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검천하-56화 (56/273)

56화 혼천신공 (4)

녹윤영의 연검은 무시무시했다.

만일 주석하가 보법이나 다른 무공에 뛰어났다면 어렵지 않게 피했을 것이다. 안타깝게도 내공을 제외하고는 모든 분야에서 주석하는 사실상 초보나 마찬가지였다.

휘익-

눈 깜짝할 틈도 없이 순식간에 검이 얼굴 앞으로 날아왔다.

꼼짝없이 목이 날아갈 상황. 뜻하지 않게 절체절명이 위기를 맞은 그는 당황했다.

엉겁결에 그는 경혼심법을 운용하여 단전의 내공을 불러내면서 손을 앞으로 뻗었다.

검을 날리던 녹윤영도 주석하의 반응에 당황했다. 주석하는 검이 없으니 당연히 피하리라 예상했다. 그런데 피하지 않고 손으로 검을 잡아 오다니!

“헉!”

오히려 놀란 녹윤영이 재빨리 검을 멈추려 했으나 이미 휘두른 검을 어떻게 할 수 없었다.

턱!

주석하의 손이 날아오는 검을 붙잡았다.

놀랍게도 검은 그의 손에 꽉 끼어 멈췄다. 그의 얼굴에 닿기 직전이었다.

넋이 나간 녹윤영은 입을 쩍 벌리고 아무 말도 못 하다가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괘, 괜찮아요?”

그녀의 눈이 주석하의 얼굴과 검을 잡은 손을 쉴새 없이 오갔다.

“이게 괜찮아 보여요?”

싸늘한 음성으로 책망한 주석하는 손에 힘을 주었다. 예전에 사천삼살을 죽일 때 비슷한 경험을 한 바 있어서 어렵진 않았다.

뚝-

연검이 절반으로 부러졌다.

경악한 녹윤영이 눈을 크게 떴다.

“내 검!”

망연자실한 눈으로 주석하의 손과 부러진 검을 살피던 녹윤영의 얼굴이 점점 일그러졌다.

“감히 내 검을 부러트리고 나를 놀리다니!”

부러진 검을 내던진 녹윤영이 그를 노려보며 분노를 터트렸다. 그녀의 주위로 검은 기운이 뭉클 피어올랐다.

혼천신공. 혼군의 절기가 녹윤영에 의해 모습을 드러냈다.

녹윤영이 혼군의 손녀라는 말을 들었기에 주석하는 놀라지 않았다. 사실 혼군은 검법이 아닌 권법과 지법에서 일가를 이룬 고수다. 혼군의 손녀가 검을 사용해서 의아해하던 주석하는 혼천신공을 일으킨 그녀를 보고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의 무공을 관찰해볼 의도가 있긴 했으나 안하무인격인 그녀에게 짜증이 났다.

“소저, 이 무슨 행패요?”

“행패는 내가 아니라 바로 너다!”

동시에 무시무시한 주먹이 날아왔다. 혼군이 무림을 종횡할 때 필살기로 이름이 높았던 혼천십이권(魂天十二拳)이었다.

그녀의 주먹은 무시무시한 권풍을 동반한 채 주석하의 머리를 겨냥했다. 앞뒤를 가리지 않고 쏟아내는 그녀의 절기에 주석하는 기가 막혔다. 혼천신공을 담은 혼천십이권이니 제대로 맞으면 중상이었다.

마땅히 대적할 무공을 찾지 못한 주석하는 손으로 막을 수밖에 없었다. 방금 검을 막을 때처럼 주석하는 재빨리 손을 뻗어 상대의 주먹을 거머쥐었다.

턱-

“헉!”

무려 혼군의 절기인 혼천십이권이 단숨에 무력화되다니!상대가 이런 식으로 반격해올 줄 몰랐던 녹윤영은 기겁해서 주먹을 빼내려 했다. 하지만 주먹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야! 이놈이! 감히 나를 희롱해?”

녹윤영은 상대가 그녀의 손을 더듬을 의도가 있다고 오해했다.

주석하는 싸늘한 미소를 머금으면서 손에 힘을 가했다. 손바닥 내부에 갇혀 꿈틀대는 작은 여인의 주먹이 느껴졌다.

이 싸움은 상대가 걸어온 것이다. 만일 그가 무공이 조금만 낮았더라면 중상을 입었을 것이다. 그러니 상대를 봐줄 이유가 없었다.

그의 손에 힘이 들어가자 엄청난 압력이 주먹에 가해졌다. 놀란 녹윤영은 다급하게 내공을 끌어올려 저항했다. 하지만 두 사람의 내공 격차는 어마어마했다.

“아악!”

손이 으스러질 것 같은 아픔에 녹윤영은 비명을 질렀다.

이 정도면 됐으려나? 그래도 혼군의 손녀라니 해칠 수는 없다. 주석하는 손을 놓았다.

손을 움켜쥐고 녹윤영은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으흐흑!”

아파서일까, 분해서일까? 이거 좀 심하게 다뤘나? 주석하는 난감한 표정으로 도수를 쳐다봤다. 도수도 같은 표정으로 혈혼도객에게 눈짓했다.

“어떡하냐?”

“허억! 아, 아가씨!”

혈혼도객이 급히 녹윤영을 달랬다.

“놔! 너희들! 이제 죽었어!”

눈물이 그렁그렁한 모습으로 녹윤영이 주석하를 쏘아보고는 후다닥 일어나서 뛰어갔다.

도망치는 뒷모습이 우습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해서 주석하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대충 녹윤영의 성격이 어떤지 감이 왔다. 혼군이 지극히 아끼는 손녀이다 보니 혼천교에서도 떠받드는 분위기였을 것이다. 안하무인 성격인 그녀가 도수나 그를 평소 다른 교도들처럼 다루다 보니 이런 사태가 발생한 거다.

“어떡하다가 얽혔어?”

“연무장에서 저 여자를 만났는데 너를 묻더라고. 없다고 했더니 무공이 허접해서 도망쳤느니 어쩌니 듣기 싫은 말을 하잖아. 넌 얼마나 잘하길래 남을 욕하냐고 대들었다가 비무하게 됐지.”대충 어린아이들끼리 투닥거렸다는 뜻이다.

“하아, 씨불! 혼군이 이 일로 한판 붙자고 하면 우짜냐?”

도수의 목소리가 사정없이 떨렸다.

“크크, 그때는 책임진다고 해. 그만하면 얼굴도 반반하고…… 어쩌면 혼천교가 통째로 손에 들어올지도 모르잖아?”

“헉!”

“근데 너무 과대평가하는 것 아냐? 혼군이 관심이나 있겠어?”

주석하는 농담으로 대답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어째 일이 꼬일 듯한 기분이다.

**

사흘 동안 주석하는 두문불출하고 외상을 치료했다.

혼군의 혼천십팔지와 혼천십이권에 당한 가슴의 상처는 예상보다 훨씬 빨리 아물었다. 혼천신공에 당한 상처인 데다 주석하의 내공과 성질이 같다 보니 발생한 이점이었다. 한 차례씩 운기할 때마다 그의 몸은 급속히 정상을 되찾았다.

몸을 놀려도 제약받지 않게 되었을 때 그는 녹윤영의 방문을 받았다.

“소저, 그날은 미안했습니다.”

녹윤영이 울면서 사라진 후 처음 만나는 터라 매우 어색했다.

“흥! 괜찮아요!”

반응이 조금 애매했다. 조금 뒤끝이 남은 것 같기는 한데 표정이 어둡지 않아 한숨 돌렸다.

“손은 괜찮아요?”

녹윤영이 면포로 칭칭 감은 수박 크기의 손을 내보였다.

주석하는 한바탕 터지는 웃음을 간신히 억눌렀다.

“무슨 일입니까?”

“할아버지께서 부르세요.”

순간 주석하의 안면이 얼어붙었다. 아무래도 손녀를 혼냈다고 야단치려는 모양이다.

“킥킥킥.”

녹윤영의 즐거운 웃음소리가 귀를 울렸다.

살짝 미간을 찌푸리는 그에게 녹윤영이 손짓했다.

“얼었군요? 그날 일 때문은 아니거든요. 그날 날 괴롭힌 일은…… 할아버지도 모르세요.”

예상과 다른 그녀의 대답에 주석하는 얼떨떨한 상태로 그녀를 따라갔다.

“흥! 그래도 그 원한을 절대 잊지 않을 거니까…… 각오하세요.”

“그건…… 나도 잘못이긴 하지만 소저도 잘못한 겁니다. 난 소저를 괴롭힌 적 없습니다.”

“알아요! 모두 내 탓이란 거. 손이 수박이 된 것도!”

버럭 소리치는 그녀의 눈은 웃고 있었다. 목소리와는 달리 전혀 화가 담기지 않은 표정이었다.

어쨌든 혼군이 불렀으니 가긴 가야 한다. 주섬주섬 그녀의 뒤를 따랐다.

녹윤영이 앞서 걸으며 그와는 눈도 마주치지 않고 말했다.

“그날…… 그 초식은 고의가 아니었어요. 난 당신을 죽일 이유가 없고…… 하여튼 그때는 당황해서 그렇게 된 거예요. 어쨌든 미안해요.”

정말 미안해서인지 아니면 겉치레인지 구분되지 않았으나 주석하는 받아들였다. 이곳에서의 그녀 지위로 보면 저런 수준의 사과도 꽤 힘들었을 테니.

“나도 괴롭혀서 미안합니다.”

“흥! 그러니까요. 앞으로 각오해요! 내 연검을 부러트렸으니 다음에 하나 사줘야 해요.”

대체 뭘 어떻게 하겠다는 것인지 몰라 대충 넘기며 그녀의 말을 무시했다. 툭탁거리면서 걸음을 빨리하다 보니 어느새 중앙 전각에 도착했다.

“할아버지는 연무실에 있어요.”

녹윤영이 그를 전각 아래 지하 밀실로 안내했다.

**

연무실 중앙에 혼군이 정좌하고 앉아 있었다.

연무실에 들어온 주석하는 감회가 새로웠다. 하얀 석벽이 천장에서 바닥까지 사방을 가로막고 있는 완벽한 밀실이었다. 평소 혼군이 은밀하게 무공을 연마하는 장소다.

정작 혼군의 반응이 전혀 없어 녹윤영을 돌아보았을 때 그녀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덕분에 이곳은 그와 혼군 두 사람만의 공간이 됐다.

조용히 문을 닫고 주석하는 혼군의 맞은편에 서 있었다.

눈을 감고 정좌한 혼군에게서 은은한 기운의 압박이 가해졌다. 다만 그 기운은 성질이 같아서 압력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고향에 돌아온, 친숙한 느낌이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묵묵히 쳐다보고 있자니 서서히 혼군이 눈을 떴다.

“앉거라.”

감히 거역하기 어려운 위압감이 풍겨 주석하는 군말 없이 반 장가량 떨어진 맞은편에 가부좌를 틀었다.

“며칠간 고심했다. 네 녀석 말이 진실인지 아닌지.”

고뇌가 담긴 혼군의 말을 주석하는 잠자코 들었다.

“생각할수록 진실과 거짓 여부는 중요하지 않더구나. 그보다 나는 다른 부분을 고민했다. 현재의 무림은 정파십존과 흑도팔군이 양 진영으로 나뉘어 치열하게 대립하는 가운데 각자 또한 끝이 없는 무한 경쟁을 벌이고 있다. 네놈의 말대로라면 오 년쯤 후에는 흑도팔군이 완전히 몰락했고 유일한 탈출구가 네놈이라 각자의 내력을 전수했다는 건데…….”혼군의 음성은 예상 밖으로 잔잔했다.

“나는 지금까지 음모를 고민하며 무림을 종횡하지 않았다. 즉 그 말이 진실인지 거짓인지 따질 그런 성격이 아니란 말이지. 내 능력이 되면 거침없이 일을 벌였고 그 덕에 흑도팔군까지 올랐다. 실제 그 일이 일어나는지 네가 여기 온 것이 누구의 음모인지 나는 관심 없다는 말이다.”주석하도 내심 인정했다. 비록 그가 혼군을 만난 시간이 일천하지만 혼군은 그리 복잡한 인물이 아니었다. 작은 이익을 위해 머리를 굴리는 그런 유형이 아니어서 원하지 않는다면 무공 전수를 절대 하지 않을 것이다. 반대로 원한다면 무슨 일이 있어도 하고 말겠지.

“오 년 이내에 몰락한다면 그건 내 능력이 부족하다는 뜻이다. 남을 탓할 일도 아니지. 어차피 피할 수 없다면 최선을 다해 받아들이면 되지 않겠느냐. 그래서 나는 너에게 집중했다. 네 녀석이 품은 혼천신공의 기운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

“직접 내력을 전하지 않았다면 절대 불가능한 현상임을 아실 겁니다.”

“그렇다. 네가 나의 분신임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아니 넌 흑도팔군 가운데 무려 다섯 사람의 분신이기도 하다. 그 사실을 인정하자 모든 것이 분명해지더군.”혼군의 강렬한 눈빛이 주석하와 맞닿았다. 주석하도 시선을 피하지 않고 편안하게 눈을 마주쳤다.

“난 네 녀석의 미래가 궁금해졌다. 만일 그 다섯 명이 너를 돕는다면 너는 역사상 전무후무한 초강고수가 될 것이다. 누구도 상상치 못한 그런 경지 말이다. 반대로 너를 이용하려는 누군가가 있다면…… 그 결말은 아무도 짐작할 수 없다. 그래서 나는 선택했다. 네 녀석이 어떤 경지에 이르는지 확인해보기로. 이것은 무를 숭상하는 사람이라면 정말 가슴 뛰는 일 아닌가? 비록 내가 아니더라도 그 경지를 볼 수 있다면 기쁜 일이다.”주석하는 혼군의 결심을 알아챘다. 과연 그는 진정한 무림인이었다. 무의 극(極)을 파헤치는, 무를 숭상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나는 네게 나의 기운을 운용할 수 있는 혼천신공을 전수할 생각이다. 네가 이미 익히고 있는 경혼신법과 그 기원이 같아서 금방 익힐 것이다. 하지만 그 공능은 비교할 수 없지. 혼천신공이 수 배는 더 뛰어나다.”

“고맙습니다.”

“혼천신공에 혼천십팔지와 혼천십이권까지 전수하면 사실상 내 절기의 핵심을 모두 전하는 셈이다. 네가 이 무공을 대성한다면 나와 같은 경지, 아니 더 높은 경지에 이를 것이다.”주석하의 심장은 정신없이 요동치고 있었다. 이렇게까지 모두를 얻게 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제자도 아닌 자에게 진신절기를 아낌없이 전하는 사람이 누가 있단 말인가.

과연 혼군은 진정한 무림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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