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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검천하-60화 (60/273)

60화 비마표국 (3)

비마표국과 함께 움직이는 표행은 힘들지 않았다.

무엇보다 먹을 것을 알아서 챙겨주니 더 바랄 것이 없었다. 잠자리도 마찬가지로 해결해주니 한시름 덜었다.

야산의 골짜기를 따라 멀리 뻗은 길을 가다 보니 허름한 주막이 나타났다. 해는 벌써 서산으로 지고 파란 하늘이 빛을 잃고 있었다.

“오늘은 이곳에서 묵습니다.”

과연 지리에 밝은 표국다웠다. 딱 쉬어야 할 때 주막이 등장했으니까. 요기와 취침까지 해결할 최고의 장소였다.

한적한 곳이었기에 그들 외에는 손님이 없었다.

주석하 일행은 표국 사람들과 어울려 저녁을 먹었다. 그들이 표국에 합류한 후로 모든 비용을 표국에서 지불했다.

주막이 넓지 않아 주석하 일행 전체에게 방 하나가 주어졌다. 방이 좁지 않고 넉넉했기에 불만은 없었다.

그들은 한쪽 구석에 녹윤영의 잠자리를 만들어주고 다른 사람들은 적당히 바닥에 누웠다.

유비연은 싫은 티를 내지 않고 알아서 한쪽 구석을 점유했다. 녹윤영의 정반대 편 구석이다. 지금까지 그녀는 적절히 잘 처신했고 그 덕에 주석하는 여전히 그녀의 남장을 눈치채지 못했다.

편안한 방에 누웠으니 잠이 잘 와야 하건만 주석하는 오늘따라 잠이 오지 않았다.

“도수야, 자니?”

“아니, 눈만 감고 있다.”

어둠 속에서 도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우리가 집 떠난 지 얼마나 됐지?”

“글쎄, 기억도 안 나는데……. 집이 그립냐? 크크, 젖 먹고 싶지?”

“네 이야기잖아!”

“하긴 집에 숨겨둔 여자도 없는 자식이.”

핵심을 찌르는 도수의 말에 주석하는 입을 다물었다.

전생에서는 그에게 여자가 붙을 기회가 전혀 없었다. 하루하루 사는 게 고생이었고 위험이었다. 당연히 여자에게 관심 둘 시간조차 없었다.

이번 생에서도 아직 마음이 편하지 않다. 여전히 회귀 후 뒤치다꺼리하느라 정신이 없다고 봐야 했다. 뇌군을 만나고 모든 게 분명해지면 정신적으로 편해지려나.

그래도 전생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안정된 생활이다. 그동안 만난 여자들 가운데 괜찮은 여자는…… 물론 없었다.

외모만 따지면 단연 우설금과 남궁서란이 최고였다. 하지만 우설금은 말을 나누기조차 꺼려질 만큼 차가웠고 솔직히 무서웠다. 그녀의 정체를 알기에 감히 머리에 떠올리는 것조차 두려웠다.

다만 그녀의 정체가 궁금하긴 했다. 그 무시무시한 무공으로 추측한다면 마교 내에서 그녀의 지위는 절대 낮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남궁서란이나 녹윤영은…….

“아아, 생각을 말아야지.”

“뭘?”

“아무것도 아냐.”

“생각나는 여자가 있구나?”

능글거리는 도수의 웃음을 뒤로하고 주석하는 생각을 이었다.

남궁서란은 외모가 전부가 아님을 확실하게 보여줬다. 오만하고 남을 배려할 줄 모르는 그녀의 성정은 그녀의 미모를 오히려 가리게 했다. 어쨌든 그녀는 앞으로 만나지 말았으면 하는 여자였다.

그 둘을 제외하면 만난 여자라고는…….

주석하는 한쪽 구석을 쓱 쳐다봤다. 녹윤영이 새근새근 자고 있었다.

저 여자도 외모는 그럭저럭 나쁘지 않은데 좀 이상한 면이 있다. 첫 만남도 순탄치 않았고. 거기에다 갑자기 따라온 행동도. 어쨌든 마음에 드는 여자는 아니었다.

적어도 여자라면 동생 주소은처럼 사근사근하고 그를 항상 믿고 좋아해 주는 그런 여자여야 했다. 아무래도 장가가기 힘들 조건이다.

“하아, 없구나…….”

긴 한숨에 도수가 킥킥대며 웃었다.

“당연히 있을 리가 있겠냐? 나도 없는데.”

이번 생에도 여자라고는 구경도 못 할 운명인가보다.

“꿈에서나 만나야지.”

주석하는 몸을 뒤척이며 눈을 감았다.

눈을 감자마자 한 여인의 얼굴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흐억!’

그 여인은 우설금이었다. 보기에는 정말 아름답지만…….

주석하는 재빨리 머리를 흔들고 눈앞에서 지웠다. 이건 순전히 오늘 밤 잠을 제대로 자기 위한 몸부림이다. 창으로 은은한 달빛이 어슴푸레 들어왔다.

**

외딴 주막 담벼락에 세 사람이 바짝 붙었다.

그들은 야밤에 눈에 띄지 않도록 어두운 야행복을 입고 주막을 힐끔거리고 있었다.

“저기냐?”

“그렇습니다.”

나직한 물음에 바짝 기가 든 녀석의 대답이었다.

“흐음, 그렇단 말이지? 하여튼 그 여자가 정말 그렇게 예뻤냐?”

“당연합니다. 한 여자는 보기 드문 미녀였습니다. 무공이 높아 감히 건드리기 힘들었고요. 다른 한 여인은 남장했는데 꾸미면 엄청날 겁니다.”

“네놈 눈이 이상한 것 아니냐? 갑자기 어떻게 미녀가 둘씩이나 나타나?”

“제 눈요? 척 보면 속곳 색깔도 꿰뚫습니다. 제가 기루에 여자를 넣은 지 벌써 십 년 아닙니까? 그 둘 정도의 미모면…… 최근 일 년 동안 납품한 여인 가운데 최고입니다.”연신 침을 흘리며 대답하는 이 녀석은 그날 표국이 호송하는 물품을 갈취하려다 실패하고 도망친 색야문 문도였다. 여인을 보는 눈이 남달랐기에 그는 단숨에 유비연이 남장 여인이란 사실을 꿰뚫어 보았다. 동시에 그녀의 미모가 최상급이란 사실까지.

보통 때라면 표행을 털려다 실패하면 바로 포기했으나 이번에는 그 두 여인 때문에 물러날 생각이 없었다. 색야문의 전문 분야가 바로 여인을 납치해서 공급하는 일이다. 눈앞에 표국 물품보다 더 탐나는 대상이 생겼다.

“문주님, 확실합니다.”

녀석이 연신 머리를 조아리며 강하게 주장했다.

색야일로와 이로는 색야문의 문주와 부문주였다. 오십 줄을 넘어선 두 사람은 평생을 색야문에 헌신하며 터전을 일구었다. 두 사람이 없었다면 일대의 기루는 기녀 부족으로 문을 닫았을 만큼 그들은 맹활약을 펼쳤다.

그들의 악행은 유명하나 두 사람의 고강한 무공 때문에 아무도 색야문을 건드리지 못했다. 적어도 정파십존 정도의 인물이 나서지 않는다면 두 사람의 합공을 버틸 수 없다고 알려졌다. 그런데 정파십존이나 되는 거물은 색야문을 노릴 만큼 한가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두 사람의 만행은 날이 갈수록 심해져서 이제는 차마 두고 보기 어려울 정도였다.

“흐흐, 오랜만에 포식해보겠군.”

“당연하지요. 문주님과 부문주님께서 먼저 보양하시고 저에게는 남은 쥐꼬리라도…….”

“에이, 이 녀석! 욕심이 하늘을 찌르는구나. 네놈이 건드리면 상품 가치가 떨어지잖아?”

색야일로는 부하를 나무라면서도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그도 이 녀석의 눈이 얼마나 예리하고 정확한지 안다. 이놈이 미녀라고 장담하면 적어도 평생 한두 번 볼까 말까 하는 미녀가 확실했다. 그렇기에 기대감이 남달랐다.

이것이 바로 야밤에 급습하게 된 이유였다.

“녀석들의 무공이 제법이라고?”

“위험한 인물은 딱 셋입니다. 바로 그 여자 둘하고…… 온몸이 시커먼 놈이 하나 있습니다. 나머지 서생 둘이 있긴 한데 그놈들은 기생오라비처럼 생긴 게…… 아니군요, 한 놈은 엄청 무식하게 생겼는데…… 하여튼 여자를 쫓아다니는 게 분명한 자식들이라 신경 쓰실 필요 없습니다.”녀석이 길게 상황을 설명했다.

색야일로는 보고받았던 여자 일행의 무위를 다시 점검했다. 확실히 평범한 무공 수준은 아니었다. 문하 제자들이 쫓겨 왔으니 충분히 강한 자이긴 했다.

하지만 그들 둘이 합공하면 최강고수와도 겨뤄볼 만하다고 자부하는 터라 당연히 자신감이 하늘을 찔렀다. 이런 곳에서 우연히 만난 자들 쯤은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흐흐, 그년들의 운이 나쁜 거지. 하필이면 우리 색야문을 만나서 말이야.”

문주가 부문주에게 동의를 구했고 부문주도 격렬하게 반응했다.

적어도 지금까지 색야문이 노린 여자들은 그들의 손을 빠져나가지 못했다. 오늘 최고의 여인 둘을 납치하리라 생각하니 절로 몸이 바짝 달아올랐다.

“비싸게 팔아야지. 그러면 반년간 운영비를 충당하겠군.”

김칫국을 마시면서 색야일로는 주막 내부를 기감으로 확인했다. 내부에서 많은 사람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들은 부하가 지목했던 그 다섯 사람이 묵고 있는 방을 손쉽게 찾아낼 수 있었다.

“호흡이 고르니 자는 게 분명해.”

상대가 무방비 상태라면 설사 그들을 능가하는 고수라도 무섭지 않다. 기습에 당할 장사는 없는 법이니까.

눈빛을 교환한 후 색야일로와 이로는 조심스럽게 방으로 접근했다.

“네놈은 여기에서 대기해.”

무공이 떨어지는 놈은 괜히 걸리적거린다. 함께 방에 들어갔다가 인기척이라도 들키면 골치 아프니까 아예 밖에서 망을 보는 게 더 낫다. 물론 이 외딴 주막에서 망을 볼일이 어디 있겠냐만.

문주와 부문주의 눈총을 받은 부하는 곧바로 벽에 붙어 고개를 숙였다. 머릿속으로 낮에 본 여인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녀석도 몸이 후끈 달아올랐다.

**

전문 살수인 도수는 미미한 기척에 잠을 깼다.

이건 직업병이었다. 오랜 기간 단련된 그는 잠을 자면서도 자신을 노리는 기척에 쉽게 반응했다. 다가오는 자가 고수인지 아닌지, 그를 목적으로 오는 건지 아닌지 쉽게 알아차렸다. 설명하기 힘들지만 누군가 목숨을 노리고 접근하면 몸이 저절로 반응해서 준비 태세를 갖췄다.

‘으응?’

조용히 문을 열고 들어서는 기척에 도수의 몸이 바로 반응했다. 그는 슬그머니 옆에 놓아둔 검으로 손을 뻗었다. 자면서도 손에 잡히는 곳에 검을 두는 것은 자객의 오랜 습관이었다. 게다가 그의 검은 검집에서 쉽게 빠져나오도록 항상 손질되어 있었다.

‘둘?’

가늘게 눈을 뜨고 동정을 살피던 도수는 예상 밖으로 무공이 강한 인물임을 눈치챘다. 표국 사람이 아니었고 그렇다고 색야문 문도도 아닌 듯했다.

소리 없는 발걸음과 적절하게 기척을 차단한 무공을 보면 지금 습격하는 자들은 상당한 수준의 고수였다. 적어도 도수 자신보다도 한참 위였다.

이들이 왜 들어왔는지 전혀 짐작할 수 없으나 좋은 목적은 아닐 것이다.

이런 놈들을 처리하는 최고의 방법은 역시 기습이다. 적어도 도수는 자신보다 훨씬 강한 놈을 기습해서 죽인 경험이 많았다. 특히 지금처럼 상대가 경계하지 않는다면 기습의 성공 가능성은 훨씬 커진다.

도수는 숨을 죽이고 방으로 들어온 두 사람의 행동을 살폈다.

방안을 두리번거리던 두 사람이 양쪽으로 갈라졌다. 두 사람은 각자 양쪽 끝의 구석으로 이동했다. 그곳은 유비연과 녹윤영이 잠든 곳이다.

도수는 이들이 왜 그쪽으로 간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다만 저들이 양쪽으로 나누어지는 바람에 목표물 선정을 고민해야 했다. 일단 둘이 아닌, 하나를 먼저 해치우면 되니 편해졌으나 그사이 남은 적이 도망치거나 아군이 다치면 곤란했다.

도수가 망설이는 사이 색야일로와 이로는 각자 유비연과 녹윤영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잠이 든 녹윤영은 확실히 미인이었다. 그리고 유비연도 한눈에 남장 여인이라는 사실을 알아챘다.

유비연을 확인한 문주의 눈이 크게 떠지고 입이 쩍 벌어졌다. 남장 뒤에 숨겨진 여인의 미모가 평범함을 넘어 중원에서 손에 꼽힐 수준이었다.

당연히 그는 평정을 유지할 수 없었다. 자신이 몰래 들어왔다는 사실도 잊고 나지막하게 탄성을 질렀다.

“으와!”

순간 도수는 더 기다리지 않았다. 번개처럼 검을 뽑아 적을 향해 몸을 날렸다.

휙-

검이 순식간에 상대를 가격했고 상대는 손쉽게 그의 검을 피했다. 그가 노린 자는 바로 녹윤영을 건드리려던 부문주였다.

도수가 실패한 원인은 문주가 소리를 냈기 때문이었다. 그 소리에 긴장해서 몸을 돌렸던 부문주가 얼떨결에 도수의 공격을 알아챈 탓이다.

한바탕 검이 허공을 가르고 부문주는 날쌘 보법으로 위기를 벗어났다.

그 순간 문주는 기습이 수포가 되었음을 깨달았다. 하지만 무슨 상관인가. 그들은 월등한 무공을 소유하고 있으니. 그는 재빨리 유비연을 제압하고자 손을 뻗었다.

“누구야?”

그때 방 중앙에서 주석하가 비비적대며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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