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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검천하-54화 (54/273)

54화 혼천신공 (2)

자하검존의 처소 정심각에서 유비연은 조심스럽게 눈치를 봤다.

그녀의 앞에는 복잡한 표정을 한 자하검존이 생각에 잠겨 있었다. 벌써 반각의 시간 동안 자하검존은 눈을 감고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그의 상념을 깨트릴 수 없어 유비연은 잠자코 있어야 했다.

이윽고 생각을 정리한 자하검존이 조용히 물었다.

“그와는 어떻게 알게 되었느냐?”

“풍운령에서 만났습니다.”

유비연은 그동안의 일을 남김없이 털어놓았다. 주석하가 그녀를 이름이 유연인 남자라고 알고 있는 것까지.

풍운채에서 있었던, 주석하가 바위를 깨트린 사건과 무너진 목책에서 살아난 사건은 대단한 내공을 바탕으로 하지 않는다면 실현 불가능했다. 이미 주석하의 가공할 내력을 경험한 탓에 자하검존은 그리 놀라지 않았다.

“그는 비록 흑도의 인물이지만 품성이 바릅니다.”

그녀의 확신에 자하검존의 미간이 살짝 모였다. 훈계하려던 자하검존은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유비연은 강호 경험이 일천하고 젊다. 세상과 인간에 대한 환상이 존재한다. 그러니 인간의 본성에 막연한 기대를 걸고 아름답고 따뜻한 세상을 꿈꾼다.

하지만 이미 반백을 훌쩍 넘긴 자하검존은 세상의 좋고 나쁜 모습을 모두 경험했다. 세상은 그렇지 않다. 사람의 본성은 바뀌지 않고 정파와 사파도 쉽게 변하지 않는다. 처음 입문한 무림인은 정사의 중간에 서 있을지 모르지만 문파에서 교육을 받고 강호를 종횡하면서 이런저런 경험이 쌓이면 그 간극은 점점 벌어진다.

그래서 정파인과 사파인은 어울릴 수 없다. 정과 사란 파벌이 얼핏 세상의 옳고 그름을 대변한다고 여길지 모르지만 현실에서는 단지 양 진영의 힘겨루기이자 파벌 싸움일 뿐이다.

그가 보는 주석하가 사파 인물이라면 그 심성이 어떻든 사파를 벗어나지 못한다. 그는 앞으로도 정파의 발목을 잡을 녀석이다.

“그래, 다행이구나.”

자하검존은 조용히 수긍하고 다음 문제로 넘어갔다.

“그와 연결고리가 있느냐?”

“네, 있습니다.”

“무엇이냐?”

“산채에서 구한 명아란 아이가 우리 문파에 입문했습니다. 그 아이와 주석하는 매우 친합니다. 아이도 잘 따랐고요.”

사파인이 추천한 입문 제자라……. 여러모로 신경 쓰이는 부분이 많다. 자칫 훗날 그 아이가 간자가 될지도 모르는 일 아닌가.

자하검존은 주석하와 관련된 모든 부분이 도무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를 향한 유비연의 호의도 거슬렸다.

“그래, 그 아이에게 잘해주거라.”

“아이가 예뻐서…… 당연히 그럴 생각입니다.”

유비연은 검존이 아이를 받아들여서 다행이라 생각했다. 다만 그다음에 이어진 검존의 지시는 의외였다.

“그 아이를 이용해서 주석하라는 자를 잘 감시해 보아라. 주석하의 배경을 조사하고 앞으로의 행보 또한 계속 확인하거라.”

“네? 갑자기 무슨 일로…….”

“그자의 무공이 심상치 않아서다.”

지시를 마친 자하검존은 더는 말하지 않고 유비연을 물렸다.

유비연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정심각을 떠났다. 자하검존이 주석하를 대하는 태도가 이상했다. 비록 주석하가 고수이긴 하지만 그녀가 볼 때 남궁천을 비롯한 중원사룡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아직은 무림에 영향을 미치기에 한참 모자라는 무공이고 그가 속한 흑검문 또한 강호에서의 입지가 미미한 곳이다. 딱히 자하검존이 신경 쓸 이유가 없었다.

어쨌든 사부의 명이니 받아들여야 한다. 그녀는 주석하의 행방을 추적해봐야겠다고 다짐했다.

**

어두운 심연.

눈앞에는 희뿌연 안개가 자욱했다.

주석하는 자신을 둘러싼 여섯 명의 괴물을 살폈다. 괴물인가 사람인가. 한 사람을 빼고는 모두 처음 보는 인물이었다. 놀랍게도 그들의 형상은 자세히 보려고 할수록 희미해졌다.

그의 눈에 익은 유일한 인물은 혼군이었다. 비록 대단히 수척한 외모에 옷차림도 남루했으나 세상을 압도하는 눈빛만은 여전했다.

고통 속에서 주석하는 입을 열려고 했다. 하지만 아무런 말도 나오지 않았다.

저들의 대화 소리가 들려왔다.

“크흐흐, 네놈 다섯이 이 녀석에게 내공을 모두 전수해라. 나는 무한회귀공을 일으켜 이놈을 과거로 돌려보낼 테니.”

“알았다. 뇌군.”

대화가 마무리되고 혼군이 그의 앞으로 다가왔다.

주석하가 뭐라고 말할 틈도 없이 혼군이 그의 머리끝 천령혈에 손바닥을 올렸다. 갑자기 웅후한 공력이 머릿속으로 들어오면서 주석하는 극심한 고통을 느꼈다.

“으아아악!”처절한 비명을 지르며 주석하는 눈을 번쩍 떴다.

주변은 낯설었다. 그가 누운 침상은 소박하게 꾸며진 작은 방이었다. 이곳이 어디인지 그는 전혀 알 수 없었다.

비명을 지른 탓일까. 두 사람이 불안한 목소리로 그에게 말을 걸어왔다.

“괜찮아?”

도수였다. 그 옆의 인물은 혈혼도객이고.

죽지 않은 건가? 혼군의 혼천신공에 심하게 당한 것 같았는데……. 어떻게 살았지?

죽을 위기가 되면 단전에 숨은 기운이 활성화된다는 사실을 안다. 다만 이번 상황을 그렇게 해결하기에는 상대가 너무 강했다. 또 그가 정신을 잃었으니 내력이 활성화되어도 어떻게 해볼 방법이 없지 않은가.

“나…… 살았어?”

의심스러운 표정으로 묻는 그에게 도수가 피식 웃으며 소리를 질렀다.

“당연히! 당연히 살았지! 모두 내 덕이라고!”

“네가 뭘 했는데?”

“혼군이랑 맞장을…… 뜨려다가 참았지. 실제로는 혈혼도객이 뜨긴 했는데…….”

“혼군은?”

“여긴 혼천교 내부야. 혼군이 널 치료했어. 내공을 이용해서 어떻게 했나 보더라.”

“음…….”

주석하는 신음을 삼키며 조심스럽게 내력을 끌어올려 보았다. 평소처럼 경혼심법으로 운기가 가능한 기운이 잠에서 깨어나 혈맥을 일주천했다. 극심했던 가슴의 상처는 거의 아물어있었다. 놀라운 회복이었다.

예전에 혈혼도객을 치유할 때와 비슷한 방식으로 혼군이 그를 도와준 듯했다. 혼군이 왜 그를 살렸는지 짐작이 되지 않았으나 어쨌든 살아난 것만으로도 감격스러웠다.

흐뭇한 미소를 머금고 있자니 혈혼도객이 갑자기 생각난 듯 벌떡 몸을 일으켰다.

“깨어나면 알리라고 했습니다. 혼군께 다녀오겠습니다.”

후다닥 사라지는 혈혼도객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도수에게 부탁했다.

“……나를 일으켜줘.”

“더 누워 있지?”

“그래도 혼군이 온다는데 누워서 맞이할 수는 없지.”

도수는 어쩔 수 없이 주석하의 상체를 일으켰다.

혼군을 기다리는 동안 주석하는 방금 꿈에서 본 장면을 다시 떠올렸다. 익숙한 광경이었다. 예전에 마교 절벽에서 떨어진 후 겪었던 바로 그 순간이었다. 회귀하여 흑검문에서 다시 깨어났을 때와 비교하면 방금 장면이 훨씬 뚜렷했다.

놀랍게도 꿈에서 혼군이 내력을 그에게 주입했다. 이것으로 그의 내공이 혼군과 유사한 이유를 확실하게 알겠다. 무려 혼군이 갈고닦은 내공이 체내에 들어왔으니 당연했다.

과거로 회귀했다는 사실을 알기에 주석하의 고민은 깊어졌다. 앞으로 오 년간 혼군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걸까. 그는 왜 마교가 위치한 십만대산의 절벽 아래에 있었던 걸까.

주석하는 고통스럽던 기억에서 핵심이 되는 두 어휘를 잡아냈다.

‘뇌군, 무한회귀공.’

무한회귀공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으나 뇌군은 안다. 당금 흑도 무림을 지배하는 여덟 명의 초강자 가운데 한 명 아닌가. 뇌군도 흑도팔군에 속해있었다. 혼군과 마찬가지로.

그렇다면 그 자리에 있던 여섯 사람은 모두 흑도팔군이었던 걸까. 그 가운데 뇌군을 제외한 다섯 사람에게서 내공을 받았다는 건가.

주석하는 자신의 몸에 잠재된 내공의 비밀을 일부 풀었다는 기쁨에 빠졌다.

덜컥-

문이 열리고 위압적인 인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혼군! 자하검존과 대결하던 그 모습 그대로였다. 주석하는 방금 꿈에서 보았던 모습과 비교해보았다.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야위고 남루한 모습이었으나 어쨌든 같은 인물이었다.

다친 주석하가 앉아있자 안면을 찡그리던 혼군이 다른 사람을 물렸다. 도수는 나가지 않으려고 버티다 혈혼도객의 손에 쫓겨났다.

방안에는 주석하와 혼군 두 사람만 남았다.

“넌 누구냐?”

“주석하입니다.”

기분 나쁜 표정이 혼군에게 떠올랐다. 그가 물으려는 핵심은 이름이 아니었다.

“저는 혼천신공을 익히지 않았습니다. 경혼심법을 익혔죠. 다만 몸속의 내공은 경혼심법으로 쌓은 내공이 아닙니다. 내공을 경혼심법으로 제어할 수 있기에 경혼심법을 익혔을 뿐입니다.”주석하의 대답은 혼군의 상식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경혼심법과 혼천신공은 그 원류가 같기에 주석하의 말은 사실이었다.

“그럼 태어날 때부터 내공을 갖고 있었나?”

“그건 아니고…….”

“제대로 말하라.”

혼군의 다그침에 주석하는 고민에 빠졌다. 자신도 믿지 못하는 과거로의 회귀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혼군은 거짓말이라고 단정할 것이다. 게다가 그런 비밀을 말해주어도 상관없나? 자칫 그의 목숨이 위험해지는 건 아닐까.

“뭔가 거짓을 꾸미고 있나 보군.”

“아닙니다.”

“어차피 진실을 털어놓지 않으면 넌 죽은 목숨이다. 절대 이곳에서 빠져나갈 수 없다.”

“압니다. 다만 죽어가는 저를 살린 이유도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주석하는 지지 않고 상대를 뚫어지게 쳐다봤다.

잠시 그와 눈싸움을 하던 혼군이 피식 웃었다.

“하룻강아지 같은 놈! 버릇이 없구나.”

말투는 서늘했으나 기분 나쁜 표정은 아니어서 주석하는 안심했다. 지금 당장 그를 죽일 생각이 없어 보였다.

단전에서 잠자는 다섯 기운 가운데 혼군의 혼천신공 기운이 섞여 있다면, 혼군의 무공을 익히면 금상첨화 아닌가. 지금 그는 엄청난 내공을 소유하고 있으면서도 이를 활용할 무공이 없다. 무식하게도 내공의 힘만으로 적을 상대해 왔다.

혼군의 무공을 익히면 그는 흑도팔군 수준에 이르는 무공을 갖게 된다. 사실상 현 무림에서 최정상급이다. 지금까지 꿈도 꾸지 못했던 무공 수준이었다.

갑자기 가슴이 마구 뛰었다. 비록 그의 목표가 무림 고수가 아니라 백화루를 소유해서 놀고먹는 것이라 하지만 어쨌든 무공은 강할수록 좋은 법이다.

그런데 저 무시무시한 혼군이 무공을 전수해줄까?

주석하는 눈을 가늘게 뜨고 혼군의 눈치를 살폈다.

기분이 나빠진 혼군이 안면을 찌푸렸다.

“말할 생각이 없나 보군.”

“절대 아닙니다. 다만…… 혼군께서 들을 생각이 없으신 겁니다. 아니, 믿을 생각이 없으신 겁니다.”

다급하게 변명하는 주석하를 주시하는 혼군의 안면에 분노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어쩔 수 없다. 진심은 통한다고 했으니 정공법으로 나가는 수밖에.

“제 내공은…… 혼군께서 직접 저에게 전수하신 겁니다. 바로 혼군 당신의 내력입니다.”

주석하는 믿지 못할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네놈을 처음 보았는데 말이 되는 소리냐?”

“그렇지 않다면 내공의 성질이 완벽하게 똑같다는 사실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습니까?”

“끙!”

혼천교도가 익히는 혼천신공은 엄밀히 따지면 혼군이 익힌 혼천신공과 미묘하게 달랐다. 그렇기에 혼천교도가 배운 신공 구결이나 내공으로는 이런 결과가 일어나지 않는다.

“미친놈! 내력을 타인에게 전수하는 일은 죽기 전이 아니라면 없다. 게다가 내력을 전수하기도 쉽지 않다. 내가 네놈에게 내공을 물려주었다고? 말이 된다고 생각하느냐?”혼군의 목소리가 점점 거칠어졌다.

당연히 예상했던 결과라 주석하는 침착하게 또박또박 강조했다.

“그런 일이 일어났습니다. 지금부터…… 오! 년! 후! 에 말입니다.”

혼군에게 천지개벽이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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