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검천하-75화 (75/273)

75화 악군 (1)

뇌군은 주석하의 말을 믿을 수도 믿지 않을 수도 없었다.

자신의 기운이 그의 몸속에 내재 되어 있다면 확신했겠지만 주석하의 몸속에 뇌군의 기운은 없다. 혼군이 확인했다고 하나 그 진실 여부는 불명확했다. 설사 진짜라고 해도 혼군이 그에게 순순히 알려주지 않을 것이다. 혼군과 그는 경쟁 관계이니까.

그러나 무시하기에는 너무 중요한 사안이라 위험부담이 컸다.

이렇게 어린 나이에 이만큼 성취를 이룬 재목을 어떻게 무시할 수 있단 말인가. 물론 뇌군의 염려는 주석하 본인에서 그치지 않았다.

‘이게 진실이라면…… 이 음모를 누가 꾸몄는가가 문제다…….’

그가 진정 걱정하는 것은 다른 부분이었다. 불과 오 년도 안 되어 닥칠 참상, 그때 자신이 무한회귀공을 익히고 있었다니? 그게 과연 본인의 의지였을까? 다른 사람의 음모는 없을까.

뇌군은 고민을 거듭했다.

그가 믿는 확실한 사실은 있다.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

미래의 자신과 현재의 자신이 위험에 대처하는 방식은 비슷하다. 이를 역으로 되짚으면 왜 자신이 그런 결정을 내렸는지 유추할 수 있다. 미래의 뇌군이 과거의 그에게 무엇을 원했는지, 또 주석하에게 무엇을 원했는지.

지금 당장은 아무리 그가 현명하고 두뇌 회전이 빠르다지만 현재 그가 아는 정보는 너무 기괴했고 그 양도 적었다. 이것만으로는 어떤 결론도 내릴 수 없었다.

이런 경우에는 최선이 아닌 차선을 선택해야 하고 최악이 아닌 차악을 선택해야 한다. 이익이 크면 그만큼 실패의 위험도 큰 법이니 눈에 보이는 확실한 것부터 해결하는 방법이 옳다.

생각을 정리한 뇌군은 주석하를 내려다보았다.

이제는 똑바로 누운 주석하는 싱글싱글 웃으며 그를 살피고 있었다. 그 얼굴이 참 순박해 보였다. 비록 이 전체가 삼자의 음모일지도 모르지만 그 음모자가 주석하는 아니란 확신이 들었다.

그렇다면 무림을 좌지우지할 초강고수 한 명쯤 자신의 힘으로 길러내는 것도 뜻있는 일이 아닌가.

“하나 물어보겠네.”

“한 개 아니라 여러 개 물으셔도 됩니다.”

“허허, 알았네. 자네와 혼군은 어떤 사이인가? 사제지간인가?”

당연히 주석하도 이 질문을 예상했다. 혼군이 그에게 무공을 가르쳐 주면서 이 부분을 무척 신경 썼었다. 그때 주석하의 주장으로 사제의 연을 포기하고 혼천교를 적대시하지 않는다는 정도로 마무리했었다.

“아닙니다.”

“그럼?”

“사제는 아니고 혼천교도도 아니지만 혼군께선 무공을 전수했습니다.”

“허어, 어째 이런 일이.”

“못 믿으시면 한번 펼쳐볼까요?”

뇌군은 손을 저으며 믿겠다는 의사를 표시했다.

혼군의 성정은 그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대가 없이 남에게 자비를 베풀 사람이 아니다. 물론 뇌군 자신도 마찬가지.

“난 자네를 믿지만 이게 그리 단순한 일은 아니지 않은가?”

“그렇죠. 무려 제가 엄청난 고수가 되는 일인데요.”

“허어…….”

뇌군은 주석하의 천연덕스러운 반응에 할 말을 잃었다. 오히려 이게 더 나으려나? 사람이 신중하게 머리를 굴리면 상대하기 힘드니까. 현재의 주석하라면 자신이 이용하기에 나쁘지 않다고 판단했다.

“자, 본론으로 돌아가서…… 자네 말을 증명해줄 수 있겠나?”

“혼군의 무공을 익힌 것으로는 증명이 안 되나요? 아니면 단전의 기운으로는요?”

“그것 말고 다른 것은?”

“없는데요?”

“그래서 하는 이야기네.”

뇌군이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주석하를 달랬다.

“난 자네가 혼군의 제자, 또는 이 모든 게 혼군의 지시가 아니란 것을 확인하고 싶네.”

“둘 다 아닌데요?”

“그러니까 이렇게 하지. 자네의 단전에 잠재된 기가 흑도팔군의 기운이라는 사실을 증명해주면 돼.”

“어떻게요?”

뇌군은 잠시 입을 다물고 주석하를 뚫어지라 쳐다보았다. 잠시나마 실내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내 짐작으로 자네의 단전에 포함된 기운의 주인은 염군, 빙군, 혼군, 악군, 독군일 거야. 혼군과는 이미 만났다고 했으니 나머지 네 사람 중 한 사람에게 확인을 받아 오게. 어차피 자네도 그들을 만날 생각이니 손해는 아니지 않은가?”

“당연하죠.”

주석하도 바라는 바였다. 그가 뇌군을 만난 이유가 바로 그들과 연결고리를 만들어 달라는 것이었으니까.

“그들은 중원 각지에 흩어져 있어. 다만 이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한 사람이 있네.”

“누군데요?”

“악군.”

악군(樂君)은 특이한 인물이었다. 흑도팔군 가운데 유일한 여자였다. 그녀는 악기를 다뤘고 주로 거문고나 퉁소를 이용해서 음공(音功)을 펼쳤다. 평소 외부와 교류하지 않고 은둔생활을 했다.

그녀가 흑도로 분류된 이유는 사갈 같은 성정 때문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비위를 거스르는 자를 단호하게 처단했다. 오래전 여러 방파를 몰살시켜 한때는 살인마로 몰리기도 했었다.

악군이란 말이 나오는 순간 주석하는 미간을 찌푸렸다. 악군의 악명을 들었던 기억 때문이다.

“소개해주시는 겁니까?”

소개도 없다면 뇌군에게서 얻은 게 없다.

주석하의 불만을 인지한 뇌군이 긍정적으로 답했다.

“서신을 보내주겠네. 다만 그녀를 어떻게 설득할지는 자네에게 달렸어. 나는 정황을 전달하는 것뿐이야.”

“그 정도면 충분합니다.”

뇌군이 조금만 신경 써준다면 큰 도움이 된다. 앞으로 남은 네 흑도팔군을 만나는 수고를 대폭 줄일 수 있다.

“시간이 없으니 빨리 다녀오는 게 좋아.”

“어디 있는데요?”

“오십 리 떨어진 청산에.”

화산파와 혼천교는 백 리 떨어져 있었다. 그런데도 이웃사촌이나 마찬가지였으니 오십 리라면 옆집이란 소리 아닌가.

“후딱 다녀오죠.”

주석하는 자신감을 불태웠다.

뇌군도 만족했다. 주석하를 만나면서 그는 제갈휘와의 회담 전략을 다시 세우게 됐다. 마교의 준동이 확인됐으니 그에 맞추어 전략을 수정해야 한다.

이제 정파와의 대립은 더욱 부담이 커졌다. 무조건 시간을 벌어야 한다. 주석하가 성장할 때까지. 지금까지 절대 고수가 없었던 흑도에 주석하라는 걸출한 녀석이 나타났다. 이것을 뇌군은 크나큰 축복으로 받아들였다.

주석하의 말이 진실이건 거짓이건 상관없이 그의 몸에 잠자는 내공만은 현실이다. 흑도의 최강자로 키우기에 충분한 여건이다.

지금까지 정파의 핍박을 받으면서 얼마나 눈물을 흘렸던가. 분열된 흑도를 규합하려고 얼마나 머리를 굴렸던가. 특히 최근 들어 정파의 우세는 더욱 심해졌고, 이제는 정파 쪽에서 정사대전을 벌여 흑도를 뿌리째 뽑으려는 음모를 진행 중이다.

그 난관의 돌파구를 주석하가 쥐고 있었다. 그렇기에 뇌군에게 주석하는 가뭄의 단비였다.

‘거짓말이라도 상관없지. 녀석이 흑도팔군 가운데 누구에게도 치우치지 않고 성장하게 만들 거니까. 드디어 흑도가 정파를 압도할 날이 다가오는구나. 하늘이시여!’장밋빛 미래를 그리며 뇌군은 주석하를 응원했다.

주석하도 뇌군의 내심을 전혀 모르지 않았다. 뇌군이 그를 이용해서 뭔가 일을 벌이려 한다는 낌새를 눈치챘다. 하지만 뭔 상관인가. 일단 지금은 흑도팔군을 모두 만나야 한다.

뇌군과 그는 서로를 이용하는 관계다. 뇌군이 그를 간섭하거나 통제하지 않는다면 그 의도를 모른 척해도 상관없었다.

단전에서 잠자는 다섯 기운을 모두 활용하게 된 후라면 어떤 일이든 스스로 주도할 수 있을 테니까.

***

청산(靑山).

왜 이름이 청산인지 주석하는 산 아래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알게 됐다. 주변의 다른 산에 비해 유난히 푸르렀다. 게다가 산 남쪽으로 도도한 장강이 흘렀다. 배산임수가 절로 생각나는 풍경이었다.

“멋진 동네인데?”

경치로 따지자면 화산에 미치지 못한다. 하지만 살기 좋은 곳이라면 이곳이 월등했다. 특별하게 튀는 경치는 없으나 정감이 물씬 풍기는 고장이었다. 이런 곳에 둥지를 튼 악군은 역시 음악의 달인인가.

그리 높지 않은 능선을 타고 주석하는 청산에 깊숙이 들어갔다. 울창한 산림을 헤치며 나아가다 보니 점점 방향이 혼란스러웠다.

그는 뇌군이 그려준 간략한 지도를 꺼냈다.

“천년 묵은 고목부터 찾아야 하는군.”

주석하는 주위를 휘휘 둘러보며 키 높은 고목을 찾았다.

“하아, 도수를 데리고 왔어야 하는 건데…….”

길눈이 그리 밝지 않은 그로선 아무래도 한 사람이 더 붙으면 유리했다. 안타깝게도 도수와 혈혼도객, 녹윤영까지 뇌군의 장원에 두고 왔다. 악군은 타인의 거처 침입을 허락하지 않기 때문에 홀로 방문하는 것이 유리하다는 뇌군의 충고 때문이었다.

물론 뇌군에게는 다른 의도도 있다. 일행이 만진장에 있으면 주석하가 반드시 다시 들러야 하니까. 혼군의 손녀까지 있으니 인질이라 할 수 없지만 주석하가 설사 도망칠 마음을 품더라도 뇌군이 대처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홀로 방문하더라도 상관없었기에 주석하도 굳이 데려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덕분에 혼자서 청산을 헤매고 있다.

대충 목적지 부근까지 왔는데 산이 깊고 숲이 울창하여 도무지 길을 찾기 어려웠다. 이리저리 헤매다 보니 숲속 어디에선가 말소리가 들려왔다.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지?”

“모르지. 원래 윗대가리는 명령만 던져두면 끝이잖아? 우리 같은 말단이야 명령을 따라야지…….”

뭔가 웅성대는 분위기였다.

주석하는 나무 뒤에 숨어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울창한 나무 아래 대략 열 명가량 되는 녀석들이 바닥에 주저앉아 쉬고 있었다. 옷차림을 회색으로 통일한 것으로 보아 같은 문파 사람이 분명했다.

“이번은 확실해?”

“당연하지. 아무리 악군이라도…….”

악군이라는 말이 나오자 주석하의 귀가 저절로 집중했다. 길을 잘못 들지 않은 모양이다.

“그래도 흑도팔군인데…….”

“흑도팔군은 사람 아닌가? 칼로 쑤시면 제까짓 게 살겠어?”

“쑤실 용기는 있고?”

“내가 쑤시냐? 사천당문을 왜 불렀는데?”

“흐흐, 이번에는 악군 그년에게 제대로 맛을 보여주겠군.”

“그나저나…… 방주님은 언제 오시지? 아직도 당문의 귀빈을 못 만나셨나?”

놀라운 대화가 오고 갔다.

주석하는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제대로 알 수 없었으나 대충 들은 정보로 추정했다.

이들은 누구인지 모르나 악군에게 호의적인 자들이 아니며 악군을 처리하려고 이곳에 왔다. 또 이들 외에 사천당문이 개입한 모양이다.

사천당문(四川唐門)이 어디인가? 주석하도 사천 지방에 있었기에 사천당문의 위명은 귀가 닳도록 들었다. 암기와 독공으로 유명한 곳으로 정파라고 하기에도 사파라고 하기에도 모호한 그런 문파였다. 물론 당문 사람들은 자신들이 정파라고 꿋꿋하게 우기지만.

사천 지역에서 곤륜파와 쌍벽을 이루는 유명한 문파였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직면하자 주석하는 어떻게 할지 고민했다. 평소라면 저들에게 악군이 어디에 사는지 길을 물어봐야 하는데 아무리 봐도 그럴 상황은 아닌 것 같고…….

“어? 너 뭐야?”

주석하에게 선택의 여지가 사라졌다. 그가 접근한 것을 발견한 녀석들이 흉흉한 기색을 내뿜으며 소리쳤다.

주석하는 재빨리 손을 내저으며 버벅댔다.

“그, 그게…… 엿들으려던 게 아니고요…….”

녀석들의 인상이 더욱 흉악해졌다.

“잡아!”

십여 명이나 되는 놈들이 우르르 몰려나와 그를 둘러쌌다. 두목으로 보이는 한 놈이 앞으로 나서서 그를 훑어봤다. 녀석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풍겼다. 마치 쥐를 잡은 고양이처럼 여유로웠다.

“흠, 여기는 인적이 드문 곳인데 넌 누구냐? 우연히 산에서 길을 잃었다는 그딴 소리는 집어치워라.”

이번 생에서는 강호 초짜라지만 전생과 합치면 경험이 꽤 되기에 주석하도 상대를 예리하게 훑었다. 이들의 무공 수준은 흑검문이나 적혈방과는 비교도 안 되게 높지만 그렇다고 구파일방 수준은 아니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솔직하게 대답해볼까.

“아, 악군이 어디에 있는지 몰라서…….”

“악군?”

녀석들의 얼굴에 비릿한 미소가 드리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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