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검천하-65화 (65/273)

65화 신창패존 (3)

주석하의 무위를 본 녹윤영은 가슴이 뛰었다.

그녀는 평소 혼군의 무공을 자주 접할 기회가 많았다. 실전이 아니었어도 혼군이 무공을 연마하는 과정에서 혼천십이권이나 혼천십팔지가 얼마나 위력적인지 수차례 경험했고 그녀도 그런 수준에 도달하려고 노력했다.

지금 주석하가 보여주는 무공은 혼군에게서 봤던 그 위력 그대로였다. 아니 실전이었기에 훨씬 강해 보였다. 그녀는 주석하에게 진정으로 감탄했다. 그로 인해 혼군의 위명이 사해에 떨치고 그 강함이 증명되리라. 앞으로 혼천교는 더욱 강해질 것이다.

‘가만, 혼천교가 아니었나?’

문득 주석하가 혼천교에 가입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생각났다. 이상하게도 혼군은 주석하에게 무공을 가르쳐주면서도 그를 혼천교도로 끌어들이지 않았다. 게다가 공식적으로는 제자로 받아들이지도 않았다.

그때는 그러려니 하고 받아넘겼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이상했다.

‘어쨌든 상관없어. 내가 거머쥐면 되니까.’

혼군이 그녀를 딸려 보낸 이유가 있다고 믿으면서 결심을 굳히는 순간 그녀와 마찬가지로 손에 땀을 쥐고 바라보는 유비연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러고 보니 저 여자는 왜 따라다니지?’

강렬한 경계심이 발동했다. 남장까지 해서 먼 길을 함께 하는 것을 보면 분명히 꿍꿍이가 있었다. 게다가 주석하는 그녀가 여자인지도 모르는 듯했다.

유비연은 그녀보다 외모도 더 아름답고 무공도 더 뛰어났다. 유비연과 경쟁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한숨이 일었다.

‘절대 물러설 수 없지.’

다른 사람은 몰라도 유비연에게만은 질 수 없다며 그녀는 전의를 불태웠다.

정작 유비연은 뒤에서 불타는 눈으로 노려보는 녹윤영의 시선을 전혀 의식하지 못했다.

그녀는 지금 경악에 빠져 있었다.

풍운채에서 봤던 주석하의 무공은 대단했다. 하지만 섬세함이 부족했고 고수이면서도 고수가 아닌 듯한 묘한 수준이었다. 약간 허당이라 할까. 목책을 뚫고 살아난 것을 보면 고수라고 인정해야 하는데 어쩐지 고수라 인정할 수 없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무려 정파십존과 대등한 싸움을 벌이고 있지 않은가. 혼천교에 들어갔다 나온 이후로 완전히 변했다. 그것이 혼군의 능력인지 주석하의 자질인지 모르지만 현 무림에서 저 나이에 저런 성취를 보이는 사람은 유일했다.

자연스럽게 그녀는 주석하에게 감탄하면서 자신의 자질이 평범하다는 사실에 우울해졌다.

게다가 정파라는 신창패존에게 한없는 분노를 느꼈다. 보통 때라면 정파인 그녀는 당연히 신창패존을 응원해야 한다. 그런데 상대가 주석하인데다 신창패존의 기이한 논리에 할 말을 잃었다.

신창패존은 정파를 위해서라면 어떤 일도 정의라는, 무고한 사람을 죽이거나 남의 물건을 가로채도 상관없다는 이상한 신념을 품고 있었다. 이는 그녀가 지키던 평범한 규범과 맞지 않기에 동조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사파가 이기라고 응원하기도 모호해서 혼란에 잠겼다.

그사이 주석하는 신창패존과 몇 차례 초식을 교환했다. 안타깝게도 그의 공격은 장창에 번번이 막혔으나 대신에 가슴이 뛰는 벅찬 즐거움을 만끽했다. 그의 무공이 무려 정파십존의 일인에게 제대로 먹히고 있었다.

콰앙!

다시 두 강기가 공간을 잠식하면서 충격파가 터져나갔다. 주변의 나무가 꺾이고 땅이 팼다. 나뭇잎이 폭풍을 맞은 듯 떨어져 내렸다.

재차 신창패존을 공격하려고 몸을 비틀던 주석하는 저 멀리서 다가오는 기이한 기운을 느꼈다. 이것은 신창패존의 기운과 완전히 상반되는, 음산하고 질척이는 이상한 기운이었다.

그 기운을 느꼈을까. 그를 공격하려던 신창패존 또한 멈칫했다.

주석하는 반쯤 펼치던 혼천십이권을 거두고 안면을 굳혔다.

활화산처럼 날뛰던 두 사람이 동시에 공격을 멈추자 장내는 일시에 적막이 감돌았다.

주변 사람들이 무슨 일인지 몰라 두리번거리는 순간,

음산한 음성이 장내를 울렸다.

“흘흘, 신창패존! 오랜만이구나!”

마치 공동묘지의 귀곡성을 듣는 듯했다. 그 목소리에 주석하의 단전에서 잠자던 어떤 기운이 맹렬하게 반응했다. 놀랍게도 다섯 기운 가운데 맑은 성질을 띤 기운이었다. 방금 목소리가 품은 기운과는 전혀 상반된 성질의 것이다.

신창패존의 시선이 저편의 어둠을 향했다. 그의 입가에 잔인한 미소가 맴돌았다.

“귀군? 네놈도 냄새를 맡았구나!”귀군(鬼君)! 흑도팔군의 일인이 아니던가.

어둠 속에서 귀기 어린 붉은 인광을 띤 두 눈이 나타났다. 그 장면은 마치 귀신의 등장처럼 공포를 자아냈다.

“크흐흐흐! 신창패존이 애송이 하나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다니 이거 실망이군.”

점차 선명해지는 인영의 모습은 섬뜩했다.

얼굴을 뒤덮은 자글자글한 주름과 하얀 수염은 나이를 추정하기 어렵게 했다. 말라 비틀어진 피부는 뼈만 남아 흉측했다. 지금까지 주석하가 접한 자 가운데 가장 고령이었다. 다만 나이답지 않게 섬뜩한 기세를 뿜어내는 눈빛은 대단히 인상적이었다.

끊임없이 풍기는 기괴한 기운도 특별했다. 귀군이라고 말해주지 않았다면 묘지에서 걸어 나온 강시로 착각했을지도 모른다.

장내로 거침없이 들어온 귀군이 신창패존의 맞은편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신창패존은 양쪽으로 주석하와 귀군의 합공을 받는 모양새가 됐다.

“흘흘, 더 지켜보려 했는데 말이지. 자꾸 이 주먹이 들썩거리지 않겠나. 후배에게 일임하는 것도 선배의 도리가 아니고.”

“크하하, 그게 아니라 물건에 욕심이 나서겠지.”

신창패존과 귀군의 대화에서 주석하는 귀군 역시 그 물건을 노리고 나타났음을 알았다. 대체 그 물건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쟁쟁한 인물들이 관심을 보인단 말인가.

또 하나, 주석하는 중요한 사실을 깨달았다. 그에게는 흑도팔군 가운데 다섯 명의 기운이 잠자고 있다. 그 기운 가운데 귀군의 것은 없다는 사실이었다. 즉 그는 귀군과 인연이 없었다.

“흘흘, 패존! 너는 오늘 이곳을 빠져나가지 못한다.”

“크하하, 네놈 능력으로 될까?”

“흘흘, 저 아이를 과소평가하는구나.”

귀군이 주석하를 흘낏 보면서 하얀 이를 드러냈다. 이 말은 주석하의 무공을 꿰뚫어 보고 계산을 끝냈다는 의미였다.

신창패존은 귀군의 속셈을 눈치챘다. 귀군과 일대일이라면 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이 둘을 모두 격파하기엔 난감했다. 정말 생사를 건다면 어찌 될지 모르지만 지금 이 사태는 목숨을 건 생사결이 아니었다.

“흘흘, 나쁘지 않군.”

당황하는 기색을 보이는 신창패존을 조롱하며 귀군이 내력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어찌 되었건 당장은 귀군 또한 같은 편이라는 생각에 주석하도 상대를 압박하는 기세를 뿜었다.

신창패존이 안면을 굳히며 내공을 끌어올려 대항했다. 그의 생각이 복잡해졌다.

방금 겨뤄본 바에 따르면 주석하의 무공은 과소평가할 수준이 아니었다. 저 둘의 합공을 정면으로 격파하는 작전은 피해야 한다. 그렇다면 오늘 이 싸움에서는 득보다 실이 많다.

평소 자신의 성향이라면 절대 싸움을 피하지 않지만 지금은 그런 문제를 따질 때가 아니었다.

그는 오늘 이 싸움의 목적을 되새겼다. 바로 표국이 호송하는 물건이다. 그 물건은 지금…….

신창패존은 표국 사람들을 곁눈질했다. 대부분 이 대결을 보느라 넋을 놓고 있었다. 그리고 호송 물건이 담긴 수레와 마차는 주막 한쪽에 곱게 모셔져 있었다.

아무리 경계를 서는 자를 배치했다고 하지만 이 중요한 물건을 저렇게 내버려 둘 리가 없으니.

그의 눈동자가 돌고 돌아 표두에게 머물렀다. 역시나 표두는 그가 의심한 대로 향낭을 손에 꼭 쥐고 사태를 주시하고 있었다.

‘저 향낭에 든 게 확실하다!’

목표물은 정해졌다. 이제 이 두 놈을 따돌리는 일이 문제다.

신창패존은 무심한 표정으로 장창을 손에 꽉 쥐었다. 누굴 먼저 쳐야 할까? 작전은 자연스럽게 세워졌다.

귀군의 손에서 귀신처럼 붉은빛이 일렁였다. 흑도팔군 가운데 가장 괴기스러운 무공을 쓰는 자가 바로 귀군이다.

주석하는 처음 보는 신비한 광경에 혼란스러웠다. 저게 대체 무슨 무공인가.

그 순간 신창패존의 장창이 주석하의 가슴팍을 파고들었다. 놀란 주석하는 혼천십이권으로 장창을 쳐냈다.

신창패존의 공격이 순식간에 이어졌다. 장창이 허공을 돌면서 이번에는 귀군을 향해 뻗었다.

“흘흘, 그런 어설픈 공격으로는 나를 어쩌지 못해!”

귀군의 손에서 붉은 기운이 장창을 향해 폭사됐다.

콰앙!

신창패존의 신형이 귀군이 날린 장력을 타고 옆으로 날아갔다. 얼핏 보면 귀군의 장력에 맥없이 휘말려 물러나는 것처럼 보였으나 실상은 달랐다.

귀군과 주석하가 신창패존을 향해 공격의 날을 다시 세우기도 전에 신창패존의 신형은 표두 사해주를 향했다.

푹!

장창이 표두의 가슴을 꿰뚫었다. 무공 차이가 큰 데다 사해주는 자신이 공격받으리라고 생각지 않았기에 전혀 대응하지 못했다.

사해주의 가슴에서 피가 솟구치는 찰나 신창패존의 손이 허리춤의 향낭을 낚아챘다. 동시에 사해주를 발로 차고 날아가던 속력을 가속하여 둘러싼 군웅을 뛰어넘었다.

‘됐다!’

이미 그는 빛의 속도로 장내를 벗어나고 있었다. 목표한 향낭을 취했고 유일한 호적수인 귀군과 주석하는 아직 그를 추격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일단 지금은 향낭을 취하고 두 놈은 훗날 혼내면 된다. 오늘 마무리 짓지 못한 대결은 그때 제대로 갚아주면 된다.

뜻밖의 사태에 모두가 넋을 놓았다.

특히 일격을 찔린 귀군과 주석하는 신창패존이 사해주를 죽이고 향낭을 탈취하는 장면을 눈 뜨고 볼 수밖에 없었다.

모두가 허를 찔렸다고 절망하는 순간이었다.

수십 장을 벗어난 신창패존은 다시 발을 박차고 앞으로 질주했다.

그 순간!

콰앙!

무시무시한 강기의 벽이 그를 가로막았다. 생각지도 못한 무형의 방해물에 그대로 부딪힌 신창패존은 고통 속에 땅바닥을 나뒹굴었다.

이런 식으로 도주를 막으려면 그와 동급인 정파십존 수준의 무림인이 아니라면 절대 불가능했다. 강자인 주석하와 귀군은 아직 상황 파악조차 못 하고 있는데 또 다른 자가 있단 말인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현실에 신창패존은 간신히 상체를 일으키며 앞을 노려봤다.

‘누구지?’

예상치도 못한 사람이 일장 앞에서 길을 가로막고 있었다. 놀랍게도 자신과 충돌한 상대는 조금의 동요 없이 조용히 그에게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허억!”

신창패존의 눈이 부릅떠졌다. 상대는 나이 어린 여인이었다. 그것도 평생 한두 번 볼까 말까 한 미인이었다. 아무리 머리를 굴려보아도 현 무림에서 이처럼 아름다운 여인이 그와 동급인 무공을 소유하고 있다는 소문을 들은 기억이 없었다.

‘외모는 천상삼화에 무공은 정파십존 급이라니! 이게 가능한 이야긴가?’

여인은 싸늘한 표정을 바꾸지 않았다. 마치 신창패존을 안중에도 두지 않는 태도였다.

그제야 여인의 피처럼 붉은 옷이 눈에 들어왔다. 산을 타고 부는 바람에 여인의 옷자락이 펄럭였다.

신창패존은 창을 지팡이 삼아 몸을 일으킨 후 여인을 노려보았다.

“감히 나를 막다니! 죽음을 자초하는구나.”

대답 대신 여인의 몸에서 무시무시한 기운이 일었다. 그 기운은 신창패존마저 압살할 듯한 위력이었다. 신창패존은 신음을 터트리며 창을 꽉 쥐었다.

“대, 대체 누구냐…….”

그 사이 주석하와 귀군이 뒤쫓아왔다.

주석하는 우설금의 등장에 경악한 상태였다. 역시 그녀도 표국이 호송하는 물건을 노렸구나. 그리고 그 물건은 지금 신창패존이 손에 쥔 향낭에 담겨 있었다.

신창패존을 가운데 두고 절대 고수 세 사람이 포위했다. 네 사람 모두 유불리를 가늠하기 어려웠다. 누구도 한편이 아니었고 모두가 향낭을 노리고 있었다.

네 사람이 뿜어내는 기운이 서로 대립하며 장내는 살얼음판으로 변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