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화 만진장 (1)
무심코 안으로 들어가던 주석하가 걸음을 멈췄다.
방순이 흉흉한 표정을 지으며 인상을 찡그리고 있었다.
“한 사람만!”
주석하는 문간에 서서 장원 내부와 밖을 번갈아 쳐다봤다. 어째 쉽게 들어갈 줄 알았더니 그렇지도 않은 모양이다.
그가 뚱한 표정을 짓자 방순이 목을 가다듬으며 재차 경고했다.
“한 사람이라고 했소!”
찝찝한 표정으로 주석하는 도수에게 손짓했다.
“에이, 인심 고약하군. 가자, 가!”
다시 밖으로 나오면서 주석하는 백화루 주인보다 만진장 총관이 더 좋은 자리가 아닌지 심각하게 고민할 뻔했다.
표사 홀로 남자 방순이 나직하게 물었다.
“물건을 가져오셨습니까?”
영문을 모르는 표사는 눈만 깜박였다.
“어허, 중요한 물건이 있을 텐데. 설마 수레에 싣고 온 것은 아니겠지요?”
그제야 표사는 죽은 표두와 부표두가 떠올랐다. 이 표행은 겉으로 드러난 것처럼 단순하지 않았다.
표사의 행동이 이상하자 방순이 다시 물었다.
“책임자 맞습니까?”
“그, 그게 말입니다…….”
표사는 오는 동안 발생했던 사건을 털어놓았다. 그 물건의 행방을 알 만한 사람이 모두 죽었다는 말에 방순이 기겁했다. 사실 수레에 싣고 온 책자나 장신구는 위장 물품이라 만진장도 필요가 없었다.
그 물건이 사라졌다니 방순은 눈앞에 캄캄했다. 뇌군이 알면 경을 칠 일이었다.
어떻게든 해명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그는 다시 물었다.
“사건을 제대로 아는 사람 있습니까?”
“방금…… 들어오려던 사람이 우리가 고용한 용병인데…… 그 사람이 그때 침입자와 싸웠습니다. 표두가 죽을 때도 가장 가까이 있었고요.”
방순은 금방 쫓아냈던 사람을 떠올렸다.
곱상한 청년 둘과, 이상하게 생긴 한 놈, 불에 탄 듯 시커먼 놈에 예쁘장한 낭자였다. 용병이라면 그 시커먼 놈? 별로 마음에 드는 모습은 아닌데 어쩔 수 없이 불러야 하나.
“그럼 그 한 사람만 들어오라고 하시오.”
지금 한 명을 더 들이는 것도 방순이 많이 양보한 것이었다. 뇌군은 시끄러운 것을 싫어하는 데다 지금은 만진장에 중요한 일이 있어서 외부 인사가 들어오면 안 되는 때니까.
잠시 후 주석하가 다시 불려왔다.
시커먼 놈이 들어올 줄 알았는데 제일 투덜거리던 얼굴 반반한 녀석이 들어오자 방순이 미간을 찡그렸다.
“당신이 그날 표두가 죽을 때 옆에 있었다던데 그렇소?”
주석하는 바로 총관이 궁금해하는 내용을 간파했다. 역시 만리안석의 행방을 묻는 것이다.
“그렇습니다만.”
“그 물건에 대해 알고 있소?”
“당연히 압니다만?”
“그 물건은 어디에 있소?”
“흠, 총관님. 전 비마표국 사람이 아닙니다. 제가 설명해드려야 할 이유가 있는지요?”
“이 사람이!”
방순은 버럭 소리 질렀다가 주석하가 보통내기가 아니라 생각하여 바로 목소리를 낮췄다. 어쨌든 지금은 물건의 행방을 아는 것이 급했다.
“이보게, 알았네. 차분하게 말해보게.”
“총관님, 그 물건 때문에 말입니다. 두 사람이 죽었고 무려 신창패존과 귀군이 연관되어 있습니다. 바로 말씀드릴 단순한 사안이 절대 아니지요.”
주석하는 최대한 궁금증을 끌어올렸다.
신창패존과 귀군이라는 이름이 나오자 방순의 입이 떡 벌어졌다. 이 사건은 그의 손에서 끝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저는 뇌군께 직접 아뢰겠습니다.”
주석하의 선언에 방순의 눈이 동그래졌다. 감히 주군의 별호를 입에 올리다니. 그의 주군은 흑도팔군의 일인이자 대단히 무서운 자다. 인근 사람들도 이 만진장의 진정한 주인이 뇌군임을 모른다.
표두가 죽은 사건도 눈앞의 주석하란 인물도 평범하지 않다고 확신한 방순이 바로 꼬리를 말았다.
“알겠네. 지금 당장은 주군께서 바쁘시니…… 일단 장원에서 머무르게나.”
방순이 한발 물러섰다.
주석하가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까 보셨다시피 전 일행이 있어서 말입니다. 일행과 함께 움직여야 합니다만.”
방순의 안면이 더욱 일그러졌다. 평소라면 허용해줄 수 있지만 지금은 좀……. 하지만 칼자루를 쥔 사람은 주석하였다.
어쩔 수 없이 방순은 요구를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 그는 하인을 보내 일행을 데려오라고 지시했다.
도수를 비롯하여 모두가 모였다.
그들을 세워놓고 방순이 경고했다.
“지금 이곳에는 귀빈들이 와 계시네. 아마 그 회합이 끝난 후에야 주군을 만날 수 있을 거네. 조용히 정해진 처소에서 기다리게.”
마음에 들지 않은 조치였으나 장원에 들어온 것만도 다행이었다.
안내하는 하인을 따라가는 주석하 일행에게 방순이 다시 경고했다.
“이곳에는 위험한 기물이 많으니 함부로 다니지 말게.”
그런 경고를 마음에 담아둘 주석하가 아니었다.
그들은 하인을 따라 정문 부근에 있는 작은 별채로 이동했다.
머무를 처소를 안내받으면서 주석하는 이것저것 물어봤다.
“귀빈이 오셨다고?”
“예, 제갈세가의 만사지존께서 오셨습니다.”
만사지존은 정파십존의 일인으로 현 무림맹의 군사를 맡은 자다. 뇌군이 흑련의 군사이니 정사를 대표하는 두뇌가 만났다는 뜻이다. 뭔가 심상치 않은 냄새가 났다.
“지존을 따라 다른 분도 몇 분 오셨습니다. 그러니 돌아다니지 마십시오. 이곳은 위험한 곳입니다.”
짧게 설명을 끝낸 하인이 바로 사라졌다.
“흐음, 뭔가 심상찮은데?”
전생을 돌이켜보니 이 무렵부터 정사 간의 싸움이 격화되었던 것 같았다. 당시 주석하는 최말단이라 관심이 없었다. 물론 지금도 딱히 끼어들 생각은 없다.
방안에 행낭을 풀어놓은 주석하는 녹윤영을 째려봤다.
“여기에 오면 뇌군을 바로 만나게 해주겠다고 한 사람이 누구더라?”
“그게요, 제가 뇌군을 아는 건 사실이에요. 예전에 할아버지랑 만난 적 있거든요. 만일 문전박대 당했다면 어떻게든 제가 수를 썼을 거라고요.”
녹윤영이 열정적으로 반박했다.
도수가 바로 딴지를 걸었다.
“네가 하는 게 다 그렇지! 괜히 데려왔어!”
“터지고 싶냐?”
티격태격하는 두 사람을 주석하는 얼른 정리했다.
“그럼 뇌군을 만나면 꼭 신세를 지도록 할게.”
주석하는 만진장에 들어온 김에 많은 정보를 얻고 떠나겠다고 다짐했다.
***
만진장 깊숙한 서재에서는 서탁 앞에 앉은 한 노인이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희끗희끗한 머리, 마른 얼굴, 주름진 이마로 보아 노인의 나이는 이순을 가볍게 넘었다.
흡사 송곳 같은 날카로운 눈빛을 보이는 그의 이름은 뇌군(腦君). 사파 연합인 흑련의 군사(軍師)이자 흑도팔군의 일인이었다. 무공은 흑도팔군 가운데 가장 낮았으나 누구도 그를 다른 흑도팔군에 비해 약하다고 생각지 않았다.
그는 무공이 아니라 진법이나 의술의 달인이었고, 세 치 혀로 무림을 좌우하는 책략의 대가였으니까. 흑도팔군의 누구도 감히 그를 경시하지 못했고, 정파십존은 그를 다른 흑도팔군보다 훨씬 위험한 존재로 간주했다.
뇌군은 방금 전서구를 통해 전달된 양피지를 읽었다. 최근에 무림에서 일어난 각종 사건을 모은 소식이었다. 그가 무림 곳곳에 뿌려놓은 정보원들이 수고한 내용이다.
“패존과 귀군의 싸움에 다른 인물이 개입했단 말이지…….”
최근 떠도는 소문에 패존과 귀군이 몇 차례 초식을 나누다가 싱겁게 헤어졌다는 내용이 있었다. 강호 최강고수의 다툼은 무림인들의 주목을 받지만 그들도 사람이니 있을 수 있는 이야기였다.
거기까지는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별일 아니었으니까. 그런데 오늘 날아온 정보는 내용이 조금 달랐다.
“실제로는 넷이었다고?”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패존과 귀군이 누군가. 그들과 대적할 자는 강호에서 손꼽을 숫자밖에 없다. 만일 다른 정파십존이나 흑도팔군이 있었다면 사람들이 모를 리 없다. 그들은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키니까.
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다른 십존이나 팔군은 아니었다는 의미다. 그런데 그들과 비슷한 고수가 또 있다고? 더욱 믿기 어려웠다.
최강고수는 하늘에서 갑자기 뚝 떨어지지 않는다.
뇌군은 예전에 보고받았던 내용과 오늘 다시 온 정보를 종합했다. 문득 패존과 귀군이 싸웠다는 고개가 호북으로 넘어오는 주요 관도란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지금 그가 기다리는 만리안석을 호송하는 표국도 공교롭게도 이 길을 통해 오고 있었다.
“설마…… 연관성은 없겠지.”
어쩐지 불안했다. 만리안석은 최근에 그가 가장 신경 쓰는 물건이었다.
만리안석은 서역 배교의 신물이었고, 대략 오십여 년 전에 우연히 중원으로 들어왔다. 배교의 신물이 왜 중원에 나타났는지 그때 어떤 신물이 등장했는지 아는 사람은 없다. 그만큼 당시에도 극비였다.
다른 신물과 함께 만리안석은 곧바로 사라졌고 최근에 우연히 다시 나타났다는 소문을 들었다. 뇌군은 재빨리 그 행방을 수소문했다.
그 가치를 전혀 모르는 한 상인의 집에 보관되어 있던 만리안석을 뇌군은 심복을 통해 고가에 사들였다. 심복은 표국을 통해 다른 물건과 위장하여 비밀리에 이곳 만진장까지 옮겨오는 중이었다.
그런데 만리안석의 도착이 예정보다 늦어지고 있었다. 덕분에 노심초사 만리안석에 신경을 곤두세우던 뇌군이었다.
문을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총관 방순이 들어왔다.
“주군! 문제가 생겼습니다.”
“뭔가?”
“그 물건이…… 사라졌습니다.”
과연 불안이 현실로 드러났다. 안색이 급변했던 뇌군은 바로 마음을 진정시키고 조용히 물었다. 지금 그가 분노한다고 해서 바로 해결될 일도 아니니.
“어떻게 된 거지?”
“호송 도중 사건이 터졌고 표두, 부표두가 모두 죽었습니다. 지금 도착한 책임자는 그 물건을 전혀 모르는 눈치였습니다.”
“정말 모르는 게 확실한가? 믿을 수 있나?”
“그자는 물건이 있었다는 것조차 모르는 듯했습니다. 다만…….”
뇌군이 눈썹이 쓱 올라갔다.
“표두가 죽을 때 패존과 귀군이 있었나 봅니다.”
역시 그 사건과 만리안석이 연관되어 있었다. 가장 우려했던 일이었다. 그는 머릿속으로 두 기인의 다툼과 표행을 연결해봤다. 만일 만리안석을 그 둘 중에 한 사람이 차지했다면 이는 보통 문제가 아니다.
문득 방금 전달받은 정보가 생각났다. 그 자리에 두 명의 고수가 더 있었다고? 설마 그자들이 가져간 건가? 그 둘의 정체는 전혀 알려진 바 없었다. 패존이나 귀군에게 물어보면 간단할 일이지만 그들의 명예와 관련되는 이상, 또 서로 대립하는 이상 알려줄 리가 없다.
“아쉽게도 어쩔 수 없나…….”
“주군, 그런데 그 싸움을 목격한 인물이 있습니다. 표행을 같이한 자인데 표사는 아닌 듯하고…….”
방순이 주석하를 설명했다.
그 일이 뇌군의 흥미를 끌긴 했으나 만리안석의 행방을 쥔 결정적 인물은 아닌 듯했다. 다만 패존과 귀군의 싸움을 봤다니 추가 정보를 얻을 수 있어 보였다. 다만 만사지존이 방문한 이때 급히 만날 인물은 아니었다.
“알았다. 그자들을 나중에 만나보겠다. 잘 감시하도록.”
뇌군은 방순을 내보내고 생각에 잠겼다.
***
조용히 기다리라고 해서 순순히 말을 들을 주석하는 아니었다.
더구나 이곳은 용담호혈이나 마찬가지인 뇌군의 만진장 아닌가. 뇌군에게서 많은 정보를 얻어내려면 그도 미리 준비해야 한다.
밤이 되자 주석하는 조용히 일어났다.
삼경이 지난 후라 장원은 고요에 잠겨 있었다. 바로 그가 움직일 시간이다.
주석하가 방을 떠나려 할 때 갑자기 누군가가 발목을 잡았다.
“헉!”
제 발이 저려 아래를 바라보니 도수가 피식 웃고 있었다.
“어디 가는데?”
젠장! 도수 이 녀석은 누가 자객 아니랄까 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