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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검천하-74화 (74/273)

74화 뇌군 (2)

‘역시…… 가까이하면 안 되는 여자였어.’

아름다운 외모에도 불구하고 그 특유의 분위기 때문에 접근이 망설여지더라니. 과연 직감이 틀리지 않았다.

주석하는 그동안 우설금 앞에서 알짱거리지 않은 자신을 칭찬했다. 어쨌든 앞으로는 보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우설금 덕분에 의도하지 않았던 마교 최상층의 권력 구조를 알게 됐다. 전생에서 마교와 싸우면서도 전혀 몰랐던 내용이다. 이런 극비 사항을 수집한 뇌군은 정말 대단한 자다.

수시로 표정이 바뀌는 주석하를 지켜보던 뇌군이 채근했다.

“단천마령과 그들이 맞붙었나?”

이제 뇌군에게는 만리안석보다 고수들의 대결이 더 흥미로웠다.

주석하도 솔직히 풀어놓았다.

“그날 신창패존이 표사가 머무는 객잔을 찾아왔었죠. 표두를 윽박질러서 어떤 물건을 찾으려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당시 제가 비마표국과 계약한 용병 신분이라…… 어쩔 수 없이 신창패존을 상대하게 됐습니다.”

“오오!”

뇌군은 주석하를 다시 살폈다. 진식을 내공으로 깼기에 주석하의 무공이 대단하다는 사실은 이미 안다. 하지만 정파십존과 맞먹을 수준이라고 생각지 않았다.

그런데 신창패존을 상대했다니! 주석하에 대한 평가가 한 단계 올라갔다.

당시의 상황을 되새기며 주석하는 귀군의 등장을 상세하게 설명했다. 신창패존도 귀군도 그 물건을 노리고 있었다는 것까지. 그 와중에 신창패존이 표두를 죽이고 물건이 든 향낭을 낚아채서 도망치는 장면을 흥미진진하게 풀었다.

“그때 우설금이 등장했죠. 그녀는 애초에 주막에 손님으로 머물렀는데 이때까지 누구도 그녀를 의식하진 않았습니다.”

주석하는 물건을 가지고 도망치려던 신창패존이 좌절하고 서로 싸우는 과정에서 향낭이 망가지고 물건도 사라졌다는 내용을 비교적 자세히 전했다.

만리안석이 파괴되었다는 결과에 뇌군의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그 무시무시한 고수들의 강기 싸움에 휘말렸다면 만리안석이 깨졌다고 해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아마 거짓을 말하진 않을 것이다. 신창패존이나 귀군에게 확인해보면 금방 드러날 진실이니. 게다가 지금까지 그가 수집한 정보도 주석하의 말이 사실임을 보증하고 있었다.

“그 물건이 대체 무엇입니까?”

주석하는 의심을 덜기 위해 슬그머니 질문을 던졌다.

뇌군은 대답해주지 않았다. 그 대신에 다른 질문을 퍼부었다.

“단천마령의 무공은 어떠했나? 패존이나 귀군과 비교해서 말이지.”

“흠, 글쎄요. 우설금은 적극적으로 나서진 않았습니다. 주로 그들이 도망치지 않도록, 또 물건을 뺏으려고만 했습니다. 그런데도 밀리진 않더군요. 아마 제대로 싸운다면 패존이나 귀군이 이길 수 없을 겁니다.”

“단천마령을 더 높이 평가하는군.”

고심하는 뇌군의 안색은 침울했다. 예상보다 마교의 실력이 더 뛰어나다고 판단한 듯했다.

주석하가 아는 바로도 마교는 엄청난 존재였다. 마교를 경계하도록 한 것만으로도 그는 중원 무림에 이바지한 셈이다. 딱히 그럴 의도는 아니지만 일부러 마다할 이유는 없으니까.

한숨을 내쉬던 뇌군이 주석하를 빤히 쳐다봤다.

“자네도 대단하군. 그 무시무시한 고수들과 사투를 벌였다니. 나이를 고려하면 자네는 중원사룡보다 더 뛰어날 거야.”

중원사룡은 현 무림에서 가장 뛰어난 후기지수 네 사람을 지칭한다. 남궁천이 바로 중원사룡에 속했다.

기분이 좋아진 주석하는 한바탕 웃음을 터트렸다.

“당연한 것 아닙니까?”

겸손을 모르는 태도에 뇌군의 안면이 살짝 찌푸려졌다. 하지만 바로 찜찜한 기분을 털어내고서 화제를 돌렸다.

“난 충분한 정보를 얻었네. 좋아. 요구사항을 말해보게. 내가 무엇을 해주길 원하나?”

이것을 원했다. 주석하는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바로 질문을 던졌다.

“무한회귀공을 아십니까?”

뇌군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무한회귀공은 현 강호에서 정말 몇 사람만 기억하는 희귀한 사술이다.

한때 만리안석과 함께 배교의 신물로 등장한 무한회귀공이 중원을 발칵 뒤집어 놓은 때가 있었다. 그때가 대략 오십 년 전이다. 그때 이후 무한회귀공과 만리안석의 행방이 묘연해졌다. 이제는 극히 일부만이 이를 기억한다. 그런데 얼마 전 만리안석이 나타났고 이제는 무한회귀공까지 입에 오르내리다니.

“안다.”

주석하는 뇌군의 박학다식함에 감탄했다. 우설금에서 무한회귀공까지 모르는 것이 없었다.

“그 무한회귀공이 출현했다는 사실도 아십니까?”

“그건 무슨 말인가?”

“화산파에서 죽은 가적성이 마교에서 빼낸 비밀이 바로 무한회귀공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주석하의 말에 뇌군은 신음을 토해냈다. 만리안석은 배교의 신물이다. 무한회귀공도 배교의 것이니 겹친 우연이 공교롭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자네가 그것을 어떻게 알지?”

“어젯밤 정자에서 만사지존과 자하검존이 나누는 대화를 들었습니다.”

뇌군은 주석하의 말을 의심하지 않았다. 아마 가적성이 캔 비밀을 캐물었다면 제갈휘도 굳이 숨기지 않았을 것이다.

주석하가 자신의 요구사항 대신에 오히려 정보를 털어놓자 의문이 들었다.

“그 정보를 나에게 알려주는 저의가 뭔가?”

“뇌군께서 무한회귀공을 익히셨기 때문입니다.”

“허허…….”

말이 되지 않는 소리에 뇌군은 헛웃음을 터트렸다. 마교의 비밀이 무한회귀공이니 무한회귀공은 현재 마교인이 익혀야 한다. 아마도 교주인 천마이겠지. 그 사실을 주석하도 짐작하고 있을 텐데 이 무슨 개소리인가.

너무 빤히 보이는 우스갯소리에 뇌군은 허허로운 웃음을 토해냈다.

정작 주석하는 빙그레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는 뇌군을 어떻게 설득해야 할지 고민을 거듭했다. 믿을 수 없는 사실을 믿게 해야만 한다.

“제 말은 진짜입니다. 물론 지금 뇌군께선 무한회귀공을 구경도 못 하셨겠지요. 하지만 오 년 후의 뇌군께선 무한회귀공을 성취하셨죠.”

“오 년 후?”

“제가 오 년 후의 미래에서 왔거든요.”

뇌군이 벌떡 침상에서 일어났다.

“난 자네와 농담할 시간이 없네.”

방을 나가려는 뇌군에게 주석하가 소리쳤다.

“지금 제 몸속에는 흑도팔군 가운데 무려 다섯 분의 내력이 잠자고 있습니다. 이는 혼군께서 확인한 사항입니다. 아까 제가 왜 제 무공을 자신했는지 아십니까? 현재 저의 무공 수준이 혼군과 동일하니까요. 직접 확인해보시죠. 제 몸속에 어떤 기운이 잠자고 있는지.”뇌군의 움직임이 뻣뻣하게 굳었다.

저렇게 자신감을 분출하는 것을 보면 온전한 거짓은 아니다. 단전을 확인하라는 의미는 일순간 자신의 목숨을 상대에게 내주겠다는 뜻이다. 완전히 믿을 수 있는 상대가 아니라면 절대 용인할 수 없다.

거짓이 아니라면?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가? 저 청년의 정체는 무엇인가? 저 나이에 그 누구도 흑도팔군과 같은 수준의 무위를 지닐 수 없다. 아! 한 사람 있긴 하다. 바로 단천마령 우설금! 젠장!

뇌군은 혼란스러운 머릿속을 바로 정리할 수 없었다. 믿을 수도 믿지 않을 수도 없는 상황이 아닌가.

“지금 기회를 드리지요. 잡지 않으시면 후회하실 겁니다. 오 년 후의 뇌군 당신은 비참한 상황에 몰려 있더군요. 당신만이 아닙니다. 흑도팔군 모두가 말이지요. 미래를 바꿀 기회는 지금뿐입니다.”주석하의 목소리가 귀를 울렸다.

방 전체가 빙글빙글 돌고 흑도팔군이 한 사람씩 뇌군의 눈앞에서 명멸했다. 분명히 저 청년의 말은 거짓일 텐데 그는 방을 떠나지 못하고 있었다.

이를 악물고 한참 동안 고민하던 뇌군이 천천히 돌아섰다. 그의 눈에 해맑은 미소를 짓고 여전히 침상에 엎드려 있는 주석하가 보였다.

“흠, 알았네. 확인해보지. 그런데 자네는 어쩌다가 엉덩이에 그리 큰 상처를 입었나? 내 진식은 그렇게 위험하지 않은데 말이야.”

“크윽!”

엉덩이 이야기가 나오자 주석하는 수치심을 삼켰다.

“그게 단전에 숨은 진기를 깨우기 위해서입니다. 제가 어떻게 진법을 깼는지 아십니까? 흑도팔군 다섯 분이 한꺼번에 진법을 깨려고 모든 내공을 쏟아 부었다고 생각해보시지요.”

“아!”

뇌군은 오늘 주석하가 갑자기 등장한 장면을 떠올렸다. 흙먼지의 폭풍우 속에 공간을 찢고 나타난 듯하지 않던가.

그 장면을 떠올리자 슬그머니 미소가 지어졌다.

뇌군은 주석하의 옆에 앉아 넓은 등을 바라봤다.

“명문혈을 통해 점검해봐도 되겠나?”

명문혈은 사혈 중의 사혈이다. 만일 뇌군이 다른 마음을 먹는다면 주석하는 바로 사망이다.

“괜찮습니다.”

천연덕스럽게 미소 짓는 주석하의 태도에 뇌군은 한숨을 쉬었다. 아직 순진한 것인지 이 청년은 경계심이 부족하다. 사람은 이리 믿을 수 있는 존재가 아닌데.

더구나 자신은 커다란 능구렁이가 똬리를 틀고 있다는 사파의 두뇌가 아닌가. 눈 깜박하지 않고 상대를 죽이는, 피도 눈물도 없는 사람이다.

허락을 얻은 뇌군은 조용히 명문혈에 손을 댔다. 그는 조심스럽게 자신의 내력을 운용해서 주석하의 몸 내부를 관조했다.

물론 주석하는 전혀 위기감을 느끼지 않았다.

지금 뇌군은 그를 죽일 이유가 전혀 없다. 죽이기보다는 그에게서 정보를 빼내는 게 사리에 맞다. 설사 뇌군이 나쁜 마음을 먹는다 해도 뇌군이 그의 단전을 다치게 할 능력은 없다. 잠자는 가공할 내력이 보호할 테니까. 위기에 빠지면 순식간에 깨어나는 내력 아니던가.

뇌군의 표정이 점차 무거워졌다.

그는 주석하의 단전에 숨은 기운을 확인했다. 뜨겁고, 차며, 음험하고, 맑고, 끈적끈적한 다섯 기운이었다. 놀랍게도 그 기운의 양은 그가 측량하기 힘들 만큼 엄청났다.

이 기운이 설사 흑도팔군의 기운이 아닐지라도 이처럼 어마어마한 양이라면 주석하는 당금 무림에서 최강 고수라 불리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뇌군은 전율이 일었다. 이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도무지 머리가 돌아가지 않았다. 이렇게 복잡하게 머리를 아프게 하는 사건은 처음이었다.

“어떻습니까?”

조용히 손을 거둔 뇌군에게 주석하가 몸을 뒤집어 바로 누우며 물었다.

“자네 말이 맞네.”

그 다섯 기운이 흑도팔군의 것이라면 아마도 염군, 빙군, 혼군, 악군, 독군일 것이다. 이 추정이 맞는다면 흑도팔군이 직접 내공을 전수하지 않고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 내공을 주입했다면 그 당사자는 거의 폐인이 되었겠지.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거냐?’

오 년 후라 했으니 그때는 상상할 수 없는 끔찍한 상황에 빠졌음이 분명했다.

긴 한숨을 쉰 뇌군이 섬뜩한 눈빛을 빛내며 물었다.

“왜 여덟이 아니고 다섯뿐이지?”

“그걸 제가 어떻게 압니까? 다만 하나는 알죠. 뇌군 당신은 그때 저에게 진기를 주입하지 않고 그 내력으로 무한회귀공을 운용했으니까요. 덕분에 제가 과거로 돌아온 거지요.”

“끙.”

뇌군은 할 말이 없었다. 당장 복잡한 머릿속을 정리하기에는 시간이 부족하고 정보도 충분치 않았다.

“그래서 나에게 자네의 비밀을 털어놓은 이유가 뭔가?”

뇌군이 절반은 믿기 시작했다고 생각하자 주석하는 흡족했다.

“이런 일이 발생한 이유를 추리해주십시오. 그리고…… 지금 저는 혼군을 제외한 다른 네 분의 무공을 익히기를 원합니다. 내력만 있어서는 쓸모가 없거든요. 그들에게 다리를 놓아주세요.”주석하가 원하는 내용이 모두 나왔다.

뇌군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무림사상 전무후무한 고수가 되려고 하는군.”

“하하, 이왕 과거로 돌아온 거 제대로 한번 살아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무시무시한 장담에 뇌군은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이 녀석은 제왕의 기운을 타고난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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