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검천하-62화 (62/273)

62화 비마표국 (5)

색야문주는 순간 싸늘한 기운이 전신을 스쳐 내려가는 기분을 느꼈다.

분명히 눈앞의 미녀는 웃고 있었다. 그런데 그 모습을 보는 순간 그의 가슴은 얼어붙었다. 전신이 떨리고 온몸이 굳었다. 무엇 때문인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물건? 색야문에서 비마표국이 호송하는 물건을 노린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았지? 물론 낮에 표행을 습격한 것은 노리는 물건이 있어서였다. 하지만 지금 야밤에 습격한 이유는 물건이 아니라 여자 때문이었다.

“무, 물건? 모, 모른다.”

마음을 다잡으려 해도 목소리가 마구 떨려 나왔다.

우설금이 천천히 일어섰다.

“네 입은 모른다고 하지만 네 얼굴은 안다고 말하고 있다.”

색야문주의 공포가 더욱 짙어졌다. 그는 자신이 왜 눈앞의 여인을 두려워하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그것은 본능이었다. 마치 고양이를 앞에 둔 쥐라고 할까.

“물건을 찾았다면 내놓아라.”

“저, 정말 모른다.”

“색야문이 오래전부터 표행 물건에 눈독 들이고 있음을 알거늘…….”

“그, 그 물건은 본 적도 없다.”

“그새 말이 바뀌는군.”

우설금은 냉담한 미소를 지으며 색야문주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순간 색야문주는 선택의 기로에 섰다. 자신의 무공을 믿고 한번 공격해볼까. 아니면 뒤도 돌아보지 말고 도망칠까. 그보다 강한 자가 흔치 않은 강호에서 정체불명의 여자가 그를 압도할 가능성은 눈곱만큼도 없다.

이제 여자의 미모는 머리를 떠난 지 오래고 오로지 자신의 생사만 고민이었다.

쉽사리 결정을 내리지 못한 그는 옆의 부하를 찾았다.

부하는 겁에 질려 벌벌 떨고 있었다. 대체 뭐가 무서운지 완전히 넋이 나가 바지마저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못난 놈! 네놈은 돌아가면 잘라버려야겠어. 거시기부터!’

“뒤져보면 되겠지.”

우설금이 잔잔한 미소를 머금고 앞으로 걸어 나왔다.

“으으.”

색야문주는 뒤로 물러서며 양손에 내력을 모았다. 무조건 최고의 절초를 이용해서 상대를 후려쳐야 한다. 그래야 막연한 두려움을 이겨낼 수 있다.

우설금이 한 발 더 가까이 다가오는 순간 색야문주는 일장을 날리려 했다.

푹-

눈앞에 그림자가 번뜩이고 그가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가슴이 후끈거렸다.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색야문주는 자신의 가슴팍을 내려다보았다.

백옥처럼 하얀 소수가 가슴에 박혀 있었다.

스르륵-

가슴에서 뜨거운 붉은 피가 여인의 하얀 옥수를 타고 흘렀다. 그 모습은 실로 기괴하면서도 흰색과 붉은색의 조화로 눈이 시리도록 아름다웠다.

“이, 이게 어떻게 된…….”

반항 한번 해보지 못하고 죽음의 문턱에 선 색야문주의 무릎이 서서히 꺾였다.

우설금은 표정의 변화 없이 담담하게 가슴에 박힌 손을 뺐다.

어느새 옆으로 다가온 백귀가 손수건을 그녀에게 건넸다.

우설금은 별일 아니라는 듯 손을 닦으며 말했다.

“뒤져라.”

백귀가 색야문주의 옷을 뒤졌다. 그들이 노리는 물건과 비슷한 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크으윽……. 잔인한 놈들…….”

색야문주의 신음이 점점 잦아들다가 마침내 고개가 꺾였다. 허무하게도 눈 깜짝할 사이 죽은 것이다. 여인을 매매하며 온갖 나쁜 짓을 저질렀던 악마의 비참한 최후였다.

백귀가 고개를 저었다.

“아직 빼앗지 못했나 봅니다.”

“그래, 예상대로였어.”

우설금의 표정은 무뚝뚝했다.

“물건은…… 아직 비마표국의 손에 있나 봅니다. 바로 치러 갈까요?”

“지금 주 공자가 붙었지?”

“주석하와 그 일행입니다. 흑접 녹윤영과 설매검화 유비연이 옆에 붙어 있습니다.”

두 사람의 별호가 나오는 순간 우설금의 표정이 살짝 일그러졌다.

“일단 두고 보도록 하지. 우리는 계속 표행을 따라가며 기회를 노린다. 그 물건이 어디에 있는지 확인할 때까지.”

흑귀와 백귀는 불만을 토로할 수 없었다. 대신에 그들은 여전히 옆에서 벌벌 떨고 있는 색야문 부하를 눈짓으로 가리켰다.

“어떻게 할까요?”

“없애야지.”

조금도 주저함 없는 명령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검광이 허공을 갈랐다.

“으악!”

단말마의 비명이 처절하게 적막을 깨트렸다.

**

다음날 출발 소리에 맞춰 주석하는 표행의 꽁무니에 붙었다.

밤에 제대로 자지 못해 무척 피곤했다. 다행히 색야문에서는 다시 쳐들어오지 않았고 그들은 무사히 주막을 떠났다.

“밤에 무슨 일이었습니까?”

표두 사해주가 그에게 물어왔다. 밤에 그 난리가 벌어졌음에도 정작 표국 쪽 사람들은 잘 잔 듯했다.

“별일 아니었습니다. 색야문에서 원한 때문인지 둘이나 습격해왔더군요.”

“색야문에서요? 또?”

“끈질긴 놈들이네요. 그들이 접근한 이유가 뭔지 아세요?”

주석하는 은근히 꼬투리를 잡으며 사해주의 눈치를 살폈다. 정작 사해주는 생각이 없는 듯 허허롭게 웃었다.

“색야문이 제정신이 아니군요. 감히 우리 주 소협께서 지키고 계신 데 말입니다. 저희는 주 소협 일행분께 대단히 감사하고 있습니다. 저희 표행 호위를 맡아 주시지 않았더라면 벌써 물건을 다 털리고 호송에 실패했을 겁니다.”사해주는 연신 표사를 수락해준 그에게 감사했다. 심지어 표사 일봉을 두 배로 올려주겠다고 했다.

그럴수록 주석하는 비마표국이 수상쩍었다. 잔뜩 실린 짐을 이동하는 마차와 수레는 겉보기에 전형적인 표국 행렬이다. 그런데도 보면 볼수록 어딘지 모르게 위화감이 들었다.

“호송 중인 물품이 무척 값나가나 봅니다?”

은근슬쩍 떠보자 사해주가 웃으며 대답했다.

“아닙니다. 그냥 평범한 것들이지요.”

돌아오는 대답은 예상대로였다.

“그런데 색야문이 왜 노렸을까요?”

색야문은 여인을 밀매하는 놈들이다. 그런데 이 표행에는 여자라고는 전혀 없으니 색야문이 노릴 이유가 없다. 지난밤에 색야문이 노린 사람은 녹윤영이라고 볼 수 있지만 적어도 처음에는 여자가 없지 않았던가. 게다가 밤에 기습했을 때 녹윤영의 반대편에서 자던 화산파 유연을 왜 노렸을까? 모든 게 의문투성이였다.

“글쎄요, 우리 비마표국이 여자를 호송하고 있다고 착각했나…….”

사해주가 말도 안 되는 대답을 내놓고는 서둘러 앞으로 갔다.

주석하는 맨 끝에서 따라가면서 생각에 잠겼다.

뭔가 숨기는 게 있는 것처럼 보였다. 물론 표국에서도 호송하는 물건이 무엇인지 정확히 모를 수 있다. 다만 지금은 그런 이유가 아니라 그에게 알려주기 싫다는 행동으로 보였다.

마음 같아서는 그냥 때려치우고 싶었으나…….

‘그놈의 돈이 뭔지…….’

밤에 한 놈이 도망쳤으니 언제 다시 들이닥칠지 모를 일이다. 절대 조용히 있을 놈들이 아니었다. 적어도 색야문의 영역을 완전히 벗어나기 전까지는 주의해야 한다.

열심히 표행을 따라 걷고 있자니 어째 뒤통수가 따끔거렸다.

마치 누군가가 그를 매서운 눈초리로 쳐다보는 느낌이다. 이제 혼군의 내력을 완벽하게 운용하게 되면서 그의 기감은 놀랍도록 발전했다. 그렇기에 지금 이 느낌이 단순한 환상이 아님을 안다.

“누구지?”

이 먼 타향에서 그를 알 만한 사람은 없다. 적어도 그는 덕양을 떠나본 기억이 없으니까.

걸음을 옮기던 그는 슬그머니 뒤를 돌아봤다.

“헉!”

순간 온몸이 굳어 주석하는 쓰러질 뻔했다.

‘저 여자가 여기에는 어떻게?’

놀랍게도 우설금과 흑귀, 백귀가 말을 타고 그들과 일정 거리를 유지한 채 따라오고 있었다. 덕양, 아니 사천을 벗어나 이곳에서도 그녀를 만나다니 정말 놀라웠다.

그녀의 의도를 알 수 없으나 이렇게 보란 듯 일정한 간격을 두고 따라오는 것은 분명히 고의적이다. 그녀가 그에게 관심 있을 턱이 없으니 다른 목적이 분명하다.

그는 주위를 휙휙 둘러봤다. 도수도 아닐 거고, 그렇다고 다른 사람도 아닐 거고……. 설마 표국이 호송하는 물건 때문인가?

‘저 여자는 마교였지…….’

다른 사람이라면 신경을 접을 텐데 우설금이 마교인이라는 사실이 거슬렸다. 지난번에 그녀는 가적성의 뒤를 추적했었다. 즉 그녀의 움직임에는 반드시 마교와 관련된 목적이 있다.

주석하는 비마표국에서 현재 호송하는 물건에 답이 있다고 짐작했다. 아무리 둘러봐도 평범한 수레이고 물품이다. 마차 내부까지 살펴보진 않았으나 저들의 행동으로 보아 다르지 않다.

“이거, 괜한 일에 엮인 것 같은데…….”

고민을 거듭하며 주석하는 가슴을 쭉 폈다.

과거라면 우설금의 무공과 분위기에 가슴을 졸였겠지만 지금은 그나마 다르지 않은가. 그는 흑도팔군 수준에 육박하는 무공을 소유하고 있으니 그녀를 겁내지 않아도 된다. 물론 그녀의 정확한 무공 수위는 짐작조차 안 되지만.

‘좋아, 사나이가 아녀자에게 쫄 수는 없지.’

용기를 내어 슬쩍 뒤를 돌아본 후 우설금을 향해 씨익 웃어줬다.

뒤따라오던 우설금의 걸음이 딱 멈췄다.

왠지 기분이 좋아졌다.

‘저 여자도 나를 겁내는구나!’

**

색야문 사건 이후 표행은 예상외로 순탄하여 그들은 금방 호북으로 들어갔다. 이대로라면 며칠 지나지 않아 표행이 끝날 예정이다.

물론 주석하는 비마표국이 향하는 장소를 정확히 모른다. 그 지점까지 안전하게 호위하면 그의 역할은 마무리된다. 일당을 받는 데다 가는 동안 숙식마저 해결되니 남는 장사가 확실했다.

나지막한 야산을 가로지르는 고개를 넘고 산중턱의 작은 주막에 도착했다.

분위기를 보니 오늘은 여기에서 묵을 모양이었다. 아직 해가 저물지 않았으니 조금 이른 듯하지만, 눈앞에 가까이 다가온 고산준령을 보니 오늘은 이쯤에서 마무리하고 내일 도전하는 것이 나아 보였다.

주변을 살피며 경치를 감상하던 주석하는 밥을 먹으라는 외침에 주막 문을 열었다. 일행은 벌써 주막을 전세 낸 듯 곳곳에 무리 지어 떠들고 있었다. 확실히 표행의 끝이 보이니 사람들의 기운이 살아났다.

평소처럼 그는 일행과 함께 따로 앉았다. 아무래도 표국 사람들과는 서로 처지가 다르기에 부담 없이 어울리기 어려웠다. 주막의 한쪽 구석에서 도수를 비롯하여 유비연, 녹윤영, 혈혼도객과 같이 젓가락을 들었다.

밥을 먹고 있자니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순간 주석하는 한숨을 내쉬었다. 최근 들어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라지만 여전히 적응은 쉽지 않다. 바로 우설금의 등장이다.

“저 여자 알아요?”

요즘에는 녹윤영마저 그의 이상함을 눈치채고 신경을 곤두세웠다.

주석하는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얼굴 몇 번 본 것으로 아는 사람이라 할 수 있나?

“정말 몰라요?”

계속된 다그침에 도수가 먹던 음식을 잘못 삼켜 켁켁 기침했다.

“이상하네. 저 여자만 들어오면 눈빛이 확 달라지는데? 예쁜 건 알아서는…….”

녹윤영이 연신 주석하를 관찰하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떻게 달라지는 걸까. 사랑스러운 연인을 본 눈빛은 아닐 테고, 설마 두려움에 떠는 모습이? 아니라고 격렬하게 고개를 저으며 눈치를 보니 녹윤영 옆에 있는 유비연마저 그를 이상한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절대 미모 때문이 아니라고!’

내심 크게 변명한 후 주석하는 얼른 태연함을 가장하며 젓가락을 더 빠르게 놀렸다.

녹윤영이 힐끔 유비연에게 눈치 주며 중얼거렸다.

“저 여자는…… 무척 아름다운데요? 천상삼화도 저만큼은 아닐 텐데……. 주 공자도 미모에 혹해서 그러는 건 아니죠?”

유비연의 정체를 아는 녹윤영의 교묘한 도발이었다. 순간 유비연의 안색이 확 구겨졌으나 그녀는 아무 말도 못 한 채 입을 다물었다.

“너보단 나은데?”

“야!”

무심코 내뱉은 도수의 한 마디에 탁자가 뒤집힐 뻔했다.

말아먹을 듯 도수를 노려보던 녹윤영이 화제를 돌렸다.

“표국에서 맡은 물건이 뭔지 알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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