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검천하-70화 (70/273)

70화 만진장 (2)

“돌아보려고.”

“총관이 가만히 있으랬잖아?”

“가만히 있으면 그게 사람이냐? 가축이지.”

주석하의 대답에 도수가 낄낄대며 웃었다. 도수가 주섬주섬 옷을 챙기고 검까지 들었다.

“크크, 그렇지! 나도 같이 가야지!”

과연 의리의 사나이라고 치켜세워 준 후, 주석하는 조용히 방문을 닫았다. 여기저기 굴러다니며 자는 다른 사람들은 내버려 두었다.

장원은 달빛마저 없어 깜깜했다. 정원을 울창하게 덮은 고목이 바람에 기괴한 소리를 냈다. 귀신을 떠올리며 벌벌 떨 장면이었지만 주석하는 귀신을 믿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용감하게 화원을 가로질렀다.

“여기까지 왔는데 만진장 내부를 구경해봐야지.”

어차피 걸리면 그냥 싹싹 빌면 된다. 몰랐다고 발뺌해보고 그래도 안 되면 배 째라고 하고. 설마 죽이기야 하겠어.

화원의 돌판을 밟으며 장원 안으로 깊숙이 들어가자니 도수가 나직이 속삭였다.

“너, 만진장이 무슨 뜻인 줄 알아?”

만진장? 뇌군이 장원 이름을 왜 그렇게 지었지? 굳이 그걸 알아야 하나?

“몰라. 무슨 뜻인데?”

“이 머리로 고민해봤는데 온갖 진이 쫙 깔려있다는 소리 같아.”

“진?”

진법(陣法) 이야기는 많이 들어봤으나 정작 경험해본 적은 없었다. 기껏 군에서 사용하는 학익진이라든가 용병술 관련 진법은 칼받이 하면서 조금 경험하긴 했다. 물론 전생에서.

기관진식이라면 제갈세가가 엄청 유명하다. 그 제갈세가의 만사지존과 쌍벽을 이루는 사람이 바로 뇌군 아닌가. 즉 도수의 뜻은 이곳 만진장이 뇌군의 거처이니 이곳에도 무수히 많은 진식이 깔려있을 가능성이 있단 뜻이었다.

주석하는 진법에 대해 전혀 몰랐기에 두려워하지 않았다.

“진법이라 해봐야 별것 있어? 그냥 깨버리면 되지.”

물론 최악의 경우다. 뇌군과 싸우러 온 게 아니니까 일단 조용히 진법을 풀어보고.

“그거 쉽지 않을 텐데…….”

“넌 진법 경험해봤어?”

“당연하지! 자객 임무 중에 뜻하지 않게 진법에 걸릴 때도 있으니까.”

가슴을 쫙 펴는 도수를 보니 그래도 안심이다. 아무래도 경험 있는 이 녀석을 데리고 나와 다행이다.

화원의 고목에 숨었다가 담벼락에 숨었다가 이리저리 뛰어다니기를 여러 차례. 두 사람은 만진장의 커다란 전각을 몇 개 지났다.

이곳은 지금까지 경험했던 다른 장원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넓었다. 다만 그렇게 많은 사람이 사는 것 같지는 않았다.

“뇌군을 찾게?”

“아니. 오늘은 그냥 둘러만 보려고.”

첫날부터 무리할 필요 없다고 생각한 주석하는 이리저리 만진장을 구경했다. 비록 밤이라 제대로 보이지 않았으나 화원의 운치는 제법이었다.

전각 뒤쪽으로 커다란 연못이 있었고 연못 한쪽에 작은 정자가 세워져 있었다. 잔잔한 연못에 별빛이 반짝여 한 폭의 그림 같은 풍경을 그려냈다.

홀린 듯 정자로 접근하던 주석하의 발걸음이 뚝 멈췄다.

이 밤에 정자에 두 사람이 앉아 있었다. 작은 촛불을 켜놓고 바둑에 심취한 두 사람. 야밤에 귀신놀음이라더니 무슨 바둑을 이 밤에 두는 건지.

살짝 미간을 모으며 주석하는 조심스럽게 귀를 기울였다.

딱-

딱-

바둑돌 놓는 소리가 선명한 가운데 바람을 타고 두 사람의 대화가 들려왔다.

“그래서 실패했나?”

“이상한 녀석이 끼어들어서 말이지.”

“이상한 녀석?”

“설명하기 조금 힘든데…… 예상외로 공력이 대단하더라고.”

“허허, 그대가 칭찬할 정도라면 대단한 녀석이겠군.”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었다. 다만 놀랍게도 한 사람의 음성은 낯이 익었다. 누군지 금방 떠오르지 않았지만.

저 둘 가운데 한 사람이 뇌군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주석하는 더욱 가까이 접근했다.

“석하야, 위험하지 않겠어?”

“괜찮아.”

“여기엔 진식이 깔려있을지도 몰라. 게다가 저 사람들은 고수일 테니 우리의 인기척을 느낄지도…….”

걸리면 어떤가. 주석하는 신경 쓰지 않고 정자로 다가갔다. 물론 안 걸리는 게 최상이기에 최대한 조심해서 움직였다.

그의 소매를 잡은 도수의 손이 떨리고 있었으나 주석하는 더욱 욕심을 냈다.

바람을 타고 대화가 들려왔다.

“다행스럽게도 일검신성이 알아낸 비밀을 모두 들었다네. 일검신성의 죽음을 빌미로 혼천교를 치려고 했던 작전이 수포로 돌아간 게 아쉬울 뿐.”

일검신성? 바로 가적성의 별호가 아닌가.

그제야 주석하는 정자에 앉은 사람의 정체를 알아냈다. 놀랍게도 이 말을 한 사람은 화산파의 자하검존이었다. 정파의 초강고수가 사파 군사인 뇌군의 장원에 있다니.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그렇다면 맞은편의 사람은 뇌군일까?

딱-

바둑돌 소리는 변함없이 흘러나왔다.

다만 바둑과 무관하게 두 사람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주석하는 바둑이 위장 행위라고 확신했다.

“내가 급히 여기까지 온 이유는 바로 일검신성이 캐낸 그 비밀 때문일세. 그 중요성이 모든 일을 뛰어넘는 데다 급하기까지 하니 당장 자네를 만나야겠더라고. 그런데 자네가 만진장에 갔다고 하지 않겠나. 어쩔 수 없이 나도 친히 이곳에 올 수밖에 없었네.”주석하의 머릿속이 빠르게 돌아갔다. 자하검존의 맞은편에 있는 사람은 뇌군이 아니었다. 오늘 들은 정보와 대충 맞추어보니 그는 만사지존이라 알려진 제갈세가의 가주, 제갈휘로 추정됐다.

제갈휘가 뇌군과 회담을 잡고 만진장을 방문했고, 하필이면 이때 자하검존이 제갈휘를 찾아 제갈세가를 찾았던 모양이었다. 그 결과 자하검존은 만진장까지 찾아오게 됐다. 자하검존이 이곳에 도착한 때는 오늘이거나 아니면 어제쯤이었으려나. 그러니 두 사람이 야밤에 저러고 있는 것이겠지.

“그 비밀이 중요한가? 그렇다면 이곳에서는 좀…….”

“크흠, 상관없네. 뇌군이 들어서 안 될 내용도 아니고……. 일부러 들려줄 일은 없지만. 뇌군도 굳이 들으려 하지 않을걸? 다만 내일 회담에 앞서 자네가 조금 알아두는 게 나을 거야.”곧 가적성이 들고 온 비밀이 누설된다고 생각하니 주석하는 한껏 귀를 세웠다. 뇌군의 비밀을 염탐하려고 했더니 뜻밖에 가적성의 비밀을 알게 됐다.

전생의 기억에 따르면 이 무렵부터 정사 간에 심각한 반목과 대립이 일어나 양쪽 모두 큰 타격을 입었고 그로부터 얼마 되지 않아 마교가 준동했다. 당시 칼받이에 불과했던 그는 마교와 중원 무림의 대립 과정을 알지 못했다.

다만 가적성의 비밀이 중요한 역할을 했을 거라는 추정은 가능했다.

귀를 세운 주석하에게 그들의 다음 대화는 격랑을 불러왔다.

“무한회귀공이라고 들어봤나?”

무한회귀공! 현재 주석하가 가진 회귀의 열쇠는 십만대산 아래에서 들었던 뇌군이라는 말과 꿈에서 얼핏 들은 무한회귀공이었다. 이 둘은 어떤 식으로든 연결되어 있다고 그는 확신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무한회귀공이 나왔다. 가적성이 알아낸 마교의 비밀이 무한회귀공이었나?

주석하는 뛰는 가슴을 간신히 진정시키고 그들의 대화에 온 정신을 집중했다.

“흠, 들어봤네.”

“역시 기억하고 있군.”

“당연하지. 오십 년밖에 안 된 일 아닌가. 알만한 사람은 기억하지.”

오십 년? 주석하는 흑검문이 오십 년 전에 세워졌다는 사실을 기억했다. 또 오십 년 동안 규율에 묶여 덕양에 웅크리고 있어야 했다는 것도. 물론 지금 이들이 말하는 내용과 전혀 관련 없지만 같은 숫자여서일까? 갑자기 생각이 났다.

“그때 배교의 신물 몇 개가 중원으로 흘러들어왔지. 무한회귀공과 만리안석, 그리고…… 하여튼 당시에 갑자기 나타났다가 사라지지 않았나. 그때 사라진 무한회귀공이 마교에서 발견되었나 봐.”

“마교라…….”

만리안석이란 말까지 나오자 주석하는 충격을 받았다. 그의 손이 슬그머니 품을 더듬었다. 만리안석이 담긴 나무상자가 고이 잠자고 있었다.

무한회귀공과 만리안석의 기원이 같은 배교란 사실에 주석하는 자신의 운명이 이들과 강하게 엮여 있다고 느꼈다.

“마교의 교주, 천마가 무한회귀공을 익히고 있다고 하더군.”

“무한회귀공의 이능을 믿나?”

“못 믿지. 어떻게 천리를 어기고 사람이 시간을 거스른단 말인가? 말이 되는 소리여야지.”

“그렇지. 다만 배교는 워낙 이상한 술법이 횡횡하는 곳이라…….”

제갈휘가 말끝을 흐렸다. 그는 오십 년 전에 들었던 사건과 무한회귀공이란 마공을 되새기는 듯했다.

다시 자하검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가적성의 의견은 달랐네. 평범하거나 거짓이었다면 그가 목숨을 걸고 우리에게 알리지 않았겠지. 그는 천마가 무한회귀공을 이용해서 마공을 익히고 있었다고 하네. 마교가 가적성을 추적한 이유도 천마가 회귀했다는 사실을 알아냈기 때문이라네.”

“설마…….”

“안타깝게도 가적성이 알아낸 정보는 여기까지야. 자네에게 묻겠네. 무한회귀공의 이능이 진실이고 천마가 무한회귀공을 익혔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어쩌면 이미 현실에서 벌어지고 있을지도 모르네.”

“끙, 거짓말이겠지…….”

제갈휘의 신음이 새어 나왔다.

주석하도 충격을 받았다. 천마가 회귀자라고? 그만이 회귀자가 아니었다. 그가 회귀한 지점이 마교의 십만대산이란 사실도 의미하는 바가 컸다. 하지만 그는 천마를 본 적도 없다. 그를 회귀시킨 자는 뇌군이다. 어떻게 된 걸까. 무한회귀공을 두 사람이 익혔다고?

자하검존과 제갈휘의 대화는 겉돌았다.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는 두 사람이 진심으로 무한회귀공을 믿지 못하기 때문이다.

반면 주석하는 회귀를 경험했기에 이 모든 정보가 진실임을 안다. 그렇다 보니 그들보다 훨씬 빨리 사태를 받아들이고 파악했다.

“천마가 정말 그런 능력이 있다면…… 우리 누구도 천마를 상대할 수 없네. 회귀를 반복하며 무한히 긴 시간 동안 무공을 익힌 자를 그 누가 대적할 수 있겠나?”

“그렇지. 또 다른 현상도 생각해볼 수 있지.”

자하검존이 지금까지 생각했던 문제를 털어놓았다.

“만일 천마 외에 다른 회귀자가 존재한다면…… 그자는 어떤 모습일 것 같나?”

“엄청난 고수겠지. 미래의 완성된 고수가 과거로 회귀한다면, 또는 지금 이 시각으로 돌아온다면 그자는 어제와 오늘이 다른, 갑자기 능력이 확 바뀐 그런 사람으로 변하겠지.”제갈휘의 설명에 주석하는 뜨끔한 기분을 느꼈다. 바로 자신과 닮은 모습이어서다. 그는 흑검문의 천덕꾸러기 소문주였다가 회귀한 후부터는 무려 사천일살을 죽이는 초강고수로 변신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해. 만일 천마가 무한회귀공을 익혀 단순히 강해지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음모를 꾸민다면 우리 주변에 회귀자가 존재할지도 몰라.”

“어떤 경우라도 중원 무림으로 봐선 큰 위기일세. 대책을 세워야겠군.”

제갈휘와 자하검존의 대화는 계속 이어졌다.

주석하는 신경이 곤두섰다. 지금 이들의 대화는 그와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무한회귀공을 익히지 않은 그가 어떻게 회귀하게 되었는지 머리가 찌근거렸다.

이 비밀은 그뿐만 아니라 중원 무림의 앞날에도 큰 영향을 미칠 내용이다.

주석하의 안색이 하얗게 질리자 도수가 놀라서 그를 흔들었다.

“석하? 무슨 일이야?”

“으, 으응. 아무것도 아냐.”

“어째 몸이 안 좋아 보이는데?”

주석하와 도수가 다시 정신을 가다듬었을 때였다.

“쥐새끼가 숨었구나!”

자하검존이 손을 홱 뿌리자 하얀빛이 번개처럼 날아왔다.

눈앞으로 다가오는 빛을 피해 주석하는 반사적으로 나무 뒤로 몸을 숨겼다.

콰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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