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검천하-64화 (64/273)

64화 신창패존 (2)

사해주는 녹윤영이 혼군과 관련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비록 그들이 흑의를 입었어도 평범한 낭인이라 여겼다. 그런데 갑자기 녹윤영의 정체가 탄로나자 이 표행이 사파의 비호를 받고 있다고 증명한 꼴이 되어 버렸다.

사색이 된 사해주는 급히 손을 내저었다.

“저, 절대 아닙니다. 저들은 저희 표국과 전혀 관계없습니다.”

“관계가 없다니? 저들도 일행임을 내가 보았거늘.”

“관련 없는 사람입니다요!”사해주가 절박하게 무릎을 꿇었다.

주석하는 쓴맛을 삼켰다.

그래도 지금까지 꽤 오랜 시간을 함께한 사이다. 심지어 색야문의 위협 때 표국에 큰 도움을 주기까지 했다. 그런데 지금 패존이 위협하자 바로 안면을 바꿨다.

물론 주석하도 표두의 절박한 심정을 안다. 어쩌면 지금 이 순간 가장 현명한 선택일 수 있다. 하지만 신뢰를 생명처럼 여긴다는 표국이 바로 안면을 몰수하다니. 그들 일행이 어떻게 되든 눈을 감겠다는 뜻 아닌가.

그동안 비마표국에 가졌던 일말의 정이 모두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과연 녹윤영은 혼군의 딸다웠다.

그녀는 금방 제정신을 차리고 앞으로 나서 당당하게 패존을 향해 소리쳤다.

“내 할아버지를 아시는군요? 그렇다면 협박을 멈추시죠? 설마 정파십존이 이름 없는 후배를 협박했다는 비난을 받고 싶지는 않겠죠?”

“흐흐, 뭔 소리냐? 난 사파를 상대로 그런 고민을 한 적이 없다. 사파 앞에서는 물불을 가리지 않는다. 내가 혼군 따위를 무서워할 줄 아느냐? 오늘 너를 제물로 삼아 정파십존이 흑도팔군의 우위에 있음을 보여주겠다.”혼군의 위명이 전혀 먹히지 않고 도발마저 수포가 되자 녹윤영은 좌절했다. 오히려 흑접이 아니라고 우기는 게 나을 뻔했다.

신창패존이 가소로운 표정을 지으며 녹윤영을 찌르려 하는 순간이었다.

이번에는 유비연이 나섰다.

“패존 어르신!”앞을 막아선 남장 여인에 신창패존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넌 또 뭐냐?”

“죄 없는 사람을 핍박하지 마세요.”

“죄가 있고 없고는 내가 정한다! 죽고 싶으냐?”

“어르신께서 죽음을 내린다면 제가 어찌 피할 수 있겠습니까?”

유비연의 굳은 표정으로 신창패존을 노려보았다. 그 기세가 의외로 대단해서 신창패존이 피식 웃었다.

“너도 흑천교 사람인가?”

“전 자하검존의 제자입니다.”

유비연의 대답에 주막 내부는 다시 격동에 휩싸였다. 무려 정파십존의 일인인 자하검존의 제자라니!

지금 이 작은 주막에 신창패존이 등장한 데다 혼군의 손녀와 자하검존의 제자까지 나타났으니 일대 사건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신창패존은 비웃음을 날렸다.

“누구 제자인지 내 알 바 아니다. 나의 앞길을 막는다면 설사 혼군이든 자하검존이든 응징할 테니까. 오늘 둘 다 죽여주마!”

과연 들리던 소문대로였다. 그는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면 밀어붙이는 성격이다. 누구의 조언도 듣지 않는 오만함도 지녔다. 그런 성정이 그를 정파십존에 올려놓았는지도 모른다.

신창패존의 장창이 유비연의 목을 겨눴다. 유비연은 부들부들 떨리는 몸을 바로 세우며 상대를 노려보았다. 그녀의 뒤에서 동병상련의 녹윤영이 떨리는 몸을 붙잡아주었다.

유비연 본인도 왜 자신이 녹윤영을 위해 목숨을 걸게 되었는지 알 수 없었다.

절망 속에 주석하는 표두에게 눈짓을 보냈다. 그 물건이 무엇인지 모르지만 넘겨주라는 의사였다. 정작 사해주는 그의 시선을 무시했다. 마치 이제는 신창패존의 관심이 자신에게서 멀어져서 한숨 돌렸다는 표정이었다.

신창패존이 장창을 가볍게 휘두르려는 순간 검은빛이 쏘아졌다.

챙!

묵직한 도가 장창을 쳐냈고 짜증이 난 신창패존의 시선이 기습한 인물을 향했다.

틈을 노려 기습한 자는 혈혼도객이었다. 그는 녹윤영의 위험을 두고 볼 수 없어 끼어들었다.

“흐흐, 네놈은…… 혼천교도구나. 오늘 제대로 다 죽일 수 있겠군.”

느긋하게 한 발 앞으로 다가선 신창패존이 이번에는 혈혼도객을 향해 창을 휘둘렀다.

챙-

도와 창이 부딪히는 순간 혈혼도객은 뒤로 와장창 밀리면서 중심을 잃었다. 신창패존은 그가 감당할 수 있는 인물이 아니었다.

불과 일합 만에 큰 충격을 받은 혈혼도객은 몇 차례 바닥을 뒹군 후에야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그 순간 신창패존의 창이 그의 목에 닿았다. 과연 패존의 창은 빠르고 묵직했다.

이대로라면 혈혼도객을 비롯하여 모두가 목숨을 잃을 것이다.

주석하는 주먹을 꾹 쥐었다.

지금까지 그가 나서지 못한 이유는 신창패존이 두려워서가 아니었다. 혼군의 진전을 이어받았기에 그도 신창패존과 겨루어보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는 이유는 바로 우설금의 존재였다. 지금 모두의 시선과 관심이 신창패존에게 쏠려 있건만 유독 우설금만은 조금의 흐트러짐이 없이 평정을 유지하고 있었다. 오히려 그녀는 느긋하게 식사를 마치고 뜨거운 차를 후후 불어 마시고 있었다.

우설금 앞에서 재주 부리면 골치 아프리라는 직감에 주석하는 그녀가 먼저 움직여주기를 기대했다. 우설금이 그 물건을 노리고 비마표국을 따라온 것이라면 곧 나설 수밖에 없으리란 계산이었다.

그런데 녹윤영이 관심을 끌게 되면서 이런 계획이 모두 깨져버렸다. 어쨌든 혈혼도객이나 녹윤영, 유비연은 주석하의 일행이었다.

이제는 주석하가 나설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됐다.

주석하는 혼천신공을 끌어 올려 손에 기운을 모았다. 그는 손에 검은 기운이 어른거리는 순간 가볍게 일지를 날렸다.

땅!

혼천십팔지가 장창의 날에 부딪히며 장창의 방향이 확 꺾였다.

“응?”

놀란 표정으로 신창패존의 시선이 주석하를 향했다. 화가 난 표정으로 노려보는 주석하가 의외로 어리다는 사실을 확인한 신창패존이 가소로운 비웃음을 머금었다.

“혼천십팔지? 너도 혼천교 사람인가?”

“혼천교? 아니다.”

“이 자식이! 거짓말까지? 방금 혼천십팔지를 펼치는 것을 봤거늘.”

“난 흑검문인데?”

빈정거리면서 주석하는 내력을 끌어올렸다.

우우웅-

그의 몸이 검은 기운으로 서서히 덮였다.

빈정대던 신창패존의 안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오래전에 신창패존은 혼군과 만난 적이 있었다. 당시 두 사람은 일 초도 교환하지 않았으나 서로 대치하면서 상대의 무위를 가늠했었다.

그는 지금 눈앞의 젊은이가 당시의 혼군에 맞먹는 기운을 뿜어내고 있음을 직감했다. 그 기운 또한 혼군과 동일했다. 그렇다면 혼군의 제자가 확실한데 혼천교가 아니라니?

“알량한 재주를 가진 놈이었군.”

어쨌든 방해하는 자는 모두 죽일 뿐이다. 신창패존은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혼군이든 자하검존이든 그가 두려워할 이유는 없으니까.

상대가 그를 인정한 듯하자 주석하가 피식 웃으며 손가락을 까닥였다.

“나와라! 넓은 곳에서 승부를 내보자.”

그런 도발을 마다할 신창패존이 아니었다.

주막이 떠나갈 듯 웃음을 터트린 그는 주석하보다 먼저 주막 밖으로 나갔다.

**

해가 지고 밤이 몰려온 산속은 을씨년스러웠다.

주막 앞의 넓은 공터에서 선선한 바람을 맞으면서 주석하는 신창패존과 대치했다.

상대의 가공할 내력이 느껴졌다. 상대가 뿜어내는 엄청난 기운이 그를 산악처럼 억누르고 있었다.

주석하는 들끓는 흥분을 간신히 억눌렀다. 목숨의 위험보다 그동안 익힌 무공을 제대로 써먹을 기회가 왔다는 생각에 온몸이 전율하고 있었다.

만일 혼군이라면 신창패존을 어떻게 상대할까. 자신은 혼군을 능가할 수 있을까. 그런 기분이 그의 마음을 즐겁게 했다.

그렇다. 강자의 오만이자 무림인의 승부욕이었다.

전생 오 년 동안 말단 하수로 전전하던 때는 감히 정파십존을 올려볼 자격조차 없었다. 그때는 비굴하게 남의 눈치를 봐야 했고 그렇게 해서 간신히 목숨을 건졌다. 물론 그 최후는 비참한 죽음이었지만.

이젠 강자 앞에서도 목을 뻣뻣하게 세우고 여유를 품게 됐다. 이 모두가 그 자신이 강해졌기 때문이다. 당연히 죽음에 대한 두려움도 없었다. 이미 한 번 죽어본 그다. 게다가 단전에서 잠자는 무지막지한 내공이 있으니 세상의 누가 두려우랴. 목숨이 위험해지면 그 기운들이 알아서 깨어날 것이다.

정파십존이라……. 너무 만만하게 상대를 대하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믿었다. 이제 누구를 만나더라도 본인의 무공을 믿는 그런 단계가 됐다.

‘피가 끓는구나!’

주석하는 지금 진정한 무림인으로 태어난 기분을 만끽했다. 스스로 주도하는 삶! 정파십존 앞에서도 조금도 굴하지 않고 자신을 드러낼 수 있다는 사실이 말할 수 없는 흥분으로 다가왔다.

고오오오-

내력이 들끓는 그의 신형을 검은 호신강기가 휘감았다.

주막 안에 있던 사람들 모두가 밖으로 나와 이 결전을 지켜봤다. 정파십존의 무공을 구경할 기회는 흔치 않다. 이 결전은 어쩌면 수십 년간 남에게 자랑할 수 있는 이야깃거리가 될지 모른다.

주석하 일행은 당연히 밖으로 나와서 응원했고 비마표국 사람들도 자신들의 운명이 달려 있기에 눈을 떼지 못했다. 표두 사해주는 연신 향낭을 쓰다듬으며 가슴을 졸이고 있었다.

가장 마지막에 나온 사람은 우설금 일행이었다. 그녀는 표정 변화 없이 전장에 시선을 고정했다.

신창패존의 안면이 점점 굳어졌다. 처음에는 상대가 별것 아니라고 여겼다. 정파십존의 위명은 쉽게 얻어지지 않는다. 지금까지 수많은 사파인을 지옥으로 보내고 얻은 명성이 바로 신창패존이다.

그는 자신의 무공과 강함을 믿었다. 그런데 주석하와 마주 서는 순간 그 판단이 틀렸음을 깨달았다. 앞에선 녀석은 마치 혼군을 마주한 것처럼 무공을 가늠하기 어려웠다.

‘대단한 놈을 키워냈구나!’

그는 진심으로 혼군이 부러웠다.

그렇더라도 오늘 저놈을 죽이고 그 물건을 회수하여 무림의 혼란을 방지할 것이다. 신창패존이 있는 한 예외는 없다.

신창패존은 창을 꽉 움켜쥐고 내공을 끌어 올렸다. 온몸에서 혈기가 피어올랐다. 그 기운은 사파의 피를 갈구하고 있었다.

“덤벼라!”

신창패존은 창을 앞으로 지르며 다리를 박찼다. 날카로운 예기가 돌풍을 일으키고 그의 신형이 허공을 날았다.

봐줄 생각은 없다. 감히 정파십존에게 대들었으니 그 대가를 치러야 한다. 처음부터 최강의 초식으로 놈을 상대할 것이다.

창끝에서 무시무시한 강기가 뻗어 나갔다. 마치 검강처럼 묵직한 창강(槍罡)이 시퍼런 빛을 발하며 전면을 뚫었다.

주석하는 상대의 공격을 예상했다. 정파십존이자 사파를 극도로 미워하는 자이니 처음부터 최강수로 들어올 것이다. 당연히 그도 최강의 무공으로 응수해야 한다.

혼천십이권이 펼쳐졌다. 내력을 주먹으로 쏟아내자 놀랍게도 그의 주먹 전면으로 권강(拳罡)이 뻗었다. 그의 발이 땅을 박차고 몸이 질풍처럼 앞으로 쏘아졌다. 호랑이를 노리는 한 마리의 야수였다.

콰아앙-

권강과 창강이 만나며 공간이 일그러졌다. 대기를 일그러트리는 거대한 충격파가 두 사람의 몸을 휘감고 사방으로 퍼졌다.

바로 이것이다. 무림 최강자의 대결은 바로 이런 것이다.

강기의 폭죽이 터지는 순간 주석하의 신형이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반면 신창패존의 발은 충격에 땅속으로 파고들었다. 하지만 장창은 멈추지 않았다.

창강이 허공을 가르며 빛살처럼 주석하의 신형을 쫓아갔다. 주석하도 피하지 않았다. 그의 신형이 허공을 선회하며 흙빛 권강을 아래로 내리찍었다.

번쩍!

다시 강기가 맞물리며 충격파가 천지를 뒤흔들었다.

두 번째의 충격파는 첫 번째 충격을 압도했다. 땅을 딛고선 신창패존을 중심으로 강기의 폭풍이 터져나가며 흙먼지가 자욱하게 일었다.

과연 최강고수의 대결다웠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