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검천하-72화 (72/273)

72화 만진장 (4)

주석하는 하늘을 바라봤다.

여기에서 보는 하늘도 똑같았다. 공중으로 날아가면 이 진법을 벗어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다만 그가 새가 아닌 게 문제일 뿐.

땅바닥을 보니 일반 화원과 같다. 땅을 파면 이곳을 탈출할 수 있겠지. 다만 그는 두더지가 아니니 불가능하다.

결론은 옆으로 뚫을 수밖에 없고 옆쪽은 진법이 설치되어 있어서 진의 영향을 받는다. 평범한 방법으로는 뇌군의 진법을 뚫을 수 없다.

주석하는 자신의 머리를 딱 때렸다.

도수가 뚱한 표정으로 놀렸다.

“왜 그래? 갑자기 미칠 것 같아?”

“어젯밤에 이걸 그냥 깨버리겠다고 장담했던 내가 미워서 그런다.”

진법에 빠지기 전까지는 별것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막상 경험해보니 이건 다른 사람과 싸우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문제다.

“하긴, 나도 이런 진법을 처음 본다.”

도수가 툴툴대며 일어났다. 계속 이러고 있을 수는 없으니 방법을 찾아보자는 눈빛이다.

따라서 일어난 주석하는 용기를 냈다.

“좋아! 내가 바로 흑검문 소문주, 주석하 아니냐? 풍운채에서도 바위를 깨고 목책 더미를 날려버린 사람이다! 이깟 화원쯤이야 날려버리자고!”

방법이 생각나지 않으면 단순무식한 방법이 최고다.

이 진식도 일반적인 상황을 가정해서 만들었을 것이다. 진식이고 나발이고 압도적인 힘으로 눌러버린다면 해결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 어차피 주석하의 장기는 압도적인 내공 아니던가.

다만 그러려면 문제가 있다. 단전에 잠재된 기운을 살려야 한다. 혼군의 내력만으로는 한계가 있으니까.

“방법! 방법 있어?”

“당연히 있지.”

주석하는 지금까지 기댔던 고목을 살폈다. 높이가 대략 십 장은 되어 보이는 엄청난 높이와 사람 허리통 몇 명을 합친 굵기를 자랑하는 나무였다.

이 나무를 호신강기로 깨트려서 사방으로 날려버린다. 과연 진식이 나무가 폭사하는 그 위력을 감당할 수 있을지 확인해보겠다. 너무 단순무식한 방법인가?

혼군의 내력만으로도 이 나무를 깨트리기 어렵지 않겠지만 적어도 그보다 더 큰 힘을 이용해서 사방으로 비산시켜야 한다. 진법을 박살 낼 수 있도록.

진식이 강한지 그의 내력이 더 강한지 확인해보겠다. 실패하면 그때 다시 생각하고.

이런 곳에 잡혀 있으려고 회귀한 것이 아니니까. 이렇게 남에게 휘둘리는 삶은 정말 싫다고.

“수! 네가 해줄 게 있다.”

“뭔데?”

“검 갖고 있지?”

“당연히 있지.”

“그걸로 나를 찔러주라.”

“야이! 미친놈아!”

장난치냐고 말하려던 도수는 문득 예전에도 주석하가 부탁했던 이력을 떠올렸다. 검으로 공격해달라고 했던가. 무엇 때문인지 지금도 이해할 수 없지만 어쨌든 상처 입은 주석하는 상상 못 할 괴력을 발휘하곤 했다.

그렇다. 주석하가 그렇다면 그런 거다.

“괜찮겠냐?”

“당연히 괜찮지.”

“흐음, 그래? 알았다. 내가 평소 네놈에게 억하심정이 넘쳤는데…….”

도수가 눈을 부라리며 검을 쓱 들었다.

주석하는 고목을 마주하고는 등을 내밀었다.

“등을 찔러주랴?”

“날 아예 죽이지?”

도수는 싱글벙글 웃으며 주석하의 뒷태를 쓱 훑었다. 마침 찌르기 아주 좋은, 살집 가득한 부분이 눈에 들어왔다.

***

뇌군은 제갈휘와의 회담이 점점 불편해졌다.

갑자기 제갈휘 옆에 자하검존이 붙을 때부터 이런 식으로 흘러가리라 예상했었다. 정파십존이 누군가. 그런 위치의 두 사람이 뇌군을 압박하고 있었다.

지금 당장 흑련이 무림맹과 대적하기는 힘들다고 판단한 뇌군은 수세에 몰렸다.

그의 물건이었던 만리안석을 잃어버린 것도 정파십존 때문이었다. 다행히 그 물건을 그들이 가져가지 못했으니 불행 중 다행이었지만. 그 보상을 요구해도 아쉬울 판에 도리어 저들의 압박을 받고 있으니.

뭔가 분위기를 전환할 계기가 필요했다.

전전긍긍하고 있을 때 총관인 방순이 찾아왔다.

“주군, 손님이 뵙자고 합니다.”

뇌군을 비롯하여 모두의 안면이 살짝 일그러졌다. 지금 이 자리가 어떤 자리인가. 무림의 정세를 좌우할 중요한 회담 아닌가. 무림맹주나 흑련주가 아니라면 지금 만날 이유가 전혀 없었다.

이런 사실을 모두 알기에 뇌군은 총관을 질책했다.

“지금은 때가 아니니…….”

“면담을 요구한 사람이 자하검존의 제자입니다.”

의외의 인물이라 뇌군은 자하검존의 눈치를 살폈다.

막 화를 내려던 자하검존은 가벼운 기침으로 무안을 날리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는 화산파에서 긴급한 전갈이 왔다고 생각했다. 그게 아니라면 이런 시점에 찾지 않을 테니.

어쨌든 그는 지금 잡은 승기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기다리라고 전하게. 회담이 끝나면 가겠다고.”

일단 그렇게 말해놓고 자하검존은 뇌군에게 시선을 돌렸다.

방순은 바로 물러나지 않았다.

“주군, 혼군의 손녀도 찾아왔습니다.”

오늘이 무슨 날인가? 예정에 없던 사람들이 연달아 등장하다니. 더구나 혼군이라면 지금 논란이 된 사건의 핵심인사 아닌가.

곤란한 표정으로 뇌군은 두 사람의 눈치를 봤다. 한창 몰리고 있었으니 여기에서 일단 회담을 중지하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그가 대답하기도 전에 정자 아래가 왁자지껄하게 변했다.

녹윤영과 유비연이 허겁지겁 달려왔고 그 뒤에서 혈혼도객이 장원의 무사를 가로막고 있었다.

자하검존은 유비연을 발견하고는 살짝 안면을 찌푸렸다. 그녀가 왜 여기에 왔는지 도무지 짐작할 수 없었다. 분명히 그녀에게 주석하를 추적하라는 명령을 내렸던 것 같은데…….

녹윤영이 먼저 뇌군에게 다급하게 인사했다.

“장주님, 혼군의 손녀 흑접입니다. 제 일행이 사라졌습니다. 대체 어떻게 된 겁니까?”

뇌군은 금방 누구를 말하는지 눈치챘다. 어젯밤에 감히 만진장을 돌아다니다 진법에 빠진 자가 둘 있었다. 아마도 그들이 혼군의 손녀와 함께 온 자들이었나 보다.

뇌군은 슬쩍 자하검존을 곁눈질했다. 어제 그들을 진법 안으로 밀어 넣었던 자가 자하검존이었기 때문이다.

그 사이 유비연이 자하검존에게 말했다.

“사부님, 아무래도 그가 위험한 듯합니다.”

자하검존의 안면이 왕창 일그러졌다. 그는 유비연이 말한 그가 누구인지 짐작했다. 사파인인 그자가 죽든 말든 무슨 상관이기에 이렇게 호들갑을 떤단 말인가.

“그게 우리와 무슨 상관이냐?”

자하검존은 질책하듯 유비연을 노려보았다.

유비연은 몸을 움츠렸다. 지금의 사부는 평소 화산파에서 자애롭게 그녀를 대하던 사람이 아니었다. 물론 그녀의 돌발적인 행동은 단순히 주석하를 향한 그녀의 관심 때문이 아니었다. 그를 잘 감시하라던 사부의 엄명 때문이었다.

마침 사부가 이 장원에 있으니 대처 방안을 물은 것뿐이다.

그만큼 주석하와 도수가 사라진 일은 녹윤영과 유비연에게 큰 사건이었다.

“상관이…….”

유비연은 자하검존의 눈치를 보며 입을 다물었다. 어쨌든 검존은 하늘같은 그녀의 사부다.

“물러가거라. 나중에 오늘의 경거망동한 행동의 책임을 묻겠다.”

질책을 듣자 유비연은 바로 고개를 숙였다.

자하검존의 단호한 태도에 뇌군도 어쩔 수 없었다. 그도 녹윤영에게 조심스럽게 일렀다.

“녹 소저, 나중에 이야기합시다.”

무리해서 정자 안까지 밀고 들어갔음에도 수포가 되자 녹윤영과 유비연은 실망에 빠졌다. 주석하가 무슨 일을 당했는지 전혀 몰랐고 시간이 지체되면 얼마나 더 위험할지도 몰랐기에 마음만 급했다.

녹윤영과 유비연이 낙담해서 돌아서는 순간이었다.

푸아아악-

천이 찢어지는 듯한 날카로운 굉음이 천지를 뒤흔들었다.

공간이 소멸한 걸까? 아니면 공간이 열린 걸까? 마치 천지가 개벽하는 듯했다.

단순히 소리뿐이었다면 놀랄 일도 아니었을 것이다.

콰- 콰- 콰아아-

굉음과 함께 하얀 빛이 사방을 비추며 어디에서 나타났는지 알 수 없는 나무 조각이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부러진 가지와 나무 잎사귀, 심지어 뿌리 조각에 흙더미까지.

마치 화원을 파서 쏟아붓는 것처럼 온갖 잡동사니가 허공에서 튀어나와 정자를 덮쳤다.

정자에 앉아 있던 제갈휘와 자하검존이 기겁해서 뒤로 물러났고 뇌군은 경악한 표정으로 고스란히 흙더미를 뒤집어썼다. 옆에 있던 녹윤영과 유비연은 몸을 웅크리며 나무와 흙더미를 피했다.

혈혼도객도 마찬가지였다. 물론 시커먼 피부와 옷 때문에 덮어쓰더라도 큰 타격이 없어 보였지만.

“이게 무슨!”

제갈휘가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눈을 부릅떴다. 당연히 그는 지금 이 현상이 발생한 이유를 알아챘다. 뇌군의 진법이 강력한 내부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터져 버린 것이다. 그도 기관진식에 해박하기에 뇌군의 진법이 얼마나 무시무시한지 잘 알고 있었다.

그런 진식을 이처럼 무지막지하게 깨버리다니. 설사 정파십존이라도 불가능한 파괴력을 눈앞에서 목격하자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만일 진식을 깬 자가 사파인이라면…… 무림에 재앙을 일으킬 최악의 상황 아닌가.

자하검존의 표정도 비슷했다. 그도 본능적으로 지금 이 현상에 얼마나 가공할 내공이 필요한지 알아챘다.

그러나 기관진식을 설치한 당사자인 뇌군이야말로 가장 충격에 빠진 사람이었다. 그는 자신의 진법이 이런 식으로 깨지리라고는 생각조차 해본 적이 없었다.

진법에 능통한 자가 하나씩 풀어서 생문으로 빠져나올 수는 있어도 이처럼 무지막지한 방법으로 진식을 아예 찢어발기리라고는 예상치 못했다.

진법으로 가둘 수 없는 그런 말도 안 되는 인물이 존재하다니.

폭풍처럼 밀려드는 온갖 더미에 그들은 제대로 눈을 뜰 수 없었다.

예상치 못한 기괴한 현상에 몸을 피하면서 유비연은 어떤 장면을 연상했다. 풍운채에서 목책이 무너졌을 때 갑자기 목책 더미가 폭죽처럼 터지면서 주석하가 등장했었다. 지금 이 장면은 당시를 떠올리게 하고 있었다.

마침 주석하를 찾으러 이곳에 왔기에 그녀는 눈앞의 믿을 수 없는 폭발과 주석하를 자연스럽게 연결했다.

우르르르-

공간을 찢어발기던 소음이 점차 사라지고 허공에서 쏟아지던 각종 더미 파편도 서서히 줄어들었다.

물론 그사이에 정자 주위는 마치 벼락을 맞은 듯 초토화됐다. 정자 지붕에는 흙이 쌓였고 연못은 흙더미와 나무 파편이 메우고 있었다.

그리고 아름답게 꾸며져 있던 화원은 전쟁터가 따로 없었다.

흙먼지가 가라앉은 곳에 두 인영이 우뚝 서 있었다.

“어이! 여기가 어디야?”

환한 미소를 지으며 오만한 표정으로 성큼성큼 걸어 나오는 사람, 바로 주석하였다. 그 뒤를 도수가 황당한 표정을 지으며 따라붙었다.

주석하가 주변을 쓱 둘러보면서 투덜댔다.

“어? 화원이 왜 이리 망가졌지?”

어젯밤까지만 해도 잘 가꾼 아름다움을 뽐내던 화원은 지금은 야산보다도 못할 만큼 엉망이었다. 자신이 어떤 사고를 쳤는지 전혀 인식하지 못하는 듯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주석하가 흙먼지를 뒤집어쓴 사람들에게 말을 걸었다.

“너희들 왜 여기 있어?”

녹윤영과 유비연의 몰골에 주석하는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정자로 다가갔다.

그제야 주석하는 그를 노려보고 있는 제갈휘와 자하검존을 발견했다. 그는 두 사람을 향해 피식 미소를 짓고는 그 옆에 있는, 처음 보는 노인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누가 소개하지 않아도 그는 이 노인이 뇌군임을 알 수 있었다.

첫인상은 중요한 법이다.

주석하는 예의 바르게 포권을 취하며 허리를 굽혔다.

“뇌군 어르신? 흑검문에서 온 주석하입니다.”

주석하가 뇌군과 만사지존에게 확실하게 도장을 찍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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