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화 악군 (3)
주석하는 모옥 밖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눈치챘다.
“청산방이군요.”
“청산방?”
“제가 이곳으로 오는 도중에 녀석들 일부를 만났습니다. 뭔가 적의를 가진 듯하여…….”
“흥! 저놈들이 이곳을 노린 게 벌써 수차례다. 나와 악연이지.”
악군도 이미 익숙한 듯했다.
주석하가 더 물을 틈도 없이 악군이 설명했다.
“십 년쯤 전에 내가 이곳 청산에 은거할 때부터 부딪쳤던 놈들이다. 청산방은 청산을 중심으로 이곳과 정반대 편에 자리 잡은 문파다. 처음 놈들이 쳐들어왔을 때 반쯤 죽여 놓았더니 그때부터 불구대천지수라면서 해마다 찾아오는구나. 왔다가 패해서 몇 놈 도망치기를 반복하니…… 귀찮은 일이지.”애초에 청산은 청산방의 독무대였다. 그들은 장강을 건너는 배를 관리하면서 문파를 유지했고 이 지역에서 공고한 세력을 쌓았다.
그런 동네에 갑자기 사파의 거두 악군이 들어왔으니 당연히 불편했을 것이다. 게다가 악군은 무림에서 이름 높은 살인마이니 이를 빌미로 그들은 악군을 몰아내려 했다.
하지만 흑도팔군이 어디 가벼운 이름인가. 몰아내기는커녕 싸울 때마다 청산방의 기둥이 뽑힐 처지가 됐다. 악군이 봉담소를 벗어나 청산방 본거지를 공격했다면 이미 멸문했을 것이다.
어쨌든 청산방은 눈엣가시인 악군을 처리하고자 기회만 노렸다. 무림 정의를 앞세워 끊임없이 공격했고 악군도 골머리를 앓았다. 강호에서 손을 떼고도 손에 피를 묻히려니 그녀도 짜증이 날 수밖에.
“얼핏 들으니 이번에는 당문의 도움을 받는다고 합니다.”
“흠, 당문? 그깟 놈들이…….”
악군은 대수롭지 않게 중얼거렸으나 사천당문을 만만하게 볼 수는 없다.
“악군! 나와라!”
밖에서 윽박지르는 고함이 들려왔다.
주석하는 악군의 반응이 궁금했다. 그녀는 과연 어떻게 대처할까.
지금까지 미동도 하지 않던 여인의 윤곽이 약간 움직였다. 그녀의 손이 거문고에 얹힌 듯했다.
띵!
맑은 거문고 소리가 모옥 밖으로 빛살처럼 뻗어 나갔다.
***
모옥 밖에는 수십 명의 무림인이 몰려와 있었다. 그들은 청산방 사람들이었다.
청산방주 목염성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오늘이야말로 악군에게 쌓였던 은원을 청산할 수 있을 것이다. 십 년 동안 악군에게 핍박받은 고통을 생각하면 찢어 죽여도 시원치 않았다.
물론 항상 청산방에서 먼저 시비를 걸었다는 점은 그의 머리를 떠나고 없었다. 어쨌든 평화롭던 청산에 불쑥 들어온 자는 악군이니까.
목염성은 모옥을 훑으며 고심하는 두 인물에게 연신 허리를 숙였다.
“대협, 저 모옥이 바로 악군의 거처입니다.”
이 두 사람은 목염성이 심혈을 기울여 도움을 청한 사천당문의 호법이었다. 한 사람은 암기에 정통한 암로이고 다른 한 사람은 독에 정통한 독로였다. 독암쌍로(毒暗雙老)로 알려진 두 사람은 사천당문의 호법으로 독공과 암기술에서 따를 자가 드물다고 알려져 있었다.
독공과 암기술에만 반평생을 매진했으니 그들의 경지는 놀라웠다. 이 독암쌍로가 연합한다면 정파십존과도 해볼 만하다는 소문이 있었기에 오늘 목염성의 기대치는 대단히 컸다.
독암쌍로가 악군을 어느 정도만 잡아준다면 나머지는 숫자로 밀어붙이면 된다는 게 그의 계산이었다.
“살인마는 철저하게 응징해야지요.”
목염성은 독암쌍로의 눈빛에서 자신감을 읽은 후 모옥을 향해 소리쳤다.
“악군! 나와라!”
그 순간, 모옥 내부에서 예리한 거문고 소리가 울렸다.
띵-
“크윽!”
한 청산방도가 갑자기 귀를 틀어막으면서 비틀거렸다. 그는 입과 코로 피를 줄줄 흘리고 있었다.
악군을 유명하게 만든 바로 그 음공이었다.
“이런 쳐 죽일 년! 쳐라!”
목염성의 손짓에 부하들이 우르르 모옥으로 몰려갔다.
띠- 띵-
거문고 소리가 다시 울리고 그 소리는 무형의 강기를 형성하며 청산방 사람을 덮쳤다.
“크윽!”
거문고 소리가 체내의 혈맥을 뒤흔들었다. 무공이 약한 자들은 바로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무공이 강한 자들은 무형화된 음파를 검으로 막았다. 검에 부딪힌 강기의 파편이 충격을 가하면서 사방으로 흩어졌고 막은 자들은 몸을 휘청이며 뒤로 물러났다.
과연 명불허전인 악군의 음공에 목염성은 질끈 입술을 깨물면서 독암쌍로를 쳐다봤다.
정작 독암쌍로는 당황하지 않았다. 그들은 백전노장이었다.
두 사람은 서로 눈빛을 교환하면서 모옥을 향해 뛰어들었다. 제비처럼 날아드는 두 사람의 몸에서 눈부신 은빛 잔영이 뿌려졌다.
촤아아악-
수십 개의 암기가 모옥의 지붕으로 날아들었다. 사천당문이 자랑하는 암기가 비가 내리듯 모옥에 집중됐다. 은빛 암기는 햇빛을 받아 눈이 부실 듯 빛났다. 죽음이 오가는 전장이었음에도 그 아름다움은 사람들의 눈에 선명한 잔영을 남겼다.
“과연! 사천당문이다!”
목염성을 비롯한 청산방 방도들은 감탄을 터트렸다. 저 암기가 모옥에 부딪치는 순간 모옥의 벽은 구멍이 숭숭 뚫리고 안에 숨은 사람은 고슴도치가 될 것이다.
순간 거문고의 음이 격렬하게 바뀌었다.
띠디디딩-
한곳으로 집중되던 음파가 사방으로 흩뿌려지며 암기를 쓸고 지나갔다. 일순간 날아가던 암기들이 동력을 잃고 맥없이 아래로 떨어졌다. 실로 가공할 음공이었다.
암기를 날린 독암쌍로뿐 아니라 청산방 사람들도 경악했다. 마음이 급해진 그들은 앞뒤를 가리지 않고 우르르 모옥으로 몰려갔다.
띠디디딩-
“크윽!”
다시 휘몰아치는 음공에 청산방 사람들이 몸을 비틀며 괴로워했고 그 틈을 독암쌍로가 파고들었다.
모옥의 좌우로 접근하던 두 사람의 신형이 순식간에 지붕으로 뛰어들었다. 그들의 손에서 수많은 암기가 쏟아졌다.
파파파팟-
마치 폭우가 쏟아지듯 암기가 모옥을 향해 일제히 떨어졌다.
그때 무지갯빛이 모옥의 지붕에서 뿜어졌다. 그 빛은 거문고 소리가 형상화한 음파의 파편이었다.
번쩍!
암기와 무지갯빛이 만나면서 주변을 뒤흔드는 파공성을 터트렸다.
콰앙-
수많은 암기가 음파의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사방으로 튕겨 나갔다. 그 암기는 청산방 사람들에게 재앙이었다. 미처 피할 틈도 없이 죽음의 암기가 덮쳤다.
동시에 격렬한 음파가 독암쌍로에게 집중됐다. 무형의 이 음파는 독암쌍로가 상대하기 대단히 까다로웠다. 두 사람은 호신강기로 음파를 막았으나 악군의 음공은 그들의 내부를 뒤흔들었다.
“크윽!”
독암쌍로의 신형이 추락하여 봉담소에 풍덩 빠졌다.
얼이 빠진 목염성은 악군이 얼마나 위험한 인물인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지금 당장에는 다른 수가 없다고 생각한 그는 재빨리 명령했다.
“후퇴다!”
연못에 빠진 독암쌍로는 무사하지 않았다. 음공에 폭격당한 암로는 심각한 내상을 입어 사실상 죽음의 문턱에 섰고 독로는 그나마 덜했으나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으으으! 악군! 네년이!”
독로는 온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분노를 터트렸다. 두 사람은 악군을 그리 강하다고 평가하지 않았었다. 하지만 직접 상대해본 악군은 왜 자신이 흑도팔군인지 분명하게 증명했다.
물론 독암쌍로도 패배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들의 장기는 암기가 전부가 아니다. 지금은 가진 재주의 절반도 채 발휘하지 못했다. 특히 독에 정통한 독로는 더욱 분했다.
목염성이 후퇴하는 것을 본 독로가 이를 갈았다.
“네년이 후회할 날이 있을 것이다!”
독로는 생사를 오가는 암로를 품에 안고 서둘러 연못을 빠져나왔다. 모옥을 등지고 도망치는 그의 손에서 무형의 가루가 허공에 휘날렸다.
***
주석하는 숨을 죽이고 발 너머를 살폈다.
악군의 거문고 연주가 멎었다. 고함과 신음이 들리던 바깥은 어느새 조용해졌다. 보지 않더라도 청산방의 후퇴를 짐작할 수 있었다.
아! 주석하는 가슴이 뛰었다. 악군의 무공은 예상을 훨씬 넘어섰다. 혼군과는 다른 유형의 엄청난 무공이었다. 저 무공을 배울 수 있다면, 저 무공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다면 그의 무공은 한 단계 올라설 것이 확실했다. 과연 흑도팔군다운 무공이었다.
발이 처져 있어서 주석하는 그녀의 표정을 확인할 수 없었다.
“잔챙이들이 물러갔군.”
악군의 음성은 의외로 고요했다.
“대단하십니다.”
“방금 온 자는 청산방 방주 목염성과 사천당문의 암로와 독로다. 그들 셋이 그나마 봐줄 만한 무공을 지녔고 나머지는 허접스러운 자들이다.”
주석하도 독암쌍로의 위명을 익히 들었었다. 그들은 당문에서도 손꼽히는 자들이다. 대외 활동을 거의 하지 않던 자들이 어떻게 청산방과 연합하여 악군을 공격했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독암쌍로에 비해 악군의 무공은 예상 이상으로 강했다. 더구나 그녀는 지금까지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앉은 자리에서 적을 물리쳤다.
주석하가 흥분으로 감탄만 하고 있을 때 다시 악군이 대화를 시작했다.
“자, 우리는 하던 이야기를 계속하지. 뇌군이 그대를 소개했다고 내가 무작정 무공을 가르쳐줄 수는 없지 않나?”
“그렇겠지요.”
“그렇다고 제자가 될 생각도 없고.”
“제자가 되겠다면 받아주실 겁니까?”
당연히 주석하도 제자가 될 생각은 없었다. 단지 그녀의 생각을 탐색하고 대화를 이끌어가려고 던진 물음이다.
“아니.”
생각할 여지도 없다는 듯 바로 답이 튀어나왔다.
주석하는 말문이 막혔다. 이번에는 혼군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난도가 높다.
“제자가 있습니까?”
“아니, 없다. 물론 제자를 들일 생각이 없지 않았다. 요즘 나를 긁는 사람이 있거든. 그 사람이 자신의 제자를 어찌나 자랑하던지.”
“누굽니까?”
“몰라도 된다. 어쩌면 내일 올지도 모르겠군.”
누구인지 짐작이 되지 않았다. 악군과 교류할 사람이라면 흑도팔군 수준이 되어야 한다. 이들 가운데 소속 없이 홀로 행동하면서 제자를 거둔 사람이 누굴까. 그에게는 너무 어려운 문제였다.
“그자가 내게 도전해왔다. 서로 무공을 겨루어서 진 사람이 이긴 사람의 제자에게 무공을 일부 전수해주기로. 문제는…… 나는 이겨도 제자가 없어서 그 보상이 쓸모없다는 것이 아쉬울 뿐. 아! 쓸데없는 이야기를 너무 많이 했구나.”무슨 말인지 전혀 알아들을 수 없었다. 무공을 전하고 받는 내용으로 보아 엄청 친한 사이인데 대체 누굴까.
어쨌든 무공을 전수할 생각도, 제자로 받아들일 생각도 없다는 말에 주석하는 쓴맛을 다실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뇌군의 서신을 가져왔으니 차 한잔은 대접해주지.”
발 너머로 여인이 일어났다. 여인이 입은 하얀 옷이 나풀거리면서 그의 시각을 자극했다.
반대편에도 문이 있는 듯 여인의 모습이 사라졌다.
그제야 긴장이 풀린 주석하는 주변을 둘러봤다. 모옥 내부가 정갈하고 아담하게 꾸며져 있었다. 악군의 성격이 잘 드러났다.
그녀의 내공 성질이 맑다고 했던가. 이곳 청산의 경치도 맑았고 봉담소도 맑았으며 실내 장식도 맑고 고즈넉했다. 그녀의 얼굴을 확인하지 못했으나 하얀 옷에 풍기는 기품만으로도 맑음을 느낄 수 있었다. 청산방 사람들이 악군이 대단한 미인이라 했었는데…….
두리번거리고 있자니 다시 악군이 나타났다.
“자, 마시게.”
발 너머로 찻잔이 날아왔다. 허공섭물의 신기에 의해 그의 앞까지 날아온 찻잔이 조용히 탁자에 내려앉았다. 방금 끓이고 찻잎을 우려낸 듯 김이 모락모락 났다. 어느덧 실내에는 진한 차향이 깊이 풍겼다.
“잘 마시겠습니다.”
뜨거운 차를 후후 불면서 주석하는 차를 들이켰다. 악군이 제공한 차여서일까. 찻물이 목을 넘어가는 순간 정신이 맑아지는 기분이었다.
“난 이 차를 좋아하네. 몸도 마음도 맑게 해주거든. 나의 소박한 행복이라 할까…….”
주석하는 유유자적한 그녀의 여유가 부러웠다. 이 순간만은 백화루주라는 목표를 때려치우고 싶을 정도였다.
순간 주석하는 내부에서 일어나는 강력한 기운에 당황했다.
‘어?’