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화 만리안석 (2)
가장 먼저 침묵을 깨트리고 움직인 사람은 귀군이었다. 그 물건이 사라진 이상 이곳에 남을 이유가 없었다. 신창패존과 저 청년에 이름 모를 여인까지. 모두가 자신에 버금가는 강자다. 길보다는 실이 많은 시간이었다.
“흘흘, 다음에 보도록 하지.”
늠름하고 패기롭게 장내를 벗어나는 듯했으나 실상은 간신히 힘을 내서 걸음을 옮겼다. 내상, 외상에 온몸이 엉망진창이었다. 걷는 내내 뒤통수의 따가움을 느끼면서 귀군은 수모를 삼켰다. 어쨌든 지금은 참아야 할 시간이다.
등장할 때만큼이나 빠르게 귀군이 사라졌다.
주석하는 우설금과 신창패존의 눈치를 봤다.
잠에서 깨어나 꿈틀거리던 맑은 기운은 귀군이 사라지자 다시 잠잠해졌다. 어차피 귀군과 우설금의 공격을 막느라 내공 소모가 심했던 탓도 있다.
다른 기운 역시 위기가 물러가자 서서히 잠잠해졌다. 혼군의 내공은 싸우는 동안 극심한 내력 소모로 내상의 징후마저 있어 제대로 운용이 불가능했다.
지금 주석하의 몸은 사실상 오래전 한 줌의 내공만이 존재할 때와 비슷한 지경이 됐다.
“별일 없다면 다음에 봅시다.”
지금 우설금이나 신창패존과 부딪히면 죽음뿐이다. 이제 그 물건이 사라졌고 그 책임이 그에게 있는 것도 아니기에 주석하는 그들의 눈치를 보면서 물러났다. 마음속으로 저들이 더는 시비를 걸지 않기를 바랐다.
“무서운 놈…….”
신창패존의 쓴웃음이 뒤에서 들려왔다.
“혼군의 제자가 아니라면 무슨 관계냐?”
주석하는 고개만 뒤로 돌린 채 담담한 미소를 지었다.
“삼 일! 삼 일간 무공을 사사받았을 뿐입니다.”
“삼 일?”
놀란 신창패존이 어이없는 듯 되뇌었다.
“하하! 무공 천재는 어디에나 있지요. 당신만이 천재란 생각은 버리시죠.”
정파십존에 속한 이들은 대부분 어려서부터 무공 천재라는 소리를 들으면서 자랐다. 신창패존도 마찬가지였다.
이를 짐작한 주석하가 슬그머니 도발한 것이다.
“앞으로 정파에…… 큰 해를 끼칠 놈이군…….”
신창패존이 장창을 으드득 거머쥐었다.
평소라면 그는 미래를 위협할 사파의 싹을 내버려 두지 않았을 것이다. 살려두면 언젠가는 후환으로 돌아온다. 하지만 지금은…….
부상도 부상이지만 우설금의 눈치가 보였다. 정체를 알 수 없는 그녀는 정파인지 사파인지 도무지 가늠되지 않았다. 무공도 만만치 않다. 주석하를 공격했을 때 우설금이 돕기라도 한다면 상황은 최악이다.
불확실한 일에 목숨을 걸 수 없기에 신창패존은 들끓는 분노를 간신히 삼켰다.
그는 우설금을 슬쩍 살핀 후 걸음을 옮겼다. 어쨌든 그 물건이 사라졌다면, 아니 파괴되었다면 오늘은 자신의 승리였다. 뇌군에게 전해질, 앞으로 사파에 막강한 도움이 될 그 물건을 없앴으니까.
그 물건을 자신이 가졌더라면 더 좋았겠지만 원래 뜻대로 되지 않는 게 인생 아니던가.
신창패존은 승리를 자축하며 우설금의 동태에 신경을 곤두세웠다. 그녀는 떠나는 자신을 저지할 생각이 없는 듯했다. 그는 내심 안심하면서 걸음을 재촉했다.
홀로 남은 우설금은 표정의 변화 없이 싸움이 벌어졌던 야산의 공터를 묵묵히 바라보고 있었다. 생각에 잠긴 그녀는 석상처럼 미동이 없었다.
***
“괜찮아요?”
주석하가 돌아오자 주막 앞에서 서성이던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가장 먼저 안부를 물은 사람은 녹윤영이었다.
처음 주막 앞 공터에서 대치했을 때는 모두가 숨을 죽이고 지켜볼 수 있었다. 하지만 귀군이 등장하고 싸움이 격화되면서 전장이 주변으로 옮겨졌다.
가까이 접근했다가 자칫 싸움에 휘말려 위험해질 수 있기에 일반인들은 따라갈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들은 아무도 네 기인의 피 말리던 대결을 전부 관전할 수 없었다.
발을 구르던 차에 주석하가 등장하자 사람들은 안도했다. 어찌 되었건 주석하는 표국을 호위하는 인물이었으니까.
“괜찮아요.”
“다른 사람들은요?”
“패존과 귀군은 물러갔습니다.”
두 절대 기인이 떠났다는 말에 사람들은 환호성을 울렸다. 다행히 죽은 사람은 비마표국의 표두 한 사람뿐이었다.
“누가 이겼어요?”
“이기고 지고 할 게 없었습니다. 물건이 숨겨져 있다고 예상한 향낭이 산산조각 나버려서…….”
싸움이 흐지부지되었다는 말에 사람들은 실망감을 금치 못했다. 두려운 상황이었으나 사람들의 호기심은 컸다. 특히 정파십존의 일인인 신창패존과 흑도팔군의 일인인 귀군의 대결은 두고두고 회자할 안줏거리였으니까. 사람들은 강자를 확인하고 싶어 한다.
아쉬움을 토하면서 사람들이 다시 주막으로 들어갔다.
대충 주위가 잠잠해지자 도수를 비롯한 일행이 그를 둘러쌌다.
“우와아! 다, 다치진 않았어?”
도수의 염려에 주석하는 고개를 저었다.
“오올! 대단한데! 혼천교에 며칠 머물더니 이젠 정파십존과도 맞장 뜨는구나!”
“아직 멀었어.”
“나도 혼천교에 있었는데 왜 이 모양이지?”
“넌 내 한 테도 쥐어 터지잖아?”
녹윤영이 핀잔을 줬다.
“뭐야? 내가 왜 터져?”
“하도 터져서 기억이 날아갔지?”
도수와 녹윤영의 다툼 속에서 주석하는 씁쓸하게 웃었다.
겸손이 아니라 실제로 아쉬움이 컸다. 이처럼 강한 고수와는 첫 대결이었고 혼군의 내공만으로는 그들을 상대하기 버거웠다. 다른 기운이 아니었다면 그는 목숨을 잃었을 것이다.
내력을 온전히 초식에 활용하지 못했다. 혼군이라면 그보다 훨씬 나은 실력을 보였을 것이다.
하지만 첫 실전일 뿐이다. 오늘 드러난 미흡함을 연구하다 보면 한층 발전할 것이다.
유비연은 주석하를 조용히 지켜볼 뿐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주석하는 그녀에게 감사했다. 정파인으로서 정파십존에게 대들기 쉽지 않았을 테니까. 처음으로 그녀가 그의 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까지 유비연은 어딘지 모르게 흑도인 그와 잘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었다.
“다치지 않아서 다행이네요. 얼른 들어가요. 밤이 늦었어요. 내일 또 떠나려면…….”
녹윤영이 그의 팔을 끌었다.
주석하는 조심스럽게 팔을 빼면서 주막 입구에 주저앉았다.
“먼저 들어가세요. 저는 여기에서 오늘 일전을 복기 좀 해보고…….”
그의 심정이 편치 않다고 짐작한 일행은 먼저 안으로 들어갔다.
주석하는 어둠이 찾아온 주막 앞에 쭈그리고 앉아서 하늘을 쳐다보았다. 별이 반짝이는 밤하늘이 펼쳐져 있었다.
하늘은, 자연은 평화롭다. 하지만 땅은, 인간 세상은 혼란스럽다.
오늘 갑자기 발발한 일전은 인간의 욕망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정파십존이고 흑도팔군이고 할 것 없이 이유야 어찌 되었건 남의 물건에 욕심을 부렸다. 그들은 온갖 이유를 들어 행동을 합리화하면서 상대를 공격했다.
얼떨결에 그 탐욕에 엮여 동참했던 그도 어쩌면 동일한 부류일지도 모른다.
오늘 전투는 조만간 무림으로 퍼져 나갈 것이다. 무림 정상의 고수와 맞장 뜬 혼군의 제자, 이렇게 이름이 나려나? 아니면 갑자기 등장한 불세출의 기재, 이런 식이려나? 그리고 묘령의 여인 우설금도 소문이 나겠지.
어? 전투 중인 우설금을 누가 목격했지? 기이한 기분에 그는 미간을 모았다.
어쨌든 앞으로 그는 강호에서 주목받는 처지가 될 것이다.
“난…… 백화루주가 제일 좋은데…….”
전생 오 년의 경험 때문에 정사의 패권 다툼이나 마교와 엮여 싸우고 싶지 않았다. 그 전쟁에 뛰어든 사람들은 때로는 명성을 얻고 부귀를 누릴지 모르지만 끝이 허망했다. 그가 보기에 모두 부질없는 짓이었다.
명분이나 정의란 이름으로 타인을 죽이고 괴롭히면서 얻은 영광이 무슨 가치가 있단 말인가.
그렇게 사느니 역시 백화루주가 되어 편하게 놀고먹는 삶이 훨씬 가치 있다. 단전에 숨은 내공을 제대로 활용하려고 시작한 강호 여정이 자칫 그를 세상에 드러내 골치 아파질 조짐이다.
언제부터일까.
주석하는 자신을 쳐다보는 시선을 느꼈다. 천천히 그는 그 시선의 주인을 찾았다.
우설금이었다.
언제 돌아왔는지 모르지만 그녀는 저쪽의 어둠 속에서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주막에서 밥을 먹을 때도, 전투를 치를 때도, 지금 그를 쳐다볼 때도 그녀는 한결 같이 무표정했다. 아니 엄밀하게 따지면 냉담하고 싸늘했다.
우설금의 목적은 무엇이었을까. 예전에 그녀는 마교의 비밀을 캔 가적성을 추적했다. 끝내 가적성을 화산파에서 죽였다.
그렇다면 지금 이곳에 나타난 이유는 뭘까? 그를 따라온 것은 아닐 테고 오늘 행동으로 미루어보면 그녀 또한 그 물건을 노린 것이 분명했다.
‘대체 무슨 물건이기에…….’
그 물건이 마교의 것인가? 그래서 그녀가 눈독을 들이나? 이제 그 물건이 사라졌으니 그녀는 계속 비마표국을 추적할까, 아니면 사라질까.
‘쯧, 내가 왜 저 여자에게 관심을 두지?’
주석하는 머리를 저으며 우설금을 힐끗 봤다. 별빛을 맞으며 조용히 서 있는 그녀는 아름다웠다. 방금 죽음의 전장을 휘젓던 여전사와는 다른 모습이었다.
주석하는 괜히 골려주고 싶은 생각에 그녀를 향해 혀를 날름 내밀었다. 얼음장처럼 변함없던 그녀의 표정이 살짝 변했다.
천천히 우설금이 그에게 다가왔다.
“그 물건이 뭔지 알아요?”
우설금의 질문은 예상 밖이었다.
“나도 몰라요. 적어도 어제까지는 관심 없었거든요.”
“물건이 어디로 갔는지 알아요?”
“제가 당신보다 더 잘 알 리가 없죠.”
“향낭에 있었나요? 열어본 적 있어요?”
순간 주석하는 몸을 흠칫 떨었다. 하지만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요. 향낭이 등장할지도 몰랐는데요.”
어째 질문이 약간 쳇바퀴 도는 느낌이다. 이런 분위기는 좋지 않다.
주석하는 분위기를 바꾸려고 질문을 돌렸다. 설마 이 여자가 죽이기야 하겠어? 아니지, 저 싸늘한 얼굴을 보면 그러고도 남지.
“물어봐도 돼요?”
우설금은 대답하지 않았다. 당연히 그럴 줄 알았기에 주석하는 질문을 이었다.
“좀 웃을 수 없어요? 괜히 겁주려고 인상 쓰는 거죠?”
우설금의 안면이 더욱 차갑게 굳어졌다.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 주석하는 미소를 머금었다.
“나이가 어떻게 돼요?”
단지 그를 노려볼 뿐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사는 곳이 어디예요? 부모님은 누구죠? 바느질은 할 줄 알아요? 칼질은…… 아, 칼은 잘 쓰겠네. 밥은 할 줄 알죠? 좋아하는 남자 있어요? 아니, 한 번이라도 좋아해 본 적은 있어요?”주석하에게서 평범한 질문이 쏟아졌다.
마치 강력한 신공에 정신없이 두들겨 맞은 듯 우설금의 안면에서 혈기가 사라졌다.
잠시 멍한 표정을 짓던 그녀가 몸을 홱 돌리며 주막 안으로 들어갔다.
“내일은 어떡할 건가요?”
마지막 그의 질문은 허공으로 사라졌다.
주막 문이 쾅 닫히자 주석하는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우설금을 완벽하게 제압했다.
“별거 아니네.”
**
어둠 속 골방에서 주석하는 홀로 누웠다.
주막에는 비마표국 사람들과 우설금 일행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없었기에 방이 남아돌았다. 덕분에 주석하는 아무 곳이나 빈방을 찾아 들어가서 침상에 몸을 눕혔다.
삼경을 훌쩍 지난 시각이라 온 세상이 고요했다. 기감을 올려 봐도 지금 이 주막 내에서 잠이 깬 사람은 없는 듯했다. 적어도 그가 잠든 이 골방을 눈여겨보는 자는 없다.
주석하는 품속으로 손을 넣었다. 작은 나무상자가 손에 잡혔다.
향낭을 거머쥐고 앞뒤로 협공을 당하던 위험한 순간 그는 향낭 속에서 이 물건을 빼냈다. 온몸을 말고 쭈그리고 있었기에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 목숨을 건 절체절명의 순간이었다.
그 덕에 그는 온몸으로 세 최강고수의 합공을 견뎌야 했다. 운이 나빴다면 죽었을지도 모른다.
‘이게 뭐냐?’
겉보기에 나무상자는 평범했다. 손바닥 정도의 크기로 단단하게 봉해져 있었다.
신창패존이나 귀군이 개입할 정도라면, 아니 마교도인 우설금마저 관여할 정도라면 평범한 물건이 절대 아니다.
그는 조심해서 상자를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