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화 비마표국 (1)
주석하의 발걸음이 저절로 멈췄다.
옆에 있던 녹윤영이 어리둥절해서 그를 쳐다보았고 무심코 도수를 따라가던 혈혼도객 역시 제자리에 섰다.
“뭐예요?”
주석하는 녹윤영의 질문을 무시하고 앞의 인영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그 사람이 그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살아 있었네요?”
녹윤영의 미간이 가운데로 모이고 눈이 가늘어졌다. 유심히 앞에 있는 사람을 살피던 그녀의 안면이 점점 더 구겨졌다.
“화산파 제자입니다.”
주석하가 녹윤영에게 대충 해명하고는 거리를 좁혔다.
유비연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검존과 혼군이 싸웠던 이후 처음 만나는 시간이었다.
“다행히 죽을 운명은 아니었습니다만 유 소협이 이곳에 있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네요.”
주석하의 대답에 녹윤영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다시 유비연을 훑었다.
여자의 직감이랄까. 보는 순간 녹윤영은 유비연의 정체를 알았다. 무려 무림의 꽃이라는 천상삼화의 일인인 데다 화산파와 혼천교가 가까이 있으니 한두 번 본 사이가 아니었다.
물론 녹윤영의 미모는 유비연에 견줄 바가 아니었으나 그럴수록 녹윤영은 유비연에게 알게 모르게 질투심을 품고 있었다. 당연히 좋은 감정은 아니었다.
그런 유비연이 무려 남장하고 입구에서 주석하를 기다리고 있었다. 미모가 뛰어난 유비연이 남장한 모습을 처음 본 그녀에게 뭔가 수상쩍다는 직감이 왔다. 게다가 주석하가 그녀를 소협이라 부르다니.
‘어? 여자인 줄 모르는 건가?’
녹윤영은 이 흥미로운 상황에 눈을 굴렸다. 아무래도 유비연에게 뭔가 꿍꿍이가 있어 보였다. 그녀는 마치 좋은 먹잇감을 본 기분이라 조용히 지켜보기로 했다. 추측이 옳다면 그녀는 유비연의 약점을 움켜쥔 셈이 되니까.
그녀는 조용히 주석하의 뒤를 따랐다.
“언제부터 기다렸습니까?”
“오늘쯤 떠나리라 예상했어요. 마침 사제 한 명이 저에게 전갈을 보냈거든요.”
“혼천교에 첩자라도 심었나 보죠?”
“그건 아니고요. 얼마 전에 서로 다툼이 있었으니 혼천교의 동태를 주시하고 있었죠.”
그날 검존과 혼군의 싸움이 흐지부지되어 버렸으니 예상 못할 일은 아니었으나 어쩐지 주석하는 자신이 감시당한 듯한 기분이 들었다.
“혹시…… 무슨 일인지?”
“흐음, 어디 가시는 길인가요?”
유비연이 주석하 일행을 쭉 훑었다. 예전에 만났던 사람들이라 눈짓으로 인사한 그녀는 가장 뒤에서 유심히 노려보고 있는 녹윤영을 발견했다.
녹윤영을 한눈에 알아본 그녀의 안색이 싹 변했다가 금세 태연을 가장해서 안색을 회복했다.
“멀리 가시나 본데요?”
“아무래도 중원을 잠시 돌아다녀야 할 듯합니다.”
“아, 저도 그런데…… 잘됐네요.”
어이없는 답변에 주석하는 무척 당황했다. 그때 뒤에서 녹윤영이 끼어들었다.
“우린 호북으로 갈 건데요, 동행하실 건가요?”
“호북?”
예상보다 먼 곳이라 유비연이 멈칫했다. 유비연은 주석하가 사천에서 왔기에 고향으로 돌아가리라고 예상했다. 분명히 예전에 그렇게 말한 기억이 나는데 갑자기 호북이라니.
순식간에 머리를 굴린 유비연이 호탕하게 웃었다.
“하하, 그러시군요. 전 강호협객행을 다니는 중이라 어디든 상관없습니다. 함께 가도록 하지요.”
순간 멍해진 사람은 주석하였다. 호북까지 따라오겠다니? 화산파에서 그를 감시하기로 했나? 유비연의 의도가 의심스러워 거절하려는 찰나 도수가 큰 소리로 웃었다.
“와하하! 난 유 소협이라면 언제든 환영이야! 솔직히 석하랑 다니면 돈이 없어서 쫄쫄 굶잖아? 유 소협은 돈이 많거든. 우리는 물주를 기꺼이 환영해!”도수가 유비연의 어깨를 툭툭 치며 격렬하게 환영 의사를 밝혔다.
정작 유비연의 안면은 확 구겨졌다. 돈이야 있지만 풍운채에서 여기까지 올 때도 거의 모든 돈을 그녀 혼자서 내다시피 했다. 따라가겠다고 우긴 상황에서 돈을 못 내겠다고 거절할 수도 없어 울며 겨자 먹기로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주석하도 도수의 주장에 수긍하지 않을 수 없었다. 부자와 동행하면 어쨌든 여행길이 훨씬 편해진다. 돈이 없어 객잔에서 숙박하지 못하고 노숙을 일삼거나 돈이 없어 밥을 굶어야 하는 고난의 시간은 영원히 안녕이다.
주석하는 정중하게 받아들였다.
“그럼 함께 갑시다. 서로 도움 주면 좋지요. 아무래도 나와 도수보다 강호 경험도 많으실 테니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서로 도움은 개뿔…….’
유비연은 내심 한숨을 쉬면서도 겉으로는 즐거운 표정을 지었다.
주석하는 어느새 일행이 된 그녀와 걸음을 나란히 했다.
“명아는 어떻게 됐습니까?”
“잘 적응하고 있어요. 제법 무재가 뛰어나다고 사형들이 칭찬하더라고요.”
주석하는 막혔던 응어리가 풀린 기분이었다. 어쨌든 명아가 화산파에서 잘 지낸다니 대만족이다. 지금 당장 만나러 가고 싶어도 그날 화산파와 검존에게 저지른 죄가 있어서 훗날을 기약해야 하지만.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염치없지만요.”
“괜찮습니다. 뛰어난 아이라 전혀 부담 없고요. 몇 년 후면 강호로 나올 정도로 성장하겠지요.”
명아를 붙잡고 있는 한 주석하와 인연이 이어진다는 생각에 유비연도 걱정을 덜었다. 문득 자하검존이 그녀에게 부탁한 임무를 떠올렸다.
주석하를 잘 감시하라고. 특이사항이 있으면 반드시 보고하라고. 무엇 때문인지 모르지만 자하검존이 주석하에게 관심을 두고 있는 것만은 확실했다.
두 사람의 뒤에서 녹윤영은 안면을 찡그리며 대화를 엿들었다.
‘이 자식은 어찌 된 게 남장한 것도 눈치를 못 채지? 눈치를 밥 말아 먹었나? 게다가 유비연 이 여우는 대체 무슨 꿍꿍이야?’
한편으로는 재밌는 광경을 볼 수 있겠다는 기대감이 들면서도 두 사람이 나란히 걷는 장면을 보니 괜히 속이 쓰렸다.
툭!
뒤에서 누군가가 걸리적 거렸다.
눈을 홱 돌린 녹윤영은 눈을 크게 뜨고 상대를 노려봤다.
“넌 또 왜!”
“돈 가져왔냐?”
도수가 히죽거리며 물었다.
“목이 몇 개지?”
도수는 다시 입을 열지 못했다.
**
날이 저물자 주석하 일행은 객잔에 들러 식사를 하고 방을 잡았다.
예전 같으면 엄두도 못 낼 일을 유비연이라는 물주가 있어서 가능해졌다. 물론 녹윤영도 만만찮게 여비를 준비한 듯 하지만 일단 비상금으로 남겨두고.
다행히 빈방은 많았다.
“자, 방을 두 개 잡아서 하나는 녹 소저가 쓰고 우리 남자들은 한 방에서 같이 자자고.”
주석하가 흔쾌히 나누었다. 남녀유별이니 가장 명쾌한 방법이다.
당연히 녹윤영은 찬성했으나 유비연은 화들짝 놀랐다. 함께 같은 방을 쓰는 것도 문제이고 그런 시간이 길수록 정체가 발각될 위험도 증가한다.
슬쩍 녹윤영의 표정을 보니 쌤통이라고 눈으로 놀리고 있었다.
“주 소협, 난 따로 방을 쓰면 안 될까?”
풍운채에서 화산까지 오는 동안에 동행하면서도 반드시 딴 방을 고집했던 그녀였다. 다행히 방이 있었고 숙박비도 그녀가 냈으니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벌써 돈 낭비하면 앞으로 힘들지 않을까요?”
“난 옆에 다른 사람이 있으면 잠을 못 자는 성미라…….”
땅에 참호를 파고 경계하는 중에도 잘 잤던 주석하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제 돈 내겠다는데 말릴 이유는 없지 않나? 그것도 무려 물주인데.
“그렇게 하세요. 단 숙박비는 모두 부담해야 합니다.”
자신의 방이야 당연히 그렇다 치고 왜 다른 일행 숙박비까지 내야 하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으나 유비연은 울며 겨자 먹기로 승낙할 수밖에 없었다.
품 안에 있는 돈을 생각하니 한숨이 나왔다. 무려 호북까지 가게 될 줄 몰랐기에 은자 사정이 넉넉지 않았다. 가다 보면 어떻게든 융통할 수 있긴 하겠지만…….
‘내가 호구지.’
다행히 홀로 방을 사용하게 되어 가장 큰 문제를 해결한 유비연은 이제 여행에 필요한 물품을 사야 했다. 남자들이야 몸만 가면 되지만 여자들은…….
“주 소협, 잠시만 밖에 다녀오겠습니다. 이것저것 준비할 게 좀 있어서…….”
“그렇게 하세요. 멀리 가지 말고 일찍 돌아오세요.”
흔쾌히 수락하는 주석하 덕분에 안도한 유비연은 급히 밖으로 나왔다. 그녀의 뒤로 녹윤영이 따라왔다.
“나도 살 거 있어요! 나도 나갔다가 올게요.”
주석하는 의심 없이 두 사람을 함께 보냈다.
밖으로 나와 처음으로 둘만의 시간을 갖게 된 녹윤영이 바로 유비연에게 인상을 팍팍 썼다.
“뭐예요? 이 우스운 남장에…… 왜 따라와요?”
유비연이 기분 나쁜 표정으로 눈을 크게 떴다.
“그러는 당신은 왜 주 소협과 같이 다니죠?”
“내가 함께 다니면 안 될 일 있어요?”
“엄연히 남녀유별인데…….”
“호오! 이럴 때만 남녀유별? 풍운채부터 함께 다닌 사람이 누군데?”
두 사람은 나란히 걸으면서 언성을 높였다. 이런 문제로 왜 싸우는지 기가 막히는 유비연이었으나 절대 지고 싶지 않았다.
당연히 녹윤영도 다른 사람은 몰라도 유비연에게만은 이기고 싶었다. 미모에서도 한 수 접어주고 무공에서도 한 수 접어주는데 말다툼에서마저 접어주면 너무 자존심 상하는 일 아닌가.
“난 그때 고진 사제와 같이 있었다니까요.”
“내 말이 그 말이에요. 주 공자는 이제 내 사제랑 마찬가지예요.”
“그게 무슨 소리죠?”
“우리 할아버지가 무공을 전수했거든요.”
“네? 그게 무슨…….”
순간 유비연은 눈앞이 노래졌다. 주석하가 흑검문이라는 사파 출신이지만 그래도 심성이 괜찮아 보였고 고강한 내공을 지녔으니 어떻게 잘 회유해서 정파로 전향시킬 생각도 없지 않았는데 무려 혼군의 무공을 이었다니?
잠재적으로 정파의 크나큰 손실이자 사파에 큰 도움이 되는 문제였다. 동시에 주석하라는 인간에 대한 신뢰가 무너지는 일이기도 했다.
“혼군의 제자라고요?”
“아, 제자는 아니지만…… 하여튼 나에겐 사제나 마찬가지니까 내가 동행하는 건 아무 문제 없어요.”
제자가 아니라니 다행이었으나 그래도 찜찜함을 털어낼 수 없었다. 주석하의 내공이 상당했기에 거기에 다시 혼군의 무공이 더해졌다면 어쩌면 엄청난 괴물로 성장할 가능성마저 엿보였다.
‘이건 사부에게 알려야 하는데…… 이 여자 말을 믿을 수가 있어야지.’
내심 전전긍긍하는 사이에 녹윤영의 질문이 다시 날아들었다.
“어쨌든, 당신은 왜 따라온 거예요? 혹시 주 공자에게 관심 있어요?”
어이없는 채근에 유비연은 한바탕 크게 기침했다. 관심이라니? 정파도 아닌 사파인에게 관심이라니. 그녀는 절대 아니라고, 단지 사부의 당부 때문이라고 내심 변명했다.
“그럴 리가요. 정말 우연히 동선이 겹쳤다니까요.”
“흥! 그걸 누가 믿어!”
“믿고 안 믿고는 당신의 자유니까 강요하지 않겠지만 어쨌든 난 그래요. 그러니까 내가 동행한다고 뭐라 하지 말아요. 당신이야말로 주 공자에게 관심이 있는 거죠?”
“흥! 나도 관심 없어요. 그런 인간을 누가 관심 가져요?”
“그러니까요!”
갑자기 대화 방향이 이상하게 흘렀다. 두 사람은 서로 다투다가 갑자기 의기투합해서 주석하를 흉봤다. 무엇이 그리 재미있는지 두 사람은 어둠이 밀려오는 저잣거리를 거닐며 깔깔대며 웃었다.
“하여튼 내가 여자란 건 절대 밝히면 안 돼요. 알죠?”
“그게 왜 비밀이어야 하는데요?”
“주 공자가 나에게 빠져 매달리면 안 되니까.”
“……미친년!”
어이가 없어 실소를 내뱉으면서도 녹윤영은 조금 긴장되긴 했다. 상대는 무림 최고의 미녀라는 천상삼화다. 비록 지금은 남장이라 여자인 자신이 혹할 꽃미남이지만 저 여자가 남장을 풀고 여자로 돌아오면…….
주석하에게 관심이 있든 없든 경쟁 관계라고 홀로 주장하는 녹윤영은 절대 용납하기 싫었다. 이 비밀을 숨기고 있으면서 심심할 때마다 유비연을 협박하며 골려 먹는 것이 더 낫다.
한바탕 비웃음을 날리면서 녹윤영은 유비연과 보조를 맞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