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화 만리안석 (3)
나무상자 내부의 물건은 평범했다.
고운 포장지에 싸인 어떤 물건이 중간에 자리 잡았고, 그 옆에 양피지 쪽지가 끼워져 있었다.
주석하는 양피지를 펴서 읽었다.
- 만리안석(萬里眼石)은 배교의 신물이다. 만 리 밖을 볼 수 있다.
짧은 내용이어서 주석하는 그 진위를 알 수 없었다. 만리안석이란 물건은 처음 들었다. 만 리 밖을 본다니? 어처구니없는 내용이라 믿기도 어려웠다.
가끔 도인이 신체에서 혼이 빠져나가 천 리 밖까지 다녀온다는 비사를 언급하기도 하지만 그런 게 가능할 리가? 그런데 만 리 밖을 보여주는 눈? 또는 돌?
배교(背敎)라니? 서역을 넘어 어디엔가 존재한다는 신비의 문파가 아니던가. 그 문파에는 중원에서는 상상도 못 할 기이한 물건과 사이한 무공이 넘친다고 했었는데……. 이 물건 또한 그런 것인가?
주석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다만 이 물건 때문에 기인들이 덤벼들었으니 분명히 평범하지 않을 것이다.
떨리는 마음을 진정시키며 주석하는 상자 안에 든 종이를 꺼냈다. 종이 내부에 싸인 물건이 그제야 모습을 드러냈다.
물건은 작은 수정구슬이었다. 달걀보다 약간 작은 크기려나? 원형의 구슬은 티 없이 맑고 투명했다. 다만 그 색상이 은은한 푸른색을 띠었다.
한눈에도 범상치 않은 물건이 확실했다. 여인들이 장신구로 쓰기에 딱 좋은. 하지만 이걸 어쩌라고?
주석하는 만리안석을 눈앞에 가져다 대고 열심히 살폈다. 흠집 하나 없기에 살피고 할 것조차 없었다. 이리저리 굴려보고 만져보고 관찰했으나 색상이 신비롭다는 것을 제외한다면 보통 구슬과 다를 게 없었다.
“값은 좀 나가겠는데…….”
극상품이니 제대로 된 물주를 만나면 꽤 값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극상품 야명주 몇 개로 성을 살 수 있다는 소문도 있으니, 어쩌면 이 보석으로 백화루를 살 수 있을지도?
보석에 별 관심이 없는 주석하는 다소 실망했다. 기껏 이걸 손에 넣으려고 죽음을 감수했다니. 어쩌면 신창패존이나 귀군, 심지어 우설금이 더 이상한 사람일지도 모른다. 아무리 값진 보석이라도 목숨에 비할 가치는 아니지 않은가.
만 리를 볼 수 있다면 사용법이라도 알아야 하는데 한참 관찰했으나 별다른 특징을 찾지 못했다.
“에이, 모르겠다. 쓸모없다면 팔아서 백화루 사는데 보태야지.”
그렇게 포기하니 마음이 가벼워졌다. 주석하는 만리안석을 다시 원래대로 상자에 넣었다.
갑자기 피로가 몰려왔다. 그는 눈을 감고 잠에 빠져들었다.
***
아침부터 비마표국 사람들은 겁에 질려 있었다.
잠에서 깨어 밖으로 나간 주석하는 어리둥절했다. 여기저기에서 허둥대는 모습이 보였다. 어젯밤 패존이 등장했을 때보다 더 혼란스러웠다.
마침 도수가 한쪽에서 유심히 구경하고 있었다.
“무슨 일이야?”
도수가 말없이 한쪽 벽을 가리켰다. 벽에 한 인물이 마치 잠든 것처럼 주저앉아 있었다.
“부표두?”
“죽었어.”
어젯밤까지 멀쩡했던 부표두가 주막 벽에 기대고 죽어 있었다. 어젯밤에 표두가 신창패존에게 죽고 지금은 부표두마저 죽었으니 이 표행 책임자가 사라졌다고 봐야 했다.
“어쩌다가?”
“아무도 모르지.”
연이은 책임자의 죽음에 표국 사람들의 전전긍긍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무슨 일인지 모르니 당연히 불안하다. 눈치 빠른 이들은 이미 도망치고 없었다.
사람이 죽었는데도 왜 죽었는지 누가 죽였는지 앞으로 누가 죽을지 전혀 모른다는 사실이 공포심을 자아냈다. 주석하도 어떻게 된 일인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어젯밤에 일이 마무리된 게 아니었던가?
그를 알아본 한 무리의 표국 사람들이 다가왔다.
“대협…….”
“네, 말씀하세요.”
“지금 현재로는 저희 표국은 표행을 중단할 수밖에 없습니다.”
주석하는 밖에 세워진 마차와 수레를 보면서 그의 말을 이해했다. 누가 목숨을 걸고 표행을 계속하고 싶을까.
그들은 머뭇거리면서 주석하의 눈치를 봤다.
“말씀하시죠.”
“……그래서 말인데 대협께서 저희를 보호해주실 수 있습니까?”
무슨 말인지 금방 이해했다. 그들은 어젯밤에 주석하의 무위를 눈으로 봤다. 무려 신창패존에게도 꿀리지 않는 엄청난 무위였다. 비록 어제는 표두의 죽음으로 끝났지만 만일 주석하가 아니었다면 더 엄청난 일을 치렀을지도 몰랐다.
이들은 지금 호북의 만진장으로 이 물건을 싣고 가야 한다. 어젯밤 신창패존과 귀군이 무엇을 노렸는지 모르는 상황이니 앞으로 닥칠 위험이 두려웠다. 현재 상태로는 모두 호송 물건을 버리고 도망칠 판국이었다. 오늘 아침 부표두가 원인 모르게 죽은 사건은 이들의 두려움에 불을 질렀다.
그들은 만일 주석하가 옆에서 도와준다면 표행을 계속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물론 지금까지 주석하 일행은 이들과 함께 움직였다. 하지만 그 일당이 너무 싸고 어제 같은 사건이 발생하기 전에 맺어진 계약이었다. 그 돈을 받고 목숨을 걸 사람이 없다고 생각하기에 그들이 사정하는 것이다.
만일 물건을 버리고 도망치면 비마표국의 신뢰는 땅에 떨어질 것이기에 그들은 어떻게든 주석하를 잡는 것이 최선이었다. 그나마 주석하가 곁에 있다면 조금은 안심해서 표사나 쟁자수를 설득할 수 있을 테니까.
“일당을 다섯 배 올려드리겠습니다.”
나쁘지 않은 조건이었다. 어차피 주석하도 뇌군을 만나려고 만진장으로 가야 한다. 그리고 그 물건이 사라졌으니 앞으로는 추가로 사건이 터질 가능성이 거의 없었다. 부표두의 죽음은…….
그는 눈으로 우설금을 찾았다. 역시 우설금은 모든 일에 초연한 사람처럼 주막 한쪽 구석에서 아침을 먹고 있었다.
“그렇게 하지요. 앞으로 여러분의 안전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주석하는 기쁘게 수락했다. 그 돈이면 앞으로 여비가 부족해서 고민할 일이 없다.
비마표국 사람들은 그에게 감사하며 죽은 표두와 부표두의 시신을 땅에 묻었다.
자신에게 쏟아지던 관심이 거두어지자 주석하는 우설금의 탁자 옆으로 지나가면서 조용히 물었다.
“왜 그랬습니까?”
우설금은 그의 시선을 조금도 개의치 않는 듯 빤히 그를 쳐다보았다. 여전히 그녀는 무표정이었다.
잠시 서로 시선을 마주하던 그녀는 시선을 거두고 밥 먹기를 계속했다. 그녀의 나직한 대답이 들려왔다.
“확인해봤을 뿐이죠.”
주석하는 조금 화가 난 표정으로 그녀를 노려보다가 걸음을 옮겼다.
아마도 우설금은 향낭에서 만리안석이 사라진 사실을 믿지 않았을 것이다. 그녀는 마차 내부나 수레 안, 또는 표국의 다른 사람이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표두가 죽었으니 부표두에게 물어볼 수밖에.
사실 표두도 나무상자 내부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몰랐을 테니, 부표두라고 알 리가 없었다. 부표두에게서 뜻한 바를 얻어내지 못한 우설금은 당연히 비밀유지를 위해 부표두를 죽여 입을 막았을 테고.
그녀가 마교란 점을 알기에 주석하는 이런 추리가 어렵지 않았다. 실제로 우설금은 목적을 위해 다른 사람을 서슴없이 죽였으니까.
주석하는 한쪽 구석에 앉아 밥을 먹었다. 가슴이 무거웠다. 자신이 마교와 얽힌 것도 불안했고 우설금처럼 예쁜 여자가 실제로는 잔인하기 짝이 없는 살인마란 사실도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품속에 숨긴 만리안석을 그녀에게 들킬지도 모른다는 불안감도 한몫했다.
***
주석하의 예상대로 이후의 여정은 편안했다.
신기하게도 흔한 산적의 습격마저 없었다. 비마표국 사람들은 이것을 주석하 덕분이라 여겨 그에게 감사했다. 자연스럽게 주석하의 목도 뻣뻣해졌다. 그렇다. 이 맛에 세상을 산다.
주막에 들렀을 때마다 주석하는 두 가지 점에 주목했다.
하나는 우설금. 우설금은 호북까지 그를 따라왔다. 이전처럼 항상 일정 거리를 유지하면서 같은 방향으로 여행하는 사람인 것처럼 위장했다. 표국 사람들도 이제는 그러려니 하는 눈치였다. 그녀가 부표두를 죽였다고 의심하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주석하도 어느새 그녀의 존재를 신경 쓰지 않게 됐다.
다른 하나는 뒤늦게 강호를 떠도는 소문이었다.
“화산파와 흑천교가 붙었다더군.”
“무려 검존과 혼군이 맞붙었었다고? 누가 이겼는데?”
“흐지부지 끝났나 봐. 그 둘이 싸우면 볼만했을 텐데.”
“아쉽군.”
신기하게도 주석하에 관한 소문은 어디에도 없었다. 검존과 혼군이 싸우려고 몇 초식 교환했다가 제자들이 말려서 그만두었다는 소식이었다. 대부분 세기의 대결을 못 봐서 아쉬웠다는 이야기였고 말린 사람 중에 놀라운 무공 소유자가 있었다거나 외부인인 주석하가 그들과 비등한 내공을 소유하고 있었다는 말은 전혀 들리지 않았다.
“거참 이상하지.”
주석하의 의문에 혈혼도객이 해답을 내놨다.
“그만큼 사람들이 정파십존이나 흑도팔군을 신성시한다는 뜻입니다. 그들은 신이니까 사람들은 그들 이외는 관심을 두지 않지요.”
명성이 이롭지 않다지만 한편으로는 서운했다.
다른 소문에 따르면.
“신창패존과 귀군이 주막에서 만나서 다투었다네.”
“주막에서 왜?”
“모르지. 술 마시다가 객기를 부렸다는 소문도 있고 표국의 물건을 털려는 귀군을 패존이 막았다는 소리도 있고. 어쨌든 그게 중요하진 않잖아? 패존과 귀군의 대결이 중요하지.”
“그렇지. 누가 이겼는데?”
“박 터지게 싸웠는데 무승부였다네. 표국이 무사했으니 패존이 이겼겠지?”
이 소문 역시 주석하에 대해선 일언반구조차 없었다. 우설금도 등장하지 않았다.
역시 명성을 얻기란 정말 힘든 일이구나. 주석하는 강호의 섭리를 다시 깨닫는 기분이었다.
현 무림은 정파십존과 흑도팔군이 지배하는 시대다. 그들이 아니라면 사람들은 딱히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래, 유명해지면 오히려 피곤한 법!”
주석하는 쓰라린 현실을 가슴에 묻었다.
그를 본 도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너 관종이었냐?”
“뭔 소리야?”
가끔 도수는 알 수 없는 말을 했다.
호북에 들어서고 고개를 넘었을 때 드디어 만진장이 보였다.
나지막한 야산을 두르고 있는 만진장(萬陣莊)은 예상외로 규모가 어마어마했다.
만진장 앞에서 주석하는 결의를 다졌고 도수를 비롯한 녹윤영은 호기심을 드러냈다. 유비연은 어딘지 내키지 않는 표정이었다.
비마표국 사람들은 이제 표행이 끝났다며 홀가분한 표정이었다.
높은 담장을 따라 한참 걷다 보니 그제야 높은 솟은 대문이 눈앞에 등장했다.
표국 행렬이 문 앞에 도착하자 안에서 하인 몇 명을 대동한 나이든 중년인이 나타났다.
“만진장 총관 방순이라 하오.”
방순 총관은 대외적으로 무척 유명한 사람이었다. 흑도팔군의 일인인 뇌군을 만나려면 먼저 방순을 거쳐야 하기 때문이다. 뇌군은 사실상 흑도 연합인 흑련의 군사였기 때문에 그에게 줄을 대려는 이가 무척 많았다.
개의 가치는 주인을 따라가는 법이다. 뇌군의 역할이 사파에서 중요해질수록 자연스럽게 방순의 가치도 올라갔다. 방순은 요즘 일파의 장문인에 버금가는 위세를 누리는 중이었다.
“비마표국입니다. 물건을 가져왔습니다.”
방순은 목을 빳빳하게 세우고 마차와 수레에 담긴 물건을 안으로 들이라고 명했다.
“보시다시피 지금 저희 장원이 손님맞이로 조금 바쁩니다. 대표만 들어오시고 다른 분들은 돌아가시지요.”
애초에 많은 표국 인원이 모두 환대를 받으리라고는 생각지 않았기에 비마표국에서는 현재 서열 최고 표사, 한 사람만 들어갔다. 주석하 일행은 거리낌 없이 따라서 들어갔다.
예상보다 많은 인원에 주름살을 깊게 패던 방순이 버럭 소리쳤다.
“한 사람만 들어오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