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보였다고 할 수 있었다.
화산파는 이 기회에 혼천교의 기세를 꺾을 의도일 것이다.
장문인과 검존의 등장에 장내가 얼어붙은 듯 조용해졌다. 그러기를 잠시, 혼천교 쪽에서도 무시무시한 인물이 등장했다. 바로 혼천교 교주이자 흑도팔군의 일인인 혼군이었다.
혼군은 이순의 건장한 인물이었다. 체구가 크고 온몸이 근육질로 매우 탄탄했다. 과연 한 문파의 수장답게 그 위압감이 장난이 아니었다.
“어? 설마…… 오늘 검존과 혼군이 대결하는 건가?”
정파십존과 흑도팔군은 현 무림 최강고수다. 정파와 사파를 대표하는 이 두 사람의 정면대결은 대단한 사건이었다. 어쩌면 일생에 한 번 보기 힘든 역사적인 광경일지도 몰랐다.
“우와아! 대단한데? 누가 이길까?”
도수가 옆에서 탄성을 터트렸다.
유비연이 미간을 찡그리며 두 사람을 째려본 후 느긋하게 말했다.
“누가 이기다니! 당연히 검존이죠.”
그녀야 화산파 사람이니 그렇게 기대하지만 주석하가 보기엔 사태가 심각했다. 이런 식의 대결은 정사 양쪽을 부추겨서 전면전으로 번지게 하고 그 여파로 훗날 마교에 빌미를 잡힌다.
한층 심각해진 주석하의 표정에 유비연도 입을 다물었다.
“혼군, 오랜만일세.”
자하검존이 먼저 인사했다.
혼군이 싸늘한 음성으로 응수했다.
“남의 집에 쳐들어오는 게 정파의 도리요?”
“야밤에 자객을 보낸 게 누구인가? 당신이 사과하면 우리는 물러가겠네.”
“혼천교가 한 짓이란 증거가 있소?”
“혼천교가 아니면 누가 그런 터무니없는 짓을 저지르겠나? 이 일대에서 그런 능력이 있는 집단은 혼천교뿐이네.”
양측의 말은 예의 있고 조용했으나 그 내면에는 상대를 압박하는 웅후한 기운이 서려 있었다.
화산파와 혼천교 말단 무인들은 터질듯한 긴장감과 장내를 억누르는 압박에 숨이 막혔다.
“설마 싸우기야 하겠어요?”
주석하는 유비연의 견해를 물었다.
유비연이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
“원래 고수들은 쉽게 움직이지 않지만 성미가 괴팍하거든요. 의외로 순간적인 충동으로 일을 벌이기도 하죠. 십존과 팔군 사이에 그간 쌓인 일도 많아서…….”말끝을 흐리는 유비연을 보니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 짐작하기 어려웠다.
사실 가적성의 죽음은 단순한 빌미를 제공했을 뿐이다. 그전에 언제 터질지 모를 긴장이 팽배해 있었고.
‘젠장, 하필이면 내가 방문했을 때 이런 일이 발생하다니. 재수가 옴 붙었어.’
주석하는 내심 투덜거리며 선택을 고민했다. 그냥 도망쳐 버릴까? 여기까지 온 고생을 물거품으로 만들 수는 없었다. 무슨 수를 쓰더라도 혼군을 만나야 하는데…….
검존과 대치 중인 혼군을 힐끔거리면서 주석하가 고민에 빠지자 유비연이 노골적으로 싫은 기색을 비쳤다.
“혼군을 응원하나 보죠?”
“그게 아니라…….”
“혼천교 입교에는 관심 없다면서요?”
“혼군을 만나야 하거든요.”
“그럼 검존을 만날래요?”
피식 웃으며 주석하는 고개를 저었다. 어째 이 서생은 그에게 관심이 많아 보였다. 지금 그 이유를 추측하기엔 상황이 너무 긴박했다.
두 거인의 날 선 대화가 어떻게 흘렀는지 모르지만, 갑자기 자하검존이 검을 들었다. 그의 주위로 강력한 강기의 폭풍이 휘몰아쳤다. 과연 정파십존다운 위세였다.
당연히 혼군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그의 눈에 비친 광기가 거대한 기운과 함께 장내를 억눌렀다.
두 사람의 몸에서 뿜어진 기파가 서로 맞물리며 장내는 폭풍전야를 맞이했다.
현 무림 최강고수의 대결에 주석하의 손에도 땀이 배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