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검천하-73화 (73/273)

73화 뇌군 (1)

뇌군과 만사지존 제갈휘는 주석하에 대해 아는 바가 전혀 없었다.

그들이 아는 것이라고는 어젯밤 장원을 돌아다니다가 진법에 걸려 지금까지 고생했으리란 정도였다.

그런데 그 진법을 말이 안 되는 방법으로 깨버렸으니 두 사람은 경악하여 입도 벙긋하지 못했다.

진법의 대가인 이상 그런 식으로 진법을 깨트리기가 얼마나 터무니없는지 알기에 타인보다도 훨씬 놀랄 수밖에.

‘인간이 아니다…….’

특히 손수 진법을 설치했던 뇌군은 주석하의 정체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다만 이곳에는 주석하의 능력을 이미 경험했던 자가 있었다. 바로 자하검존이었다.

자하검존은 혼천교 앞에서 잠시 겪었던 주석하를 떠올렸다. 자신과 혼군 사이에 끼어들어 싸움을 방해했던 장본인이 아닌가.

그때 주석하의 어마어마한 내공을 경험하고 놀랐던 기억이 났다. 그런데 지금의 주석하는 그때보다 한 단계 더 발전한 것처럼 보였다.

‘특이한 놈인 줄 짐작은 했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자하검존은 주석하의 옆에 선 유비연에게 시선이 갔다. 그제야 유비연이 이곳에 나타난 이유를 명확히 이해했다. 저놈을 따라다니라고 했으니 유비연은 지금쯤 저놈의 정체를 파악했으려나.

세 강자가 주시하는 상황에서도 주석하는 전혀 위축되지 않았다.

이제는 정파십존이든 흑도팔군이든 접한 경험이 많아 적응된 데다 자신의 무공 또한 이들과 비교해서 뒤지지 않음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회담을 방해해서 죄송합니다만…… 저도 어쩔 수 없었습니다. 하아! 그놈의 화원이 거치적거리길래 조금 힘을 썼더니…… 나도 망가트리고 싶어서 그런 건 아니라고요…….”주석하의 말에 모두의 표정이 더 황당하게 변했다. 조금 힘을 쓴 게 아니고 많이 쓴 것 같은데…….

세 기인의 표정을 살핀 주석하가 재빨리 고개를 숙였다.

“어쨌든 본의 아니게 방해했습니다. 계속 회의하시죠. 전 나중에 다시 오겠습니다.”

주석하는 냉큼 뒤로 돌았다. 그의 입가에 장난스러운 미소가 맺혀 있었다.

이만하면 확실하게 존재감을 드러낸 것인가. 저들의 몰골을 보니 계속 회담을 진행하기 어려울 것이다. 설사 한다고 해도 이전의 회담 분위기가 절대 만들어질 수 없다. 최소한 오늘은 회담 재개가 어려울 테고 내일 다시 열리더라도 오늘처럼 심각한 분위기로 회의가 이루어질까.

주석하는 자신을 위해, 또 무림을 위해 이런 결과를 노렸다. 이들에게 확실하게 각인해 두면 앞으로 남에게 휘둘릴 일은 분명히 줄어들 것이다.

무림 측면에서 보자면 오늘 사건 때문에 당분간 정파와 사파는 전생처럼 대립하며 전운을 고조하기 쉽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그때의 정사대전이 사라지고 그때보다 마교에 덜 핍박받게 될지도 모른다.

주석하의 행동에 얼이 빠져 아무도 바로 대응하지 못했다.

뇌군은 혀를 차면서도 내심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저놈이 표국과 같이 왔다고 했던가. 비록 만리안석이 엮여 있다지만 그것은 이미 날아간 거고, 지금 이 회담에 비하면 주석하는 중요도가 확 떨어진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지금 관심이 생겼다. 뭔가 있는 놈이었다. 게다가 저 녀석의 출현으로 일방적으로 밀리던 회담 분위기가 반전됐다.

뇌군은 주석하라는 이름을 머리에 새겨 넣고 이른 시간 내에 만나야겠다고 생각했다.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걸어가는 주석하에게 도수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석하야! 크, 큰일 났다!”

큰일은 무슨. 지금처럼 목을 세우고 있을 때 산통 깨는 소리 좀 하지 말라고. 주석하는 눈치를 주려고 슬그머니 뒤를 돌아봤다.

역시 아직도 비슷한 분위기인 가운데 오직 도수만 급히 그에게 뛰어오고 있었다.

“뭔데?”

“피! 피난다! 엉덩이에!”

“컥!”

그제야 주석하도 엉덩이가 쓰렸다. 단전에서 잠자던 내력을 깨우느라 도수가 검으로 찔렀던 부위다. 아니나 다를까 주석하의 엉덩이는 시뻘겋게 피로 물들어 있었다.

빳빳하게 세웠던 목이 민망함 때문에 움츠러들었다. 도수 이 자식은 그런 건 좀 모른 척하면 안 되나? 아니면 진작 말해주던가.

모른 척하고 몇 걸음 더 내디뎠을 때 이번에는 녹윤영이 후다닥 뛰어와서 옆을 부축했다.

“괜찮아요?”

그녀의 얼굴에는 염려가 가득했다.

하아! 이 여자는 갑자기 왜 평소와 다른 행동을 하지? 그것도 하필 옆에 들러붙어? 그러면 그가 더 병신처럼 보이는데…….

“옷도 다 찢어졌어요!”

“커흑!”

설마 피에 젖은 빨간 엉덩이를 까고 있다는…….

이제는 민망해서 뒤를 돌아볼 생각도 못 하고 주석하는 휘적휘적 빨리 걸음을 옮겼다. 빨간 엉덩이를 보여주느니 얼른 사라지는 게 백번 낫다.

***

천으로 엉덩이를 싸매고 방 안을 뒹굴고 있자니 뇌군이 직접 찾아왔다. 주석하가 의도한 대로였다.

“몸은 어떤가?”

뇌군의 음성은 부드러웠다. 적어도 화원을 망가트린 일을 책망하지 않겠다는 호의가 느껴졌다.

몸을 일으키려니 뇌군이 만류해서 주석하는 침상에 편하게 누웠다. 정확하게는 누운 게 아니라 엎드렸다. 아픈 엉덩이를 깔아뭉갤 수는 없으니.

“그럭저럭 움직일만합니다.”

“다행이군.”

뇌군은 그의 몸 상태를 확인한 다음 사람들을 물렸다. 방 안에는 주석하와 뇌군만 남게 됐다.

“흑검문 출신이라 했던가?”

“덕양에 있는 작은 문파입니다.”

주석하는 흑검문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했다. 당연히 뇌군에게 인상적인 내용은 없었다. 흑검문은 강호에서 흔히 밟히는 평범한 문파였다.

“그래, 여기에 온 건…… 무슨 일 때문인가?”

“뇌군 나리를 만나러 왔습니다.”

“난 아무나 만나주지 않네.”

“지금 만나고 있지 않습니까.”

당돌한 주석하의 말에 뇌군은 잔잔한 미소를 머금었다. 과연 뭔가 다른 녀석이다.

“그 말은 비장의 무기를 가졌다는 의미겠군?”

“적어도 제가 원하는 답을 얻어낼 만큼은 갖고 있죠.”

“난 자네에게 원하는 게 없어.”

“흐음, 과연 그럴까요?”

주석하가 살짝 고개를 들어 뇌군을 살폈다. 과연 나이 든 능구렁이였다. 안면에 별다른 감정이 드러나지 않는다. 희끗희끗한 머리카락과 주름진 이마는 산전수전 다 겪은 백전노장이었다.

“진법을 깨트린 제 능력이 인상적이지 않았나 보군요.”

“아니, 충분히 인상적이었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나에게서 원하는 답을 얻기 어렵겠지.”

“그럼…… 패존과 귀군의 싸움은요?”

뇌군의 표정이 처음으로 살짝 변했다.

“그 자리에 있었나?”

“당연하죠.”

뇌군은 그동안 모았던 정보를 더듬었다. 패존과 귀군의 싸움에 두 사람이 더 가담했다고 했다. 진식을 깨트린 방식으로 미루어보면 주석하의 무공도 만만치 않다고 추정할 수 있다. 어쩌면 이 청년이 그 둘 중 하나인가.

뇌군은 입안이 바짝 탔다. 어쩌면 잃어버린 만리안석의 정보를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최소한 패존이나 귀군이 만리안석을 노렸는지, 또 누가 노리고 있었는지 정도는 알아낼 수 있을 것이다. 그에게는 무척 중요한 정보였다.

뇌군은 주석하를 찬찬히 훑었다. 흑도팔군의 한 사람인 그 앞에서도 전혀 위축되지 않는 태도가 대단했다. 게다가 주석하는 오늘 곤란했던 회담을 깨트려서 그에게 도움을 줬다. 호감이 가지 않을 수 없다.

괜히 천진난만한 녀석을 견제할 필요가 없다고 여긴 뇌군이 인자한 노인 특유의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좋다. 네가 궁금해하는 문제를 풀어주마. 대신에 너도 나의 궁금증에 대답해야 한다. 어떠냐?”

“아, 좋아요. 제가 바라던 바입니다.”

예상외로 술술 풀려 주석하는 만족했다. 뇌군은 의외로 까다로운 사람이 아니었다.

“먼저 물어보거라.”

고민하던 주석하는 고개를 저었다. 그가 물어볼 내용은 무척 많다. 지금은 상대가 원하는 것을 먼저 주고 답을 얻는 게 낫다고 판단했다.

“아닙니다. 제가 양보하지요. 설마 흑도팔군이 나중에 딴소리야 하겠어요?”

자신감 넘치는 모습에 쓴웃음을 머금은 뇌군이 조용히 물었다.

“패존과 귀군의 싸움을 말해 보거라. 하나도 빠짐없이.”

이미 짐작하고 있었기에 주석하는 상세한 설명을 시작했다.

오늘 뇌군에게 그는 자신이 회귀자임을 밝혀야 한다. 십만대산 아래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왜 일어났는지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두 물어봐야 한다.

당연히 뇌군은 경험하지 못한 일이고 미래에 경험할 일이다. 이 모두는 뇌군이 그가 진실하다고 인정해야 대화가 가능하다.

그렇기에 주석하는 숨길 것이 없었다. 우설금에 대해서도 물어볼 테니까. 다만 단 하나는 숨길 생각이다. 바로 만리안석이다.

주석하는 만리안석을 뇌군에게 돌려줄 생각이 전혀 없었다. 이 물건은 그가 목숨을 걸고 빼앗은 것이니까. 원래의 주인이 뇌군이라 하여 뇌군의 소유물이 아니다.

“어디까지 비밀이 유지되나요?”

어찌 보면 당돌한 질문이었다. 주석하가 대답한 사안의 비밀유지는 뇌군의 몫이다. 그 둘의 싸움을 주석하가 비밀로 해달라고 요구할 이유가 없을 텐데…….

이상한 낌새를 눈치챈 뇌군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이 자리에서 오가는 모든 대화는 우리 둘만의 것으로 하지.”

주석하가 바라던 대답이었다.

어디부터 이야기를 꺼내야 할까. 주석하는 일단 미끼를 슬쩍 던져봤다.

“그날 싸운 사람이 둘이 아니라 넷이란 사실을 알고 있나요?”

주석하의 물음에 뇌군이 오히려 놀랐다. 그 부분이야말로 뇌군이 가장 궁금해하던 핵심이 아니던가. 놀랍게도 다른 두 사람에 대해서는 전혀 알려진 바가 없었으니까.

그런 핵심을 곧바로 말해주겠다는 태도에 뇌군은 주석하를 높이 샀다. 얼른 정보가 쏟아지기를 기대하며 주석하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정작 주석하에게서 나온 다음 말은 조금 달랐다.

“혹시…… 우설금이라고 아세요?”

우설금? 뜬금없이 우설금이 왜 나오지? 뇌군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지고 어두워졌다.

이 세상에 우설금이란 이름을 가진 사람은 한둘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이 자리에서 언급될 인물은 오직 하나뿐이다. 다만 그 이름은 주석하처럼 신출내기 강호인이 언급할 일이 전혀 없다.

“안다.”

“누구죠?”

“으음. 설마?”

“그렇습니다. 그 자리에 우설금이 있었거든요.”

뇌군의 안색이 확 변하며 한동안 온몸이 격동을 일으켰다.

주석하도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는 뇌군이 우설금을 알고 있으리라 생각하지 않았으니까. 아무리 흑도의 정보통이라지만 아직 마교가 준동하기 전이었다.

단지 우설금이란 이름을 가진 여자가 그 싸움에 개입했다고 알려주려 했는데 본의 아니게 우설금의 정체를 캐낼 수 있을 듯했다. 그녀의 정체만 알아도 이곳에 온 보람이 충분했다.

“우설금이 누굽니까?”

입술을 지그시 깨물고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면서 뇌군이 입을 열었다.

“넌 나를 놀라게 하는구나. 알려주마. 우설금은…….”

주석하는 귀를 세웠다.

“우설금의 별호는 단천마령(丹天魔靈)이다. 붉은 하늘을 상징하고 항상 붉은 옷을 입는다.”

붉은 옷이 주석하의 의심을 싹 거두어갔다.

“정파에 정파십존이 있고 사파에 흑도팔군이 있는 것처럼 마교에는 마교칠왕이 있다. 그 칠왕 위에 교주인 천마를 수호하는 마교수호사령이 있는데…… 단천마령은 그 수호사령의 하나다. 한 마디로 마교 최정상급 인물이라 할 수 있지.”단천마령 우설금. 주석하의 상상을 벗어난 엄청난 존재였다.

“아직 모습을 드러낸 적이 없으나 마교수호사령이라면 정파십존이나 흑도팔군보다 절대 무공이 낮지 않다. 어쩌면 더 높을지도 모르지.”

뇌군의 설명이 주석하의 가슴에 격동을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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