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화 혼천신공 (5)
혼군의 입가에 서늘한 미소가 감돌았다.
“좋아할 필요 없다. 그게 네놈 운명이고 또 내 운명일 뿐이니까. 다만 몇 가지만 말해두기로 하지. 물론 듣고 안 듣고는 상관없다.”
비록 제자가 아니라고 단언했으나 주석하는 제자가 된 마음으로 경청했다. 적어도 그가 보는 혼군은 충분히 존경할 가치가 있는 사람이었다.
“이런 말을 하고 싶진 않지만…… 네 녀석 말이 사실이라면 오 년 이내에 나와 혼천교는 난관에 봉착할 것이다. 그때 혼천교와 내 손녀 윤영이를 저버리지 말거라. 다른 것은 전혀 상관하지 않지만…… 윤영이를 생각하면 나는 편히 눈을 감지 못할 것 같아서 말이야.”담담한 말투였으나 그 속에서 주석하는 손녀를 향한 혼군의 뜨거운 애정을 감지할 수 있었다. 눈앞에 방금 보았던 귀여운 여인의 얼굴이 지나갔다. 버릇이 없다고 해야 하나? 그러면서도 밝고 경쾌한 그녀를 떠올리니 기분이 좋아졌다.
“명심하겠습니다.”
“짐을 지우려는 생각은 없다. 보답을 바라고자 하는 일이 아니니. 어차피 나는 내 길을 갈 뿐. 다만 윤영이 그 아이는…… 됐다.”
“다른 말씀은 없으십니까?”
“있지만 자질구레한 것들뿐이다. 아마 넌 혼천교를 떠나면 다른 흑도팔군을 찾아가겠지. 그런 거냐?”
주석하는 시인도 부인도 하지 않았다.
“적어도 뇌군은 찾아가겠구나. 알다시피 뇌군은 조심해야 할 자다. 모략에 능한 사기꾼이지. 절대 그자의 세 치 혀에 놀아나지 말거라. 그의 말은 믿을 필요 없다. 넌 네가 하고 싶은 대로, 가슴이 움직이는 대로 행동하면 된다.”
“알고 있습니다.”
주석하는 혼군의 눈빛에 가득한 우려를 인정했다. 예상보다 혼군은 그의 행보를 훨씬 잘 이해하고 꿰뚫고 있었다. 불과 며칠 사이에 이런 결론을 도출해낸 그의 통찰력이 놀라웠다. 그러니 흑도를 이끄는 흑도팔군이 되었고 유력 단체인 혼천교를 이끌었겠지. 그는 단순히 무공만 뛰어난 인물이 아니었다.
“다른 자를 만날 때도 마찬가지다. 물론 너는 지금처럼 행동하고 비슷한 결과를 유도하겠지만 이는 실로 위험한 행동이다. 만일 내가 나쁜 마음을 먹었다면…… 어떻게 되었을 것 같으냐?”
“죽었겠죠.”
“그리 단순하지 않다.”
혼군의 심각한 표정에서 주석하는 약간 충격을 받았다. 솔직히 이곳에 오면서 혼군을 설득하지 못할 가능성을 염두에 뒀었다. 다만 그 여파는 생각 밖이었다.
“보통의 경우라면 그냥 버릇없는 녀석을 없앤다고 바로 죽였겠지. 물론 네 녀석의 단전에 숨은 내공을 고려하면 쉽게 죽지도 않겠지만 그렇다고 죽이지 못할 것도 없다고 본다.”지금의 주석하는 내공을 제대로 다룰 무공이 없기에 그의 장담도 틀린 말이 아니었다. 하다못해 그가 죽였던 마불만 하더라도 마불이 그를 경계했다면 죽는 쪽은 반대였을 것이다. 혼군의 수준이라면 현재의 그는 절대 죽음을 모면한 방법이 없다.
“죽음이 문제가 아니라…… 네 녀석이 나와 같은 성질의 내력을 소유하고 있다는 것이다. 네가 정신을 잃었을 때 내가 딴마음을 먹었다면 네 몸속에 있는 나와 같은 성질의 내력을 내가 모두 흡수할 수 있었다. 그 결과는…… 물론 네가 죽지 않을지라도 나는 지금보다 두 배는 더 강해질 수 있었다.”생각지도 못한 이야기에 주석하는 충격을 받았다.
상대의 내력을 흡수하려면 흡성대법과 같은 사술이 필요하다. 그런 무공을 익힌 자들은 강호에서 비난의 대상이 된다. 자신이 강해지려고 남을 해치기 때문이다. 지금도 무림 공적 가운데는 그런 이들이 있으나 흔하지는 않다.
혼천신공으로 내력을 제어할 수 있기에 혼군 같은 고수라면 그가 정신을 잃은 사이 그를 치유해주는 대신에 몸속을 떠도는 같은 성질의 진기를 유도하여 자신의 몸으로 끌어들일 수 있다. 그 결과는 흡성대법과 마찬가지이지만 실제로는 같은 기운이기 때문에 가능하다. 혼군의 내력과 그의 내력은 서로 구분할 수 없다.
“나는…… 아예 그럴 의도 자체가 없었지만 다른 이들은 다르다. 욕심 많은 자가 네 녀석을 보면 침을 흘리겠지. 흑도팔군 대부분은 그리 공명정대하지 않다. 물론 내가 공명정대하다는 의미는 아니다.”갑자기 무공이 두 배로 강해질 손쉬운 방법이 있다면 그 누가 유혹을 거절할 수 있을까. 현재도 무림 최강자인 사람이 두 배로 강해지면 사실상 무림의 패자가 된다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 무한의 권좌를 누가 거부하겠는가.
주석하의 안면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생각해볼수록 첫 인연으로 혼군을 찾은 것이 행운이었다. 다른 자에게도 이런 행운을 기대하기 쉽지 않다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그래서…… 너 자신을 함부로 드러내지 말거라. 단전의 내공도, 회귀 사실도…… 그 모두가 자칫 네 목숨을 앗아갈 그런 비밀이다.”
주석하는 반박하지 못했다.
지금까지 그가 회귀 사실을 가족에게마저 숨긴 이유는 별다른 뜻이 아니었다. 단지 다른 사람이 그를 미쳤다고 욕할까 봐. 절대 자신의 안전 때문이 아니었다.
그런데 혼군의 말이 옳았다. 어쩌면 그는 무림지보보다 더 사람의 욕망을 부채질하는 인물일지도 모른다.
“오늘 절기를 얻어 나와 같은 경지에 이르면 그 위험은 현격히 줄어들겠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다. 이 정도면 잘 알아들었으리라 본다.”
“감사합니다.”
혼란 속에서도 주석하는 마음을 굳게 다졌다.
“그럼 혼천신공의 구결을 일러주마. 경혼심법과 비슷한 부분이 많아 금방 익힐 수 있을 거다. 네 단전에 품은 내력을 얼마나 잘 제어할 수 있는지 확인해 보거라.”혼군이 구결을 암송하기 시작했다.
주석하는 무공에 집중했다. 불과 며칠 후면 그는 혼군에 버금가는 강자로 재탄생할 것이다.
**
푸욱-
석벽에 열 개의 작은 구멍이 새겨졌다. 그 깊이는 바로 옆에 찍힌 열 개의 구멍과 거의 유사했다.
주석하는 자신이 새긴 흔적과 이전에 혼군이 새긴 흔적을 비교했다. 그 깊이나 위치가 완벽했다. 그의 혼천십팔지가 혼군과 유사한 수준에 이르렀음을 의미했다.
혼천십팔지는 모두 열여덟 개의 초식으로 이루어진 지법이었다. 타인의 혈도를 짚는 부드러운 지법에서 천하의 어떤 물체든 깰 수 있는 강력한 지법에 이르기까지 지법 무공의 전부를 담은 절기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혼천십이권은 또 어떤가. 상대의 공격을 피하거나 흘리는 기법에서 시작하여 상대를 제압하고 타격을 가하며 살상하기까지. 권법은 주석하가 처음 배우는 무공이었다. 무기를 사용하지 않는 체술의 극한이랄까. 별 것 아닌 권법에 내공이 가해지면 모든 물체를 뭉개는 어마어마한 위력을 발휘했다.
이 두 무공을 통해 주석하는 진정한 무림인으로 다시 태어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는 석벽에 남은 수많은 손가락 자국과 주먹 자국을 살피며 미소를 지었다. 완전하지는 않더라도 만족할 만한 수준이 확실했다. 이처럼 빨리 혼군의 무공에 적응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던 부분이었다.
아마 모르긴 해도 혼군은 그보다 더 놀랐을 것이다. 모두 혼천신공으로 통제하는 내력 덕분이었다.
“흑도팔군과 붙어도 해볼 만하지 않을까?”
너무 과한 자신감일까? 적어도 마음만으로는 흑도팔군, 정파십존의 수준에 닿았다고 자신했다. 예전에 만났던 남궁천도 이제는 그를 능가한다고 장담할 수 없을 것이다.
우설금은? 아직 그녀의 수준은 짐작조차 되지 않았다. 우설금의 무공은 신비에 가려져 있고 딱히 그녀의 무공을 제대로 본 적도 없으니까. 옆에서 목격한 강함 역시 그녀는 기운을 전부 드러내지 않았기에 한계가 있다.
다만 이 순간 주석하는 몰랐던 부분을 새롭게 알게 됐다. 그는 경혼심법으로 혼군의 내력을 대부분 다루고 있었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혼천신공을 익히고 나니 그간 사용했던 내공은 지금의 절반 수준이었다. 즉 경혼심법을 사용할 때보다 혼천신공을 익힘으로써 적어도 배는 강해졌다.
그는 흡족한 기분으로 석실을 벗어났다.
전각 밖으로 나왔을 때 그를 맞이한 사람은 놀랍게도 혼군과 녹윤영이었다.
“표정을 보니 연성이 끝난 것 같군?”
“익숙해지려면 멀었습니다.”
“그렇겠지. 벌써 완벽하다면 그게 사람이겠나?”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혼군의 얼굴에는 감탄한 표정이 역력했다. 그는 이미 무형의 기운을 통해 주석하의 성취를 대략 짐작했다.
“가르침을 감사드립니다.”
“……이제 곧 떠나야겠지?”
“아무래도…… 그래야 할 것 같습니다.”
섭섭한 표정을 짓던 혼군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을 대로 하게. 이번에는 어디로 갈 건가?”
“뇌군입니다.”
내키지 않는 표정을 짓던 혼군이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하게. 대신에…… 윤영이를 데리고 가게.”
“네?”
예상치 못한 요구에 주석하는 녹윤영에게 시선을 돌렸다. 생글생글 웃는 표정이 뭔가 일을 꾸민 느낌이었으나 그렇다고 다그쳐 물을 수는 없었다.
혼군이 웃으면서 설명했다.
“뇌군을 어떻게 만나려 하는가? 여기에서처럼 막무가내로 쳐들어갈 수는 없지 않나? 아마도 그를 만나려면 윤영이가 도움이 될 거야. 물론 거추장스럽다면 데려가지 않아도 되네. 뇌군이 어디에 있는지 자네는 모르지 않나? 윤영이가 나의 손녀이다 보니 흑도팔군을 만날 때 도움이 될 걸세.”주석하는 막연하게 흑도팔군을 만나겠다는 의지만 있었을 뿐 구체적인 방법을 생각해보지 않았다. 단순히 부딪치면 문이 열리리라고 생각했고 설사 어려움이 닥치면 그때 해결하겠다는 작전이었다.
막상 생각해보니 중원 각지에 흩어져 있는 팔군을 찾는 것부터 보통 문제가 아니었고 그들을 만날 기회를 얻으려면 더욱 큰 난관이 가로막고 있었다.
혼군의 제안 자체는 엄청난 도움이지만 이 세상에서 무조건 좋은 일이란 없다. 혼군의 요구에도 숨은 뜻이 있을 테니.
“그, 그게…….”
주석하는 바로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말을 더듬었다. 녹윤영과 그의 사이가 그리 좋지 않고 따지고 보면 은원 아닌 은원이 깔려있다.
주저하는 모습에 녹윤영의 눈썹이 쓱 올라갔다.
“그래서 싫다는 거예요?”
“아, 그게 아니라…….”
“부담 주지 않을 테니까 데려가기 싫으면 언제든 말하세요. 바로 빠져 줄 테니까.”
그렇게까지 말하는데 거절할 수는 없었다. 이 발상의 주인이 혼군인지 아니면 그녀인지 모르나 지금 바로 거절하면 예의가 아니었다. 물론 따지고 보면 그에게도 나쁜 제안이 아니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주석하는 떨떠름한 상태로 수락했다.
방긋 웃는 녹윤영과 어이없이 실소를 머금는 혼군의 태도가 대조되어 보였다.
**
네 사람이 혼천교 정문을 나섰다. 바로 주석하 일행이었다.
“이 여자는 왜 같이 가는 거야?”
“뭐야? 불만 있어?”
도수와 녹윤영이 얼굴을 보자마자 으르렁댔다. 딱히 그날 둘이서 검을 맞댄 비무 외에 인연이 없었던 것치곤 어째 서로 반목이 심했다.
“우리가 얼마나 험한 여정을 수행하는데…… 여자가 따라오면 짐이지. 그것도 작은 행낭이 아니라 쌀가마니보다 더 무겁지.”
“뭐? 얼마나 가벼운 줄 알아? 나보다 무공도 못하는 게.”
“아, 아니! 내가 무공이 못하다고? 말은 똑바로 해! 그때 내가 봐주지 않았으면 넌 뼈도 못 추렸어!”
“너야말로 그날 목이 날아가지 않은 걸 다행으로 여겨.”
둘이서 툭탁대는 말다툼에 주석하는 귀를 막아야 했다. 벌써 이렇게 불협화음이 일어나니 아무래도 평탄한 여행을 기대하기 쉽지 않아 보였다.
거기에다 혈혼도객마저 눈을 부라렸다.
“도 소협, 아가씨에게 불경한 언사라뇨? 목이 몇 개입니까?”
“제엔장!”
빽 소리를 지르며 도수가 모두를 무시하고 앞서갔다.
한숨을 내쉬던 주석하의 눈에 앞에서 기다리는 의외의 인물이 보였다.
“하아!”
그의 안색이 살짝 차가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