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화 만리안석 (1)
프스스스-
호신강기가 각자의 몸을 보호하며 상대를 압박했다.
숨 막히는 압력이 모두를 억눌렀다. 한 치도 움직일 수 없는 긴장감이 장내를 메웠다.
그들은 감히 입을 열지도 못했다. 지금 상대를 압박하고자 전력을 다해 내공을 끌어올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연히 가장 괴로운 자는 신창패존이었다.
세 사람의 합공을 받듯 삼각형의 중앙에 서 있는 데다 목표물인 향낭을 들고 있어서다. 그의 무공이 아무리 뛰어나더라도 이들 셋의 합공을 감당할 수준은 아니었다.
물론 세 사람이 신창패존만 압박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신창패존을 압박하면서도 다른 사람에게도 마찬가지로 압력을 가하고 있긴 했다. 하지만 신창패존을 억누르는 만큼은 아니었다.
‘이대로는 버티지 못한다.’
신창패존의 판단은 빨랐다.
아무리 중요한 물건이라도 목숨보다 귀하지 않다. 지금 저들이 그를 공격하는 이유는 향낭 때문이다. 향낭만 포기하면 저들이 그를 공격할 일도 없고 서로 싸우게 될 것이다.
향낭은 훗날 다시 도모하면 된다. 누가 가져가더라도 일대일이라면 상대를 죽이고 뺏을 자신이 있었다.
결정을 내리자 몸이 저절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와라!”
신창패존은 장창으로 크게 원을 그리며 포위한 세 사람을 한꺼번에 공격하기 시작했다.
파파파팍-
창의 예리한 기운이 강기의 압박을 끊어냈다. 균형을 이루던 압력이 일순간 사라졌다.
동시에 세 사람의 공세가 재차 그에게 집중됐다.
신창패존의 신형이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그가 있던 자리에 세 사람의 공세가 밀물처럼 몰려들어 빈자리를 메웠다.
콰앙-
주석하는 묵직한 충격을 온몸으로 받으면서 두 다리로 버텼다. 다행히 아직 견딜만했다.
가장 먼저 손을 쓴 자는 귀군이었다. 신창패존이 솟구치자마자 그는 퇴로를 차단하며 공세를 퍼부었다. 사이한 붉은 화염이 하늘을 뒤덮었다.
이 공세에 대항하려면 그만큼 기력을 소모해야 한다. 그때는 이 싸움에서 목숨을 부지할 수 있다는 보장이 없다. 결심했다면 무조건 빨리 결행하는 것이 최선이다.
수십 년 동안의 강호 경험에 맞춰 신창패존은 귀군에 대항하는 대신에 향낭을 뿌렸다. 동시에 그는 귀군의 공세를 이용해서 더 높이 튀어 올랐다.
붉은 기운 속으로 작은 향낭이 떨어져 내렸다.
이런 식의 전개를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신창패존이 향낭을 끝까지 지키리란 생각이 완전히 빗나갔다.
“앗!”
주석하는 향낭을 붙잡으려고 몸을 날렸다. 그만이 아니었다. 이제는 아무도 신창패존의 행방에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우설금과 귀군 또한 동시에 향낭을 향해 신형을 폭사했다.
가장 빠른 사람은 주석하였다. 하지만 그가 향낭을 붙잡으려고 손을 내미는 순간 무시무시한 강기가 밀려들어 향낭을 위로 쳐올렸다.
이미 허공에 뜬 상태인 주석하는 더 위로 몸을 띄울 수 없었다.
그의 위로 우설금이 치솟았다. 그녀의 몸놀림은 한 마리의 나는 새처럼 우아하고 빨랐다.
우설금의 손이 향낭에 닿는 것을 보고만 있을 귀군이 아니었다. 귀군의 시뻘건 기운이 우설금의 몸을 휘감았다.
주석하는 귀군의 저 기운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붉은 기운이 우설금을 감싸자 그녀는 향낭을 포기하고 허공에서 몸을 틀었다.
콰앙!
우설금의 장력이 귀군의 붉은 기운과 맞부딪치며 강한 폭음이 일었다. 순간 귀군의 안면이 일그러졌다.
애초에 귀군은 우설금을 얕보고 있었다. 우설금이 정파십존이나 흑도팔군에 버금가는 고수라면 이름이 알려지지 않을 리 없었다. 그렇기에 설사 그녀가 놀라운 강자라 하더라도 자신의 한 수 아래라 여겼다.
그래서 귀군은 전력을 다해 우설금을 공격하진 않았다. 이것이 결정적인 실책이었다.
단 일 초의 교환으로 귀군은 어마어마한 충격을 받았다. 놀랍게도 이 이상한 여인은 자신과 비교할만한 고수였다. 그는 약한 내상과 함께 온몸이 으스러지는 듯한 충격을 견뎌야 했다.
“대체 누, 누구냐?”
신창패존과 마찬가지로 귀군 또한 경악에 휩싸였다. 비록 손해를 보는 교환이었으나 그나마 다행스럽게도 우설금이 향낭을 채가는 것을 막았다.
허공으로 솟구쳤던 우설금이 향냥을 잡지 못하고 떨어져 내리는 사이 귀군이 다시 손을 뻗었다.
“헛!”
귀군이 향낭을 잡았다고 생각하는 순간 놀랍게도 손이 쑥 들어와 향낭을 가로챘다. 주석하였다.
허공에서 향낭을 붙잡은 주석하는 곧바로 몸을 틀었다.
동시에 적들의 공세에서 벗어나고자 멀리 떨어진 곳으로 발을 박찼다. 그때 주석하는 자신의 앞을 막아서는 그림자에 당황했다. 신창패존이었다.
향낭을 포기하고 도망친 줄 알았는데 신창패존은 여전히 부근에 머물며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하필이면 주석하가 피하는 쪽이 신창패존이 선점한 곳이었다. 그의 신형이 돌진하는 순간 신창패존의 장창이 벼락처럼 그를 향해 창강을 뿜어냈다. 그 위력은 바다를 가를 듯 어마어마했다.
향낭을 품에 안으면서 창강에 대응하려던 주석하는 뒤에서 밀려오는 또 다른 강기의 폭풍에 당황했다. 그의 뒤에서 귀군의 붉은 기운과 우설금의 산악을 방불케 하는 장력이 엄습해 들어왔다.
동시에 앞뒤로 공격받게 되자 손발이 흐트러지며 머릿속이 하얗게 탈색됐다. 홀로 이 모두를 상대할 재간은 없다.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도무지 계산이 서지 않았다.
귀군의 기운이 파도처럼 몰려오자 주석하의 단전에서 맑은 기운이 폭발적으로 뿜어져 나왔다. 이런 현상이 왜 일어나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으나 순간 그는 모험을 감행했다.
향낭을 끌어안고 전신을 웅크리며 앞뒤로 밀려드는 공세에 저항했다.
‘내공으로 버틴다!’
다른 사람이라면 절대 시도하지 못할 행동이었으나 주석하는 자신의 몸에 잠재된 내력을 믿었다.
마치 고슴도치처럼 웅크린 그의 몸을 강기가 강타했다.
콰앙!
얼핏 보면 주저앉은 주석하를 앞뒤에서 짓이겨버린 형국이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의 몸 전체를 호신강기가 감쌌고 밀려드는 강기가 호신강기를 와장창 깨트렸다.
“크으윽!”
그 충격은 어마어마했다. 전신을 호신강기로 보호했으나 그 충격은 작지 않았다. 온몸의 혈맥이 갈기갈기 찢어지는 듯한 충격을 느끼면서 주석하는 앞으로 엎어졌다.
그의 입에서 피가 울컥 뿜어졌고 몸을 감싼 호신강기는 완전히 사라졌다. 심지어 입고 있던 옷마저 찢어져 너덜거렸다. 참혹 그 자체였다.
일순간 흐름이 막혔던 내력이 곧바로 다시 일주천하기 시작했다. 혼군의 음험한 기운은 앞쪽에서 강타한 신창패존의 공격에 깨졌고 단전에서 솟구쳤던 맑은 기운은 뒤쪽에서 강타한 귀군과 우설금의 공세에 완전히 무력화됐다.
이뿐이라면 주석하는 생사를 오가는 위기에 빠졌을 것이다. 하지만 그에게는 아직 세 기운이 남아 있었다. 두 기운이 소모되는 순간 다른 세 기운이 단전을 뛰쳐나왔다. 그 기운은 무력화된 그의 혈맥을 재빠르게 일주천하며 위험에서 구해냈다.
다만 이 순간에 다시 적의 공세가 밀려들면 그는 치명상을 입을 가능성이 컸다.
문제는 향낭. 주석하가 온몸으로 공세를 받고 주저앉으며 꼬꾸라진 직후 그의 손에서 향낭이 벗어났다.
향낭은 신창패존이 휘두른 거센 강기의 폭풍에 휘말렸다.
이를 놓칠 신창패존이 아니었다. 그는 순식간에 장창을 회수하고 향낭을 거머쥐었다. 이제 향낭을 가지고 도망치면 최후의 승자가 될 수 있었다.
향낭을 쥐는 순간 억겁의 공세가 밀려왔다. 눈앞에 붉은 그림자가 빛살처럼 다가왔다. 우설금이었다.
본능적으로 신창패존은 향낭을 쥐지 않은 다른 손으로 장창을 휘둘러 우설금의 공세를 차단했다.
콰앙!
거센 충격파가 팔방으로 퍼졌다. 장창이 충격에 휘말려 길을 잃은 순간 신창패존은 울컥 핏덩이를 뱉어냈다. 우설금이 쏟아낸 공격은 그의 예상을 한참 초과하는 위력을 발휘했다.
전신을 강타한 충격에 신창패존은 향낭을 계속 잡을 수 없었다. 향낭을 손에서 놓치는 순간 신창패존을 노린 귀군의 붉은 기운이 향낭을 엄습했다.
푸아악-
향낭이 폭죽처럼 터지며 내부에 들어있는 내용물이 허공으로 뿌려졌다. 순식간에 향낭의 천이 먼지처럼 조각나고 안에 든 각종 향 재료가 사방으로 비산했다.
그 공간에 가장 먼저 뛰어든 사람은 우설금이었다. 그녀는 반쯤 날아가 버린 향낭을 손에 쥐었다. 향낭을 노린 다른 세 사람의 강기가 그녀의 앞에서 폭발했다.
일순간 천지를 경동시키는 격전이 흘러간 후 네 사람은 무사하지 않았다.
그나마 조금의 흐트러짐 없이 고고한 자세를 유지한 사람은 우설금이었다. 심지어 그녀는 한 손에 절반만 남은 향낭마저 들고 있었다.
신창패존은 우설금의 마지막 공격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여 큰 손해를 입었다. 위중한 내상에 더해 한 손이 부러지는 부상이었다. 지금 당장에는 제대로 반격하지 못할 만큼 심각했다.
귀군 또한 무사하지 않았다. 주석하를 공격했던 그는 주석하의 몸에서 발현된 강력한 반발력에 대항해야 했다. 주석하가 웅크리고 있었음에도 그는 주석하를 압도하지 못하고 그 반탄력에 오히려 큰 손해를 봤다. 그것도 우설금과 일 초를 교환하여 큰 손해를 본 직후였다. 그 과정에서 귀군 역시 적지 않은 내상을 입었다.
주석하는…… 당연히 가장 위험한 지경에 처했어야 했다. 겉으로 보기에 그는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하지만 단전의 숨은 내력이 재빨리 일어나서 그의 내상을 치유하고 곧바로 무공을 사용할 수 있는 상태로 전환했다.
비록 지금은 혼군의 내력이 소모되어 혼군의 무공을 제대로 사용할 수 없으나 아무려면 어떤가. 내력만으로도 충분히 이 싸움에서 버틸 수 있었다.
한바탕 광풍이 휩쓸고 지나간 후 귀군과 신창패존은 우설금을 확인하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최후의 승자는 흑도팔군도 정파십존도 아닌 이름 모를 여인이었다.
“이, 이게 어떻게 된…….”
“크윽! 대, 대체 넌 누구냐!”
두 사람의 공포에 질린 눈이 우설금을 훑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여인의 정체는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한번 보면 절대 잊을 수 없는 외모에 차가운 냉기를 풀풀 날리는 여인. 게다가 지금까지 여인은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벙어리도 아닐 텐데 대체…….
정작 우설금은 담담한 표정으로 그들을 노려보며 모두가 보는 앞에서 향낭을 뒤집었다. 강기의 폭풍 속에서 절반이 찢긴 향낭 속에는 흔한 향 재료 외에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향낭에 남아 있던 물건들이 바람에 흩어졌다.
우설금은 향낭을 뒤집어 내부를 보여준 후 매서운 눈으로 세 사람을 노려봤다.
주석하는 그 뜻을 바로 이해했다. 그들이 노리던 그 물건이 감쪽같이 사라진 것이다. 애초에 향낭에 없었던지 아니면 싸움 중에 향낭에서 빠져나갔거나 소멸했는지 누구도 알 수 없었다. 심지어 그 물건이 무엇인지조차 아는 사람이 있을까.
그 모든 비밀을 쥔 사람은 이미 고혼이 되었다. 비마표국 표두는 신창패존의 손에 죽었으니 그 행방을 누가 알 것인가.
귀군과 신창패존이 서로를 쳐다봤다. 이를 닭 쫓던 개꼴이라 하던가. 두 사람은 동시에 고개를 저었다. 그들도 무슨 물건인지 모른다는 뜻이었다.
잠시 그들을 노려보던 우설금이 고운 아미를 찡그리더니 향낭을 든 손을 번쩍 들었다.
화르르르-
절정의 삼매진화에 의해 향낭에 불이 붙었고, 타오르는 불꽃은 잿더미가 된 향낭과 함께 사라졌다.
귀군과 신창패존은 우설금이 주막 내부에 있던 손님이란 사실을 떠올렸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 여인이 비마표국의 사람인지 아닌지 알 도리가 없었다. 두 사람은 무의식적으로 주석하에게 시선을 돌렸다.
주석하도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이 의미는 우설금의 정체를 모른다는 뜻이기도 했고 향낭 속의 물건에 대해서도 아는 바가 없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어둠 속에서 우설금은 여전히 말없이 세 사람을 노려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