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화 비마표국 (2)
함께 길을 떠난 주석하 일행은 묘한 조합이었다.
유비연은 화산파 제자이자 정파였다. 누가 뭐라 해도 그녀는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협의지사였다.
반면 녹윤영은 사파인 혼천교 부교주였다. 그녀는 정파의 위선을 싫어했기에 그런 유비연에게 전혀 공감하지 못했다.
주석하와 도수는…… 겉으로는 사파라지만 실제로는 정사지간이나 마찬가지여서 남의 일에 무관심했다. 이익이 생기지 않으면 굳이 개입하려 하지 않았다.
혈혼도객은…… 녹윤영이 합류한 이후로 찍소리도 못했다.
그렇다 보니 여행 중에 자잘한 부딪힘이 많아졌다. 유비연이 정파랍시고 백의를 입고 나머지가 사파의 상징인 흑의를 입은 것처럼 서로 달랐다.
이동하다 시비가 벌어진 장면을 보면 유비연은 꼭 나서서 잘잘못을 가리고 나쁜 놈을 응징하려 했고 나머지 사람들은 무관심하게 그냥 지나치려 했다. 가끔 녹윤영은 이상한 일에 간섭하여 오히려 더 시비를 크게 벌여놓기도 했다.
오늘 야산을 넘다가 길목에서 마주친 사건도 비슷했다.
산 중턱에서 병장기 소리가 들리자 유비연과 다른 이들의 반응이 달랐다.
“도와줘야 하는 것 아냐?”
유비연이 뛰어들 채비를 하는 반면 다른 이들은 시큰둥했다.
“누가 할 일 없이 싸우지?”
“아, 또! 귀찮은데! 넌 좀 참아라, 응?”
주석하와 도수의 반응은 남달랐다.
휘익-
콰당!
숲 너머에서 사람이 나무토막처럼 날아와 그들의 발아래 처박혔다. 마치 짐짝처럼 날아온 시체였다.
“허억!”
주석하를 비롯하여 모두가 찔끔하는 사이 도수가 시체를 확인하고는 고개를 저었다.
“이미 죽었는데?”
“나쁜 놈들!”
순간 격분한 유비연이 곧바로 숲 너머로 몸을 날렸다.
녹윤영과 혈혼도객은 안면을 찌푸리며 시선을 돌렸다. 이런 일이 있을 때마다 유비연과 의견충돌이 잦아서였다.
“협객행은 무슨 협객행! 그냥 오지랖이지.”
휘익-
쿵!
또 하나의 시체가 숲을 넘어왔다. 복장이 다른 것을 보니 아무래도 이건 유비연이 사고치는 중이…….
주석하를 필두로 그들은 급히 숲을 넘었다. 대형 사고를 치기 전에 막아야 한다.
숲 사이 공터에서 발생한 난장판에 유비연이 뛰어들어 분전하고 있었다.
주석하도 강호를 쏘다닌 경험 덕에 금방 무슨 상황인지 알아챘다.
곳곳에 널린 수레와 마차, 여기저기 쌓인 물품, 사람들의 옷차림을 보니 상단이나 표국이 확실했다. 이럴 때 다른 한쪽은 보나 마나 상단을 터는 산적이다.
주석하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공격하는 십여 명의 인물은 평범한 산적이 아니었다. 남루한 옷차림이 아니라 짙푸른 장삼이었고, 호미나 괭이, 날 빠진 도가 아니라 예리하게 벼려진 검이었다. 게다가 그들의 흉흉한 움직임은 완벽하게 무림인이었다.
“날강도로군. 어느 문파지?”
상단을 공격하여 물건을 뺏는 일은 흑도 문파라도 할 짓이 아니다. 정파든 사파든 상단을 호위하여 수입을 얻는 게 정상이다.
“나도 몰라요.”
유비연의 안색이 점점 어두워졌다.
공격하는 자들의 움직임이 의외로 조직적이어서다. 저들은 어중이떠중이가 아니라 문파에서 제대로 교육하여 길러낸 자들이다.
보고 있는 사이 놈들의 횡포가 점점 심해졌다.
“도와줄 건가요?”
지금까지 유비연이 이런 식으로 나온 적은 없었다. 그녀는 곧바로 분쟁에 뛰어들었고 대부분 홀로 처리했다. 그런데 그녀가 도움을 요청한다는 것은…….
“저들이 강한가요?”
“많이. 지금 보이는 것은 일부일 뿐이죠. 저들은 상단 호위무사를 손쉽게 처리할 실력이죠. 아직 본색을 모두 드러내지도 않았어요.”
주석하에게 눈을 찡긋한 유비연이 곧바로 검을 사선으로 그었다.
서걱-
불쌍하게도 한 놈이 쓰러졌다.
유비연은 검에 사정을 두지 않았다. 적이 강하다고 여겼기에 틈을 주지 않고 바로 상대를 무력화했다. 그녀의 검이 지나가면 피가 튀고 적이 쓰러졌다.
“넌 뭐야?”
갑자기 강자가 등장하자 상단을 털던 자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유비연은 상대를 노려보며 버럭 소리 질렀다.
“네놈들은 어디 소속이냐?”
“흐흐, 우리? 반반한 처자라면 바로 울음을 그친다는 색야문이다!”
색야문은 강호에서 나름 유명한 방파였다. 주로 여염집의 처녀를 납치해서 기루에 공급하는 악행을 저지른다고 알려져 있었다. 특히 문주와 부문주를 맡은 색야일로(色夜一老)와 색야이로(色夜二老)는 무공과 악행으로 상당히 유명했다.
색야문은 유비연의 예상을 넘은 강한 문파였다. 강호 유명 방파의 세력에는 미치지 못할지라도 그녀가 홀로 처리할 문파의 범주를 넘어섰다. 아쉽게도 천상삼화인 그녀는 미모로는 최강이었지만 무공은 신예 최강이라는 중원사룡에 비해 떨어졌다.
그렇다고 이런 나쁜 놈을 내버려 두고 물러설 그녀는 아니었다.
“색야문이든 뭐든 도의를 저버리고 상단을 괴롭히는 자를 용서할 수 없다!”
유비연의 검이 빠르게 적의 허리를 갈랐다.
그녀 덕분에 여유가 생긴 상단 호위무사들은 간신히 한숨 돌렸다. 이미 절반 이상의 호위가 쓰러진 터라 물건을 모두 빼앗길 위기에서 갑자기 등장한 유비연은 그야말로 구세주였다.
하지만 유비연은 혼자가 아닌가.
서걱-
다만 유비연의 무공은 색야문도와는 차원이 달랐다. 그렇다고 완벽하게 압도할 수준은 아니어서 적들이 조직적으로 연합하기 시작하자 서로 팽팽해졌다. 역시 숫자에는 장사가 없다.
“이런! 쉽지 않은데? 어떡해!”상황을 파악한 도수가 주석하를 돌아봤다.
“어쩌긴, 구해야지.”
귀찮지만 유비연이 뛰어든 이상 해결해야 한다. 게다가 상단을 도와주면 분명히 보상이 있다. 돈을 벌 기회가 생겼는데 이를 마다할 그가 아니었다. 언제까지 유비연의 호주머니에만 의존할 수는 없지 않은가.
서너 명을 단숨에 해치운 유비연은 검을 세우고 호흡을 가다듬었다. 지난번 협객행 때는 이런 상황에서 일단 몸을 뺐다. 무리해서 나쁜 자를 처단하려다 목숨을 잃느니 훗날을 도모하는 편이 더 낫기 때문이다.
그녀가 만인을 압도할 무공 경지가 아님에도 꽤 효과적으로 협객행을 마무리한 이유였다.
다만 오늘은 상황이 달랐다.
유비연은 자신을 포위한 색야문 녀석들을 싸늘한 눈으로 응시했다. 그녀의 안면에서 분노가 줄줄이 표출됐다.
“오늘 너희를 모두 죽이지 않으면 내가 성을 간다!”
“대체 네놈은 누구길래 우리 사업을 방해하는 거지?”
“알 필요 없어!”
유비연은 벼락처럼 앞으로 돌진하며 검을 찔렀다.
챙-
오늘 유비연이 다소 무리하게 싸움을 거는 이유는 이들이 색야문이기 때문이다. 여인을 인신매매하는 나쁜 조직이 바로 이들 아닌가. 그녀의 관점에서 강호에서 가장 나쁜 자가 바로 이런 놈들이다. 무리해서라도 응징해야 하는 이유다.
정작 여전히 지켜만 보고 있는 주석하와 그 일행 때문에 약이 오르긴 했으나 어쨌든 아군이라 치면 그녀도 믿을 뒷배가 충분했다.
한 명과 다수가 격돌하니 당연히 노는 녀석이 생기게 마련이다.
싸움에서 떨어져 나온 색야문의 한 놈이 무심코 구경 중인 주석하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어?”
상대방에게 동료가 있다는 점은 중요하다. 만일 그 동료가 강자라면 피하고 약자라면 인질로 쓸 수 있어서다.
녀석이 보기에 주석하 일행은 별 것 아닌 것처럼 보였다. 회심의 미소를 띠고 공격하려던 녀석의 시선이 주석하를 너머 녹윤영에게 멎었다.
“오! 돈이 좀 되겠는걸?”
색야문답게 여인의 가치를 한눈에 알아봤다. 녀석이 옆의 동료에게 눈치를 줬다. 이미 오랜 기간 손발을 맞춰왔던 동료들은 금방 그 뜻을 헤아렸다.
공격해 온 적에겐 이미 충분한 숫자가 붙어 있으니 이쪽을 도모하는 편이 더 낫다. 게다가 이쪽에는 눈이 번쩍 뜨일, 값이 꽤 나갈 미모의 여자마저 있지 않은가.
“으흐흐! 오늘 꿈을 잘 꿨더니!”
무려 다섯이나 되는 놈들이 주석하의 앞으로 표표히 접근했다.
정작 그들은 주석하를 무시하고 가장 뒤쪽의 녹윤영에게 몰려갔다.
“어? 이것들 뭐냐?”
“너와 나를 졸로 보는 거지!”
“하! 하다하다 이젠 저런 놈들에게도 무시당하다니!”
주석하와 도수가 눈을 휘둥그레 뜨고 시시껄렁한 농담을 나누는 사이 색야문 다섯이 녹윤영을 포위했다.
“이년! 순순히 검을 버리고 우리를 따르라!”
“환락의 세계로 안내해주마.”
색야문 사람들이 키득대며 위협하려는 순간 녹윤영이 연검을 거침없이 휘저었다.
“허억!”
챙-
예상치 못한 녹윤영의 무공에 녀석들이 당황했다. 혼천교 소교주인 녹윤영이 평범할 리 없었다.
무심결에 그녀에게 다가서던 한 녀석의 손목이 그대로 날아갔다.
“이게!”
놈들이 버럭 소리치는 순간.
뒤에서 강력한 기운이 밀려왔다. 대응할 틈도 없이 한 녀석의 어깨가 날아가며 피가 사방으로 튀었다.
“감히 누구에게 찝쩍대는 거냐!”
혈혼도객의 거대한 도가 녀석들을 휘저었다. 누가 혼천교 아니랄까. 충성심으로 똘똘 뭉쳐 소교주에게 덤벼드는 녀석들을 정말 단칼에 요절냈다.
혈혼도객은 외모에서부터 상대를 압도했다. 옷과 피부색이 혼연일체가 되어 마치 시커먼 악마가 덤벼드는 모양새다. 당연히 놈들은 너무 놀라 제대로 반응하지 못했다.
서걱-
한 놈의 배를 가르고 다른 놈의 허리를 동강 내면서 모두 다섯이나 되었던 녀석들을 순식간에 해치웠다.
무심결에 이쪽을 본 다른 색야문 녀석들이 경기를 일으켰다.
순간 녀석들은 결심을 굳혔다. 무조건 도망쳐야 한다.
“도망쳐!”
누구랄 것도 없이 일부가 튀어나갔다. 유비연과 맞상대를 뜨던 녀석들도 금방 사태의 심각성을 눈치챘다.
그들은 유비연을 공격하듯 허초를 날려놓고 곧바로 반대 방향으로 몸을 날렸다.
바람보다 빨리 색야문도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하아! 이것들을…… 놓치면 안 되는데!”
분개한 유비연이 펄펄 뛰었으나 이미 도망친 녀석들을 어떻게 할 도리가 없었다.
대충 보니 쓰러진 놈들이 십여 명가량, 도망친 놈들도 그 정도 숫자였다.
혈혼도객의 활약으로 예상외로 손쉽게 마무리되어 주석하는 손을 덜었다.
그들에게 상단을 이끄는 한 남자가 다가왔다.
“대협 덕분에 무사했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포권을 취하는 남자는 자신을 비마표국의 표두인 사해주라고 소개했다. 지금 중요한 물건을 배달하는 중이라나. 한 마디로 표행 중이란 뜻이었다.
사해주는 가장 연장자로 보이는 혈혼도객에게 어려움을 토로했다.
“혹시…… 대협께선 어디로 가십니까?”
“호북입니다만.”
“아! 호북! 저희도 호북으로 갑니다.”
공교롭게도 방향이 같았다.
“하아! 지금 표사 절반이 다쳐서 저희 상황이 매우 좋지 않습니다. 중간에 용병을 고용해서 인원을 충원해야 할 지경인데…… 혹시 함께 가실 의향 없으십니까?”사해주의 예상치 못한 정중한 제안에 모두가 주석하를 바라봤다. 도움을 주면 적절한 보수를 챙기리라 예상했지만 이처럼 직접 표사를 제안할 줄 몰랐다. 여비가 부족하다고 느꼈기에 주석하는 군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작 녹윤영은 내키지 않는 표정이었으나 마지못해 수락했고 유비연은 남을 돕는 일인 데다 자신의 돈을 쓰지 않을 수 있다는 생각에 격렬하게 환영했다.
혈혼도객이 대충 눈치를 본 후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그렇게 하지요. 그러잖아도 심심했는데 잘 됐습니다.”
“대협께서 도와주신다니 환영입니다. 그런데 모두 존성대명이……?”
사해주는 이들의 실력을 눈으로 직접 보았기에 그럴듯한 별호가 있으리라 예상했다.
정작 주석하나 도수는 별호가 없었고 유비연은 주석하 때문에 별호를 밝힐 수 없었다. 혈혼도객과 녹윤영은 별호를 밝히면 표두가 놀라서 도망칠까 봐 적당히 둘러댔다.
“아직 마땅한 별호가 없습니다.”
“아, 그러시군요.”
재차 인사하고 돌아서던 사해주는 뭔가 찝찝한 듯 혈혼도객에게 다시 물었다.
“그런데 한 분을 제외하고는 왜 모두 흑의를 입으셨습니까?”
주석하가 몸을 움츠리며 대답했다.
“하하하! 이거요? 때 안타는 게 최고 아닙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