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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검천하-61화 (61/273)

61화 비마표국 (4)

주석하는 도수만큼 기감이 발달하지 않았으나 색야일로, 이로가 들어와서 양쪽 구석으로 나뉠 때부터 잠이 깼다. 혼군의 엄청난 공력을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게 된 뒤로 그의 감각은 혼군과 다르지 않았으니 침입을 눈치챈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기습을 노린 도수와 달리 주석하는 녀석들의 의도가 궁금했다. 그들이 무슨 짓을 하려는지 조용히 지켜보고 있었다.

한 녀석이 녹윤영을 노리고 다가가자 그는 이들이 색야문 잔당임을 확신했다. 다만 이들의 무공이 꽤 높아 상단을 습격했던 이들이 아닌 상급자라고 추측했다.

그런데 다른 한 녀석은 구석의 유비연에게 다가갔다. 이 녀석이 왜 그쪽으로 갔는지 도무지 짐작할 수 없었다.

신경을 곤두세우고 녀석들의 움직임에 집중하던 찰나 한 녀석이 탄성을 터트렸다. 그리고 도수가 공격을 시작했다.

“색야문?”

주석하가 방 중앙에서 그들의 정체를 꿰뚫는 순간 색야일로와 이로는 몸이 굳었다. 따지고 보자면 정체를 모를 일도 아니건만 어쨌든 정체를 들켰다는 사실에 그들은 당황했다.

“흐흐, 네놈은 입을 다물었어야 했다! 우리의 정체를 발설하는 순간 네놈의 목숨은…….”

부문주는 검을 찔러오는 도수를 맞아 싸움을 시작했고 문주는 지금껏 노리던 유비연을 포기하고 주석하에게 몸을 돌렸다.

그들은 다른 녀석들까지 깨어나 공격에 가담하기 전에 빨리 해치워야겠다고 생각했다. 사전 정보에 따르면 이 두 청년은 예쁜 여자 뒤를 쫓아다니는 어중이떠중이라 하지 않았던가.

실제로 도수의 공격은 처음에만 예리했을 뿐 그다음부터는 그럭저럭이었다. 큰 위험이 되지 않았다.

이곳에서 가장 고수라고 지목된 시커먼 놈이 깨기 전에 얼른 해치워야 한다. 그렇기에 두 사람의 행동은 빨랐다.

부문주는 도수를 제압하려고 손을 뻗었고 문주는 음흉한 미소를 머금으며 주석하의 얼굴을 후려쳐갔다. 비록 단순한 동작이었으나 이 초식은 색야문의 비전 절기로 대단한 위력을 지닌 무공이었다.

예전이라면 주석하는 이 공격을 쉽게 해치우지 못했을 것이다. 손에 검이 없는 데다 다른 무공도 변변찮아 공격해 들어오는 상대의 손을 막는 방법 이외에는 속수무책이었다.

하지만 혼군에게 무공을 배운 지금은 달랐다. 그의 손에서 혼천십이권이 펼쳐졌다.

절정의 권법으로 가볍게 상대의 공격을 피한 주석하는 몸을 옆으로 틀면서 상대의 면상을 향해 똑같이 주먹을 날렸다.

뻐억!

순간 색야일로는 혼이 달아나는 충격을 받았다. 눈앞이 노래지며 뵈는 게 없었다. 온 얼굴이 부어오르고 시큰거렸다. 만일 얼굴이 옥상에서 떨어진 메주보다 더 망가졌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그는 기절했을 것이다.

도수와 여유롭게 초식을 주고받던 색야이로는 금방 문주의 상황을 눈치챘다. 한방에 문주가 인사불성 직전까지 몰렸다는 사실에 다급해졌다. 일단 위기에 빠진 문주부터 구해야 했다.

상대의 강함을 고려할 겨를도 없이 그는 도수에게 일장을 날리고는 재빨리 주석하를 공격했다. 그 또한 색야문의 비전절기를 썼다. 지금은 무공을 아낄 때가 아니었다.

문주를 계속 공격하려던 주석하는 뒤에서 부문주가 달려들자 여유롭게 몸을 틀었다. 어차피 급할 것은 없다. 문주와 교환했던 일합으로 그는 상대의 실력을 완벽하게 간파했다.

“오늘 몸 좀 풀어볼까?”

혼군의 무공을 익힌 후 처음 맞이하는 실전이다. 당연히 실전 감각을 익히고 무공의 완성도를 점검해봐야 한다.

“이놈!”

벼락같은 호통을 지른 부문주가 재차 공격 자세를 취하기도 전에 주석하의 일 권이 상대의 옆구리를 강타했다.

빡!

“크윽!”

소리로 보아 뼈가 부러지는 충격이 확실했다. 주석하는 혼천십이권을 활용하여 상대의 뒤로 돌았다. 다음 순간 혼천십팔지가 펼쳐졌다. 손가락에서 뿜어진 음험한 기운이 벼락처럼 상대를 엄습했다.

푸푹-

부문주의 등에 다섯 개의 선명한 손가락 자국이 새겨졌다.

“크아악!”

예상치 못한 기습에 부문주는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 설사 준비하고 있었더라도 주석하의 위력적인 지법은 감당할 수 없었다.

상체에 모두 다섯 개의 구멍이 뚫리고 뚫린 구멍에서 피가 울컥 쏟아졌다. 부문주는 눈을 부릅뜨고 자신을 공격한 주석하를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노려보았다.

이렇게 어이없는 죽음을 맞게 될 줄은 전혀 생각지도 못했다. 자신의 무공이 이렇게 허접할 줄 몰랐다. 무림 최강자가 아니면 충분히 대적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오만이었던가.

제대로 비명을 지르지 못하고 부문주는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순식간에 온몸의 기운이 빠져나가고 점차 시야가 캄캄해졌다.

주석하는 자신의 손을 살피며 씨익 웃었다.

“제법 쓸 만하네.”

색야문주는 부문주가 쓰러지자 충격을 받았다. 지금까지 그들이 위명을 떨친 이유는 두 사람의 연합 때문이었다. 그들의 합공 위력은 두 배 이상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한 명이 어이없이 죽었다.

색야문주는 닥친 위기를 눈치챘다. 부문주가 죽었으니 이 자리에서 그가 아무리 버텨봐야 앞날을 기약할 수 없다. 지금은 빨리 도망치는 것이 정답이었다.

결정은 빨랐고 행동은 더 빨랐다. 한 대 얻어맞은 얼굴의 아픔을 느낄 여가도 없이 그는 재빨리 몸을 돌려 전면에 보이는 창으로 몸을 날렸다.

우지직-

창문이 부서지며 요란한 소음이 일었다.

“저 자식!”

도수가 분노를 터트렸고 주석하는 미처 색야문주를 추격할 생각을 하지 못했다.

몸을 일으킨 녹윤영과 유비연은 상황 파악을 못 해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그녀들은 누가 기습했는지 감을 잡지 못했다. 혈혼도객은 감히 소교주를 노렸다며 길길이 날뛰었다.

뒤늦게 주석하는 창문을 통해 밖으로 빠져나왔다. 저 멀리 색야문주와 그 부하로 보이는 녀석이 도망치고 있었다. 경공이나 보법을 익히지 않았기에 주석하는 그들을 추격할 재간이 없어 바로 포기했다.

“나중에 색야문을 손볼 기회가 있겠지.”

어차피 색야문주의 무공은 그를 위협할 수준이 되지 않는다. 오늘 처음 실전에서 사용해본 혼군의 무공에 뿌듯함을 느끼며 주석하는 마무리를 지었다.

**

색야문주는 정신없이 앞을 달려갔다.

뒤에서 헉헉대며 죽어라 따라붙는 부하가 성가셨다.

“이놈아! 빨리 뛰어라!”

“무, 문주님! 헉헉! 뒤에 아무도 안 따라오는데요?”

“어?”

그제야 뜀박질을 늦추고 색야문주는 슬쩍 뒤를 돌아봤다. 역시 추적하는 자는 없었다.

“이 자식아! 진작 말했어야지!”

“허억! 헉! 말할 틈이라도 주셨습니까?”

말대꾸를 해오는 녀석을 쥐어박으려고 색야문주는 급히 멈췄다.

“흐아, 죽겠군.”

“무, 문주님! 부문주님은 어디 가셨습니까?”

“황천갔다.”

“거기가 어디…… 예?”

예상치 못한 결과에 부하는 눈만 깜박였다. 그의 기억에 주막에서 잠자던 녀석들의 무공은 그리 높지 않았다. 색야이로가 어떻게 할 수 없는 그런 자들이 아니었다. 그런데 부문주가 죽었다니.

그제야 심상치 않은 상황을 눈치챈 부하는 색야일로의 얼굴을 뚫어지라 살폈다.

“어? 문주님! 얼굴이 왜 밤탱이가 되셨습니까?”

“이놈이! 나를 놀리는 거냐?”

부하가 괜히 눈을 언급하는 바람에 주석하에게서 맞은 얼굴이 쓰라렸다. 안면이 함몰한 듯 엄청 아팠다.

“으으, 죽겠군.”

그래도 목숨을 건졌으니 운이 좋았다. 조금만 미적거렸더라면 그 역시 목숨을 잃었을 테니까. 그는 자신의 빠른 결단이 뿌듯했다.

색야문주는 주석하의 가공할 무공을 떠올리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어떤 놈인지 모르지만…… 진짜 괴물이었다. 다시는 마주치지 말아야 해.”

“누가요? 그 시커먼 자식요?”

“아니, 그 기둥서방이라던 두 놈.”

“그래도…… 부문주님 복수를 하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복수? 너 같으면 복수 생각이 나겠냐?”

버럭 소리치던 색야문주는 문득 어둠 속에서 봤던 유비연의 아름다운 얼굴이 아른거렸다.

“흐음, 그래. 복수해야지. 단 그놈은 말고 그 여자에게.”

유비연을 떠올리자 저절로 입가에 미소가 돋아났다. 비록 남장하고 있었으나 숱한 여자를 사고팔았던 그는 한눈에 확신했다. 이 여자의 미모는 그가 지금까지 봤던 여자 가운데 최상이라고.

언젠가는 그녀를 납치해서 오늘의 앙갚음을 해줄 것이다. 그녀를 손에 넣는다면 부문주의 목숨 정도야 충분히 바꿀 수 있지.

결심을 굳힌 색야문주는 걸음을 서둘렀다.

“가자!”

마침 화사한 달빛이 내리고 있었다. 달빛은 어둠에 잠긴 골짜기를 비추며 그의 앞길을 밝혔다.

“월궁에 항아가 있다더니…… 화용월태가 따로 없구나.”

하늘에 솟은 달을 보니 방금 보았던 여인의 얼굴이 그 속에 있었다.

몇 걸음을 걸었을까.

“문주님, 저기 보십시오.”

부하가 그를 흔들었다.

달빛에 취해 있던 색야문주는 화들짝 정신을 차리고 앞으로 시선을 향했다.

오솔길이 끝나는 지점에 커다란 바위가 있고 그 아래에서 이슬을 피하고 있는 사람이 보였다. 야밤에 산속에서 노숙 중인 사람이 꺼림칙했으나 그렇다고 피할 색야문주는 아니었다.

자신의 무공이라면 귀신이 아닌 이상 누구도 두렵지 않다. 오히려 그는 방금 얻어터진 수모를 분풀이할 상대를 찾았다며 기분이 뛰었다.

그들이 다가가도 노숙 중인 상대는 전혀 미동조차 없었다. 그들은 모두 세 사람으로 바위에 등을 기대고 잠이 든 듯했다.

“이것들이 감히 내가 누군지도 모르고 나자빠져 자고 있지?”

툴툴대면서 상대를 확인하던 색야문주의 입이 쩍 벌어졌다.

바위에 기댄 세 사람은 기이하게도 검은색, 흰색, 붉은색 옷을 입은 이남일녀였다. 그런데 붉은 옷을 입은 여인을 보는 순간 눈을 다시 감을 수 없었다.

“미, 미인이다!”

방금 주막에서 난생처음 최고의 미녀를 봤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 눈앞에 그에 버금가는 미녀가 자는 듯 눈을 감고 있지 않은가.

“서, 설마…… 처녀 귀신은 아니겠지?”

야밤에 미녀가 웅크리고 있으니 자연스럽게 처녀 귀신이 떠올랐다. 하지만 색에 미친 색야문주가 처녀 귀신이라고 무서울 리 있을까.

“귀신이 무서웠다면 인신매매를 하지도 못했지. 그렇지 않냐?”

색야문주는 옆의 부하를 툭 쳤다. 마찬가지로 여인의 미모에 넋이 나갔던 부하가 간신히 제정신을 차렸다.

“경국지색인데요?”

“으흐흐, 그렇지? 이게 웬 떡이냐!”

색야문주는 홀린 듯 바위 아래로 다가갔다.

일 장 앞으로 다가갔을까. 자고 있던 여인이 번쩍 눈을 떴다.

“허억!”

깜짝 놀라 한걸음 뒤로 물러섰던 색야문주는 간신히 가슴을 진정하고 여인을 살폈다. 눈을 뜬 여인은 형언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다웠다. 본래의 미모에 달빛이 내려앉은 얼굴은 천상의 선녀를 방불케 했다.

“모르긴 몰라도 천상삼화도 이만큼은 아닐 것이다.”

그새 주막에서의 수모를 잊고 오늘 운수가 대통했다고 여긴 색야문주는 재빨리 입을 열었다.

“소저, 야밤에 이슬 피하느라 힘들지? 내가 좋은 잠자리를 제공해줄 테니 따라오게.”

정중하고 다정한 말투로 권했다. 어차피 상대가 수락하든 말든 상관없었다. 여인이 어떻게 대답하든 바로 끌고 가서 날이 뜨기 전에 재미 볼 생각이었으니까.

옆에 있는 두 청년은 여인의 수하로 보이지만 색야일로인 그를 대적할 무공을 지니진 않았을 것이다. 주막에서의 일과 달리 이번에는 변수가 절대 존재하지 않는다.

홍의 미녀, 우설금의 입가에 싸늘한 미소가 감돌았다. 마치 유부에서 울리는 듯한 목소리가 고운 입술에서 새어 나왔다.

“색야문주, 물건은 찾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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