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화 혼천신공 (1)
혼군의 얼굴을 본 순간 주석하는 온몸이 얼어붙었다.
괜히 흑도팔군의 일인이 아니었다. 분노를 터트리는 혼군의 기세는 숨이 막히게 했다. 지금까지 이렇게 강한 자 앞에서 그 기운을 온몸으로 받은 적은 처음이었다.
전생에는 당연히 없었고 마불이나 우설금도 이런 식으로 그를 압박했던 적은 없었으니까.
이런 상황에서 자연스럽게 대답이 나온다면 그게 오히려 이상한 일 아닌가.
대답하려고 입을 열었던 주석하는 결과적으로 버벅거리면서 아무런 말을 꺼내지 못했다.
이를 혼천교에 대한 반항으로 여겼을까.
부웅-
혼군의 신형이 순식간에 사라지더니 주석하의 앞에 나타났다.
빨랐다. 무슨 신법인지 주석하는 전혀 알 수 없었다. 초강고수만이 쓴다는 이형환위 수법이 바로 이것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커윽!”
그는 배에 강력한 충격을 받고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어떻게 된 상황인지 제대로 알기도 어려웠다. 혼군이 그의 배에 일 권을 먹인 듯했다.
젠장! 적이 아닌데……, 뭔가 말을 해야 하는데, 여기까지 온 목적을 설명해야 하는데, 적이 아니고 같은 편이라고 설득해야 하는데…….
충격이 만만치 않았다. 주석하는 어쩔 수 없이 다시 내력을 끌어올렸다. 지금 당장은 어떻게든 대항해서 목숨을 부지해야 한다. 혼군과 싸워 이길 가능성은 전혀 없지만 그렇다고 이대로 죽을 수는 없지 않은가.
“이놈이! 그래도 버티는구나! 감히 혼천교의 무공을 익히고도 무사할 줄 알았나?”
혼군이 주저앉은 그의 멱살을 잡고 일으켰다. 주석하는 제대로 저항하지 못했다.
푸- 푹-
흑색의 선명한 기운이 어린 혼군의 오른손가락이 주석하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혼천신공(魂天神功)! 혼군을 흑도팔군에 이르게 한 개세신공이었다. 그리고 지금 오른손에서 시전되는 비장의 초식은 바로 혼천십팔지(魂天十八指)로 강호일절로 위명을 떨친 무공이었다.
사실상 혼군의 절정 신공이 펼쳐진 것이다.
내력을 일으켜 호신강기로 몸을 보호했다고 하나 혼군의 앞에서는 무기력하게 깨졌다. 주석하의 가슴에는 선명한 검은 구멍이 무려 다섯 개나 뚫렸다.
“크윽!”
이제는 해명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 사실상 주석하는 의식을 잃었고 그는 죽음 앞에 이르러 있었다. 혼군의 혼천십팔지에 일격을 당하고도 목숨을 부지할 재간은 없었다.
혼군은 한 손으로 주석하의 멱살을 잡은 채 방금 공격했던 자신의 오른손과 주석하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이상한 놈이군. 너무 성급했나? 무공을 거의 못하잖아?’
그가 성질이 급해서 무차별로 공격하긴 했다. 하지만 이 녀석의 대응도 정상이 아니었다. 앞서 검존과 그의 대결을 깨트릴 수준의 내공이라면 혼천십팔지에도 어느 정도 대응했어야 했다. 마치 무공을 익히지 못한 사람처럼 호신강기를 제외하고는 전혀 방어하지 못할 줄이야.
혼천교도가 아닌 녀석이 혼천신공을 익혔다는 사실에 너무 이성을 잃었나? 어떻게 된 일인지 정황을 알아봤어야 한다는 후회가 일었다.
그는 내공을 제외한 다른 무공에서 주석하가 사실상 입문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는 의심이 들었으나 말이 안 되는 상상이라며 재빨리 털어냈다.
이것도 운명이고 녀석의 명줄이 짧을 뿐이다. 이렇게 된 이상 마무리하고…….
혼군은 주석하의 가슴에 재차 일 권을 쑤셔 넣을 생각에 주먹을 꾹 쥐었다. 그 순간 주석하의 몸에서 강력한 호신강기가 다시 일었다. 역시 그 기운이 가진 성질은 그의 혼천신공과 너무 유사했다.
아무리 같은 심법으로 내공을 쌓았다고 해도 같은 사람이 아닌 이상 이렇게 일치하기 어렵다. 다시 의문이 불처럼 일었다. 이 녀석은 어떤 식으로든 그와 인연이 있을지 모른다. 해명을 듣지 않고 곤죽을 만들어버렸으니 너무 성급했나…….
약간의 후회와 약간의 의문 속에 이미 끝난 일이라며 자조하는 순간, 주석하의 몸에서 기이한 반응이 일었다.
“응?”
이번에는 호신강기의 성질이 점차 변하고 있었다. 그의 것과 동일한 성질의 기운에 다른 기운이 섞이며 이전과 비교하기 힘든 강력한 호신강기가 형성되었다. 그 강기는 공격하려던 그의 오른 주먹을 자연스럽게 밀어냈다.
“의식을 잃은 게 아니었나?”
반쯤 죽었다고 생각했는데 녀석의 몸이 반응했다. 마치 살아 있는 사람이 의도적으로 일으킨 호신강기처럼.
혼군은 주석하의 반응에 호기심이 일었다.
그는 불끈 쥔 오른손을 풀고 서서히 내력을 낮췄다. 그의 몸 외부로 뻗어 나가던, 칼날 같은 혼천 신공이 점차 수그러들었다. 혼군의 신형을 감싸던 음험한 기운이 점차 흐릿해졌다.
그러자 놀라운 현상이 일어났다. 주석하의 몸을 감싸던 강기의 막 또한 서서히 사라지고 있었다.
혼군은 눈썹을 꿈틀거리며 주석하의 맥문을 잡았다. 동시에 자신의 내력을 몸 내부로 슬쩍 흘려 넣어 그의 무공 수준을 측정했다.
같은 성질의 내공이었기에 아주 자연스럽게 그의 기운이 주석하의 것과 섞였다. 사실 같은 성질의 기운이 아니었다면 이렇게 손쉽게 내부를 탐색할 수 없었을 것이다.
주석하의 상태는 좋지 않았다. 혼천신공에 일격을 맞은 주석하는 맥이 미약하게 뛰고 있었다. 혼천십팔지에 의해 타격을 입은 녀석의 가슴은 정확히 다섯 군데가 완전히 짓이겨졌다. 주변 혈맥이 끊어지고 엉키는 바람에 몸속의 진기 또한 그 흐름이 대단히 미약했다. 이 상태라면 불과 일각을 버티지 못하고 목숨을 잃을 것이다.
“음?”
놀랍게도 주석하의 단전이 맹렬하게 들끓고 있었다. 그 기운은 어마어마했으나 혈맥이 엉망이 된 바람에 제대로 단전을 빠져나오지 못했다.
뜨겁고, 차며, 음험하고, 맑고, 끈적끈적한 다섯 기운이 뒤섞여 혼란스러웠다. 이 가운데 혼군의 기운과 같은 내력은 음험한 놈이었다.
한 사람의 몸에 서로 다른 성질의 기운이 존재할 수 있다니! 그것도 하나하나가 엄청난 내력이었다.
이건 말이 안 되는 상황 아닌가.
혼군은 지금까지 알던 무공 상식이 머릿속에서 파괴되는 기이한 경험을 했다.
“대체 이놈 뭐야?”
뭔가 요상한 녀석을 죽여버렸다는 자책감이 일었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지금은 대라신선이 와도 이 녀석을 살리기 어렵다.
대충 주석하의 몸 내부 탐색을 마쳤을 때 시커멓게 생긴 한 놈이 그의 앞에 뛰어나와 넙죽 엎드렸다. 얼굴부터 발끝까지 옷도 피부도 시커먼 것을 보니 혼천교도가 확실했다.
“교, 교주님!”
“네놈은 또 뭐냐?”
“혀, 혈혼도객입니다.”
당연히 혼군은 혈혼도객이란 별호를 처음 들었다. 혼천교 내에 혈혼도객 수준의 부하는 무수히 많았다.
혼군이 싸늘한 표정으로 노려보자 기겁한 혈혼도객이 다시 바짝 몸을 낮췄다.
“어디 소속이지?”
“최, 최근에 잠시 외부에 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겁에 질려 제대로 말이 나오지 않아 혈혼도객은 말을 더듬었다. 하지만 지금은 반드시 할 말이 있었다.
“그, 그자는…… 흑검문 소문주입니다.”
“흑검문? 그건 이미 들었다만.”
사실 별 기억이 없었으나 그가 검존과 싸울 때 녀석이 그렇게 대답했던 것 같기도 했다. 그렇더라도 존재감 없는 흑검문은 전혀 변수가 되지 않는다.
“그, 그는 교주님을 뵈려고 왔습니다.”
“나를?”
새삼 묘한 느낌에 그는 품 안의 주석하를 내려다보았다. 그렇다면 손님이었다는 말인데…….
“며칠 전에 도착해서 교주님 알현 기회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손님이 왜 화산파와의 싸움에 끼어들었는지 모를 일이지만 그것만으로는 의미가 없었다.
“그는…… 경혼심법을 익혔습니다.”
혼군의 안면이 살짝 일그러졌다. 경혼심법. 그도 잘 아는 무공이었다. 한때 잘 나가던 흑도 문파 경혼곡의 내공심법이다. 다만 경혼심법이 부실하다는 점도 알고 있었다.
혼군은 무공을 경혼곡에서 경혼심법으로 시작했다. 그러다가 경혼곡이 멸문하고 강호를 떠돌면서 새로운 무공을 창안했다.
바로 경혼심법의 약점을 보완한 혼천신공이다. 혼천신공을 대성하면서 그는 흑도팔군이 되었고 나아가 혼천교를 세웠다.
즉 원류를 추적해보면 혼천신공은 경혼심법의 한 갈래다. 하지만 지금 일파 종사의 위치에 선 혼군은 과거의 경혼심법이 얼마나 부실한 무공인지 잘 알고 있었다.
“거짓말 마라. 경혼심법으로는 이처럼 정순한 내공을 연마할 수 없다. 이자의 내공은 경혼심법이 아니라 혼천신공에 기반을 두고 있다.”
추상같은 꾸짖음에 혈혼도객이 다시 몸을 바짝 낮췄다.
“그는…… 경혼심법을 익힌 지 불과 일 년이 채 안 되었습니다.”
혼군은 마치 벼락을 맞은 것처럼 격동을 일으켰다. 일 년? 지금 이자의 내공이 얼마나 엄청난데? 경혼심법에 지금까지 몰랐던 공능이 있었던가? 아니 절대 그럴 리는 없었다. 혼천신공을 창안하면서 경혼심법을 구석구석까지 모두 뜯어봤던 그였다.
문득 주석하의 몸에 다른 기운이 잠재되어 있다는 사실이 생각났다. 절대 한 몸에 담을 수 없는 이질적인 기운. 그 기운 각각은 인간이 연마한 내공이라 할 수 없을 만큼 엄청났다. 도무지 설명할 수 없는 현상에 혼군은 주석하를 내려다보았다.
호기심이 일었다.
현재 혼천교도에게 전수하는 혼천신공은 핵심이 빠져 있다. 완전무결한 혼천신공은 오직 그만이 알고 있고 수련한 자도 그가 유일하다. 이 세상에서 그가 아니라면 절대 이처럼 정순한 혼천신공 내력을 품을 수 없다.
그런데 그런 인물이 나타났다. 죽이더라도 어떻게 된 일인지 알아내고 죽여야 한다.
“음.”
혼군은 신음을 토하며 급한 성격을 자책했다. 이자를 살릴 수 있을까? 평범한 경우라면 절대 불가능하다. 화타나 편작이 오더라도 그 결과는 바뀌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이놈과 같은 성질의 내공을 갖고 있어서 어쩌면 그의 내력으로 이자의 망가진 혈맥을 치유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단지 가능성일 뿐이지만 시도해볼 가치는 있었다.
혼군이 손에 쥔 멱살을 놓자 주석하의 몸이 바닥에 쓰러졌다.
“그를 데리고 따라와라.”
한 마디만 남기고 혼군이 전각으로 들어갔다.
한바탕 혼란이 엄습했던 장내는 다시 제자리를 찾았다. 혼천교도들은 쓰러진 주석하와 엎드린 혈혼도객을 힐끔거리면서 주변을 정리했다.
“아아!”
혈혼도객이 꿇어앉은 채 고개를 들고 하늘을 쳐다봤다. 그의 얼굴에는 기쁨이 어려 있었다. 어쨌든 지금 당장은 주석하를 위험에서 구해냈다. 살지 죽을지 모른다고 해도 최선을 다해야 한다.
혈혼도객이 주석하를 옮기려고 할 때 먼저 주석하를 품에 안는 사람이 있었다. 바로 도수였다.
“고생했습니다. 혼군 앞에서 대단하더군요.”
도수는 아낌없이 혈혼도객의 용기를 칭찬했다. 주석하가 잡히는 순간 그도 검을 들고 뛰어들고 싶었다. 그런데 그러지 못했다. 혼군의 위세에 짓눌려서다.
“하지만…… 소문주를 구하진 못했습니다.”
“난 그것도 못한 걸요. 그리고 이 녀석…… 이렇게 쉽게 죽을 놈 아닙니다.”
도수는 주석하를 꾹 끌어안았다.
최근에 주석하를 알고 난 후 은연중에 그를 믿게 됐다. 아무리 위험한 상황이라도, 아무리 길이 보이지 않더라도 주석하라면 어떻게든 헤쳐나가리라고.
“며칠만 기다려 보세요. 분명히 일어날 거예요.”
도수는 주석하를 품에 안고 혼천교 깊숙이 들어갔다. 마치 혼천교도인 것처럼 그의 걸음은 당당했다.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혈혼도객도 다급하게 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