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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검천하-63화 (63/273)

63화 신창패존 (1)

“수레에 실려 있잖아? 각종 귀한 책이랑 장신구, 자기, 족자…….”

“더 중요한 게 있나 봐요.”

“우리가 신경 쓸 일은 아니잖아.”

괜히 우설금이 신경 쓰여 주석하는 적당히 말을 잘랐다. 여기까지 우설금이 따라오고 있는 것으로 봐선 분명히 노리는 물건이 있다고 봐야 했다.

정작 녹윤영은 눈치 없이 말을 이었다.

“그 물건을 표두가 소지하고 있데요.”

깜짝 놀라 눈을 드는 순간 우설금과 눈이 딱 마주쳤다.

간신히 태연을 가장한 주석하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다시 눈길을 돌렸다.

“우리가 신경 쓸 일이거든요? 우리가 호위를 맡았잖아요. 가장 중요한 게 무엇인지 알아야 적이 나타났을 때 제대로 한몫하죠.”

틀린 말은 아니건만 표두가 그런 내용을 언급한 적이 없었다.

녹윤영의 말이 옳다면 지금 수레와 마차에 실린 물건은 눈속임용이라 봐야 했다.

전생을 떠올려봐도 딱히 생각나는 사건은 없었다. 다만 이때쯤부터 정파와 사파 간의 대립이 격화되고 훗날 정사 대전으로 발전했다. 그때는 하루하루가 너무 고달파서 정세에 신경 쓰지 못했었다.

“하여튼 뭔가 이상한 표행이에요.”

녹윤영이 말을 마친 후 유비연을 슬쩍 봤다. 본능적으로 그녀는 유비연이 이 여행에 끼어든 이유가 의심스러웠다. 게다가 아니라고 우기지만 옆 탁자의 이상한 여자도 주석하와 안면이 있어 보였다. 거기에 색야문 습격까지 따져보면 우연이 아니었다.

“그러니까 위험한 순간이 되면 고민해야 해요.”

무슨 말인지 주석하도 알아들었다. 받은 돈이 있으니 표행을 돕지 않을 수 없지만 딱 수고비만큼만 일해주면 된다. 덕양에서 가적성 호위에 나섰던 슬픈 기억이 떠올랐다.

착잡한 심정을 달래고 있으려니 녹윤영이 자신의 앞에 놓인 생선 덩어리 하나를 주석하의 밥 위에 올려줬다.

“이거 먹고 힘내요.”

뜻하지 않은 호의에 주석하가 미소를 지을 때 유비연이 짜증 난 눈으로 녹윤영을 쏘아봤다. 정작 녹윤영은 놀리듯 주석하와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옆 탁자의 우설금은 표정 변화 없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젓가락을 탁 내려놨다.

당연히 주석하는 그녀의 반응을 조금도 눈치채지 못했다.

대충 식사자리가 마무리되었을까. 문이 벌컥 열리고 한 남자가 안으로 들어왔다.

건장한 체구에 키가 큰 중년의 남성이었다. 네모난 턱에 턱수염을 기른 강인한 인상의 소유자로 손에 든 긴 장창이 무림인임을 알리고 있었다.

눈을 사납게 부라리며 주막 안을 훑어본 남자가 한마디 말도 없이 걸음을 옮겼다.

저벅-

저벅-

사내가 한 걸음씩 내디딜 때마다 무형의 기운이 공간을 장악했다. 엄청난 존재감에 억눌려서 사람들은 꼼짝할 수 없었다.

사내에게 감히 범접하기 힘든 강렬한 기운이 뿜어졌다. 폐부를 찌르는 강렬한 눈빛에는 천하를 내려다보는 거만함이 담겼다.

‘고수다!’

누구냐? 너는! 주석하는 사내에게서 풍기는 기운에 감탄했다. 공간을 압도하는 위압감은 이 사내의 무공이 절대 그보다 약하지 않다고 경고하고 있었다. 갑자기 어마어마한 초강 고수가 등장한 이 사건이 과연 우연일까.

동료들의 눈치를 보니 모두가 비슷한 표정이다. 도수는 입을 벌린 채 신음도 내뱉지 못했고 혈혼도객은 슬그머니 몸을 움츠렸다. 다만 유일하게 유비연의 눈빛만이 강렬하게 흔들렸다. 아는 인물이란 뜻이다.

남자는 성큼성큼 걸어 들어와 주막 내부를 쓱 훑어본 후 큰 소리로 외쳤다.

“으하하하! 책임자가 누구냐?”

흉흉한 기세에 아무도 대답하지 못했다. 모두가 식사를 멈추고 사내를 주목했다.

어쩔 수 없이 표두 사해주가 앞으로 나섰다.

“비마표국의 표두입니다만, 누구십니까?”

“물건을 내놓아라!”

“뭐?”

다짜고짜 윽박지르는 사내에게 사색이 된 사해주는 뒤로 물러섰다. 가까스로 용기를 낸 그가 정중하게 물었다.

“당신은 누구요? 남의 표행에 나타나 물건을 내놓으라니? 날강도도 이런 날강도는 없소.”

“네놈은 내가 날강도처럼 보이느냐?”

사내의 눈에서 불꽃이 일었다.

이 사내는 등장할 때부터 범상치 않은 인물이라고 이마에 써놓고 있었다. 한바탕 파란이 일 조짐이다.

“누구지?”

주석하의 질문에 유비연이 조용히 고개를 저으며 속삭였다.

“끼어들면 안 돼요.”

화가 난 사해주가 버럭 소리쳤다.

“당신은 대체 누구요?”

“흐흐, 나? 강호에선 신창패존이라 부르지.”

“허억! 패…… 패존!”

신창패존(神槍覇尊). 정파십존의 일인으로 현 강호에서 손꼽히는 최강자였다. 자하검존이나 혼군과 동급인 인물이다. 그는 금의위에서 창을 연마했고 강호에 나와서도 홀로 활동했다.

일설에 따르면 그의 성격은 거침이 없고 다혈질이고 패도적이었다. 체면을 따지는 정파와 달리 사파 인물을 만나면 반드시 응징하고야 마는 잔혹한 면도 있었다. 그 때문에 사파에서는 신창패존이란 이름만 들어도 벌벌 떨었다.

당연히 신창패존의 위명을 듣지 못한 사람은 이곳에 없었다. 감히 눈조차 마주칠 수 없는 어마어마한 인물이었다.

사해주는 급히 허리를 숙이며 정중하게 인사했다.

“패존이셨군요. 처음 뵙습니다. 저희는 비마표국 사람입니다. 지금 의뢰받은 물건을 호송 중입니다. 무슨 일인지 모르겠으나 오해가 있으신 게…….”

“오해라니? 쓸데없는 말 말고 물건을 내놓아라.”

주석하는 과연 정파십존다운 존재감이라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의문이 생겼다. 정파인이 강압적으로 물건을 내놓으라니. 그것도 만인이 보는 공개된 장소에서. 이것은 사파인도 함부로 하지 않을 행동이었다.

“어떤 물건 말씀이신지요?”

정파십존의 위명에 감히 대들 수 없는 사해주가 겁에 질려 물었다.

“내가 꼭 말하지 않아도 알 텐데?”

“저희는 중요 물건을 마차에 실어 호송하느라…….”

“그런 것 말고, 네놈이 가진 물건 말이다.”

신창패존은 이미 모든 사실을 알고 이곳에 온 것이 확실했다.

안색이 하얗게 질린 채 몇 번이고 침을 삼키며 마음을 진정시킨 사해주가 간신히 다시 입을 열었다.

“패, 패존이시여! 저, 저희 표국은 고객과의 신뢰를 최우선으로 생각합니다. 그, 그래서…… 고객의 물건을 함부로…….”

“갈! 네놈이 감히 나에게 훈계질이냐? 네놈이 가진 그 물건이 향후 무림을 어지럽힌다. 사전에 방지하고자 왕림했거늘 무슨 문제냐? 내놔라!”

“그, 그게 무슨…….”

사해주는 도무지 모르겠다며 손을 저었다. 실제로 그는 자신이 위탁받은 물건이 무엇인지 몰랐다. 다만 이 의뢰에 상당히 큰 금액이 붙었고 남의 이목을 속이기 위해 다른 물품과 함께 호송하면서 위장하라는 지시만 받았을 뿐이다.

오는 도중 색야문의 습격을 받으면서 이상하다고 판단했고 그래서 호위무사를 추가했다. 그런데 무려 정파십존의 일인인 신창패존이 등장해서 물건을 내놓으라니. 눈앞이 노래졌다.

신창패존의 눈에서 섬전처럼 날카로운 빛이 뿜어졌다.

“생각해보아라. 네놈이 지금 물건을 어디로 보내고 있는지. 그곳이 어디지?”

목적지를 함부로 내뱉을 수 없으나 사해주는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마, 만진장…….”

“그래, 만진장! 만진장은 뇌군의 영역이다. 즉 그 물건이 뇌군에게 전해지면…… 무림이 어찌 될지 아느냐? 나는 사파 놈에게 그 물건이 들어가도록 두고 볼 수 없다.”

“허억!”

사해주는 상황을 확실하게 깨달았다. 색야문이 노린 것도 바로 의뢰받은 그 물건이었다. 지금 눈앞에 나타난 신창패존 역시 그 물건을 노리고 있다. 명분은 사파에게 넘어가지 않도록 하겠다는 것이지만 그 물건을 욕심내고 있음이 분명했다.

주석하 또한 놀랐다. 공교롭게도 이 표행은 그와 목적지가 같았다. 마치 그와 인연이 있는 듯한 그 물건의 정체가 더욱 궁금해졌다.

“어디에 있느냐? 내놓으면 무사할 것이고 내놓지 않으면…… 여기에 있는 자는 누구도 빠져나갈 수 없다.”

신창패존이 단호하게 선언했다.

신창패존은 죽음의 사자나 마찬가지였다. 그는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일에는 물불을 가리지 않는 무모함이 있었다. 사람의 목숨을 아끼는 다른 정파인과 달랐다. 공포가 급작스럽게 주막에 내려앉았다.

“으으.”

사해주의 안색이 흙빛으로 변했다. 표국의 신용을 생각하면 내놓을 수 없고 표국 인부의 목숨을 생각하면 무조건 내놓아야 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허리춤에 차고 있는 향낭을 슬쩍 만졌다. 그 향낭 속에 바로 그 물건이 숨겨져 있었다.

그 행동을 눈여겨본 신창패존이 장창으로 탁자를 찍었다.

쾅!

커다란 탁자가 쫙 쪼개졌다.

“으으.”

겁에 질린 사해주는 신음조차 삼키지 못하고 벌벌 떨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여기 있는 사람들로선, 아니 표국 전체 무사가 덤빈다 해도 패존의 적수가 아니다.

입가에 비릿한 미소를 풍기던 신창패존이 다시 장창을 휘둘렀다.

푹!

가장 가까운 곳에서 벌벌 떨고 있던 표사의 가슴을 창이 꿰뚫었다.

“으아악!”

그 모습을 본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며 한쪽 구석으로 몰렸다. 일부는 주막 밖으로 나가려 했다.

신창패존은 사리가 통하는 평범한 정파인이 아니었다.

뻐벅-

밖으로 뛰쳐나가던 세 사람이 창에 맞아 벽으로 날아갔다. 벽에 부딪힌 세 사람은 전신이 피투성이가 된 채 의식을 잃었다.

“흐흐, 보았느냐!”

신창패존의 모습은 악귀와 다름없었다.

주석하 또한 동료들과 함께 슬그머니 일어나 뒤로 물러섰다. 신창패존의 압도적인 위세에 감히 나설 생각이 들지 않았다. 아무리 그가 호위를 의뢰받았다 할지라도 정파십존 같은 고수를 상대하라는 의뢰는 아니었다. 목숨을 내놓아야 할 이런 의뢰라면 천만금을 준다고 해도 거절했을 것이다.

그러니 물러나는 것이 당연했고 그의 일행도 같은 생각이었다.

‘그래도 너무 하잖아? 사파인도 저런 식으로 물건을 빼앗지는 않을 텐데.’

그 물건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르는 그는 신창패존의 행동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무림을 위한다는 명분 아래 벌이는 날강도짓 아닌가.

“몇이 죽을 때까지 버티는지 두고 보겠다.”

음산한 미소를 머금은 채 신창패존이 장창을 다시 휘둘렀다. 한 번의 움직임에 다시 표사 둘의 목이 떨어져 나갔다. 졸지에 주막 내부는 피범벅이 됐다. 물론 신창패존은 몇이 죽든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사해주는 여전히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그는 생각지도 못한 엄청난 참변에 머리가 완전히 정지했다.

쿵!

신창패존이 다시 한 발짝 앞으로 나섰다.

그때 문제가 발생했다. 신창패존의 시선이 녹윤영을 향했다.

다른 사람들과 달리 주석하 일행은 흑의를 입은 데다 여인은 녹윤영 혼자였다. 그러니 유달리 눈에 띌 수밖에 없었다.

신창패존의 눈이 녹윤영에게 고정되자 그녀는 몸을 움츠리며 시선을 피했다. 감히 누가 패존의 시선을 마주할 수 있을까.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던 신창패존이 녹윤영에게 창을 겨눴다.

“넌 누구냐?”

녹윤영은 입이 얼어붙어 대답할 수 없었다. 신창패존의 기운이 그녀를 압박하고 있었다.

“흐흐, 당연히 말을 못 하겠지. 이제 기억났다. 넌 혼군의 손녀로구나. 흑접이라 했던가?”

녹윤영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고 주석하는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이 자리에서 신창패존에 대항하기엔 부담이 너무 컸다.

“보아라! 흑도 무리가 표행을 돕고 있구나! 뇌군이 그 물건을 얻으려고 혼군의 도움을 요청했다는 증거다! 표두! 넌 할 말이 있느냐?”

“흐, 흑접?”

장내에 경악성이 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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