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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검천하-76화 (76/273)

76화 악군 (2)

한바탕 대소를 터트린 녀석들이 주석하를 다시 훑었다.

“하! 어쩐지…… 이놈 반반하게 생기긴 했군.”

이건 또 무슨 소리인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주석하가 눈을 굴렸다.

퍽!

녀석이 그의 머리를 강하게 냅다 후려쳤다. 졸지에 머리를 얻어맞은 주석하는 눈을 부라렸다.

“하긴 이 깊은 산골짜기에 무슨 생각으로 들어왔겠냐? 네놈의 번지르르한 얼굴을 보니 나도 이해는 해. 악군이 좀 예쁘긴 하지. 그래도 감히 네놈 따위가 상대할 인물은 아니야. 우리 청산방 정도 되면 몰라도.”

“청산방요?”

“흐흐, 우리는 청산방 사람들이다. 악군을 잡으러 온 영웅이지. 악군은 무림을 어지럽히는 살인마 아니더냐? 우리는 강호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이곳에 왔다. 물론 가끔 네놈처럼 악군의 미모에 눈이 멀어 목숨 아까운 줄 모르고 달려드는 불나방도 있긴 하다만.”뭔가 엄청난 오해가 발생한 것 같아 주석하는 다급하게 손을 저었다.

“그, 그게 아니라…….”

“아니긴 뭐가 아냐? 네놈 시커먼 속은 내가 알지.”

“예?”

“소문을 듣자 하니 일 년에 한두 명은 그년에게 홀려서 찾아갔다가 반병신 되어 쫓겨난다더라. 그년 살인마라니까. 얼굴은 예뻐도 마음은 사갈이야. 그런 여자는 없애야 해. 그래서 우리 청산방이 나선 거다. 넌 우리 덕분에 목숨 건진 줄 알아.”녀석들의 협박에 주석하는 입을 다물었다. 굳이 이 녀석들의 오해를 바로잡아줄 필요는 없다. 앞으로 다시 볼 녀석들도 아니고.

“그, 그래서 악군은 어디에 있습니까?”

“악군? 저 위에. 더 올라가면 봉담소라는 작은 연못이 있어. 봉황이 목욕하는 연못이란 뜻인데 목욕하는 봉황이 바로 악군이야. 흐흐, 목욕 장면을 훔쳐본 나무꾼들이 그렇게 이름을 붙였지. 한번 보면 잊을 수 없다는데…… 근데 그놈들 대부분 다 죽었어.”대충 산을 더 올라가야 한다는 말로 들렸다. 길을 알았으니 계속 이놈들의 장단을 맞춰줄 이유가 사라졌다. 청산방이 악군의 적이니 악군에게 잘 보이려면 이것들을 쫓아내면 되는 건가?

주석하가 머리를 굴리고 있을 때 녀석들 가운데 한 명이 말했다.

“조장님, 이 녀석 이대로 두어도 괜찮을까요? 악군에게 일러바치면 우리만 망하는 거잖습니까?”

녀석의 말에 청산방 사람들의 안색이 확 변했다. 그들은 생각지도 못했다는 듯 주석하를 다시 노려봤다.

당연히 악군에게 이를 생각이었던 주석하는 괜히 뜨끔해서 입을 닫았다.

“모든 일은 철저해야 하지 않습니까? 둑에 난 작은 구멍이 크게 번져 홍수가 납니다.”

“맞습니다. 악군에게 들어가면 우린 전멸입니다. 이 녀석 살려두면 안 됩니다.”

갑자기 분위기가 흉흉해졌다.

주석하의 안면이 일그러졌다. 아무리 그래도 죄 없는 사람을 죽이려 하다니. 대충 무림 정의 어쩌고 하는 것을 보니 청산방은 정파인 듯한데 행동은 동네 파락호와 다르지 않았다.

다급해진 주석하가 손을 저었다.

“나, 나는 악군과 안 친합니다.”

“클클, 당연히 네놈이 친할 리 있겠냐?”

“그, 그래도 대낮에 정파가 함부로 사람을 죽이시면…….”

“우리는 정의를 수호한다고. 네놈처럼 여인의 미모에 홀려 건수 찾아 돌아다니는 놈을 응징하지. 살인마 악군도 나쁘지만, 네놈도 마찬가지야! 우리가 청소하지 않으면 이 세상이 어떻게 되겠냐? 살신성인이 다른 게 아냐. 악의 싹을 자르는 게 정파가 할 일이라고.”이것들이 입은 달렸다고 마구 헛소리를 질러댔다. 점점 차가워지는 가슴과 달리 주석하는 겉으로는 살살 기었다.

“그래도 대협, 생명은 소중하지 않습니까?”

“내 말이 그 말이다. 어차피 네놈은 악군에게 뒈질 목숨 아니냐? 혹시 운이 좋아서 살아남더라도 훗날 색마가 될 테니 지금 싹을 자르는 게 이 세상을 돕는 거다.”조장이란 자가 설명하는 동안 뒤에 선 다른 녀석이 슬그머니 검을 들었다.

도무지 말이 안 통하는 저들의 논리에 주석하는 점점 분노가 치밀었다. 웬만하면 사고 안 치려 했는데 자꾸 그쪽으로 몰리는 기분이다.

조장이 옆의 부하에게 눈짓했다.

“깔끔하게 정리하자.”

그 순간 부하 녀석이 검으로 주석하의 가슴을 찔렀다.

과거의 그라면 당황했겠지만 혼군의 무공을 익힌 지금은 하품이 나올 지경이었다.

주석하는 가슴으로 들어오는 검날을 손가락으로 붙잡았다.

“어?”

예상치 못한 전개에 정작 검을 지른 녀석이 눈을 깜박였다. 어떻게 된 일인지 어리둥절한 눈치다.

“이익!”

녀석이 용을 쓰며 검을 잡아당겼다. 당연히 검은 손가락에 끼어 꼼짝도 하지 않았다.

표정을 굳힌 주석하는 슬그머니 검날에 진기를 주입했다. 검이 붉게 달아올랐다. 마치 달구어진 쇳물이 붉은빛의 형상을 드러낸 것처럼 보였다.

“흐어억!”

뜨거움을 느낀 녀석이 검에서 손을 놓았다.

그제야 청산방 제자들은 무슨 일인지 깨달았다. 눈앞의 녀석이 단순한 하류 잡배가 아닌 무림 고수임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사색이 된 녀석들이 주석하의 앞에서 몸이 굳었다.

주석하는 마두도 아니었고 살인을 즐기지도 않는다. 굳이 이런 녀석들까지 일일이 손을 봐야 한다는 생각 자체가 없었다. 아무리 이에는 이이고 피도 눈물도 없는 강호라지만.

주석하의 손에서 붉게 달아오른 검이 휙 날아갔다. 방금 그에게 검을 질렀던 녀석의 허벅지에 쿡 박혔다.

“크억!”

비명과 동시에 청산방 사람들이 사방으로 튀어 도망가기 시작했다.

주석하의 손에서 시커먼 지력이 앞으로 뿌려졌다. 혼천십팔지였다.

“으악!”

제일 먼저 조장 녀석이 다리에 일지를 맞고 비탈을 나뒹굴었다. 이어서 서너 명의 청산방 사람들이 도망치다가 앞으로 꼬꾸라졌다. 목숨을 빼앗은 것은 아니다.

“도, 도망쳐라!”

녀석들이 메뚜기 떼처럼 사방으로 튀었다.

“이것들이!”

쓴웃음을 삼키면서 주석하는 목을 꼿꼿하게 세웠다. 이런 장면에서 목에 힘을 주는 것도 우습긴 했다. 솔직히 남는 것 하나 없는 허세라지만 이 맛에 세상을 사는 것 아니겠는가.

주석하는 혀를 차며 몸을 돌렸다. 잠시의 모욕은 이 정도의 복수로 충분하다. 그들에게도 함부로 살인하면 안 된다는 교훈이 내려졌을 것이다.

그는 숲을 넘어 멀리 보이는 봉우리로 시선을 돌렸다.

“저기에 악군이 산다고 했지…….”

청산방 사람들의 말을 듣다 보니 악군(樂君)인지 악군(惡君)인지 혼란스럽지만 이미 각오하고 온 일이다.

결심을 굳힌 주석하는 다시 열심히 비탈을 올랐다.

***

높은 봉우리 중턱, 깊은 계곡에 아담한 폭포가 물을 쏟아냈다. 시원한 물소리가 사방으로 퍼지고 새들의 울음소리가 계곡을 메웠다. 그 아래쪽으로 맑은 물이 찰랑대는 작은 연못이 있었다.

눈부신 햇살이 물 위에서 반짝이고 작은 무지개가 화사하게 걸렸다.

천상의 선경 같은 풍경에 주석하는 할 말을 잃었다. 이곳은 과연 음악에 심취한 악군이 은거할만한 장소였다.

바로 청산방에서 말하던 봉담소다.

한동안 경치에 홀려 넋을 놓았던 주석하는 시선을 돌려 주변을 살폈다. 연못에서 약간 떨어진 곳에 작은 모옥이 보였다. 그 모옥 앞뒤로는 텃밭이 있고 이름 모를 채소가 자라고 있었다. 그 모옥마저 봉담소와 잘 어울려 주석하는 악군이라는 사람의 심성을 짐작했다.

목적지에 도착했다는 생각에 미소를 머금고 몇 걸음 접근했을까.

모옥 안에서 낭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구냐? 더 접근하면 죽는다.”

경고가 떨어졌다. 낭랑한 여인의 목소리였으나 폐부를 찌르는 섬뜩함이 느껴졌다. 위험을 감지한 발걸음이 저절로 딱 멈춰졌다.

이제 뇌군의 도움을 본격적으로 활용할 때다.

“뇌군의 서신을 가져왔습니다.”

잠시 침묵이 감돌았다. 즉각적인 반응이 없는 것으로 보아 예상치 못한 상황에 당황한 듯했다.

얼마나 기다렸을까.

“들어와라.”

과연 뇌군을 앞세운 효과를 봤다.

모옥 내부는 어두웠다. 창으로 햇빛이 희미하게 들어왔으나 내부에는 전혀 불이 켜져 있지 않았다.

넓은 방 중앙에 길게 대나무 발이 쳐졌고 그 발 너머로 하얀 옷을 입은 여인의 윤곽이 흐릿하게 보였다. 가는 대나무로 만든 발은 그녀의 얼굴을 알아보기 어렵게 했다. 여인의 앞에 놓인 서탁과 거문고가 그를 반겼다. 아마 저 여인이 흑도팔군의 일인인 악군이리라.

남녀유별이라 발을 쳐둔 걸까.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일까. 주석하는 다소 실망했으나 아무려면 어떤가. 그가 머뭇거리고 있자니 악군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앉게.”

작은 의자를 손수 가져와서 주석하는 발의 맞은편에 앉았다.

앉자마자 악군의 질문이 시작됐다.

“뇌군과 어떤 사이지?”

악군의 목소리에는 날카로운 예기가 깔려 있어서 주석하는 함부로 대답하기 망설여졌다. 무엇이라 대답하기 어려워서 머뭇거리는 사이 재차 질문이 들어왔다.

“제자인가?”

“제자는 아닙니다.”

“서신을 주게.”

주석하는 품에서 뇌군의 서신을 꺼냈다. 그의 손에서 서신이 두둥실 떠오르더니 발을 넘어 악군의 손으로 넘어갔다.

절정의 허공섭물에 주석하는 손에서 땀이 뱄다. 물론 그의 내공이라면 그도 저런 식의 신기를 보이는 것이 어렵지 않다. 다만 그가 주목한 부분은 자연스러움이었다.

이제 막 고수의 반열에 들어선 주석하는 아직 여러모로 어설펐다. 반면 악군은 당연하게도 완숙의 경지다.

주석하는 악군이 서신을 읽기를 기다렸다. 물론 그는 서신의 내용을 전혀 몰랐다. 뇌군이 불리하게 쓰지 않았을 테니 굳이 관심을 둘 이유도 없었다.

“흐음, 서신으로 보면…… 자네는 놀라운 인물이군.”

“무엇이 말입니까?”

뇌군이 어디까지 밝혔을까. 뇌군의 심기로 보아 그가 회귀자임을 알리진 않았으리라 확신했다.

“자네가 흑도팔군의 무공을 원한다고 적혀 있는데? 이미 그만한 자질도 갖췄고. 나의 무공과 유사한 기운을 품고 있어서 성취도 빠를 거라나……. 흠, 뇌군의 주장이니 틀리진 않겠지.”악군은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이는 듯했다.

주석하가 입을 열기도 전에 악군이 다시 질문했다. 원래 말이 많은 성격인지 아니면 이곳에 대화를 나눌 사람이 없어서인지 알 수 없었다.

“제자가 되기를 원하나?”

“아닙니다.”

“흐음, 그래. 지금까지 누구에게 무공을 배웠나?”

“혼군입니다.”

“하아, 그렇군.”

가벼운 한숨이 새어 나왔다.

갑작스러운 침묵에 주석하도 차분하게 마음을 가라앉혔다. 이제 악군을 만났고 서신도 전했으니 다음은 스스로 풀어야 한다. 뇌군이 해줄 수 있는 것은 여기까지다.

머리를 굴리고 있자니 악군의 단호한 음성이 떨어졌다.

“혼군은 음험한 기운을 갖고 있다. 성정이 아니라 내공의 성질이 그렇다는 거다. 나는…… 내 무공은 다른 이들에 비해 맑은 기운이 필요하다. 그 둘은 서로 어울리지 않는다.”평범한 경우라면 당연한 지적이었다. 하지만 서로 다른 기운을 이미 품고 있는 주석하에게는 전혀 해당하지 않는 견해였다.

“내 의견이 미덥지 않을 수 있으나 모두 너를 위해 하는 말이다. 서로 다른 성질의 무공을 연마하면 발전이 더딜 뿐 아니라 자칫 주화입마에 빠지기 쉽다. 그러므로 나는 네가 익히지 않기를 바란다.”

“그 점은 이미 압니다.”

주석하는 짧게 자신의 의지를 보였다.

발 너머로 보이는 악군의 윤곽은 전혀 흔들림이 없었다.

“하긴, 뇌군도 그 사실을 알고 보냈겠지. 난 뇌군에게 빚이 있다. 그래서 너를 안으로 들였어. 다른 사람이라면 모옥 부근에 온 것만으로도 이미 죽었겠지.”악군이 사람을 많이 죽였다는 소문을 들었던 주석하는 식은땀이 났다. 짐작하기에 악군은 그에게 무공을 가르쳐줄 의향이 없어 보였다. 사실 너무 당연하지 않은가. 제자도 아닌 자에게 자신의 비전절기를 가르쳐준다는 게 말이 될까.

설득할 말을 고심하고 있을 때 갑자기 밖에서 우렁찬 고함이 들려왔다.

“악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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