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화 혼천신공 (3)
“오 년 전이 아니라, 오 년 후?”
“그래서 제가 믿지 못하실 거라 하지 않았습니까?”
주석하의 표정은 한 치의 흐트러짐이 없었다.
거짓말도 작은 거짓말이라면 의심을 하게 된다. 하지만 너무 큰 거짓말이라면 오히려 진실처럼 들리기도 한다.
“설마…….”
“이미 제 몸속 기운을 확인하지 않았습니까? 저를 치료하려면 당연히 그랬을 텐데요?”
방금 꾸었던 꿈으로 주석하는 전생에 있었던 상황을 되새겼다. 그렇기에 단전에 잠재된 내력의 근원을 확신했고 혼군을 압박할 수 있었다.
“그럴 리가…….”
혼군은 주석하의 단전에 숨어 있던 기운을 떠올렸다. 인간의 몸이라고는 믿어지지 않는 엄청난 기운, 그것도 성질이 상반되는 기운이 뒤섞인 이상한 몸이었다. 정상적인 수련을 통해서는 얻을 수 없는, 무려 수백 년간 내공을 연마하더라도 절대 존재할 수 없는 단전이었다.
“믿고 싶지 않으시겠지만……, 진실을 아시지 않습니까? 저에게 내공을 전수한 사람은 흑도팔군 중 다섯 분입니다. 생각해보세요.”
주석하의 몸속에 존재하는 다섯 기운, 따뜻하고, 차갑고, 음험하고, 맑고, 끈적끈적한 기운은…… 염군(炎君), 빙군(氷君), 혼군(魂君), 악군(樂君), 독군(毒君)의 특징이 아닌가.
“그게 가능할 리가…….”
이해는 한다. 하지만 마음은 계속 부정한다. 자신이 왜 일면식도 없는 이 청년에게 내력을 넘겼단 말인가. 그렇다면 자신은 불과 오 년 후에 죽었다는 걸까.
혼군은 일고의 가치도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계속 찜찜하다. 마음 깊은 곳에서는 진실이니 받아들이라고 누군가가 속삭이고 있었다.
전신에 경련을 일으키며 부정하던 혼군은 결국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적어도 그는 상식보다 무공, 내공의 성질을 더 믿는 자였다.
“무려 흑도팔군 가운데 다섯 명의 내력을 얻었단 말이지…… 그럼 나머지 셋은 어디로 갔느냐?”
“저도 모릅니다. 다만 확실한 것은 이 모든 일을 주도했던 사람이 뇌군이었습니다.”
“뇌군이라…….”
혼군이 눈썹을 찡그렸다.
그가 보기에 뇌군은 이상한 놈이었다. 뇌군은 무공보다 머리를 쓰는 자였다. 뭔가를 꾸미는 간신 같은 기질, 전형적인 사기꾼이었다. 물론 뇌군이 존재하기에 정파와 당당하게 맞서고 있는 현실을 인정한다. 하지만 무력을 최고의 덕목으로 간주하는 혼군과 계략을 도모하는 뇌군은 어울리지 않는 존재였다.
“뇌군이 왜?”
“저도 모릅니다.”
주석하가 기억하는 내용은 극히 단편적이었다. 그들이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전혀 모른다. 사실 기억하는 거라고는 뇌군과 무한회귀공이란 말뿐이다. 하지만 혼군에게 무한회귀공을 꺼낼 수는 없다.
“너 혹시…… 뇌군 사람이냐?”
혼군의 안면이 굳어졌다. 흑도팔군은 힘을 합쳐 정파와 맞서 싸우지만 실제로는 각자가 최고의 자리에 오르기 위해 무한 경쟁을 벌인다. 주석하의 설명에 혼군은 경기를 일으키지 않을 수 없었다. 뇌군은 믿을 수 있는 자가 아니니까.
“아직 뇌군을 만난 적이 없습니다. 먼 훗날, 오 년 후에는 만나겠지요.”
“흐음, 미래에 흑도팔군의 공동전인이 된다는 말이지…….”
사태를 파악하자 혼군은 여러 변수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됐다. 오 년 뒤에 무슨 일이 발생하는지 그 과정을 알지 못한다. 하지만 미래의 종착지를 알고 있으니 어떻게든 해볼 여지가 있다.
그는 두 방향이 있음을 깨달았다. 눈앞의 녀석을 죽여서 그런 미래 자체를 부정하거나 아니면 이 녀석을 이용해서 미래가 자신에게 유리하게 흐르도록 하거나.
죽이기에는 지금 주석하가 가진 내공이 너무 아까웠다. 무려 현 무림 최강고수의 다섯 배에 해당하는 내공이다. 절대 존재할 수 없는 능력을 지닌 놈이니 오히려 잘 구슬려서 자신의 편으로 만드는 것이 더 나을지도 모른다.
‘뇌군이 이 모든 사태를 끌어냈더라도 아직 이 녀석과 뇌군은 접점이 없으니…… 차라리 내가 먼저 끈끈한 유대관계를 맺는다면…….’
마침 혼군은 아직 제자를 거두지 않았다. 이런 능력을 지닌 놈을 제자로 받아들이면 나쁘지 않다. 어쩌면 다음 세대에서 자신의 모든 것을 물려받은 이놈은 다른 흑도팔군의 제자를 압도할 것이다. 어쩌면 정파십존의 후예들마저 발라버릴지도…….
욕심이 일었다.
“네놈이 여기에 온 이유가 무엇이냐?”
“저는 제 내공이 혼천교의 무공과 유사하다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경혼심법만으로는 한계에 부딪혔거든요. 그래서 혼천교의 무공을 배우러 온 겁니다. 또, 제 내력의 진실도 궁금했고요.”
“좋다. 믿겠다. 넌 본군의 제자가 될 생각이 있느냐?”
주석하는 혼군과 눈을 마주쳤다.
곧 죽이려 하던 혼군의 태도가 많이 바뀌긴 했다. 이것만으로도 성공이지만 아직은 살얼음판이다. 게다가 주석하는 혼군의 무공을 반드시 배워야 하지만 제자가 될 생각이 없었다. 적어도 그는 자랑스러운 흑검문의 계승자 아닌가. 비록 별 볼 일 없는 문파라지만 저버리고 싶지 않았다.
“물론 저도 제자가 되고 싶습니다. 하지만…… 몸속의 기운을 고려하면 불가능합니다. 무려 다섯 가지 기운이니까요. 그러니 누구의 제자도 될 수 없습니다. 다만…….”발끈하는 혼군을 진정시키고자 주석하는 재빨리 다음 말을 이었다.
“저와 가장 먼저 맺어진 혼천교를 제가 어찌 잊겠습니까?”
실망한 기색이 드러났다가 서서히 옅어졌다. 혼군 또한 어쩔 수 없는 현실을 받아들여야 했다. 지금 이 녀석을 잡지 않으면 나중에는 오히려 더 잡기 어려워진다. 이 녀석이 뇌군과 만나 그 꾐에 빠지고 나면 골치 아픈 일이 발생할지도 모르고.
긴 한숨이 새어 나왔다. 혼군을 아는 자라면, 평소 모든 사람 앞에서 군림하던 그의 성품을 아는 자라면 의외의 모습이었을 것이다.
“알았다. 생각해보도록 하지. 당분간 이곳에서 몸조리하라. 넌 당분간 이곳을 떠날 수 없다.”
경고한 혼군이 자리를 떴다.
홀로 남게 되자 주석하는 긴장이 누그러졌다. 어쩌면 회귀한 이후 가장 힘들었던 시간일지도 몰랐다.
**
혼군이 사라진 후에도 도수와 혈혼도객이 돌아오지 않았다.
‘이것들이 어디로 간 거야?’
의아한 기분에 주석하는 몸을 일으켰다. 아마 혼군이 말한 이곳의 의미는 혼천교일 것이다. 그러니 혼천교 내부를 좀 돌아다닌다고 해서 문제 될 일은 없겠지.
갑갑한 마음에 전각 밖으로 나간 주석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혼천교 입구에서 보던 경관을 내부에서 보는 느낌은 다소 달랐다.
주변에 혼천교도가 몇몇 있었으나 그에게 관심을 두는 사람은 없었다.
도수와 혈혼도객을 찾기 위해 객방으로 향하던 그는 뒤쪽 연무장에서 날카로운 기합 소리를 들었다.
“으아아!”
감탄사인지 비명인지 알 수 없는 소리는 분명히 도수의 것이었다. 황당해진 주석하는 급히 연무장으로 뛰어갔다.
그곳에는 마구잡이로 검을 휘두르는 도수가 있었다. 그 반대편에는 기합을 지르며 도수를 때려잡고 있는 낯선 이가 보였다.
“어?”
도수의 처지가 매우 다급해 보였으나 주석하는 실전이 아닌 비무임을 알아챘다. 그는 미간을 찌푸리며 한쪽에서 구경 중인 혈혼도객에게 다가갔다.
“무슨 일인가요?”
“그게…… 갑자기 저 여자가 쳐들어와서 도수에게 뭐라고 했는데 도수가 버럭했더니 저렇게 됐습니다.”
무슨 말인지 전혀 알아들을 수 없었다. 주석하는 도수와 겨루고 있는 여인을 관찰했다.
나이는 대충 그들 또래였고 흑의 경장을 입은 모습을 보니 혼천교 제자가 확실했다. 사실 혼천교도가 아니라면 이곳에서 이러지도 못할 테니.
흑의 여인은 검날이 낭창낭창 휘어지는 연검을 사용해서 도수를 곤경에 빠트리고 있었다. 도수의 반응은 꽤 무거웠다. 연검을 처음 상대하는 듯 손발이 어지러웠다.
여인의 무공은 상당히 날카로웠고 지금 전력을 다한 것인지 아닌지 알 수 없으나 도수보다는 적어도 한 수 위였다.
애초에 도수는 암습에 최적화되어 있어서 이처럼 정면대결 상황에서는 힘을 쓰지 못했다. 그런데 상대의 무공이 더 높다 보니 일방적으로 밀리고 있었다.
“으아아!”
상대의 검에 무차별로 휘둘리던 도수가 화가 머리끝까지 난 듯 검을 앞세우고 상대를 향해 돌진했다.
아무리 지방의 작은 조직인 살검회라지만 조직 내에서 최강의 자객이었던 도수였다. 생사를 넘나드는 수많은 실전 경험으로 무장한 도수가 그리 녹록하게 당할 리는 없었다.
채챙-
저돌적인 도수의 공격에 놀란 흑의 여인의 몸이 일순간 굳었고 그 틈을 도수는 놓치지 않았다.
순식간에 승기를 뺏어온 도수는 상대를 몰아붙였다.
비무치고는 상당히 격렬한 두 사람의 격돌에 주석하는 고개를 저으며 물었다.
“누구야?”
“그게…… 흑접(黑蝶) 녹윤영입니다.”
“흑접?”
주석하는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문득 혼군의 이름이 녹담평이란 사실을 깨달았다.
“혼군과 무슨 관계인데?”
“혼군의 손녀죠.”
혼군의 위명은 많이 들었으나 가족관계를 전혀 알지 못했기에 주석하는 여인을 유심히 살폈다. 새삼 독오른 여인의 표정과 남다른 외모가 눈에 들어왔다. 혼군 밑에 저런 미모가? 이건 믿기지 않는 기적이었다.
무공이 대단한 강자였기에 흑접이 꽤 유명하리란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왜 전혀 기억에 없는 걸까.
관전하는 사이 도수가 손을 번쩍 들었다.
“으아아! 항복! 항복!”
“항복? 그런 건 없어!”
순식간에 연검이 도수의 가슴팍을 그었고 상의가 너덜너덜해졌다. 다행히 손속에 사정을 둔 듯 피를 볼 정도는 아니었다.
“으아아!”
약간은 과장된 비명을 지르면서 도수가 정신없이 주석하에게로 뛰어왔다. 그리고는 재빨리 그의 뒤로 숨었다. 도수를 뒤쫓던 여인이 주석하 앞에 멈췄다.
“응? 당신은 누구죠?”
주석하는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라 멀뚱거리며 그녀를 쳐다보았다.
순식간에 녹윤영의 눈이 주석하의 아래위를 훑었고 입가에 미소가 드리워졌다.
“아하, 당신이 바로 그…… 검존과 싸울 때 끼어들었다는…… 그자군요?”
대충 이야기를 들은 모양이었다.
“그렇습니다만, 주석하입니다. 당신은…….”
“난 녹윤영, 강호에서는 검은 나비, 흑접이라 하죠. 혼천교 소교주이고요. 만나서 반가워요.”
한 손에 연검을 든 채 그녀가 포권을 취했다.
주석하도 어쩔 수 없이 예의를 차려서 인사했다.
인사가 끝나자마자 녹윤영이 다시 등 뒤의 도수를 가리키며 소리쳤다.
“얼른 나와! 안 나오면 쥐 잡는다!”
도수는 주석하의 뒤에 바짝 숨어서 더욱 몸을 움츠렸다.
옆에서 혈혼도객이 설명을 덧붙였다.
“그게 말입니다. 우리가 우연히 연무장을 지나가다가 아가씨께서 검법을 수련하는 광경을 구경하게 되었거든요. 그냥 지나갔으면 괜찮았는데…… 도수가 괜히 검법을 평하는 바람에…….”“야! 이 자식아! 너! 내 검법이 형편없다고 했잖아! 검이란 화려하게 그림 그리듯 휘두르면 안 된다며? 목표물이 있으면 그냥 팍팍 찔러야 한다며? 근데 왜 도망가? 얼른 나와!”
“뭔 소리야! 난 죽어도 거짓말은 못 해! 그게 검법이냐? 춤추는 거지.”
주석하의 등 뒤에서 도수가 지지 않고 반박했다.
“이 거지발싸개 같은 놈이!”
녹윤영이 다짜고짜 검을 앞으로 찔러왔다.
평소 도수의 검법론이 그런 식이었으니 새삼스러운 일은 아닌데 그걸 하필 여인 앞에서 비난하면 어떡하는지. 그것도 이곳에서 무서울 게 없는 여자 앞에서…….
도수가 뒤에서 살짝 얼굴을 내밀고는 혀를 날름거리며 약을 올렸다.
연검이 멋진 호선을 그리며 날아들었다. 도수가 후다닥 피하는 바람에 그 연검은 그대로 주석하의 옆구리로 들어왔다.
주석하는 전혀 예상치 못했기에 뒤늦게야 연검의 공격을 알아챘다.
슥-
연검이 옆구리를 스치고 살짝 피가 배어났다.
“어?”
당황한 주석하의 앞으로 다시 연검이 날아들었다.
“네놈도 한통속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