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검천하-52화 (52/273)

52화 혼천교 (3)

천하를 주름잡는 두 지존이 서로를 노려보자 주위는 적막에 잠겼다.

무림인이라면 누구든 가슴이 뛰지 않을 수 없다. 고수들의 대결을 보는 것만으로도 깨달음을 얻어 무공이 한 단계 성장하기도 한다. 물론 이곳에 있는 대부분은 두 지존에 비하면 너무 미흡하여 그런 기연을 상상하기 힘들긴 하다.

어쨌든 사람들은 지금 역사적인 대결을 목격한다는 사실에 감격하여 눈도 깜박이지 않고 두 사람을 주시했다.

우우우웅-

자하검존과 혼군의 몸에서 피어오르는 강기가 벽을 형성하며 퍼져나가 상대방의 강기와 대치했다. 강기는 예리한 칼날이 되기도 했고 그 칼날을 막는 방패가 되기도 했다. 두 사람의 중간에 무형의 벽이 생겨났다.

“으음.”

고수는 고수를 알아본다. 강기가 만나 형성한 벽만으로도 두 사람은 상대의 무공에 경탄했다. 그들은 서로를 노려보며 생애 다시없을 강한 상대를 만났다고 확신했다. 이 대결에서 승리한다면 무림에서 명예를 떨치는 것은 물론 팽팽한 정과 사의 균형을 깨트리고 나아가 본인의 무공 성취에도 유의미한 발전을 이루게 될 것이다.

우- 우- 웅-

마치 강기의 벽이 살아 있는 듯 두 사람 사이에서 물결처럼 출렁거렸다. 내공을 외부로 발산하면 밀어냈다가 내부에서 가다듬으면 다시 밀려왔다.

‘내공 대결을 원하는 건가?’

혼군은 내력을 더욱 끌어올려 상대를 압박해봤다. 상대 역시 지지 않고 곧바로 응수해왔다.

자하검존은 검으로 무림을 평정한 검객이다. 그런 그가 검을 들었음에도 검이 아닌 내공 싸움을 먼저 시도해온다. 혼군의 입장에선 나쁘지 않다. 다만 그만큼 내공에서 자신이 있다는 뜻이기에 조심해야 한다.

혼군은 자하검존의 도발에 가소로움을 느꼈다. 검법에 능한 자가 검이 아닌 강기로 상대를 떠보는 수작을 부리다니! 내공이라면 그도 둘째라면 서럽지 않던가.

혼군은 분노한 만큼 내력을 강화하여 상대를 압박했다.

뜻하지 않은 내공 대결이 펼쳐지면서 사람들은 더욱 긴장된 분위기에서 관전했다.

유비연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좋은 방식이 아니야, 정말 내공 대결이 성사되면…… 설사 승리하더라도 몇 개월을 요양해야 할 만큼 타격이 너무 큰데…….”

주석하는 그녀의 관전평에 머리가 확 깼다.

누가 의도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저 두 사람은 자존심 때문에라도 쉽사리 물러서지 않을 것이다. 그 끝은 어쩌면 공멸일지도 모른다. 내공 대결이란 한쪽이 끝내고 싶어도 끝낼 수 없는 최악의 승부 아니던가.

이즈음 주석하는 혼군이 펼치는 기운이 자신이 현재 사용하는 내력과 대단히 유사하다고 생각했다. 과연 혈혼도객의 눈썰미가 나쁘지 않았다.

“그대로 보고 있어야 하나요?”

“이미 늦었어요. 두 사람이 내공을 일으켰어요. 아마 물러서고 싶지 않을 거예요. 아니 물러설 수가 없죠. 저 상태에서 내공을 거두어들이면 바로 패배하니까. 이젠 앞이 보이지 않는 격돌만 남았어요.”허탈한 표정으로 유비연이 중얼거렸다.

그사이 두 사람의 기세는 더욱 강해지고 중앙에 드리워진 강기의 막은 세차게 출렁였다. 시간이 흐를수록 저 막의 흔들림과 긴장은 높아지고 상황은 최악으로 치달을 것이다.

중지하려면 빠를수록 유리하다. 하지만 누가? 저 두 사람을 떼놓으려면 저 둘에 버금가는 내공을 가진 자라야 한다.

당연히 혼천교에는 존재하지 않았고 그나마 후보라면 화산파 장문인이 있지만 화산파 장문인도 검존의 의사를 무시하고 대결을 중지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아! 이젠 끝장났네요. 누구도 그만두지 않을 거예요.”

만일 검존이 이긴다 할지라도 이런 식의 방법은 두 사람을 모두 해치는 길이라고 유비연은 생각했다. 그녀는 두 사람이 무공을 겨루더라도 이보다 훨씬 명쾌한 방법을 사용하기를 바랐었다.

주석하는 고민에 빠졌다.

두 사람이 대립하면 정파와 사파의 결집을 불러오고 이는 훗날 최악의 상황으로 연결된다. 정파도 사파도 타격을 입고 마교가 날뛸 여건이 만들어지겠지.

이를 말려야 하는데. 혼군의 관심을 끌어야 할 상황이니 그가 뛰어들기에 나쁜 여건은 아니다. 아직 저들은 내력을 십이성까지 끌어올리지 않았기에 그도 어찌해볼 가능성이 있다.

다만…… 이렇게 무림의 일에 개입하면서 살고 싶지 않았는데. 남들의 주의를 끌지 않고 덕양에 머물면서 백화루주로 놀고먹을 생각이었는데.

‘젠장!’

놀고먹는 것도 마교가 중원을 침공하지 않아야 가능하다. 지난 전생처럼 흘러가면 아무리 그가 덕양에만 처박혀 있다고 해도 마교의 마수를 피하기 어렵다. 편하게 살려고 했더니 마교가 발목을 잡는다.

“아아! 난 끼어들기 싫다고!‘

그렇다면 초반에 빨리 개입해서 자신의 존재를 혼군에게 과시하는 게 더 낫다고 판단한 주석하는 내력을 끌어올리며 저들의 내력 싸움 강도를 가늠했다.

“혹시 검존의 내공이 얼마나 되는지 아세요? 이갑자? 삼갑자?”

“내가 어떻게 알아요?”

말이 안 되는 초보 질문에 유비연이 비웃음을 머금었다. 내공의 양을 가장 단순하게 표현하는 방식이 수련 기간이다. 하지만 심법에 따라 내력이 모이는 정도가 다르고 내공의 질이 다르다. 또 그 내력을 외부로 어떻게 발현하느냐도 차이가 난다.

단순하게 이갑자 삼갑자라 해봐야 의미가 없기에 유비연은 대답하지 않았다. 이런 질문을 보면 주석하는 아직 무공 깊이가 얕아 보였다. 내공이 얼마인가에 상관없이.

주석하는 선택의 기로에 섰다. 그의 내력이 지금 두 사람이 뿜어낸 내력에 미치지 못하면 반대로 그가 위험해진다.

“까짓거…….”

그래도 믿는 구석은 있다. 그의 몸이 버티지 못하면 단전에 잠자는 다른 내력이 깨어날 테니까.

그는 처음부터 최대한으로 내력을 끌어올렸다. 경혼심법으로 운기된 내력이 그의 몸을 가득 채웠다.

주저할 틈도 없이 주석하는 두 기인이 쳐놓은 강기의 막으로 돌진했다.

수만 근의 압력이 전신을 짓누른다. 눈앞에 하얗게 채색된 억겁의 기운이 휘몰아친다. 마치 휘장을 걷어내듯 강기의 막을 조금씩 찢었다.

우우우웅-

사방에서 엄청난 압박이 들어온다. 그는 온몸으로 전해오는 경고를 무시하고 몸 주위를 호신강기로 감싸며 두 사람이 대결하는 중앙으로 진입했다.

고오오오-

혈맥을 폭주하는 내공이 느껴졌다. 그 기운은 전신을 압박하는 자하검존과 혼군의 내력에 대항하며 꿋꿋하게 존재감을 뿜어냈다.

“엇?”

갑작스러운 방해자의 난입에 자하검존은 순간 어떻게 할지 고민했다. 혼군 또한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을 내공에서 능가할 자가 사실상 없으니 강기가 얽힌 공간에 뛰어들면 죽음뿐이다.

어떤 미친 자식이 전장에 개입했든 죽으려고 환장한 게 분명했다. 상대를 살리려면 내력을 거두어야 하지만 혼군과 손발을 맞추지 않는 이상 불가능하다. 자하검존은 내력을 그대로 유지하는 쪽으로 판단을 내렸다.

당연히 혼군도 같은 심정이었다. 그도 내력을 거둘 생각이 없었다. 다만 이 순간 혼군은 특이한 느낌에 경악했다.

두 사람 사이로 뛰어든 자는 그와 같은 계열의 내공을 사용하는 자였다. 그렇다면 혼천교 인물이다. 하지만 그가 아는 바로는 혼천교도 가운데 누구도 이만큼 정순한 기운으로 엄청난 내공을 이룬 자가 없었다. 이는 부교주도 불가한 일이었다.

‘넌 누구냐?’

두 사람의 중간에 끼어든 순간 주석하는 어마어마한 압력에 짓눌리게 됐다. 그가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한 최고의 압력이 짓눌렀다. 숨이 턱 막히고 온몸의 기운이 갈피를 못 잡는 상태에서도 주석하는 당황하지 않았다.

이미 짐작했던 상황이었다. 아직은 예전에 그가 겪었던 마불의 공격 때보다 오히려 압박감이 덜했다. 마불 때는 진기를 제대로 다룰 수 없는 상황이라 그 고통이 훨씬 컸었다.

강기의 태풍 속에서 주석하는 이를 악물고 천천히 두 팔을 양옆으로 펼쳤다. 그의 손바닥이 두 기인을 향하자 팽팽하던 강기의 벽이 파열음을 냈다.

파지지직-

주석하는 이를 악물고 모든 힘을 쏟아냈다.

고오오오-

다행히 혼군이 만든 강기와 그의 강기가 부드럽게 섞이면서 한결 견디기 편해졌다.

이제는 이 압력을 되돌리며 난관을 극복할 시점이다.

주석하는 내공 전부를 손바닥으로 쏟아냈다. 그의 좌우에서 강기의 폭죽이 터지고 두 기인이 형성했던 강기의 벽을 일순간 잠식해 들어갔다.

콰아앙-

하늘과 땅을 가르는 강기의 폭풍이 파열음을 터트리며 장내를 휩쓸었다.

사람들은 경악했다.

자하검존이 누군가. 혼군은 또 누군가. 감히 그들과 맞먹는 최강 고수가 이 자리에 있단 말인가.

주석하가 방출한 강기가 두 지존이 내공을 겨루며 형성했던 강기의 벽을 일순간 날려버렸다.

고오오오-

폭풍이 지나간 후 아무도 입을 여는 사람이 없었다. 오직 구경꾼들의 황당한 표정만이 선명하게 남았다.

침묵이 흘렀다.

오직 주석하는 중간에서 양쪽으로 팔을 뻗은 채 그대로 자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자하검존과 혼군은 입을 벌린 채 뒤로 몇 걸음 물러나 상황을 수습했다. 주석하 덕분에 내력 대결에서 벗어난 자하검존은 주석하의 나이가 예상외로 젊다는 사실에 경악했다.

혼군은 자신과 같은 성질의 강기를 뿌린 주석하에게 의문의 시선을 보냈다.

주변 군웅들은 어떻게 된 일인지 알지 못해 눈동자만 굴렸다. 자하검존과 혼군의 표정을 본 그들은 이 사건이 의도치 않은 방향으로 흘렀고 난입한 주석하가 예상외의 고수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황당하게도 누구도 주석하의 정체를 알지 못했다.

“넌 누구냐?”

자하검존이 내력을 갈무리하며 묵직한 의문을 뱉어냈다. 그는 주석하가 방출한 내력이 혼군과 유사하다는 사실에 우려를 표했다. 만일 주석하가 오늘 혼천교를 돕는다면 상황이 걷잡을 수 없을 만큼 악화한다.

주석하는 정파에 밉보일 생각이 없기에 예의 바르게 대답했다.

“소인은 흑검문 문하입니다.”

“흑검문?”

“사천에 있는 작은 문파입니다.”

문파 명과 주석하의 차림새에서 자하검존은 바로 주석하가 흑도 인물임을 알아챘다.

“감히 네놈 따위가 이 중요한 결전에 끼어들다니! 혼천교와 무슨 관계냐?”

“아무 관계도 아닙니다.”

“무슨 소리! 이곳에 있으니 혼천교의 빈객임을 알겠거늘.”

자하검존이 버럭 소리쳤다. 어쨌든 이 녀석은 정파가 아니었다. 그렇다면 빨리 그 싹을 잘라야 한다. 방금 보인 녀석의 무공 신위는 가벼이 내버려 둘 수준이 아니었다.

강호 경험이 풍부한 주석하는 자하검존의 내심을 곧바로 꿰뚫어 보았다. 지금 이 위기를 벗어나려면 정파도 사파도 아니어야 했다.

“제가 혼천교와 관계없음은 저기…… 유 소협이 알고 있습니다.”

주석하는 재빨리 유비연을 지목했다. 유비연이 화산파에서 얼마나 인정받는 인물인지 모르나 지금 당장 화산파와 연고가 있는 인물은 저 서생이 유일했다.

“유 소협?”

갑자기 지목당한 유비연은 낭패한 상황이 됐다. 자칫 주석하에게 남장했다는 사실을 들킬 우려가 있어서다. 그녀는 황급히 자하검존에게 대답했다.

“저분은 주석하 소협으로 저와 함께 강호에서 협을 행한 인연이 있습니다.”

자하검존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는 유비연의 성격을 잘 안다. 유비연은 절대 악한 자를 두둔하지 않는다. 즉 저 청년은 사파 인물일지라도 협과 의를 아는 인물이라는 뜻이었다.

상대를 계속 압박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자하검존도 눈치챘다. 이쯤에서 어떤 식으로든 마무리해야 했다. 계속 혼군을 걸고넘어져서 사생결단을 내기엔 부담이 크다. 오늘만 날은 아니니.

“그렇다면 왜 끼어들었지?”

“검존과 혼군의 대결은 두 분 모두에게 손해입니다. 이기더라도 큰 희생을 감수해야 한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아실 텐데요? 두 분을 존경하는 저는 가만히 있을 수 없었습니다.”주석하의 주장에 자하검존과 혼군이 모두 의미심장한 눈빛을 보냈다.

“흐음.”

한숨을 내쉰 자하검존이 검을 거두고 문하 제자들에게 명했다.

“돌아가자.”

순식간에 화산파 인물들이 자취를 감췄다. 유비연은 할 말이 있는 듯 몇 차례 주석하를 곁눈질하다가 어쩔 수 없이 떠났다.

일단 혼군의 눈에 띌 목적은 달성했다. 주석하는 긴장을 풀고 혼군을 쳐다봤다.

순간 혼군의 분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놈은 누구길래 혼천교의 무공을 쓰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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