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검천하-71화 (71/273)

71화 만진장 (3)

자하검존이 던진 것은 작은 비수였다.

주석하를 겨냥하고 날아든 비수는 그들이 기댄 나무에 박혔다. 다만 자하검존의 비수가 평범할 리 없었다.

우지직-

나무가 꺾이면서 거대한 줄기가 통째로 무너져 내렸다.

“허억!”

이제 들키는 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이 난국을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 난감했다.

휘익-

다시 하얀 빛이 날아들었다. 이번에는 두 개였고 그 빛은 정확히 그와 도수의 가슴을 겨냥하고 있었다.

생각할 틈이 없었다.

주석하는 도수를 밀치고 바로 몸을 날렸다.

콰직-

다시 비수가 나무를 스쳐 지나가면서 그들을 향해 거대한 나무가 무너져 내렸다.

“으윽!”

주석하는 자하검존의 의도를 짐작할 수 없었다. 그들의 목숨을 노리는 것 같으면서도 아닌 것 같기도 했다.

일단 지금은 몸을 피하고 볼 일이다.

그는 도수를 붙잡고 정신없이 화원 안으로 뛰어들었다. 지금은 자하검존에게서 멀어져야 했다. 현 상황은 여러모로 그에게 불리했다. 야밤에 염탐하다 걸렸으니 변명도 난감했다.

“뇌군의 끄나풀인가?”

“글쎄, 모르지. 어설픈 쥐새끼 두 마리야.”

“우리 대화를 들었겠지?”

“어차피 비밀은 아니지 않은가? 특히 마교 비밀은 널리 퍼져도 상관없네. 혹시 아나? 뇌군이 대책을 세울지. 자네도 회담하면서 뇌군에게 슬며시 운을 띄워 보게. 어떻게 반응하는지. 우리는 이 정보를 어떻게 유리하게 활용할지 고민하면 되네.”주석하와 도수가 사라진 뒤로 자하검존과 뇌군의 조용한 대화가 이어졌다.

***

“헉헉!”

주석하는 도수의 손을 잡고 정신없이 뛰었다. 두 사람의 발에 키 작은 화초가 채고 화원에 깊이 발자국이 새겨졌다. 지금은 그런 문제를 따질 겨를이 없었다.

“으아아, 미친놈!”

도수가 울분을 터트렸다. 그처럼 강력한 비수를 날리는 자를 처음 경험해서다. 하긴 정파십존인 자하검존은 지금까지 도수가 경험했던 인물과 차원이 다르니까.

“조용히 말로 할 것이지! 비수를 날려! 그것도 머리통에!”

달리면서도 길길이 날뛰는 도수를 향해 주석하는 낄낄대며 웃었다.

“안 맞았으니 다행인 거지.”

“그 자식 제대로 맞출 생각도 없었다고! 우리를 놀리려는 수작이야!”

도수도 자하검존의 의도를 정확하게 꿰뚫었나 보다.

그렇게 한바탕 웃으며 화원을 달리다 보니 문득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이곳은 만진장이다. 그것도 야밤이다. 두 사람이 이렇게 난리를 피우고 소리 질러도 아무 문제없는 건가?

주석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별빛이 내리는 화원은 평화로워 보였다. 저 멀리 보이는 전각도 변함없는 위용을 자랑했다. 세상은 여전히 잠에 빠져 있었다.

“여긴…… 경계 무사도 없나?”

“으아! 어딘가 있겠지!”

“하긴 우리가 걱정할 문제는 아니니까. 얼른 돌아가자.”

그들이 만진장을 걱정할 일이 있을까. 실없이 웃던 주석하는 자신들이 낯선 화원에 들어와 있음을 고려하여 숙소인 건물을 찾았다.

멀리 몇 개의 전각이 보이긴 했으나 어쩐지 익숙하지 않고 낯설었다. 조금 전에 이동하면서 익혔던 주변 지형이 쓸모없어졌다. 안타깝게도 지금은 야밤이라 어두웠고 심지어 은은하게 안개마저 내려앉고 있었다.

“여기가 어디지?”

“뭔 상관! 가다 보면 나오겠지!”

도수는 태평이었다. 주석하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화원이 망가진 거야 대충 몸으로 때우면 되지 않을까. 며칠 장원에서 허드렛일을 하며 해결해도 되고.

두 사람은 처소가 있던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얼마나 걸었을까.

화원이 끊어지지 않았다. 이상하게도 화원 밖 길도 보이지 않았다.

“이거 좀 이상하지 않아?”

주석하가 미간을 찌푸리자 도수가 피식 웃었다.

“왜? 진식이라도 설치되어 있어? 이렇게 넓은 곳은 진식을 펼치기 힘들어. 뭐…… 여기가 만진장이니 진식이 만 가지가 설치되어 있다지만…….”

무심코 중얼거리던 도수의 표정이 점차로 굳었다.

“하아! 씨불! 이거 진짜 진식인가?”

“네 녀석이 진식 경험이 풍부하다고 그러지 않았어?”

“물론! 당연하지! 나, 나야…… 경험이 많지!”

무림에서 사파 제일 두뇌라고 칭송받는 뇌군이 어찌 평범한 진식을 자신의 장원에 설치했을까.

현실을 깨달은 주석하는 지금까지와 달리 세밀히 주위를 관찰했다.

아무리 봐도 평범한 화원이었다. 다만 어둠이 내려앉아 구별이 힘들고 은은한 안개가 기묘한 분위기를 풍긴다는 것뿐.

“뭐, 상관있겠냐? 가다 보면 길이 나오겠지!”

도수가 먼저 앞으로 걸어갔다.

아무래도 저 자식은 진법 경험이 없는 게 분명하다. 그렇다고 해서 주석하도 별다른 방법이 있는 것이 아니어서 도수를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누가 한 말인지 모르겠으나 옛 현인의 좋은 명언이 떠올랐다.

아무리 험한 길일지라도 혼자가 아닌 둘이라면 외롭지 않다고. 둘이라면 무섭지 않다고. 도수가 옆에 있으니 겁날 게 없다.

계속 노력하다 보면 안 되는 일이 없으니, 걷고 걷다 보면 이 화원도 언젠가는 끝이 날 것이다.

***

날이 밝고 해가 높이 떠올랐을 때 정자에 세 사람이 자리 잡았다.

비밀리에 열리는 이 회의가 알려졌다면 세간의 관심이 집중되었을 것이다. 현 무림의 최강자는 아닐지라도 그 방향타를 잡은 두 사람이 마주했기 때문이다.

바로 무림맹의 군사인 만사지존 제갈휘와 흑련의 군사인 뇌군의 만남이다.

실상 이 회담은 제갈휘가 만진장을 방문하면서 성사되었고 회담 주요 내용은 최근에 벌어진 화산파와 혼천교의 갈등과 패존과 귀군의 격돌이었다.

“화산파에 온 손님을 혼천교에서 습격한 사건은, 그것도 무림의 존망을 짊어진 사람이었음에도 혼천교에서 살해한 일은 매우 유감입니다. 더구나 이를 따지러 간 화산파를 몰아세운 행위는 오히려 적반하장이지요.”제갈휘의 경고에 옆에 앉은 자하검존이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였다.

“혼천교에서 제대로 사과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냥 있지 않습니다.”

사건의 전말을 들은 뇌군이 살짝 표정을 일그러트렸다.

“혼천교에서 가 소협을 죽여서 무슨 이득을 보겠습니까? 이득도 없는데 그런 무리수를 둘까요?”

“혼군은 그전부터 가 소협이 지닌 비밀을 원했습니다.”

제갈휘와 뇌군의 대화가 점입가경이었다. 두 사람은 조금도 밀리지 않고 팽팽한 논리를 전개했다. 애초에 결론이 나기 어려운 주제였다.

자하검존은 화산파의 명예가 실추되었다고 여겨 두 군사의 회담에까지 이 문제를 들고 왔다.

뇌군은 이들의 논리 뒤에 숨은 공격성을 꿰뚫어 봤다.

최근에 무림맹과 흑련의 세력 분포는 무림맹의 우위였다. 예전과 비교하면 흑련이 많이 위축된 분위기였다. 무림맹에서는 이참에 확실하게 세력을 확장하려 했다. 그렇다 보니 무리수를 두는 것이다.

가적성의 죽음도 혼천교의 행위란 증거는 없다. 그런데도 무리하게 덮어씌웠고 혼천교에 쳐들어가기까지 했다. 이는 화산파에서 혼천교를 이 기회에 처리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실제 혼천교가 가적성이 죽음에 관여했는지 아닌지는 별개의 문제다.

뇌군은 열심히 논리를 펼치는 자하검존의 눈치를 살폈다.

‘무력에 자신이 있나 보군.’

본인의 무공에 더해서 화산파의 무력이 혼천교를 압도한다고 확신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뇌군은 최근의 혼천교 상황을 떠올렸다. 최근 들어 혼천교가 일대에서 세력을 확장하긴 했다. 아마 화산파에서는 그 부분이 심히 거슬렸을 것이다.

옆에 대치한 적이 점차 강해지는 꼴이니까. 더 커지기 전에 어떤 식으로든 자르겠다고 결론을 내려놓고 마침 사건이 터지자 몰아붙이는 게 확실했다.

무림은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곳이다. 뇌군도 그 사실을 안다. 다만 평소 겉으로라도 의와 협을 앞세우던 제갈휘와 자하검존이 이런 식으로 나오니 기가 막힐 따름이다.

“그래서 어떻게 하시겠다는 거요?”

“우리 화산에서는 혼천교에 정식으로 선전포고할 생각이오.”

자하검존은 전쟁을 하겠단 의지를 굽히지 않았다. 그 말을 제갈휘가 거들었다.

“흑련에서 혼천교를 돕는다면 무림맹에서도 화산파를 도울 거요. 오늘 본인이 여기까지 온 이유는 바로 이 사실을 알려드리기 위함이오.”

자하검존이 전쟁을 결심했다면 이미 회담이 무의미하다는 사실을 뇌군도 알고 있었다. 무슨 변명을 하더라도 꼬투리를 잡고 자신들이 내린 결론으로 끌고 갈 사람들이니까.

“알았소. 혼군에게 잘 이야기해 보겠소.”

당사자인 혼군이 이곳에 없으니 뇌군은 이런 정도로 수습할 수밖에 없었다. 무림맹과 흑련이 부딪히면 지금은 흑련의 손해니까.

“그리고 최근에 벌어진 신창패존과 귀군의 다툼을 들으셨소?”

이 사건은 뇌군 자신과도 엮인 문제였다. 물론 이 두 사람은 이 사실을 전혀 모른다. 심지어 만리안석이 관여되었다는 것마저도. 알면 더 골치 아파진다.

“그렇습니다만.”

“그 사건은 신창패존이 무림의 안녕을 위해 표국을 조사하려고 했는데 귀군이 훼방을 놓아 발생했소. 조만간 신창패존이 귀군에게 정식으로 항의할 거요.”오늘 제갈휘는 확실히 모든 문제를 더 키우려 한다. 무림맹과 흑련이 부딪히게 판을 키워서 흑련을 꺾으려는 의도가 보였다. 무림의 안녕이라니. 진실은 표국을 조사하려고 한 게 아니라 표국 물건을 강탈하려 한 거다.

그렇다고 뇌군은 진실을 밝힐 수 없다.

‘젠장, 이들이 날을 잡았군.’

무림맹이든 흑련이든 일사불란한 상명하복 조직이 아니다. 사실 뇌군이 흑련 군사이지만 혼군이나 귀군에게 사과하라고 할 자격은 없다. 이 사실을 제갈휘도 잘 알고 있다. 그런데도 이런 식으로 압박한다는 것은…….

정사대전을 벌여보겠다는 건가?

뇌군은 가슴이 답답해졌다. 어쩌면 훗날의 정사대전을 위한 명분 쌓기일지도 모른다. 적어도 지금의 무림맹은 껄끄러운 존재이기에 피해야 한다.

뇌군은 연신 그들을 달래며 만리안석을 떠올렸다. 이들이 만리안석을 노리고 표행을 의도적으로 습격했다면 이는 더 큰 일이다.

만리안석은 대체 어디로 갔을까? 뇌군의 시선이 옆의 화원으로 향했다.

***

주석하와 도수는 커다란 고목 아래 주저앉아 헉헉대고 있었다.

날이 밝았고 그들은 끊임없이 걸었다. 대체 무슨 화원이 이렇게 크냐고! 가도 가도 끝이 나오지 않았다. 흔한 길마저 보이지 않고 꽃이 만발하거나 나무가 우거진 숲만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참다못한 도수가 나무 위로 올라가서 주위를 둘러봤다. 놀랍게도 그들이 떠난 정자도 보이지 않았고 장원의 주요 전각마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끝없이 이어진 화원만이 눈에 들어왔다.

마치 드넓은 바다를 본 듯한 느낌에 기가 질린 도수는 간신히 입을 열었다.

“으아! 우린 진법에 빠진 거야.”

어쩐지 가도 가도 끝이 나오지 않더라니. 주석하는 눈을 게슴츠레 뜨고 도수를 노려봤다. 진법에 자신 있다고 했던 녀석이 누구였지?

정작 도수는 딴소리만 늘어놓았다.

“아무래도 뇌군이 우리를 혼내고 싶나 봐. 생각해봐! 뇌군의 진법을 우리가 깰 수 있을 리 없잖아? 애초에 상대하겠다고 힘쓴 우리가 잘못한 거지.”이 자식이 이렇게 바로 꼬리 내리다니! 하긴 어디를 봐도 싸울 대상마저 없지 않은가. 화초와 싸우겠다면 말리지 않겠지만.

주석하도 막막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시간이 얼마나 됐을까?”

“글쎄.”

“다른 사람들은 이 사실을 알까?”

혈혼도객이나 녹윤영 등이 무엇을 하고 있을지 궁금했다. 두 사람이 진법에 갇혔다는 사실을 알면 구하려고 할 텐데……. 괜히 그러다가 뇌군의 미움을 사면 큰일인데…….

“지금쯤 회담이 열렸겠지?”

주석하는 외모가 그려지지 않는 뇌군과 어젯밤에 본 제갈휘가 마주한 장면을 상상했다.

정작 자신은 여기에서 이러고 앉았으니 은근히 오기가 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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